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주시대

 


東周時代
1. 개요
2. 경과
2.1. 기원전 8세기 ~ 기원전 7세기경
2.2. 기원전 6세기 ~ 기원전 5세기경
2.3. 기원전 4세기 ~ 기원전 221년


1. 개요


동주(東周)는 본래 서주(西周)의 마지막 왕인 유왕이 견융의 침입에 의해 패망하고, 평왕에 의해 수도를 낙읍으로 옮기는 기원전 770년부터, 진(秦)나라에 의해 멸망된 마지막 난왕(赧王)대에 이르는 시기(기원전 256년)까지의 주 왕조를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중국사학에서는 통상적으로 춘추시대전국시대를 아울러 부르는 명칭으로 동주시대를 설정하므로, 본 항목에서는 공화 원년으로부터 진시황제나라를 멸망시키는 기원전 221년 사이의 시기를 일컫기로 한다. 단,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를 어느 시기를 기점으로 해서 나눌 것인가에 대한 이설이 많으므로 춘추전국시대라는 표현은 쓰지 않기로 한다.

2. 경과



2.1. 기원전 8세기 ~ 기원전 7세기경


낙읍 동천 이후의 주 왕실은 제후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였다. 이 때문에 제후들 중에는 연나라와 같이 아예 주 왕실과의 교류가 거의 끊어지다시피 한 곳이 생기기도 하였으며, 이를 틈탄 유력 제후들의 영토확장과 군소제후국 병탄, 그리고 미개척지의 개발이 활발해졌다. 이러한 경향을 선도한 것은 주 왕실과 같은 희씨이며 평왕의 왕조 수복에 공이 큰 허난 성정(鄭)나라였다.
그러나 7세기경으로 넘어가면서 명재상 관중을 등용한 제(齊)나라 환공이 패자의 자리를 차지하여 주 왕실로부터 인정받으면서 패자의 시대가 열린다. 이 시기의 중요한 특징으로써, 종래의 주 왕실 권력이 명분상으로는 부정되지 않으면서,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슬로건이 내걸렸다는 것을 꼽을 수 있다.[1]

2.2. 기원전 6세기 ~ 기원전 5세기경


이 시기부터는 주 왕실과의 관계가 비교적 멀거나 아예 민족이 다른 제후국들이 중원의 패권을 두고 다투게 된다. 그중 가장 규모가 크고 치열했던 것이 문공을 위시한 산시성 지역의 진(晉)나라, 장왕을 위시한 후베이성 지역의 초(楚)나라 간에 벌어진 패권경쟁이다. 이들은 모두 당시의 중심지로 여겨지던 중원 지역과는 거리가 있었으며, 문화적·인종적으로도 중원 지역의 여러 제후국과는 상이했었다. 이리하여 진과 초 양국은 황하를 사이에 두고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전쟁을 벌였으며, 두 나라의 전쟁 가운데 황하 중하류 지역에 있었던 군소국들[2]은 상황에 따라 진나라와 초나라의 편을 오가는 거수기로 전락하고 만다.
이러한 제후국들의 발흥에 의해 주 왕실의 위세는 나날이 위축되었으며, 종법제에 근거한 사회 제도도 무너져 가기 시작했다. 진 문공은 이전의 제 환공에 비해서 주 왕실을 가볍게 다루었으며, 초 장왕은 아예 동주의 수도 낙읍 근처까지 쳐들어가 "구정[3]의 무게를 재고 싶다"는 무례를 범할 정도였다. 이렇게 주 왕조는 권력의 핵심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물론 약화된 것은 주 왕실만이 아니었다. 기존의 체제에 기반한 제후들의 영향력도 대폭 축소되고 대부[4]들의 권한이 막강해졌다. 제후는 배제된 채 대부들만이 전쟁의 판세를 결정짓는 사태도 벌어졌다. 기원전 5세기에 이르면 대부에 의해 제후가 축출되거나 암살되는 사건까지 다발하여, 이 시대를 하극상의 시대로 정의하는 사람도 있다.
군사적으로는 평지가 많은 중원지역을 바탕으로 한 전차 중심의 군제가 진, 초와 같은 산악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패권국가들에 의해 대규모의 보병을 중심으로 하는 군제로 바뀌었다. 이 때문에 소규모 전차전으로 인해 길어야 며칠을 넘기지 않던 동주 초기의 전쟁양상과는 달리 전쟁 수행에 수 달이 걸리는 대규모 전면전 양상이 등장하여, 이것은 후대로 이어진다.
이 시기에 중원의 패권을 잡은 군주들을 춘추오패라 한다. 이는 다분히 음양오행설에 의해 끼워맞추어진 성격이 강하며, 누가 오패에 들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논하는 바가 다르다.

2.3. 기원전 4세기 ~ 기원전 221년


이 시기에는 주 왕조의 권위가 완전히 추락하여 각 제후들이 천자만이 칭할 수 있었던 왕의 호를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며, 종법제에 의거한 전통을 갖고 있었던 진, 제등의 나라는 분할당하거나 왕조가 교체되어 이전시기와는 전혀 다른 국면으로 접어든다.
이 시기에는 관중지역에 중심지를 두고 있었던 진(秦)나라상앙의 개혁으로 상징되는 중앙집권적인 체제개편을 시행하여 대부분 기간동안 최강자로 군림하였다. 상앙의 스승인 이회가 저술했다고 전해지는 법경(法經)은 중국 역사에서는 최초의 율령제도안이며, 이후 중원에 출현한 율령제 통일국가의 제도에 지대한 영향을 남겼다. 이러한 형태의 개혁은 초나라와 같은 다른 나라에서도 시도되었으나, 대부분은 기득권세력의 반발에 부딪혀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이런 사람의 대표격으로 오기가 있다)
주나라의 권위가 약해지다못해 사라지고 군주 1인에 의한 중앙집권적 국가 형성의 기운이 높아지자, 통일된 왕조의 출현을 바라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러한 움직임은 이 시기의 사상서인 맹자순자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는 결국 현실에서도 이루어진 바, 동주 초중기에 백단위를 넘던 제후국의 숫자는 이 시기에 이르면 병합에 병합을 거듭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 숫자가 되었다.[5] 결국 이러한 국면은 기원전 221년에 전국칠웅 중 마지막으로 남은 제를 진이 멸망시키면서 진나라에 의한 중국 최초의 중앙집권적 통일왕조의 성립으로 귀결지어지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기존의 지배층이 무너지면서 몰락한 지배층의 일파들 중에서 자신만의 학설을 갖고 여러나라를 다니면서 각 나라의 군주에게 헌책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이 들을 후대에 제자백가라 칭하였는데, 그 중에서 가장 세력이 강하고 강령이 교조화된 것은 유가묵가였다.
유가는 현상유지와 예의범절을 중시하였기 때문에 국가가 안정기에 들어선 이후 권력자들의 통치이념으로써는 매우 이상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법가를 중시한 통일국가 진의 멸망 이후, 법가의 권위주의에 질린 반작용으로 도가의 무위지치를 지향한 한나라 초창기를 지나 한무제 대에 이르면서 유가는 점차 통일국가의 기본이념으로 자리잡게 되었다.[6] 그러나, 묵가는 본질적으로 교리 자체가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강조하는 등 지배층과 대립할 수 밖에 없는 구조였다. 더군다나 이를 사상으로만 외치는 것이 아니라 침공받는 국가의 성에서 방어전투에 직접 참가하여 명성을 떨치는 등의 행위를 했다. 결국 이 때문에 탄압을 받아 쇠멸의 길을 걸어 명맥이 끊겼다.
[1] 이 점에서 덴노를 두고 쇼군이니 관백이니 태정대신이니 다이묘니 하면서 싸워제낀 일본의 전국시대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2] 정(鄭), (蔡) 등.[3] 쉽게 말해 천자를 상징하는 물건이라고 보면 된다. 이 물건이 사라지고 이후 대체하기 시작한 옥새와 비슷한 역할.[4] 천자와 제후를 보좌하는 고위관리.[5] 기원전 3세기가 되면 고작 일곱국가만이 살아남는다. 이를 전국칠웅이라 한다.[6] 유가 이데올로기의 가르침은 겉으로 드러나는 명분을 맡고, 법가의 규칙과 형벌은 실질적으로 나라를 통치하는 제도로써 살아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