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오넬 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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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onel George Logue, CVO. 1880. 2. 26 ~ 1953. 4. 12.[1] 호주 출신의 언어치료사이자 배우로 한국에선 킹스 스피치에서 제프리 러쉬가 분한 역할로 잘 알려져 있다. 조지 6세의 말을 더듬는 장애를 치료했다.
호주 남부의 애들레이드(Adelaide)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에드워드 로그는 아일랜드 더블린 출신으로, 1850년에 호주에서 로그 양조장을 차렸다. 아버지 조지 에드워드 로그는 할아버지의 양조장에서 경리일을 했으며 나중엔 호텔을 운영하기도 했다. 목소리가 좋은 탓에 웅변술을 배웠으며 1911년부터 퍼스에서 연기와 웅변술 등을 가르쳤다. 퍼스의 YMCA 등에서도 일했는데 대전쟁[2] 후에 돌아온 호주 출신 참전용사들이 포탄 충격(PTSD)으로 말더듬 현상에 시달리자 호흡법을 포함한 운동 치료와 유머, 인내 등을 통한 로그 특유의 치료법으로 이들을 치료하였다. 1924년에는 아내와 세 아들을 데리고 영국 런던으로 이주했다. 표면상으론 휴가라고 했지만 영국에 간 뒤에 1926년에 할리가 164번지에 웅변술 학원을 차렸다. 하지만 당시엔 언어치료란 개념이 생소했기에 한동안 생계를 위해 연극 배우 일도 겸했다.
라이오넬에게 치료를 받고자 당시 요크 공이었던 앨버트 왕자, 뒷날의 조지 6세가 학원을 방문했다. 로그는 이러한 부유한 고객에게 가난한 고객이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보조금을 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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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오넬과 아내 머틀. 머틀은 1945년에 세상을 떠났다. 라이오넬은 1944년에 로얄 빅토리아 훈장 3등급장[3] 을 받았으며 1953년에 사망했다. 호주 평민 출신의 장례식치곤 예외적으로 여왕인 엘리자베스 2세와 대비인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이 대리인을 보냈다.
손자 마크 로그는 할아버지의 서간 등을 정리해 킹스 스피치란 책을 펴냈고 영화의 원작이 됐다.
조지 6세는 당시 앨버트 왕자로 조지 5세의 차남이었고 왕세자는 장남인 웨일스 공 에드워드 8세였다.1925년 10월 31일에 앨버트 왕자는 영국 박람회에서 연설을 맡았는데 화자나 청자나 다 괴로운 경험이었다고 한다. 왕자는 이 일로 상당히 고심했고 1926년에 처음으로 로그를 만났다. 로그는 왕자의 후두와 횡격막이 잘 작용하지 않는다고 진단했고 매일 한 시간씩 발성 연습을 시켰다. 그의 도움으로 왕자는 1927년에는 별다른 말더듬 없이 연설을 할 수 있게 되었다. 1930년대와 1940년대에도 로그는 조지 6세와 같이 다니며 잰말놀이(tongue-twister)[4] 를 써서 왕자의 리허설을 도왔다. 로그는 왕의 연설문을 교열해 발음하기 어려운 단어는 같은 뜻의 다른 단어로 바꾸거나 삭제했고, 강조해야 할 부분과 쉬어야 할 부분을 일일이 표시했다. 또한 천천히 연설하도록 지도했는데, 그 덕분에 연설이 차분하고 진중한 분위기에서 이루어져 왕의 권위가 강조되는 효과를 보았다.
이후 조지 6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두 사람은 친구로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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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스 스피치에서 제프리 러쉬가 연기했다.
'말더듬이 왕 조지 6세'란 제목의 다큐멘터리에서 그에 대해 비중있게 다루었다. 그에게 치료받았던 다른 말더듬이 환자들의 증언 등을 통해 그를 다각도로 분석하였고 또한 그의 치료법의 장점과 함께 한계도 다룬 부분이 특징. 그에 따르면 당시 로그의 치료방식은 공식 연설문과 같이 격식을 차릴 필요가 있는 대화나 발언에는 효과가 탁월한 반면 일상 대화같은 부분에선 한계가 있었다고 한다.
1. 개요
Lionel George Logue, CVO. 1880. 2. 26 ~ 1953. 4. 12.[1] 호주 출신의 언어치료사이자 배우로 한국에선 킹스 스피치에서 제프리 러쉬가 분한 역할로 잘 알려져 있다. 조지 6세의 말을 더듬는 장애를 치료했다.
2. 생애
호주 남부의 애들레이드(Adelaide)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에드워드 로그는 아일랜드 더블린 출신으로, 1850년에 호주에서 로그 양조장을 차렸다. 아버지 조지 에드워드 로그는 할아버지의 양조장에서 경리일을 했으며 나중엔 호텔을 운영하기도 했다. 목소리가 좋은 탓에 웅변술을 배웠으며 1911년부터 퍼스에서 연기와 웅변술 등을 가르쳤다. 퍼스의 YMCA 등에서도 일했는데 대전쟁[2] 후에 돌아온 호주 출신 참전용사들이 포탄 충격(PTSD)으로 말더듬 현상에 시달리자 호흡법을 포함한 운동 치료와 유머, 인내 등을 통한 로그 특유의 치료법으로 이들을 치료하였다. 1924년에는 아내와 세 아들을 데리고 영국 런던으로 이주했다. 표면상으론 휴가라고 했지만 영국에 간 뒤에 1926년에 할리가 164번지에 웅변술 학원을 차렸다. 하지만 당시엔 언어치료란 개념이 생소했기에 한동안 생계를 위해 연극 배우 일도 겸했다.
라이오넬에게 치료를 받고자 당시 요크 공이었던 앨버트 왕자, 뒷날의 조지 6세가 학원을 방문했다. 로그는 이러한 부유한 고객에게 가난한 고객이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보조금을 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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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오넬과 아내 머틀. 머틀은 1945년에 세상을 떠났다. 라이오넬은 1944년에 로얄 빅토리아 훈장 3등급장[3] 을 받았으며 1953년에 사망했다. 호주 평민 출신의 장례식치곤 예외적으로 여왕인 엘리자베스 2세와 대비인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이 대리인을 보냈다.
손자 마크 로그는 할아버지의 서간 등을 정리해 킹스 스피치란 책을 펴냈고 영화의 원작이 됐다.
2.1. 조지 6세와의 관계
조지 6세는 당시 앨버트 왕자로 조지 5세의 차남이었고 왕세자는 장남인 웨일스 공 에드워드 8세였다.1925년 10월 31일에 앨버트 왕자는 영국 박람회에서 연설을 맡았는데 화자나 청자나 다 괴로운 경험이었다고 한다. 왕자는 이 일로 상당히 고심했고 1926년에 처음으로 로그를 만났다. 로그는 왕자의 후두와 횡격막이 잘 작용하지 않는다고 진단했고 매일 한 시간씩 발성 연습을 시켰다. 그의 도움으로 왕자는 1927년에는 별다른 말더듬 없이 연설을 할 수 있게 되었다. 1930년대와 1940년대에도 로그는 조지 6세와 같이 다니며 잰말놀이(tongue-twister)[4] 를 써서 왕자의 리허설을 도왔다. 로그는 왕의 연설문을 교열해 발음하기 어려운 단어는 같은 뜻의 다른 단어로 바꾸거나 삭제했고, 강조해야 할 부분과 쉬어야 할 부분을 일일이 표시했다. 또한 천천히 연설하도록 지도했는데, 그 덕분에 연설이 차분하고 진중한 분위기에서 이루어져 왕의 권위가 강조되는 효과를 보았다.
이후 조지 6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두 사람은 친구로 지냈다.
3. 미디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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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스 스피치에서 제프리 러쉬가 연기했다.
'말더듬이 왕 조지 6세'란 제목의 다큐멘터리에서 그에 대해 비중있게 다루었다. 그에게 치료받았던 다른 말더듬이 환자들의 증언 등을 통해 그를 다각도로 분석하였고 또한 그의 치료법의 장점과 함께 한계도 다룬 부분이 특징. 그에 따르면 당시 로그의 치료방식은 공식 연설문과 같이 격식을 차릴 필요가 있는 대화나 발언에는 효과가 탁월한 반면 일상 대화같은 부분에선 한계가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