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인도차이나 연방'''
'''Fédération indochinoise'''

프랑스 식민제국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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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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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7 ~1953 /1954[1]
위치
인도차이나 반도 동부 지역
수도
사이공 (1887~1902)
하노이 (1902~1945)
사이공 (1945~1954)
공용어
프랑스어, 베트남어
라오어, 크메르어, 중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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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지도.
1. 개요
2. 역사
2.1. 베트남 독립운동의 발아
2.2. 베트남 국민당 결성
2.4. 몰락
3. 구성
4.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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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청프전쟁을 계기로 사실상 프랑스의 속국이 된 응우옌 왕조와 프랑스령 코친차이나, 라오스, 캄보디아를 합쳐서 만든 프랑스령 식민지 연방 지역이다.
조선 총독과 달리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총독은 문관도 부임했고, 무관이 올 경우도 역시 일본 육군 장군(대장)이 대세인 조선 총독에 비해 이쪽은 프랑스 해군 제독들이 많이 취임한 것이 특징이다.

2. 역사


초대 베트남 총독인 사르네 제독은 정치를 전혀 모르는 인물이었고, 당시 코친차이나의 상황은 후에 조정이 임명했던 관리나, 조세 명부, 관청 문서 등이 전혀 남아있지 않은 최악의 상황이었다. 결국 실질적인 통치가 시작된 것은 1863년 그랑디에 제독이 부임한 후였다. 그랑디에 제독은 5년간 지배하면서 조세제도를 개혁하고, 공공사업을 벌이는 한편 통역 학교를 설립하는 등 통치의 기초를 다졌다. 본격적인 통치는 인도차이나 총독부를 설립한 직후였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총독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1897년에 부임한 폴 두메르다.
폴 두메르는 강력한 동화 정책과 본국 중심의 식민지 정책을 단행하였다. 당시 적자 상황이었던 인도차이나 경영을 위해 예산을 높이 책정하고, 이를 조달하기 위해 인두세를 500%, 토제세를 150% 인상하고 각종 간접세를 신설하기 시작했다. 우선 술에 관한 법률을 개정하였다. 모든 술 제조와 판매에 관한 권한을 프랑스 기업인 퐁텐느에 부여하고, 마을마다 소비량을 할당하여 강제로 술을 마시게 하였다. 집에서 술을 마시는 것은 금지되었고, 술을 만들다 발각되면 감옥에 가거나 재산이 몰수되었다. 이 조치로 퐁텐느는 자본금 350만 프랑을 투자하여 연간 200에서 300만 프랑의 이익을 거둘 수 있었고, 그에 비례하여 베트남의 술값은 1902년 5센트이던 것이 1906년에는 29센트로 4년 사이에 6배 가까이 폭등하였다. 베트남인들은 명절마다 집에서 담은 술로 축제를 벌이던 관습이 있었다. 따라서 총독부의 술 제조 금지령은 베트남 생활 문화의 핵심을 파괴한 행위였다.
이후 폴 두메르는 소금을 전매하였고, 소금 값은 10년 만에 5배로 상승하였다. 거기에 아편마저 독점 판매하여 폴 두메르가 물러났을 때 인도차이나 총독부의 아편 수입은 취임할 때의 2배인 150만 프랑이었고, 아편 흡연자 역시 2배 이상으로 늘어있었다. 게다가 아편 재배와 무역은 식민 당국이 지역유지와 기업들을 통해 반강제적으로 확산 시킨 것이기 때문에 아편전쟁의 여파를 보며 기존 성리학적 가치관에 따라 마약에 취해 해롱해롱거리는 걸 극히 죄악시 하던 베트남인들의 가치관에 큰 모욕감을 주었다. 바로 다음 시기 총독부 역시 토지조사 이후 높아진 세금 + 소작료, 술 제조 금지, 소금, 담배, 인삼의 전매 등으로 마구 식민지인들을 쥐어짜게 된다.
폴 두메르가 취임 전에는 적자였던 인도차이나의 예산을 흑자로 돌렸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는 인물들도 있는 것 같지만, 전체 예산의 25%를 술, 아편, 소금의 전매로 조달했다는 문제점도 안고 있었다. 폴 두메의 가장 큰 악정은 베트남의 토지를 프랑스에서 이주해 오는 기업과 사람들에게 나눠주면서 베트남 민중들의 생활 기반을 빼앗은 것이다. 이 결과 코친차이나의 토지 중 총 36만 헥타르가 프랑스인 이주자에게 불하되었다. 여기에 소수의 대지주가 동참하면서 토지 집중은 심화되었고, 전체 국민의 90%에 달했던 농민층의 양극화와 극빈층의 붕괴를 초래하였다. 이런 악조건은 나중에 인도차이나 공산당 조직이 결성되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게다가 프랑스의 식민통치에 관여한 프랑스인들은 베트남을 지배할 때 베트남의 전통적인 유교 사상을 말살하기 위해서 베트남어를 로마자로 표기하는 국어(꾸옥응으)를 사용하게 하였다. 하지만 꾸옥응으가 베트남 독립운동에 기여한 것도 적지 않았다. 우선 꾸옥응으 자체는 17세기 초에 기본적인 표기법이 만들어진 것이었고 그 전에 쓰이던 쯔놈은 매우 불편했다. 한국으로 치자면 꾸옥응으는 한글(훈민정음)이고, 쯔놈은 이전에 쓰이던 이두향찰 수준이었다. 오히려 프랑스 정부는 베트남어 알파벳 표기법 수준이 아닌 프랑스어 전용을 계획하고 있었고, 이에 베트남인들이 반발하자 차라리 꾸옥응으를 쓰자고 한 것이다. 꾸옥응으의 보급 이후 인쇄나 출판이 활발해지면서 계몽운동은 더욱 용이해졌고, 베트남인들의 저항의식은 더더욱 확산될 수 있었다.
꾸옥응으와 비슷한 결과를 낸 것으로 프랑스의 교육 정책도 있었다. 프랑스는 식민 지배가 베트남의 '문명화'를 위한 것이라고 선전하고, 베트남의 전통적인 유교식 교육 대신 프랑스식 교육을 강요하였다. 그런데, 이 프랑스식 교육에는 프랑스의 계몽 사상 및 프랑스 혁명 등의 내용도 당연히 포함되었다. 이런 프랑스식 교육을 받은 베트남인들은 독재 비판, 시민 주권 등의 지식을 얻으며 반식민주의 사상과 저항의식을 더더욱 고취시킬 수 있었다.
라오스의 경우에도 응우옌 왕조처럼 루앙프라방 왕국이란 괴뢰 왕국과 왕이 존재했으나, 당연히 실권은 프랑스 측에 있었다. 그러나 라오스는 농사를 짓기에는 환경도 그리 좋지 않았고[2], 중국 진출에도 큰 도움이 되지 않았기에 프랑스 당국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소외당했고, 당국은 상대적으로 돈이 되는 아편 재배를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게다가 교육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 평민을 위한 교육 기관은 사찰이 전부였다.
캄보디아 역시 라오스와 사정은 비슷하여, 고무, 옥수수 등의 플랜테이션 농법이 주된 경제 수단이었다. 근데 그마저도 대공황 이후 폭망.

2.1. 베트남 독립운동의 발아


1885~1888년까지는 '껀브엉(勤王) 운동'[3]이라고 하여 응우옌 왕조를 도와서 국토회복을 이루려는 독립운동이 있었으나, 당시에는 식민침략 열풍이 거셌던 터라 '그들만의 리그' 취급받았다. 상대적으로 교육 수준이 낮고 당국의 관심도 적었던 라오스, 캄보디아와는 달리 교육 수준도 상대적으로 높았고 착취가 가장 심했던 베트남에서는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독립 운동의 세가 빠르게 커져갔다. 또 베트남 국민 입장으로 보면 인간적 유교 왕조가 야만적인 프랑스 앞에 무릎을 꿇었다는 분노심도 한 몫했다.
프랑스의 침략 초기부터 계속된 게릴라식 무장 투쟁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면서 두 가지 움직임이 새롭게 등장하였다. 하나는 특정 지역에만 국한되었던 투쟁을 전면적이고 조직적인 투쟁으로 발전시켜 나갈 것을 지향하는 움직임으로 다시 국내의 모든 저항 세력을 규합해서 무력 투쟁을 벌이자는 부류와 국제 사회의 지원을 기대하는 부류로 나뉘었다. 다른 움직임은 프랑스 식민 지배는 물론이고 응우옌 왕조를 비롯한 봉건체제 자체를 타도 대상에 포함시키는 형태였다.
여기에 프랑스에 대한 저항 의식이 가미 되면서 초기 베트남의 민주주의와 독립운동은 판보이쩌우(Phan Bội Châu, 潘佩珠)와 판쩌우찐(Phan Châu Trinh, 潘周楨)이 주도했다. 판보이쩌우가 군주제를 옹호하고 외세의 힘. 특히 일본 제국의 힘을 빌려 프랑스를 물리치려는 생각으로 일본으로 유학가자는 동유운동을 전개한 반면[4], 판쩌우찐은 군주제를 부정하고 프랑스의 도움으로 근대화를 이룩하려 하였기 때문에 군주제를 비판하는 글을 발표하고, 프랑스를 도와서 개혁을 이루려는 모습을 보여주게 되는 것이다. 그 외에 옛날 유교사회로 돌아가려는 복벽주의 독립세력들도 있었다.

2.2. 베트남 국민당 결성


이렇게 분열된 운동을 하나로 규합시킨 계기가 된 인물이 응우옌타이혹(Nguyễn Thái Học, 阮太學)이었다. 응우옌타이혹은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하노이의 인도차이나 대학을 다니면서 사회주의에 의한 사회개혁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하였다. 1926년에는 친구들과 남 동 서사를 설립해서 유럽에서 발생한 사회 개혁 주장을 게재한 출판물을 제작, 판매하였고, 1927년에 지지자를 모아 무력 혁명을 통한 베트남 독립을 위하여 베트남 국민당을 창설한다. 이것이 베트남 국민당 운동이다.
베트남 국민당은 1929년에 당원수가 1500여명에 이를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였지만, 하노이에서 발생한 프랑스인 바쟁 살인 사건의 주범으로 지목되면서 인도차이나 총독부의 탄압을 받았다. 상황을 타개 하기 위하여 1930년 엔 바이에 위치한 프랑스 군 막사를 공격하면서 무장 봉기를 일으켰으나, 프랑스군의 반격으로 결국 실패하였다. 이 결과 몇천명의 당원이 체포되고, 응우옌타이혹은 사형에 처해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베트남의 독립운동은 민족주의, 비공산주의 계열에서 공산주의 계열의 주도로 바뀌게 된다.
그리고 이를 주도한 베트남 근대사 최고의 영웅 호찌민의 지휘로 베트남 민족주의 세력은 공산주의의 세력의 영향력 속으로 규합된다.

2.3. 제2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중 1940년 비시 프랑스페탱 정권이 나치 독일에 항복하자 일본 제국은 이 기회를 틈타 대다수가 유럽국가의 식민지였던 동남아시아로 세력을 확장시켰다. 그 명분은 당시 일본에 저항하던 중국을 압박하는 것이었고, 그 과정에서 비시 프랑스를 압박하여 거의 강제로 허락을 받아 최대 25,000명의 인도차이나 파견군을 베트남에 진주시켰다.
1941년 말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아돌프 히틀러는 일본이 연해주를 공격하여 전쟁 수행에 도움을 주기를 원했기에, 일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비시 프랑스 정부를 압박하였다. 이에 따라 25,000명의 파견제한이 사라졌고, 인도차이나의 군사시설을 마음껏 이용할 수 있으며, 인도차이나에서 생산되는 물품을 마음껏 수탈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상 프랑스 총독부와 일본군 사령부 간의 이중권력이 생긴 셈이다. 공납을 프랑스 따로 일본 따로 바쳐야 하니 주민들에 대한 수탈은 더욱 심해졌고, 이것이 독립운동이 확산되는 계기를 가져온다.
1941년 베트남 공산당은 독립운동 조직인 베트남독립동맹(Việt Nam Ðộc Lập Ðồng Minh Hội, 약칭 Viet Minh)을 결성하고, 호치민이 지휘를 맡았다. 공산당에 의해 창건되었지만 성향에 관계없이 조직원을 받아들여 1943년쯤 가면 베트남 내에서 가장 활발한 독립운동 세력이 된다.
1944년 전세가 불리해져 일본군이 필리핀에서 패망하자 일본 제국 남방군 사령부를 사이공으로 옮기게 되면서 인도차이나 지역의 중요성이 커졌다. 그러나 비시 프랑스 정부가 몰락하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총독부는 자유 프랑스 쪽에 갈아타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이에 불안감을 느낀 일본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총독부를 폐지시키고 행정권까지 장악한다. 그리고 각 지역의 명목상 군주들을 수반으로 한 괴뢰국들(베트남 제국, 라오스 왕국, 캄보디아 왕국)이 성립된다. 이에 자유 프랑스샤를 드골은 식민지 회복을 위해 라오스 지역의 민족 운동을 적극 지원한다(...).
태평양 전쟁 과정에서 일본군에게 엄청난 식량 수탈을 당하면서 1945년 초 인구의 10%에 가까운 '''200만명이 굶어죽는 대기근'''을 겪으면서 일본에 대한 저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일제의 쌀 수탈로 200만명 넘게 아사한 1945년의 베트남

2.4. 몰락


프랑스는 1945년 끝물인 일본의 침략에 무릎을 꿇었다. 당시 프랑스군에는 베트남인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계속되는 핍박에 질려 있었다. 이들은 일본군에게 투항[5]했고, 프랑스군이 어디있고 무엇을 하는지에 대한 정보를 일본측에 제공하였다. 이는 프랑스가 참패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6] 더구나 연합군 파리 탈환 후 독일로 망명한 비시 프랑스 정부가 1945년 4월에 완전히 와해됐고, 더군다나 바오다이는 프랑스를 적대하는 일본군에게 협력했다. 이 사이에 일본군의 명호작전에서 베트남인들이 프랑스군에 대한 정보를 넘겨준 데다 베트남인이 대부분인 프랑스군에서 사기가 낮을대로 낮은 베트남인들이 일본군과 제대로 싸울리 만무했다. 일본에게 프랑스가 무릎을 꿇은 이 사건은 동남아 국가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고, 이는 베트남을 포함한 동남아 국가들의 독립투쟁을 더 촉발시켰다.
여기에 절대적으로 보이던 프랑스가 일본에 굴복했다는 것부터가 베트남의 독립 투쟁을 더욱 고무시켰고, 호치민과 인도차이나 공산당이 중심이 된 가운데 인도차이나 공산당과 그 전위조직, 베트남 문화 강경 지지파, 베트남 국민당(VNQDD)의 일부세력, 군소집단 및 중국으로 망명한 소수의 개인들이 참가하였다. 이후 모든 정치활동은 베트민의 이름으로 행하여지고, 공산당은 뒷전으로 물러나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후에 군대 조직도 완성되는데, 그 중에서 베트남 해방군 선전대가 월맹군으로 발전하였다. 결국 일본이 항복하기 직전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민이 봉기하면서 일시적으로 베트남을 해방시켜 베트남 민주 공화국이 성립되게 된다. 베트남 민주 공화국은 다시 자신들을 지배하려는 프랑스에 맞섰고, 결국은 프랑스와 베트민 사이에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반면 남베트남은 일본 패망 후 프랑스인들이 억류된 상태에서 권력 공백에 돌입했다. 승전국들은 중화민국군에 일본군 잔당 처리를 위해 남베트남 지배를 맡겼는데, 중화민국은 프랑스인들을 풀어주지 않은 채 호찌민의 공산화에 소극적으로 대응하면서 정치적 혼란으로 치달았다. 이에 중화민국군은 프랑스인들을 풀어주면서 지배권을 프랑스에 넘겼고, 돌아온 프랑스군은 다시 베트남을 다스리려 했다가 국제 여론의 비난을 받았다. 이에 프랑스 측은 1949년 베트민이 장악하지 못한 남부 베트남을 베트남국으로 형식적으로 독립시켰으나 사실상 프랑스의 괴뢰 국가였다. 반면 베트민은 주민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유리한 위치를 점했으며 1949년에는 국민당을 몰아내고 중국대륙을 통일한 중화인민공화국의 지원까지 받으면서 프랑스를 더욱 몰아붙였다.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로 베트민에게 패배하였고, 제네바 합의에서 베트남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고 그해 10월 군대를 철수시켰다.
한편, 일본이 패망하자 라오스에서는 독립할지 프랑스 식민지로 돌아갈지를 둔 갈등이 있었는데, 독립파가 라오 이싸라(자유라오당)이라는 정당을 창당해 활동을 시작했으며, 베트남 민주 공화국과 연대하였으나 프랑스의 식민 통치가 재개되자 지도부는 태국 등으로 망명갔다. 라오스-베트남 간 국경 지대를 중심으로 쑤파누웡 주석이 이끄는 빠텟 라오당(파테트라오) 등이 게릴라 투쟁을 벌여나갔다. 이후 1949년 라오스는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보장받았고, 1953년에는 독립하였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이후 프랑스군이 완전 철수했다.
노로돔 시아누크 캄보디아 국왕은 일본의 힘을 빌려 독립하려던 작전이 실패한 후로도 꾸준히 독립 운동을 벌였고, 1949년에 다시금 독립을 선언하였다. 프랑스로부터 온전한 독립을 보장받게 된 건 1953년. 그리하여 캄보디아의 독립을 승인하여 모든 구성국이 독립하였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해체된 것은 제네바 합의 직후인 1954년 7월 21일이다.
독립 이후 프랑스 정부의 영향력은 사실상 사라졌지만, 민간 등에선 심리적으로 프랑스에 대한 두려움 등이 꽤 오래 남아 있었다. 베트남 전쟁 종전 후, 탈출하지 못한 이대용 공사 등 주월한국대사관 직원들이 대사관 내 식량이 떨어지자 외부에서 구매해 올 계획을 세웠는데, 한국 국적자임이 탄로나면 사로잡힐 것을 우려하여 고민하던 중 누군가가 "베트남 사람들은 프랑스인들한테 하도 당해서, 지금도 프랑스인들을 무서워 한다. 트럭에 프랑스 국기를 꽂고 다니면 아무도 손을 못 댈 것이다."라는 제안을 했고, 실제로 프랑스 국기를 단 트럭이 지나가자 아무도 시비를 걸지 않고 순순히 비켜 주어, 무사히 식량을 구매해 돌아오는 데 성공했다는 일화도 있다. 일화 자체는 사실이지만 그 내용은 사실과 다른데 베트남 사람들이 프랑스인들을 무서워해서 시비를 걸지 않은게 아니라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패한 후 프랑스는 베트남에 대해 중립을 지켰고 베트남 전쟁에서도 이를 그대로 유지했다.[7] 따라서 굳이 중립국인 프랑스에 대해서 베트남이 시비 걸지 않은 것이다. 이건 크메르 루즈가 집권한 캄보디아도 마찬기지였다.

3. 구성




4. 출처


  • 먼나라 이웃나라 시즌2(지역/주제편): 동남아시아, 천년 문명의 신비에서 21세기 변화와 개혁의 주역으로 - 이원복 글/그림. 김영사. 2018. p100~104.


[1] 모든 구성국이 독립한 것은 1953년이지만 1954년 공식적으로 해체된다.[2] 물론 현대 라오스의 농업은 농업기술의 발달로 인해 프랑스 치하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나아진 편이다.[3] 한국 세계사 교육 과정에서는 한국식 한자 독음으로 그대로 읽어 '근왕 운동'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조타'를 '찌에우다'라고 베트남식으로 가르치는 것과는 정 반대.[4] 판보이쩌우는 러일전쟁 시기만 해도 일본에 대해 호의적으로 봤으나, 이후 일본의 제국주의 본성을 알게되면서 철저한 반일주의자로 굳혔다. 동유운동에 이어, 1912년 중국의 신해혁명을 보면서 그는 베트남 광복회를 조직해 공화주의를 표방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나, 프랑스 경찰에 체포되어 평생 구금당하게 된다.[5] 이들 사이에서는 프랑스에게 핍박을 당하느니 차라리 같은 동양인 일본에게 투항하는 것이 나을 거라고 생각하는 심리가 있었다고 한다.[6] 이것을 일본에서는 명호작전(明号作戦)이라고 한다.[7] 프랑스는 굳이 따지면 남베트남과 우호적이었지만 남베트남 측에 파병하지는 않았다. 미국이 파병을 요청하자 미국을 비난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