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삼국지)

 


董和
(? ~ 221년 이전[1])
1. 개요
2. 정사
2.1. 유장 휘하에서
2.2. 유비 휘하에서
3. 연의
4. 미디어 믹스


1. 개요


후한 말의 문신이자 삼국시대 촉한의 인물. 는 유재(幼宰). 동윤의 아버지. 남군(南郡) 지강현(枝江縣) 사람이다. 다만 원래 그의 선조는 본래 파군 강주(江州) 사람이었고 한 말에 동화는 종족을 이끌고 서쪽으로 이주해왔다는 점을 보면 어떤 사정이 있어 집안이 한때 형주로 이주했다가 다시 익주로 되돌아 온 사례로 보인다.

2. 정사



2.1. 유장 휘하에서


익주목 유장은 그를 우비장(牛□長), 강원장(江原長), 성도령(成都令)으로 임명했다.
땅은 토질이 넉넉하고 곡식이 풍성했으므로 당시 풍속은 사치스러웠고 재산이 있는 사람들은 제후의 의복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먹었으며, 혼인과 장례에 집안이 기울고 가산이 탕진할 지경에 이르렀다.
동화는 솔선수범해 검소하게 살면서 수수한 옷을 입고 간소한 식사를 했으며, 신분을 넘는 행위를 말리고 금지하면서 이에 대한 규제를 만들었으므로 그가 부임한 곳마다 풍속이 바뀌고 선한 방향으로 변했다. 백성들은 법규를 두려워해 이를 범하지 않았다.
그러나 현의 호족들은 동화의 엄한 법을 싫어했으므로 유장에게 동화를 파동(巴東)의 속국도위(屬國都尉)로 전임시키도록 진언했는데, 수하에 있던 수천 명의 관리와 백성들 그리고 노약자들이 동화의 유임을 간절히 원해 유장은 그를 2년간 더 유임하도록 했다.
그 후 돌아와 익주 태수로 승진했는데, 그의 남다른 청렴함과 검소함은 여전했다. 동화는 남방의 이민족들과 협력하여 일하고, 성의로써 일관되게 일에 매달렸으므로 남방 사람들은 그를 아끼고 신뢰했다.

2.2. 유비 휘하에서


214년에 유비가 촉을 평정하자 동화를 초빙해 장군중랑장(掌軍中郎將)으로 임명하면서 군사장군 제갈량과 함께 좌장군 대사마(유비)의 일을 담당하도록 했는데, 옳은 것은 아뢰고 옳지 않은 것은 폐지하도록 진언해 제갈량과 즐거이 사귀게 되었다.
동화는 관직에 올라 봉록을 먹은 이래로 밖에서는 먼 지역의 장관이 되었고, 안에서는 정치의 중추를 담당하며 20여 년을 지냈지만 죽었을 때 집에는 쌀 한 섬의 재산조차도 없었을 정도로 검소했다.
제갈량은 신기묘산(神奇妙算)의 지략가로 잘 알려져 있지만, 나랏일을 독단적으로 처리하지 않았다. 그는 촉한의 승상이 된 뒤에 〈교여군사장사참군연속(教與軍師長史參軍掾屬)〉이라는 훈계하는 글을 수하들에게 전하여 널리 의견을 구하는 방침을 밝히고 협조를 당부하였다.[2]

각기 직무를 담당한 자는 사람들의 의견을 모으고 주군에 이익이 되는 의견을 널리 받아들이도록 하라. 만일 작은 불만이 있는 사람을 멀리하고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것을 곤란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국가의 큰 일에 해를 입히게 될 것이다. 다른 의견이 타당하다면 찢어진 신발을 버리고 주옥을 얻는 것처럼 하라.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이 고통스럽다면 모두 할 수 없다. 오직 서원직(서서)만은 이러한 일에 처했을때 미혹되지 않았고, 또 동유재(동화)는 직무를 담당한 7년동안 불충분한 점이 있으면 10번씩 반복해 상담하고 지적해넀다. 진실로 자네들이 서원직의 10분의 1만이라도 배울 수 있고, 동유재처럼 돌이켜 검토하는 태도를 갖고 국가에 충성한다면 나 또한 잘못을 적게 할 수 있을 것이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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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내용은 자치통감에도 실려 있다. 여기서 유래하여 '집사광익(集思廣益)'이라는 고사성어가 생겼는데 이는 여러 사람의 의견을 모아 유익한 점을 취하면 더 큰 효과와 이익을 얻을 수 있음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제갈량은 또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이전에 처음에는 최주평(崔州平)과 사귀면서 잘한 것과 잘못한 것을 자주 지적받을 수 있었으며, 후에는 서원직(서서)과 사귀어 그의 가르침을 여러 번 받았다. 이전에 동유재(동화)와 함께 일을 한 일이 있었는데, 그는 매번 자신의 의견을 전부 말했고, 후에 호위도(호제)가 일을 맡으면서는 여러 차례 간언을 하여 부당한 결정을 제지했다. 비록 내 성품이 우매하고 닦여지지 않아 그들의 의견을 전부 받아들일 수는 없었을지라도 이 네 명과는 처음부터 끝까지 친하게 지냈으며, 이는 그들의 직언을 의심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에 충분하다.

제갈량이 동화가 죽은 후에 부하들에게 동화에 대한 이야기로 훈계를 했을 정도로 제갈량이 이처럼 동화를 아꼈던 추념의 정은 깊었다. 양희의 계한보신찬에서 동유재를 찬(贊董幼宰)하길 장군(掌軍, 동화)은 맑은 절조를 갖고, 의기가 높고 마음이 항상 같았다. 직언을 하고, 백성들은 그 기강을 사모했다고 한다.
정사 삼국지 비의전과 세설신어에서는 허정의 아들 허흠이 죽었을 때 동윤, 비의 등이 장지에 가고자 했는데, 아들 동윤이 수레를 청하자 뒤가 열린 녹거를 내줬다. 동윤은 수레를 타기 어렵다는 기색을 띄었지만 비의는 곧장 앞쪽에서 먼저 올라탔는데, 장지에 도착해 제갈량과 여러 귀인들이 모두 모이니 수레들이 매우 훌륭했다.
동윤은 여전히 안색이 편치 못했지만 비의는 태연했는데, 수레를 몰고 갔던 사람이 돌아오자 동화가 그에게 물어 그 일을 알고 나서 동윤에게 자신은 동윤과 비의의 우열에 대해 의문을 갖고 판가름하지 못하고 있었다가 이제야 자신은 분명히 알게 되었다고 얘기했다.

3. 연의


삼국지연의에서는 처음부터 익주태수로서 유장의 부하로 등장하며, 211년에 촉한유비의 공격을 받자 장로에게 가세하는 것을 요구하도록 진언했다. 유비가 성도에 다가올 때까지도 항전을 주장했으나 결국 유장은 항복했으며, 동화 역시 유비를 섬겨 유비는 촉 입성 후에 동화를 장수중랑장으로 임명되었다가 유비 사후에는 제갈량을 보좌했다.

4.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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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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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2,13
삼국지 시리즈에선 아주 쓸만한 무장. 유비의 입촉 이전의 유언, 유장의 무장 중 정치력으로는 단연 최고. 또한 휘하 무장으로 두고 있다면 동화의 아들인 동윤이 딸려오는데 동윤 역시 정치력이 90을 넘는 내정에 특화된 인재이므로 기쁨은 두 배.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65/무력 41/지력 74/정치력 82의 B급 문관. 혼란과 고무가 있어서 전장에서 활용도 어느 정도 가능하다. 그 이외의 병법으로는 노병계 병법인 제사와 지식계 병법인 조영을 가지고 있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59/무력 35/지력 73/정치력 84/매력 71의 내정특화 문관. 특기가 5개로(농업, 상업, 보수, 반박, 명사) 많지는 않지만 농업, 상업 특기를 모두 가지고 있고 명사 특기도 가지고 있는 것이 강점이다.
삼국지 11에서는 정치가 87에 달하며, 지력이 74이고 매력이 76인 전형적인 문관형 능력치를 가지고 있다. 특기인 친만이 특기 중에서 쓸모없기로는 이를 데가 없어 사실상 특기가 없는 것이나 다름없지만 전풍처럼 전투용으로든 계략용으로든 전쟁터에 내보내야 하는데 특기가 없는 무장과는 달리 이쪽은 전투용으로 내보낼 이유가 없으므로 저들에 비해서 특기가 없는 것이 덜 두드러진다.
삼국지 12에서의 전법은 궁군병격. 장임과 엄안 등 익주의 궁병라인이 막강해서 도움이 될 것 같으나, 이거 쓰느니 그냥 장임으로 원사병격, 엄안으로 노당익장을 쓰는게 더 나은 지라... 일러스트는 손에 가슴을 올리고 있다.
삼국지 13에서의 능력치는 통무지정 순으로 57/34/75/87. 특기는 상업 5, 교섭 1. 전수특기는 상업으로 전법은 방어강화다.
삼국지 14에서의 능력치는 통솔 57, 무력 34, 지력 73, 정치 87, 매력 72로 전작에 비해 지력이 2 하락했다. 개성은 법률, 교화, 친만, 소욕, 인정, 주의는 예교, 정책은 호적정비 Lv 4, 진형은 학익, 전법은 진정, 친애무장은 제갈량, 호제, 혐오무장은 없다.
삼국전투기에서는 김성근으로 패러디되었다. 처음 등장한 가맹 전투 (4)편의 타이틀 컷을 장식하기도 했다.
가맹 전투 편에서 처음 등장. 유비군의 익주 점령 이후 군사중랑장에 임명되어 제갈양과 더불어 유비 정권의 중심에 섰다고 묘사된다.
대단한 야구팬인 최훈은 이외에도 원술의 대장군인 장훈동명이인인 야구선수로 등장시키는 등 야구 관련 패러디를 간간이 써먹었다. 연재 당시에는 아직 야신 신화가 강성했었기에 김성근의 이미지가 좋아서 인물 설명도 '촉에 대해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인물', '너무 깐깐해 지방 호족에게 미움을 받아 쫓겨남'이라고 되어 있다만, 김성근 거품이 걷힌 지금 다시 보면 상전벽해가 아닐 수 없다.

[1] 제갈량이 승상에 오르기 전에 동화는 이미 죽었다.[2] 제갈량(諸葛亮)이 처음에 익주목(益州牧)을 다스릴 때 아랫사람에게 말하기를, "작은 혐의가 있는 사람을 멀리하면 서로 논란하여 잘못을 적게 하기 어렵다. 만약 논란하여 합당하게 된다면 이는 떨어진 신발을 버리고 주옥을 얻는 것과 같다." 하였다.[3] 다른번역 : 무릇 관직에 참여한 사람은 여러 사람의 의견을 모아 나라의 이익을 넓히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조금이라도 미움을 받지나 않을까 걱정하여 의견을 말하기를 멀리하고, 서로 의견이 엇갈리게 될까 걱정하여 말하기를 어려워한다면 큰 손실을 입는 것이다. 의견이 엇갈리는 가운데 얻는 것이 있으니, 병폐를 버리고 주옥을 얻는 것과 같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 그렇게 하기 어렵거늘, 오직 서원직(서서)만은 하는 일마다 미혹됨이 없었다. 또 동유재(동화)도 7년 동안 일하면서 생각이 다른 경우에는 열 번이라도 와서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였다. 진실로 서서의 10분의 1이라도 본받고, 동화의 성심성의를 다함을 본받아 나라에 충성을 다한다면 나 역시 잘못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4] 원문 : 夫參署者,集眾思廣忠益也。若遠小嫌,難相違覆,曠闕損矣。違覆而得中,猶棄弊蹻而獲珠玉。然人心苦不能盡,惟徐元直處茲不惑,又董幼宰參署七年,事有不至,至於十反,來相啟告。苟能慕元直之十一,幼宰之殷勤,有忠於國,則亮可少過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