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기(전국시대)

 





'''오자(吳子)
오기
吳起'''

''''''
(姜)
''''''
(吳)
''''''
(起)
'''최종직위'''
영윤(令尹)
''' 고향'''
불명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440년 ~ 기원전 381년
1. 소개
2. 생애
2.1. 젊은 시절
2.2. 조작된 오기의 악행?
2.3. 명장으로서의 면모
2.4. 위나라를 떠나다
2.5. 초나라의 재상이 되다
2.6. 오기 가득한 최후
3. 평가
4.1. 손자병법과 연계성
4.2. 충무공 이순신과 오자
5.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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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춘추전국시대전국시대 명장이자 병법가, 또한 정치가. 전국시대를 대표하는 전략전술의 귀재 중 한 명으로 오기(傲氣)도 많았고, 인간적으로는 너무나도 차가운 냉혈한이었지만 병사들의 상처를 친히 입으로 빨아 주었다는 유명한 일화를 생각하면 상당히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는 인물. 일생도 꽤나 드라마틱하다.
우연의 일치로 윗 항목에 있는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마음을 뜻하는 동음이의어 오기의 뜻에 맞게 파란만장하고도 오기있는 삶을 살았던 인물이기도 하다. 실제로 오기의 삶을 보면 진정한 오기란 이런 것이다 싶을 정도. 오기의 처절하고도 섬뜩한 독심과 비정함까진 배울 필욘 없어도, 여러차례 모함을 받으며 자리에서 쫓겨나더라도 끈기와 포기하지 않고 오기있게 살았던 것만큼은 후대의 사람들에게도 의미심장하다.

2. 생애



2.1. 젊은 시절


얼마나 오기가 쩔었는지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는데, 어렸을 적 자기보다 더 강한 깡패를 상대로 덤비다가 죽지않을 만큼 맞았다. 그런데 그는 다음 날 다시 그 깡패를 찾아가 다시 한번 자웅을 겨루어 보자며 깡패를 도발했고, 그는 또 다시 죽지 않을 만큼 맞았다. 그러나 오기는 칠전팔기의 정신으로 계속 그 깡패를 쫓아다니면서 덤볐고, 결국에 밑도 끝도 없는 오기에게 지친 깡패는 마지못해 싸움에서 져주었다.
별다른 수입 없이 백수생활을 하는 터라 벼슬을 구하려고 명망있는 사람들에 연줄을 대기 위하여 천금을 날리는 바람에 아버지는 홧병으로 돌아가시고,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사자, 홧김에 칼 들고 가서 평소에 비웃던 사람 30여 명을 찾아내어 차례차례 '''모두 살해했으며,''' 이런 죄악을 저질렀으니 도주해야 했다. 떠날 때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긴 어머니가 크게 꾸짖자, 어머니 만류에도 팔을 물어뜯어 피를 흘려 그 피로 재상이 되기 전까진 찾아오지 않겠다고 어머니께 맹세했다고 한다.
한때 공자 제자인 증삼의 아들 밑에서 수학한 적이 있으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공부에만 열중했다. 이를 의아하게 여긴 스승이 묻자 어머니와의 약속을 언급하며 자신을 변호했고[1], 효를 중요하게 여기는 유가의 사상의 특징상 그는 증삼가문에서 계속 공부를 할 수 없었고, 결국 쫓겨났다. 더불어 효를 중시하는 유가의 기준에서는 '부모와 자식 사이에 피의 맹세를 했다'는 자체가 탐탁지 않았는데, 하물며 부모 장례도 거들떠보지 않는다면야...[2]
결국 오기는 유학을 버리고 병법을 익혔다. 그리고 그는 노나라에서 벼슬을 얻었는데, 마침 제나라가 노나라를 쳤다. 그런데 노나라 조정에선 오기의 재능을 알면서도 그 아내가 제나라 출신이라 선뜻 그를 장군으로 쓰기를 꺼렸다. 이를 들은 오기는 '''주저없이 아내의 목을 베고''' 대장군 자리에 오른 다음 노나라에 침입한 제나라를 상대로 하여 싸움에서 승리한다. 오기는 자신이 출세하기 위해서는 아내를 죽여야 함을 깨닫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집으로 돌아가 아내에게 장군으로 승진한다고 하였다. 같이 고생한 나날이 오래되었던 터라 그의 아내도 기뻐하였다. 그가 "정말 내가 장군이 되면 좋겠소?" 하고 묻자, 아내는 당연하지 않느냐고 하였다. 그러자 오기의 얼굴이 일순간 싸늘해지며 '''"그렇다면 어쩔 수 없소."''' 하며 아내를 죽였다. 요코야마 미츠테루사기에서는 그저 좋은 말로 타일러 친정집에 돌려보내고 만다. 그리고는 제나라 군대에서 사신이 오자 '처가의 나라인지라 싸우기는 껄끄러우니 적당히 협정하고 끝내자'라며 안심시키고 기습하여 제나라 군대를 전멸시켜 버린다.- 비록 그는 제나라 군대와의 싸움에서 큰 전공은 세웠으나 대장군에 기용되기 위하여 아내를 죽인 일이 빌미가 되어 노나라에서 쫓겨났고, 위나라 문후(文侯)를 만나 장수로 기용된다. 바로 이 부분이 바로 오자병법의 도입부다. 문후가 '난 평화를 사랑해서 그대는 필요없소'라고 말하자 오자가 '가죽 모아다가 갑옷을 만드는 데 쓰고, 대장간마다 병장기 만드느라 분주한 것을 이미 다 보아 두었으니 거짓말은 마시오'라고 하자 바로 문후는 할 말을 잃었다.

2.2. 조작된 오기의 악행?


하지만 오늘날의 학계에서는 '''초년기 오기의 악행이 조작되었거나 과장되었다'''고 보는 시각이 존재한다. 이것이 일리가 있는 것이, 위에서 언급된, 마을 친구 30명 싸그리 도륙내기, 엄마 장례 생까기, 마누라 목 한 방에 따 버리기 등의 일화가 모두 《사기(史記)》 〈손자오기열전(孫子吳起列傳)〉에 있는 '''어떤 노나라 사람이 오기를 비방한 말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는 20세기 후반이나, 21세기에 들어서서 제기된 설이 아니라 20세기 중엽의 학자 곽말약이 이 문제를 제기한 바 있고, '술오기(述吳起)'라는 제목의 글을 써서 아예 '''오기의 악행이 봉건 귀족들에 의해 조작, 왜곡되었다는 견해'''를 주장한 바 있다. 《사기》 외의 다른 문헌에서는 '''이와 같은 일화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3]. 오히려 《한비자(韓非子)》, 《여씨춘추(呂氏春秋)》 등 '''전국시대 당대'''의 문헌에서는 오기를 '''권세와 재물에 초연한 현자'''와도 같은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즉 오기의 악행이라고 기록된 일화들은 한대에 편찬된 사서인 사기 외에는 전국시대 당대의 문헌들과 교차검증이 안 된다는 얘기다.
특히 《한비자》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吳起之出愛妻, 文公之斬顚頡, 皆違其情者也。

오기吳起가 사랑하던 아내를 쫓아내고 문공(文公)이 전힐(顚頡)[4]

벤 일[5]은, 모두 그들 인정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故能使人彈疽者, 必其忍痛者也。

그러므로 남에게 등창[6]

을 보이고 따게끔 시키는 자는, 반드시 그 아픔을 견뎌 낼 수 있는 자인 것이다.

이는 한비자에서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하고 있는데, 오기가 아내한테 허리띠를 짜 달라 했는데 '국정 허리띠 치수'에 맞지 않아서 다시 짜 달라 하고 외출했는데, 아내는 "이미 날실을 넣고 짜서 고쳐 짤 수가 없습니다"하면서 그대로 짜 버리고는 내놓았다. 이 일 때문에 오기는 아내와 이혼했다. 쫓겨난 아내가 친인척 중 하나에게 자신 대신 용서를 빌어달라 부탁을 했는데, 이 양반이 말하기를 "오기는 법을 지키는 사람이라서 법대로 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왕에게까지 이르는 공을 세우고자 하는 것이다. 자기 마누라한테부터 그렇게 함으로써 법을 실천하겠다는 거니까." 또 다른 일화에서는, 오기가 아내한테 허리띠를 짜달라 했는데, 어쩐지 옛날에 짜줬던 허리띠보다 잘 만들어졌다. 왜 잘 만들었냐고 아내한테 따지니 이번엔 특히 정성 들여서 짰다고 대답이 왔다. 근데 오기 이 양반 왈: "난 저번 거랑 똑같이 만들어 달라고 했는데 정성들여 잘 만들다니!"
한비자가 인용한 일화에서 오기는 '''법치의 실현을 위해 눈물을 머금고 아내를 쫓아낸 철인''' 정도로 그려져 있다. 물론 한비자나 사마천이나 딱히 어느 쪽에 지대한 신빙성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서도, 적어도 사마천 《사기》의 험담이 꼭 사실에 부합함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다만 이건 딱히 사마천이 악감정을 품어서 오기의 이미지를 왜곡했다기보다는 사마천이 사기를 편찬할 무렵 오기에 대한 남은 기록은 여러 종류가 있었고, 이를 취합 편집하는 과정에서 기록간 모순이 생겼기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7] 오히려 오기와 피터지게 싸워 오기를 진짜 원수로 여겼을 진나라 사람들이 쓴 여씨춘추에서도 오기는 이렇게 평가되고 있다.

숨은 낌새와 드러난 외양이 파악하기 쉽든 어렵든 성인은 알아차리지 못하는 일이 없지만 보통 사람들을 알아차릴 길이 없다. 알아차릴 길이 없으면 보통 사람들은 "신기하다", "요행수다"라고 한다. 그러나 신기한 것도 요행수도 아니고, 그 이치상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이런 면에서 후성자와 오기는 '''성인에 가깝다'''.

다만 '''사람이 어느 한 면만 가진 것이 아닌 다면적인 면을 가지고 있는 동물'''이라는 점과, 제3자가 평가한다 해도 사람은 일반적으로 자기 자신이 본 모습만 가지고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니까 사서에 기록된 오기의 모습이 딱히 미화나 폄하된 것이 아니라, 그냥 그 자체로 실제 오기의 모습일 가능성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실제 역사 속 인물들을 살펴보면 살펴볼수록 참 한가지 말로 정의하기가 힘들고 선악구별이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프랑스 혁명기 당시 활약했던 정치가 로베스피에르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무차별 학살을 지시내렸고 자기 동지인 당통까지 단두대로 보내버린 냉혈한이었지만 동시에 부정축재 및 여자 문제가 전혀 없어 뭐 이런 인간이 있나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든다. 더욱이 전혀 뜻밖의 위인이 오기 못지 않은 인성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도조 히데키는 자기 조국을 전쟁의 수렁텅이로 몰아넣은 매국노이자 전범이었지만 막상 자기 부하들은 진심으로 사랑하여 매끼 반찬을 살펴보고 '''병사들이 자신과 똑같은 식단을 못 먹으면 자기도 정말 안 먹는 대인배의 면모를 보여주었는데''' 욕심만 안부리고 안분지족했으면 후세에 욕을 안 먹고 좋게 살다 갔을 것이라는 동정심마저 든다.
현재 남아있는 오기병법 등의 사료에 있는 오기의 직설적인 면모를 들며 이런 사람이 어떻게 기회주의자나 위선자라고 할 수 없다는 사람도 있지만 이런 시선이야말로 오기를 한가지 시선으로만 바라다 보는 편견일 뿐이다. 사람은 관계가 먼 사람일 수록 경계하는 습성이 있기 때문에 친해지면 모를까 아첨부터 한다고 의외로 쉽게 넘어오지 않는다.[8] 특히 왕을 비롯한 상류층일수록 이런 기회주의자나 사기꾼을 많이 접해볼 기회가 많기 때문에 사람을 보는 안목이 보통사람에 비해 탁월할 수밖에 없다. 타국에서 천거받아 온 사람인 오기 입장에선 자신의 실력부터 증명해야 앞날이 밝기 때문에 왕 앞에서도 직설적이면서도 사실에 기반한 발언으로 "나는 입만 산 기회주의자가 아니라 당신에게 찍힐 위험성을 감수하면서 이런 발언 할 정도로 실력있고 믿음직한 사람이다"란 걸 어필했어야 했고 실제로도 실력을 증명했기에 출세가 가능했던 것이다.[9]
당장 밑 단락의 병사들 처우에 보듯이 오기는 자기 자신이 필요하다 싶으면 과감하게 주변의 평가는 아랑곳하지 않고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의 과거를 아는 사람은 위선적이라고 평가하겠지만, 그런 과거를 알 리 없는 병사들 입장에서는 '''말 그대로 성인 그 자체'''로 보일 수밖에 없다. 오기를 성인으로 묘사한 진나라 기록은 이런 병사들이 좋게 평가한 것을 적국에서도 이런 면모는 인정하고 기록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기록을 보면 병사들 뿐만 아니라 주변의 인사에게도 필요하다 싶으면 적극적으로 인간적 대우를 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렇게 되면 호의를 받은 사람 측에서는 좋게 평가하지 나쁘게 평가하지는 않는다. 기록에 남아 있는 서로 상충하는 기록은 세월 탓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오기 그 자신의 처신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크다.'''

2.3. 명장으로서의 면모


오기는 진(秦)나라 침공을 막기 위한 요지 서하(西河)로 부임해 이곳에서 성을 쌓고 군사를 조련했다. 서하는 위가 서쪽으로 진출하기 위해 필요했던 요충지였다는 점과, 문후가 승하했을 때 오기가 사흘을 통곡했다는 것으로 말미암아 문후가 오기의 재능을 간파하고 그를 요충지로 보내어 그가 지닌 능력에 맞는 대우를 해줬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그리고 오기는 진나라가 어수선한 틈을 노려 침공을 개시하였고, 다섯 개의 성을 빼앗는 전공을 세웠다.
이렇게 오기가 군대를 이끌고 진나라와 대치할 무렵 그가 세운 전적은 명실공히 불패였다. 덧붙이자면, 공을 세우지 못한 예비병들로 급조된 5만의 부대로 50만의 진나라 군대를 상대로 승리하기도 했다.[10]
오기는 수십만이 동원된 큰 전투만 76회 치른 결과 그중 64회를 승리로 이끌었고 나머지 12회는 무승부였다. 다만, 이때의 진나라는 상앙의 개혁이 있기 전이라 다른 나라들이 벌벌 떠는 원톱 자리는 먹지 못했다는 점은 참고할 필요가 있다. 기원전 389년, 음진 전투로 진나라에 기둥 뿌리를 뽑았던 오기는 기원전 387년, 더 진나라 깊숙히 쳐들어가 승리했으나 이내 모함을 받고 초나라로 도망간다.
이후에 기원전 386년 진나라를 이어받은 진출공이 변란에 휘말리고 진나라의 혼란기가 계속되었음을 감안하면 오기와 위나라 양측에게 대단히 아쉬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렇게 오기가 진나라를 쳐발랐는데도 오기가 떠난 이후로 야금야금 서하 전역의 땅을 갉아먹히던 위나라는 결국 서쪽에 치우쳤던 수도인 안읍을 동쪽의 대량성으로 천도하기에 이른다. 서하 땅에서 황하를 건너면 바로 안읍이 위치해 방위에 불리했기 때문이다.
이후 위나라는 기원전 342년 마릉 전투에서 결정타를 얻어맞아 완전히 몰락하고 상앙의 변법에 힘입어 진은 서하뿐만 아니라 옛 수도인 안읍을 포함한 위나라의 서쪽 영토를 완전히 정복하고야 만다.
그가 위나라에서 밀려난 이유는 왕실과 인척이 되기 위한 혼인을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출세길에 오르기 위해 스스로 아내 목을 친 그의 무자비한 면모나, 여자와 재물을 꺼리지 않았다는 악평이 자자했지만, 의외로 장수로서 병사를 통솔할 때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다. 병사가 등에 종기가 났다는 보고를 듣자 그 병졸을 찾아가 입으로 고름을 빨아준 이야기가 바로 그의 다른 면모였다. 그 병사의 어머니는 이러한 소식을 듣고는 남편도 오기의 그런 행동에 감동받아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우다 전사했는데, 이젠 아들마저 오기를 위해 싸우다 전사하게 생겼다며 오열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에 대해 이러한 오기의 인간적인 면모를 오기가 진심으로 병사를 아꼈다기보다는 자신을 위해 목숨 걸고 싸울 병사를 만들기 위한 용인술이라는 의견도 있다. 이러한 일은 요즘 군대에서조차 보기 힘든 일인데, 그때 당시에 이런 일이 있었다면 그들이 받은 감동은 엄청났을 것이다. 더하여 오기는 병졸들과 똑같이 입었고 똑같은 음식을 먹었으며, 행군을 할 때에는 수레에서 내려 같이 짐을 지고 걸었다고 한다. 군참에 병사가 우물을 다 파기 전까지는 장수는 목 마르다 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데 오기는 실로 현명한 통솔자였다.
지금도 이러할진데 당시는 얼마나 더 했냐는 말은 절대 빈말이 아니다. 요즘 군대의 군 내부의 계급의 차이로도 보기 힘든 일인데, 당시로선 사회적 신분의 차이도 있는 데다 전반적으로 계급의식이 더 강하던 시절임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19세기 영국 해군에서는 전략적 요충지인 다이아몬드 섬에 배치되었던 장교인 울콤 중위가 부하 수병과 겸상을 했다는 이유로 사실상 진급에 타격이 있는 견책이란 중징계를 맞고 더이상 영국 해군에 이름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 사례도 있다.
이러한 일화는 군대에서 정훈교육 시간이나 지휘관이 훈화하는 시간 등에 단골로 언급되며, 같은 이야기가 육군 수양록에도 짤막하게 실려 있다. 하지만 아내를 죽인 일화나 어머니의 죽음을 묻어둔 채 무덤조차 찾아가지 않았던 사실, 그리고 병사를 선대했던 오기의 본심은 언급되지 않아서 오기를 그저 병사들에게 자애롭던 훌륭한 장군 정도로 알고 있던 군필자들은 나중에 오기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를 듣고 나서 놀라기도 한다.
여담으로 문후는 악양이란 장수도 등용했는데, 악양은 중산국 정벌 때 그곳에서 벼슬 살던 그의 아들이 고깃국이 되자, 거리낌 없이 그 국을 마셔버리고 공격을 계속한 일화로 유명하다. 훗날 제나라 전역을 유린한 연나라 명장 악의가 바로 악양의 손자다. 독하기로는 악양도 오기 못잖았던 셈인데, 악양은 중산국 정벌 후로 다시 중용되지 않았지만 오기는 위나라에서 꽤 오래 활동했다.
비록 군사는 아니지만 서문표 역시 문후 시대의 인물이었는데, 하백 신앙 때문에 인신공양을 하던 마을을 개혁한 것으로 유명하다. 상당히 인재풀이 좋았던 시기였다 할 수 있다.

2.4. 위나라를 떠나다


이후 문후가 승하하고 무후(武候)가 즉위했다. 오기는 문후의 뒤를 이어 무후도 섬겼다.

위 무후가 스스로 정사(政事)를 긍휼히 여겨 조정에서 나올 때마다 기쁜 빛을 띠었다.

이때 오기가 고했다.

"이제껏 초 장왕의 얘기를 말해준 신하가 있었습니까?"

무후가 답했다.

"모르오."

오기가 고했다.

"초 장왕은 자신이 나라를 다스리는 나랏일에 신하가 끼어들 틈이 없었으나, 매우 근심해 했습니다. 무신이라는 사람이 그 이유를 물으니 장왕이 말하기를 "은나라의 중훼가 이르기를 제후가 그 스승이 될 만한 자를 얻으면 왕자가 될만 하고, 좋은 벗이 될 만한 자를 얻으면 패자가 될 만하며, 의심을 풀어줄 자를 얻으면 유지할 만하나, 나서서 계획하나 신하가 감히 따르지 못하는 사람은 망할 만하다" 했으니 나는 망할 운명인가보오..." 하였습니다."

오기가 다시금 고했다.

"장왕은 그것을 근심하였는데 지금 주군은 그것을 기뻐하시는군요."

이에 무후가 몇 걸음 물러나 '''두 번 절하며''' 말했다.

"하늘이 선생으로 하여금 과인을 깨우치게 하는구려!"

<<순자>> <요문>

하루는 무후가 뱃놀이를 나갔다가 주변 경치를 보며 '강산의 험난한 지세는 위나라의 보물이다' 하고 감탄했다. 그러자 오기는 '하나라 은나라도 험난한 터에 나라를 세웠으나 결국 왕이 덕이 없어서 망했습니다. 지형에 의지하지 말고 왕은 덕을 닦으십시오' 하고 왕에게 간언했다. 거기서 끝났으면 좋았을 텐데 오기는 더하여 '덕을 쌓지 못한다면 이 배에 있는 사람들이 언제 왕의 적이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라며 더 적극적인 간언을 해서 무후와 사이가 틀어졌다. 그러나 무후는 오기에게 계속 서하를 맡겼다.
무후는 새로 재상 자리를 만들고 전문(田文)[11]을 앉혔다. 오기는 평소 자신의 공이 높다고 자부했기 때문에 내심 불복하고 전문을 찾아가 '''누가 더 잘났는지 따졌다.''' 비록 전문이 차분하게 타일러 데꿀멍했지만. 오기와 전문이 이를 논한 것은 다음과 같다.

오기: "병사를 지휘하면서 사기를 드높이고 적국이 감히 넘보지 못하게 한 공적은 어느 쪽에 더 많습니까?"

전문: "공이 더 낫소."

오기: 그렇다면 "백성과 친하여 국고를 풍성하게 한 공적은 어떻습니까?

전문: "공이 더 낫소."

오기: "서하를 지켜 진나라로 하여금 감히 공격하지 못하게 하고, 한과 조를 복종케 한 공적을 세운 것은 누구입니까?

전문: "그것 또한 당신이오."

(이후 전문은 차분하게 타이른다.)

전문: "왕이 어려 민심이 왕에게 없고 왕은 신하를 믿지 못하며 신하들도 진심으로 복종하지 않고 신뢰 또한 확립되지 못한 상태요. 왕 사이와 신하와 백성을 잘 다스리는 데 공이 낫소, 내가 낫소?"[12]

[13]

그러자 오기는 조금 망설이더니 "공이 낫소."하며 물러났다.

훗날 전문이 죽고 부마 공숙좌(公叔痤)가 그 자리를 이었는데, 오기를 못마땅하게 여겼다.[14] 공숙좌는 오기를 몰아낼 계락을 만들면서 무후를 설득했다. '오기 같은 인재를 붙잡아 두려면 공주를 시집 보내야 한다. 만약 위나라에 뼈를 묻을 각오라면 부마가 될 테고, 다른 꿍꿍이가 있다면 사양할 것이다.' 그리고는 공숙좌는 오기를 부르고는, 일부러 부인(공주)을 자극해서 개작살이 나는 추태를 연출한다. 이 광경을 본 오기는 식겁해서 부마 자리를 사양했고, 무후는 오기를 의심하게 되었다. 결국 오기는 초나라로 떠나게 된다.

2.5. 초나라의 재상이 되다


초나라 도왕(悼王)은 오기의 명성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선뜻 재상 자리를 내주었다. 그제서야 비로소 어머니와 피로 했던 약속을 지킨 셈이다. 하지만 오기가 재상이 된 뒤에도 어머니의 묘를 찾아갔다는 기록은 없다. 이것을 보면 끝까지 불효자식이었던 셈.
당시 초나라는 영토에 비해 국력은 약했는데, 젊은 시절부터 바라 마지않던 재상 자리에 오른 오기는 대대적인 부국강병책을 펼쳤다. 법률을 정비하고 불필요한 관직은 모두 폐지해 재정 낭비를 없앴고, 촌수가 먼 초나라 왕족과 귀족들이 '''이름값'''으로 받아먹던 봉록을 몰수해서 국고로 환원시켰다. 이런 일련의 조치로 탄탄해진 재정 덕분에 초나라는 군사력을 불리며 오기의 지휘하에 강국으로 부상했다. 오기는 이 군사력을 가지고 남쪽으로는 백월을 평정하고, 북쪽으론 진(陳)나라와 채나라를 병합했으며, 삼진(三晉)의 군사를 격퇴하고, 서쪽으로는 진(秦)나라를 쳤다. 그러자 제후들은 초나라의 강성함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졸지에 '''특권을 빼앗긴 높으신 분들은 이를 갈고 있었다'''.

2.6. 오기 가득한 최후


결국 도왕이 세상을 떠나자마자 오기를 증오하던 초나라 귀족들이 작당하고 그를 죽이려고 난을 일으켰다. 오기는 귀족들이 쏜 화살들을 맞아 부상당한 채로 쫓기다가 죽음을 직감한 동귀어진의 꾀를 내어 죽은 도왕의 시신 위로 엎드린 다음 무수히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사망했다.
당시 초나라의 법을 따르자면 왕의 몸에 해를 끼치는 자들은 사형이었고 물론 시신도 해당했다. 그 이유는 예전에 오자서초평왕[15]무덤을 파헤쳐 시체에 채찍질을 한 사건 때문이었다. 꼭 법이 아니더라도 당장 왕위를 계승한 숙왕(肅王)은 부왕의 시신을 훼손한 무리를 용납할 리가 없지만...[16] 결국 초나라 귀족 가문 중 무려 '''70여 세대'''가 처형당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오자는 결국 마지막 싸움에서도 무승부를 기록했다'라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날아간 머릿수만 보고 따지면 무승부는커녕 아예 대승이다.
물론 그가 시행한 정책들은 모조리 없어졌고 초나라의 왕족과 귀족들이 다시 특권을 회복해서 완벽한 승리는 아니었다. 이처럼 '''국가 내부가 통합되지 못하고 봉건성이 강했다는 것'''은 초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초나라의 문제로 지적된다. 즉 오기의 개혁이 실패한 결과 초나라는 한 단계 더 발전할 가능성을 잃어버렸다는 것. '''자신은 최후를 맞았지만 개혁 조치는 후대까지 받아들여진 상앙과는 정반대다.'''[17]
이 계략은 일찍이 초나라 성왕(成王)이 아들 상신의 반란[18]으로 최후를 맞게 되자 청웅탕[19][20]을 먹고 죽겠다 한 것과 제나라 민왕을 이용해 제나라 국력을 갉아먹던 소진[21]이 누군가에게 암살당해 숨을 거두면서 자신을 역적이라 발표하고 저자거리에 효수하게 하여 범인을 잡은 것과 함께 춘추전국시대의 가장 유명한 권모술수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3. 평가


위무후와 나눈 대화나 초나라 제도의 개혁, 평생 많은 전투를 치렀지만 '''불패'''를 기록한 전적, 그리고 최후의 순간까지도 지혜를 짜내 원수들에게 복수를 하는 등 결코 범상한 인물은 아니었다. 오히려 기량만 따진다면 중국사에 무수한 네임드 장수 가운데도 탑 클래스일 듯.[22]
병법가로서 명망이 높지만, 재상으로서 초나라의 정치 개혁을 실시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상앙과 같은 법가적 정치가의 면모도 지니고 있었다.[23]
그러나 가족조차 한낱 출세의 도구로 보는 비정한 행태 때문에 예나 지금이나 결코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어지간해서는 사견을 잘 안 넣는 사마천도 비정함 때문에 몸을 망치니 슬픈 일이라고 말했다.
노나라에서 위나라로, 위나라에서 초나라로 섬길 군주를 자주 바꿔온 것도 그러한 평가에 한몫한다. 하지만 춘추전국시대에 자신을 올바르게 평가할 사람을 찾기 위해 군주를 바꿨던 건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다.[24][26]
그런데 정작 정쟁에는 초연한 모습을 보였다. 부마가 되지 않은 것도 그렇고, 초나라 개혁을 위해 원한을 감수한 것도 그렇고 왕에게 고언을 아끼지 않기도 했다. 특히 뱃놀이를 하던 무후에게 위에서 언급한 말을 했던 얘기도 있고, 무후가 어전회의를 하고 나서 오기에게 '''어전회의 중에 내 주장에 이의 거는 사람이 없었다''' 며 자랑하자 "초장왕은 그 상황에서 오히려 자신에게 똑똑한 신하가 없으니 안타깝다며 한탄했기에 춘추오패가 될 수 있었다"며 자만하지 말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또한 한비자에는 이런 일화가 또 있는데, 오기가 하루는 옛 친구를 만나서 식사를 하자고 했는데, 친구가 "그래. 근데 내가 좀 볼 일이 있어서 잠깐 일 좀 보고 먹자"고 했고 오기는 "그래, 뭐 자네 돌아오면 먹지"라고 대답했는데, 저녁이 되도록 친구는 오지 않았고 오기는 끝까지 밥을 먹지 않고 기다리다가 결국 하루 종일 식사를 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오기는 사람을 보내 옛 친구를 찾아오게 했고 친구가 오자 그때서야 함께 식사를 하였다고 한다.

4. 오자병법


저서인 《오자병법》은 원래는 48편이었다 하나 , 현재 전해지는 것은 6편뿐이다. 현재 전해지는 《오자병법》의 내용은 문후와 무후와의 대화 내용을 담은 것이라 한다.
오자병법은 손자병법과 달리(적어도 현재 남아있는 6편으로 미루어 볼 때) 전략과 같은 거대 담론보다는 구체적인 용병술과 그 방법론에 그 중점을 두고 있다. 조직의 인화를 유지하고, 부대를 편제하는 구체적인 방법과 아군의 전투력을 유지하고 상대의 전투의지를 꺾고, 전투 역량을 살상하는 방법 등을 서술해 놓았다.
오자병법은 조직내에서 조직원들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나오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점술에 관한 것이다. 손자병법에서는 점술은 전쟁의 결과와 무관하므로 가치가 없다고 하였는데, 오자는 반대로 점술을 '잘 이용하면' 조직원들의 사기를 높일 수 있다고 하였다.(양쪽 다 점술을 믿지 않는 것은 같으나 활용가치에 대한 평가가 다르다.) 냉정한 것 같은 이미지와 달리 오자병법 내용 중 상당수는 조직내에서 인화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 많다. 이는 오자가 유교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비록 증자에게서 쫓겨나긴 했지만 한때 몸담았으니. 오기가 문후를 만나러 갈 때에도 선비들이 입는 옷을 입고 있어서 문후가 오기를 병법가인지 선비인지 헷갈려했다고 하며, 애당초 오기 본인부터가 스스로를 '''유생'''이라고 칭한 적도 있다.
심지어 '전장에서 패배한 자는 군법으로 엄히 처형하여 필사적인 각오로 싸우게 만들어라.'라는 문구가 심심찮게 나오던 것이 당시 병법서인데 오자 병법에는 '공을 세운 자에게 상을 주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공을 세우지 못한 자를 격려해주는 것 또한 중요하다' 라는 말까지 한다. 위에서 말한 그 냉혈한과 동일인물이 맞나 싶을 정도.
부국편에서는 5종류의 정예병을 만들면 크게 쓰일 거라 말하는 장면이 있는데, 종류는 다음과 같다.
특히 1, 2 번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정예병으로 만들면 죽음을 각오하고 싸울 거라 주장했다. 그야말로 털끝만큼의 양심이 남아 있다면 목숨을 걸고 싸우게 만드는 능력이 탁월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을 훗날 이르길 '''장수의 명령에 불길로 직행하는 자들'''이라고 한다.
또한 정치의 중요성 역시 언급한다. 일단 왕과의 대화로 내용이 채워지다보니 정치의 중요성에 대한 문답도 언급되며 아군이 우리나라의 정치가 옳고 적국의 정치가 잘못되었다고 믿게 해야 이길 수 있다는 명분 중심의 이론 또한 언급한다.

4.1. 손자병법과 연계성


손자병법》에서 잘 다루지 않은 부분도 중요시하며 다뤘기 때문에 옛날 사람들은 오자병법과 손자병법을 같이 읽었다는 이야기도 있다.[27] 위 무왕 조조가 병가를 논할 때 손오를 병칭한 예가 자주 있다.
손자병법이 주로 형이상적인 설명이 주를 이룬다면, 오자병법은 보다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가며 설명을 하기 때문에 손자병법의 설명이 구체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면 오자병법을 읽는 방식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손자병법과 오자병법의 차이를 청동기에서 철기, 전차에서 기마로 전환된 것과 연관짓는 주장이 있다.
청동기와 전차가 주력인 시절엔 군사력을 유지하는데 드는 부담이 철기와 기마 시대보다 더 컸고, 주 병력을 구성하고 있는 계층이 농민병이 아니라 왕족과 경, 대부, 사를 비롯한 상위층의 명예 전쟁 비슷한 형태였다. 그랬기 때문에 그 시대에 쓰인 손자병법은 가급적 전쟁으로 손해를 입는 것을 최대한 지양하는 모습을 보인 반면, 대량생산이 쉬워진 철기와 기마병이 주력이 된 시대에 쓰인 오자병법은 전투를 통한 상대편의 전투의지 저해와 전투역량 살상에 중점을 두게 되었다는 것이다.[28]

4.2. 충무공 이순신과 오자


오자는 이순신과 관계가 깊은데, 명량 해전 직전 이순신의 명언으로 유명한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고,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라는 구절이 바로 오자에서 인용한 것이다.[29] 그렇지만 오자 원문에 있는 표현과 이순신이 직접 한 말(정확히는 《난중일기》에 이순신이 '내가 이렇게 말했다'고 적어놓은 표현)은 차이가 있다. 이 말의 정확한 출처는 오자 제3편의 <치병(治兵)> 제4장에 나오는 대목. 오자에 나오는 원래 표현은 "무릇 전쟁터란 한 번의 실수로 시체가 되는 죽음의 땅이다. '''죽을 각오로 싸우면 살아날 수 있고 요행히 살려고만 하면 죽게 된다.'''(凡兵戰之場 立屍之地 '''必死則生 幸生則死''')"이다.
또한 저 말 뒤에 있는 ''''한 사람이 길을 막으면 능히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一夫當逕 足懼千夫: 일부당경 족구천부)' 도 오자의 말을 이순신이 어레인지한 표현. 이 말은 오자의 6번째 장인 <여사(勵士)>편에 나오는 말로 오자에 나오는 원래 표현은 일인투명 족구천부(一人投命 足懼千夫). 위무후가 오기에게 형벌과 상에 대해 물었을 때 오기가 다음과 같이 답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명량해전 때의 유명한 두 표현이 오자가 출처였다는 것은 이순신 역시 오자를 탐독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여담으로 일본에서 오자병법을 탐독해 똑같이 필사즉생 필생즉사를 강조한 인물이 있다. 바로 우에스기 겐신.

"왕께서 공이 없는 병사 5만을 출동시키면 신이 군사를 거느려 대응할 것인데, 만약 임금께서 이기지 못하면 제후에게 웃음거리를 사고 천하에서 권력을 잃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죽게 될 적 한 명을 넓은 들에 잠복시키면 천 명의 군사가 쫓되 매우 겁내고 두려워할 테니, 왜 그렇겠습니까? 그것은 갑자기 뛰쳐나와 자신을 해할까봐 그럴 것입니다. 하여, '''한 사람이 목숨을 던지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一人投命 足懼千夫).'''

오늘날 저 두 표현은 그저 '''정신력'''이나 '''근성'''만을 강조하는 표현, 혹은 의지드립으로 자주 오용되곤 하는 표현들이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 보면 저 두 표현의 원 출처는 '''병법'''이다. 이순신도 분명히 '병법에 이르기를'이라고 말하고 있다. 효과적이고 합리적인 군대 운영방식과 군사이론을 설명하고 있는 병법에서 정신력이나 근성만을 주장할 리가 없다. 저 표현들을 뽀대난다거나 정신력 강조용으로 쓰기 전에 오자에 나온 원래 의미가 무엇인지 잘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필사즉생 행생즉사'도 흔히 '전장에서는 닥치고 목숨 걸고 싸우라'는 의미로만 알려져 있는데 이 표현의 진정한 의미는 '''한번 작전을 세운 후에 그 작전 때문에 죽지는 않을까 하는 안일한 생각은 하지 말고 주저없이 작전을 실행하라'''는 의미가 진짜 의미에 가깝다.

5.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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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훈삼국전투기에서 한 컷 나오면서 패러디 되었다. '''오자'''마녀 도레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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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2,13
코에이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삼국지 10부터 등장. 통솔, 지력, 정치는 90대, 무력, 매력은 70~60대이다. 즉 무력, 매력은 제외하면 90대인 S급 고대무장. 악의에 이어 두 번째로 손꼽히는 압도적인 성능을 보유하고 있다. 전투, 내정이 모두 가능한 전형적인 출장입상형 무장이지만 잔혹한 행적이나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했던 경력을 반영한 것인지 매력은 60~70대에 속한다.
삼국지 10에서는 고대무장으로 등장하며, '''99'''/74/96/96/70에 특기가 23개. 상성이 조조와 일치하는데, 능력치도 매력을 제외하면 비슷하고, 등장과 사망도 비슷하다. 둘다 높은 통솔, 지력에 군사 특기를 가져서 당연히 S급 무장이지만 비교하자면, 오기는 은밀이 없는 대신 화시, 반목, 천문이 있기 때문에 전투시에는 조조보다 더 낫다. 다만 명사 특기가 없어서 평상시에 도적들과 만나면 맞짱을 떠야되는 단점이 있다. 그래도 무기 하나 쥐어주면 왠만큼 이길 정도의 무력이니 걱정할 정도는 아니다.
삼국지 11에서는 97/70/95/96/67 특기는 귀모로 쓸 만해 보이지만, 병과적성이 기병 빼고 올A에 S가 없는 게 흠. 그래도 능력치과 병과적성 A는 어느 정도 쓸 만하고, 화계폭약없이 불함정을 활용할 수 있다. 친애무장은 조조이다.
삼국지 DS 2에서는 능력치는 무력빼고 11과 동일하지만 그 무력이 '''80'''인지라 안 그래도 강한 장수였는데 더 강해졌다.
삼국지 12의 전법은 '''신화계'''. 능력치는 무력이 66으로 너프된 것 외에는 변동이 없다. 총합이 조조, 악의, 오다 노부나가에 비해서 낮으나 이들보다 지력이 휠씬 높다. 특기는 상재, 경작, 병심, 연병, 변설, 수련, 공성, 군사, 귀모. 병종은 창병. 친애무장은 조조가 빠지고, 고증으로 초도왕과 친애무장이다. 그의 저서인 오자병법을 소지한다.
삼국지 13에서도 유감없이 등장. 능력치는 통무지정 94/66/95/96으로 전형적인 군사. 전수특기는 귀모에 중신특성도 신산귀모. 더 설명이 필요없다. 적성은 A/B/A로 기병을 제외한 남은 병종에서는 준특화. 전법도 종횡기략에 공격+방어+사기+기동저하+특공봉인을 해버리는 사악한 전법. 주로 궤주하는 적 부대 격파에 특화되어 있다. 특기도 상업3 / 문화3 / 훈련8 / 순찰5 / 설파7 / 교섭8 / 견수8 / 수영6 / 귀모8 로써 육전이든 해전이든 어디서든 다방면으로 활약가능하다.
여담이지만 시리즈 내내 조조와 궁합이 좋아서 거의 대부분 조조에게 등용되는 게 태반이다. 영웅집결에서 곽가와 정욱이 재야로 등장하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또한 일본의 삼국지 해석에서는 조조를 '반유가적'인 인물로 많이 묘사하는 편인데, 정작 오기는 유가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병법가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일본에서는 오기와 유가의 연관성에 대해 그다지 주목하지는 않는 듯하다.
[1] 사실 30명이나 죽였기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가면 사형이 확정이다.[2] 거기다 증삼은 공자의 제자이면서 효자로도 유명한 사람이었다.[3] 아래에 서술된 오기가 재상 전문(田文)을 털려다가 역으로 털린 일화는 《사기》에만 기록되어 있다.[4] 진 문공의 19년 유랑길을 보좌한 10인의 신하 중 하나.[5] 진 문공은 조(曹)나라의 희부기(僖負羈)라는 사람의 후대를 받은 적이 있어서, 나중에 조나라를 침공할 때에 희부기에게만은 크게 예우를 하고 상까지 내렸다. 그런데 이때 10인의 신하 중 위주(魏犨)와 전힐이 질투 나서 고의로 그랬는지는 몰라도 희부기의 집에 방화를 해서 희부기가 사망했다. 전힐은 방화하다가 실수로 자기도 타 죽었다고도 하고 , 진 문공의 지엄한 명에 의해, 전투가 완전히 종료된 후에 처형되었다고도 한다. [6] 저(疽). 등에 나는 부스럼, 종기.[7] 애초에 사마천 역시도 기록하면서 "카더라이기는 하지만, 이런 말도 있다"는 수준으로 적은 거라 나름 최선을 다하여 중립성을 지킨 거라 할 수 있다.[8] 사기사건 사례만 보더라도 처음부터 사기치는 경우는 없고 인간적인 면을 보이며 피해자의 약점을 긁어준 다음 경계심이 풀어지면 그때부터 작업에 들어가서 사기치는 경우가 대다수이다.[9] 또한 스탈린이나 프리츠 하버 같은 현대의 사람과 일대일 비교하는 건 아니라는 서술도 있었는데, 현대의 사례는 "인간의 면모가 생각 외로 복잡하다"는 예시로 든 것이다. 고대나 지금이나 사람은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이지 다른 동물이 아니다.[10] 이것이 기원전 389년에 벌어진 후세에 음진(陰晉) 혹은 양진(陽晉)의 싸움이라고 불리는 전투이다. 서하에 말뚝 박고, 이를 전진기지 삼아 지속적으로 진나라를 압박하는 위군을 축출하기 위해 대규모로 군사를 일으킨 진군을 오기가 격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위군이 5만의 병력으로 10배의 병력을 물리쳤다는 것에서 온 듯. 당시 진나라는 50만을 동원할 수 있을 만한 상황이 안 되었다. 구체적 숫자가 기록된 것은 오자병법인데, 과장이 섞여있긴 하겠지만 이후로 관서가 텅텅 비었다고 할 정도로 진나라는 엄청난 타격을 입고 빈사상태에 빠진다.[11] 맹상군의 이름과 한자까지 같아서 맹상군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는데 다른 사람이다. 맹상군은 제나라 사람이고 이 사람은 위나라의 대신으로 위나라 문후의 스승이었던 전자방(田子方)의 아들이다. 여씨춘추에는 상문(商文)이라고 적혀 있다.[12] 이에 대해 오기가 타국 출신인 것을 거론하며 오기가 재상이 되는 것에 대해 여론이 별로 좋지 못했다는 분석이 존재한다.[13] 과거 춘추전국시대는 타국 출신의 인재들이 유명세를 떨친 시대였지만 현대사회 처럼 타국 출신인 인물들이 자국에서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에 대해 여론이 결코 긍정적이지 않았던 것은 매한가지였다. 타국의 인재에 긍정적이였다고 인식되는 진나라조차도 이후 승상이 되는 이사가 장문의 글을 써서 진시황에게 올려 그것이 왜 부당한지에 대해 변론을 올리기도 했다.[14] 전문은 재상이 되면서 오기를 밀어낸 것으로 인식되지만 오기를 알아보고 오기를 뒷바침해주던 인물이기도 했다.[15] 도왕은 평왕의 5대손이다.[16] 사실 초나라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일지라도 이 경우엔 짤없이 중형이다. 현재도 왕이 통치하는 국가들은 왕의 시신을 훼손하면 무조건 중형이다.[17] 진혜문왕이 얼마나 뛰어난 군주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비록 상앙을 증오해 수구세력들인 귀족들과 손을 잡아 왕위에 올라 상앙을 죽였지만 그러한 수구세력들이 원하는 과거로의 회귀가 아닌 진심 진나라를 위한 것이 뭔지를 파악해 사람은 미워해도 상앙의 법치개혁만큼은 크게 인정했다는 것이다[18] 원래 성왕은 포악하고 잔인하다는 상신을 태자로 삼지 말라는 신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상신을 태자로 삼았었다. 하지만 뒤늦게 후회하고 상신을 내쫓고 다른 아들 직을 태자로 삼으려고 했는데 상신은 고모 강미를 분기시키고 진상을 알아낸 다음 반란을 일으켰다.[19] 곰 발바닥 요리를 말하는데 진흙에 싸서 굽고 약재에 한번 삶고 다시 진흙에 굽고 하는 식으로 3일은 굽고 쪄야 한다. 성왕이 반란을 일으킨 상신에게 곰발바닥을 먹고 죽게 해달라고 한 건 상신을 제압할 근왕 세력이 도달할 시간을 벌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간파한 상신은 성왕에게 죽음을 강요해 결국 성왕은 목을 매어 눈을 부릅뜨고 최후를 맞았다. 상신은 목왕으로 즉위했고, 목왕은 성왕이 정사를 어지럽혔다는 이유로 영왕(靈王)이라는 시호를 내렸을 때, 눈을 감지 못하자 성왕을 추증했더니 눈을 감았다고 한다. 이 영왕이라는 시호는 성왕의 고손자 비위가 형제였던 공자 기질(公子 棄疾)에게 쫓겨나 자살한 다음 받게 된다. 참고로 일찍이 성왕은 정나라에 갔을 때 정나라 문공에게 시집갔던 여동생 문미가 문공과 함께 딸들을 데리고 왕림했다. 문공은 정성을 다해 성왕을 대접했는데 초나라에 돌아갈때 문미의 두 딸, 즉 조카들을 데리고 가 버렸다. 이에 정나라의 한 대부는 성왕이 배은망덕하다면서 패권도 누리지 못하고 제명대로 살지 못할 거라고 했었다.[20] 참고로 상신은 이후 초 목왕이 되었고, 그 아들은 바로 '''춘추오패 중 하나, 초 장왕이다'''.[21] 소진은 연나라 역왕의 어머니와 간통했는데, 역왕은 알면서도 모른 척 했다. 두려워진 소진은 빠져나갈 목적으로 제나라에 자신을 보내주면 제나라 국력을 갉아먹어서 멸망시키겠다고 호언장담했다. 역왕이 허락하여 소진은 제나라에 가서 '''대륙판 도림'''이 되어 민왕에게 사치와 대규모 토목공사를 장려했다.[22] 하지만 <이위공문대>에서 이정은 전술면에서 '''"손무가 최고이며 오기는 그에 미치지 못한다"'''며 그를 디스한다.[23] 오기는 공자의 제자였던 증자를 스승으로 삼은 유가 출신이다. 하지만 증자의 문하에서 출문당하였고 이후 군사전략을 연구하였고 실제로 이것으로 공을 세웠고 오자병법도 저술한 병가이기도 하며 초나라에서는 법가적인 변법을 대대적으로 주도한 법가 이기도 하다.[24] 오히려 후대의 통일왕조 시대때에는 상상도 못했던 이직프리랜서, 자기 PR이 춘추전국시대에서는 흔한 일이었다.[25] 공자 맹자와 같은 그 '자'가 맞는다.[26] 춘추 전국시대 대표적인 충신이자 협객으로 유명한 예양만 하더라도 자신을 올바르게 평가해 줄 주군을 만나기 위해 두 번이나 주군을 바꾼 바 있다. 마지막에 모신 주군이 비로소 자신을 알아주었기에 최후까지 충절을 지킨 것이지, 그렇지도 않은 자들에게까지 그걸 지킨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예양으로부터 그것을 들은 조양자도 예양을 '''예자'''[25]라 부르기까지 했으니 확실히 당시에는 '나를 알아봐주는 사람이 진정한 주군'이라는 인식이 팽배해 있었음이 확실하다.[27] 오죽하면 사마천이 '''"군사문제로 이빨 깐다는 놈들은 집집마다 손자 오자 다 갖춰놓았으니, 자세한 건 이하생략"'''이라고 할 정도. 한비자 역시 집집마다 손오병법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28] 철기 시대가 되면서 보병 중심의 병법을 썼다는 주장도 있다. 청동기 시대에는 전차가 주력이고 보병은 들러리 수준이었지만 철기 시대가 되면서 보병의 비중이 더 커졌고, 그런 시대에 쓰인 오자병법은 병졸들을 다루는 방식을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오자병법에는 병졸들을 달래는 방법이나 제대하는 군인들을 다루는 방법, 전공이 많은 자와 없는 자 양쪽 모두를 격려하는 방법 등이 구체적으로 언급된다.[29] 하지만 오기의 인지도가 손무에 비해 낮아서 이순신의 저 말이 병법서에서 인용했다는 건 알면서도 오자병법에서 인용한 것이라는건 모르는 사람들도 있다. 심지어 손자병법에 나온 말로 잘못 아는 사람도 있을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