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오스 왕국

 



'''라오스 왕국'''
'''ພຣະຣາຊອານາຈັກລາ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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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국장
1947년 ~ 1975년
위치
라오스
수도
비엔티안, 루앙프라방[1]
정치체제
입헌군주제
역대 국왕
1대: 시사방 웡
2대: 사방바타나
국가원수
국왕
언어
라오어
민족
라오스인
종교
불교
통화

성립 이전
프랑스령 라오스
멸망 이후
라오 인민민주공화국
1. 개요
2. 역사
2.1. 성립 과정
2.2. 내전
3.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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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라오스에 존재하였던 왕국으로, 정치이념은 자유주의 우파 성향이다.

2. 역사



2.1. 성립 과정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괴뢰왕국은 해체됐고, 이에 따라 독립파와 프랑스 복귀파가 싸웠다. 독립파들은 '라오이싸'를 결성한 후 임시정부를 수립해 북베트남과 연계하여 게릴라전을 시작했다. 1946년에는 종주국인 프랑스가 돌아옴에 따라 라오이싸 지도부는 태국과 베트민으로 망명갔고, 라오스인들은 프랑스를 반가워하지 않았다. 1947년 프랑스는 베트민과의 전쟁에 집중키 위해 유화책을 개진하여 라오이싸를 달랬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내의 자치령인 라오스 왕국으로 승격시켜 외교, 재정, 군사권을 뺀 일부 주권을 인정했다. 또한 루앙프라방의 왕인 시사방 웡을 라오스의 왕으로 승격시켰으며, 쑤완나 푸마와 쑤파누봉 왕자 등 지도자들이 귀국했다. 1953년 10월 22일에는 독립이 정식으로 승인된다.

2.2. 내전


1950년 8월에 쑤파누웡 왕자가 '빠텟 라오'를 결성해 북부 지방을 장악했고, 이복형인 쑤완나 푸마 총리의 우파내각과 왕실이 대립에 가세해 싸움을 지속했다. 1954년 4월 제네바 회담에서 세 분파는 미국과 소련의 압력을 받으며 중립안을 받아들였으나, 디엔비엔푸전쟁으로 프랑스가 지면서 중립안은 휴지조각이 되어 싸움은 더 커졌다. 1964년에는 베트남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미국, 베트남 공화국 등의 국가들이 라오스 정부를 더욱 더 지원하게 되었으며, 전쟁의 불길은 라오스로 퍼졌다. 미군은 빠텟 라오와 호치민통로를 없애려고 라오스 전 국토를 폭격해 라오스 국민 75만명이 보금자리를 잃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미국은 빠텟 라오와 호치민통로를 완전히 부수지 못했으며, 왕국군-정부군-공산군 3개 군대의 전투만 격렬해졌다.
1970년대 들어 빠텟 라오에 정부군이 밀리자, 1973년 1월 파리협정으로 미군이 철수할 즈음 정부-관군 양측이 협상을 했고, 이에 따라 라오스에 머무르던 태국군과 미군이 나가고 평화협정을 맺었다. 그 동안 우익측은 쑤완나 푸마 총리를 중심으로 민족연합 임시정부를 만들고, 빠텟 라오도 쑤파누웡 중심으로 민족정치자문위원회(NPCC)를 만들었다. 쑤파누웡은 왕정을 유지하면서도 언젠가는 베트남처럼 종전의 우익정부를 없애서 적화통일하려는 장대한 야심을 지녔고, 1975년 베트남 공화국이 베트남 민주 공화국에 항복하자 국왕이 퇴위하고 쑤완나 푸마 총리가 사임하여 사실상 빠텟 라오가 승리했으며,[2] 그해 12월 1일 왕정이 폐지되고 공산국가인 라오인민민주공화국이 수립된다.

3. 출처



[1] 라오스 왕실의 궁전이 위치한 곳.[2] 이원복 교수 교양만화 <가로세로 세계사> 2권에선 이를 '공산통일'이라 표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