시중

 



1. 市中
2. 侍中
2.1. 중국사
2.2. 한국사
2.3. 신라/후삼국시대 주요 역임 인물
3. 관련 문서


1. 市中


도시의 안쪽이라는 뜻으로 사람들이 생활하는 보편적 지역범위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예: 시중은행, 시중금리, 시중가격, 시중물가

2. 侍中


당나라, 신라, 태봉의 관직으로 고구려대대로백제상좌평이나 발해의 대내상이나 고려문하시중이나 조선영의정이나 대한민국국무총리에 견줄 수 있다.
시중에 해당하는 영어 표현은 독일 총리의 표현으로 사용하는 Chancellor이다. 영의정이나 국무총리는 Prime Minister(장관들의 장)인데 시중은 Chancellor(최고비서)라는 뜻으로 차이가 있다. 고려의 문하시중도 영어로는 Chancellor에 해당한다.

2.1. 중국사


한나라 때는 소부의 아래 관직이다. 항상 천자를 수행하면서 고문에 응하고, 거동시는 가교 뒤를 기마로 따른다. 녹봉 2천 석. 천자를 시중하고 어가(御駕)와 어의(御衣) 등을 맡아보던 관직. 한나라 이후 조위, 서진 이후에는 문하성(門下省)의 대신을 시중이라 칭했다.
당나라 때도 문하성(門下省)의 장관으로 정3품 정원 2인이다. 수당(隋唐) 이전의 중국에선 군주의 자문관으로 특히 군주가 신하와 대면할 때 항상 군주 옆에서 질의에 응하는 직책이었다. 위진남북조시대의 혼란을 거치며 상서를 기반으로 한 기존 관료 체계를 황제의 비서관인 중서령, 시중이 대체하고 이들 관직이 기구화되는 과정에서 그중 하나인 문하성으로 확대되었다.
당나라 초기에는 종2품 상서좌복야 1인, 정3품 중서령 2인과 함께 재상의 역할을 수행하였다.[1] 이후 동평장사(同平章事) 관행의 등장으로 상기의 관직과 더불어 이미 실무관으로서 재상을 지낸 고위관료의 명예직이 되었다.[2]

2.2. 한국사



'''삼국시대 신라에선 진덕여왕 대에 '중시'라는 이름으로 처음''' 만들어졌는데, 화백회의상대등으로 대표되는 귀족 권력을 견제하는 역할을 하였다. 사극에서도 지겹게 우려먹듯이 과거 왕권과 신권은 항상 서로를 견제했고, 신라에서도 왕권의 변화와 함께 상대등과 시중의 파워는 엎치락 뒤치락했다.
신라 최초의 중시는 향가 모죽지랑가로 유명한 죽지였다. 원래 신라는 국왕을 화백회의에서 추대하고 화백회의에서 폐위할 수 있을 정도로 귀족 세력에게 막강한 권력이 있었는데, 진덕여왕 즉위 직전 선덕여왕 말기에 당시 상대등이었던 비담반란을 일으켰다가 김춘추김유신에게 패배함으로서 귀족의 권위가 크게 떨어진다. 일단은 마지막 성골인 진덕여왕이 왕위에 올랐으나 사실상 최고 권력자는 김춘추였고, 김춘추는 이 참에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중국 정치제도의 수용을 통한 정치개혁을 시도한다. 이 과정에서 행정 실무를 총괄하는 집사부가 설치되었는데, 집사부의 장이 바로 중시이다. 이후 신문왕의 무자비한 왕권강화정책, 특히 김흠돌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진골 귀족들을 대거 숙청하면서 중시의 권한이 막강해지게 되었으나 혼란스러운 하대에 가면서 다시 상대등의 파워가 강해진다. '''경덕왕 때인 747년 시중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후삼국시대 궁예태봉도 신라의 정치체계를 토대로 해서 시중이 있었으며, '''왕건'''이 바로 시중을 역임했다. 단 태봉에서는 신라 제도의 명칭은 모두 태봉식으로 고쳐서 시중은 광치나(匡治奈)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고 하는데, 이름만 다르고 시중에 대응하는 지위였다고 삼국사기와 고려사에 설명되어 있다.
고려시대에는 초기엔 태봉의 체계를 그대로 받아들이되 명칭은 다시 시중으로 되돌렸다. 이후 성종 때 국가의 행정을 총괄하는 중서문하성의 최고 관직으로 문하시중이 있었다. 고려는 성종 때부터 신라 13부를 계승하지 않고 당나라의 3성6부제를 수입해 대체했기 때문에 신라의 시중이 아닌 당의 시중 제도가 문하시중의 유래에 해당하지만, 중국과는 달랐던 고려의 환경상 실질적으로는 삼국/남북국의 수상직[3]과 유사했던 신라의 시중과 기능이 더 유사했다.[4]
고려말 '''이성계'''도 문하시중을 역임했다. 조선이 건국된 이후에도 태종대에 문하부가 의정부로 개편되기 전까지 존재하였다.

2.3. 신라/후삼국시대 주요 역임 인물



3. 관련 문서



[1] 재상들의 회의 장소인 정사당(政事堂)에 참여할 자격이 있음을 나타내는, 당나라 중기에 있었던 관함인 동중서문하삼품(同中書門下三品)의 명칭은 이들 관직의 품계에서 비롯되었다. 의미상 중서성과 문하성의 장관과 동급임을 나타낸다. 재상의 평균 연령을 40대로 유지하고 2품 이상은 명예직으로 취급한 당나라에서는 관료의 원래 품계가 2품 이상이어도 정치에 참여하기 위해 3품과 동급임을 표시해야 했다.[2] 동평장사는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의 약칭으로 동삼품(同三品)을 대체하여 본직의 뒤에 붙어 재상의 자격을 나타내는 관함이었다. 중서문하성 체제 고려에서 평장사(平章事)는 문하·중서시랑 뒤에 붙는 관함이었고 그중 선임자는 동평장사로 칭했다. 고려 말 도평의사사 체제에서는 문하부의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라는 명칭으로 합쳐졌고 조선시대 의정부 찬성사를 거쳐 종1품 좌·우찬성이 되어 삼정승 다음의 재상이라는 의미에서 이상(貳相)이라고 불렸다.[3] 대대로, 상좌평, 상대등/시중, 대내상.[4] 신라는 당대 가장 선진적이었던 당의 관료제를 일부 도입했는데 명칭상 같은 직책이라고 해도 신라에 원래 있던 직책을 당풍으로 개명했거나 신라가 처한 환경에 맞춰서 도입한 경우가 많아 기원부터가 아예 다르거나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지게 된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차이의 대표적 사례로 지적되는 것은 병부(兵部)이다. 3성과 6부의 관계와 달리 신라의 13부는 위계의 차등은 있으나 각각 별개의 기구였으며 병부 역시 3성 6부제에서의 상서성 병부와 달리 한 기구에 종속되지 않은 독립된 기구였다. 더욱이 신라의 병부는 상서성 병부보다 설치시기가 더 이르다. 당의 문하성 시중과 신라의 집사부 시중의 관계도 이와 유사하다. 중국의 3성6부제에서는 시중이 꼭 수상(首相)이 아닐 때도 있고 애초에 재상의 명칭이 자주 바뀌었다. 하지만 고려의 중서문하성에서는 수상의 명칭으로 일관되게 문하시중을 사용하며 문하시중에 임명된 사람이 없을 경우 동급(종1품)의 중서령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문하시중 바로 밑의 종2품 문하시랑평장사가 수상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