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비
1. 개요
大妃
Queen Dowager
제후국에서 선대 국왕의 왕비가 받게 되는 지위. 황태후와 사실상 같은 의미로 명칭만 다르다. 황태후를 줄여 태후라고 했던 것처럼, 대비도 왕대비(王大妃)를 줄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선대 국왕의 왕비의 자식이 세자가 되므로 왕의 친모가 곧 대비였으나, 후궁의 자식 혹은 방계혈통이 즉위할 경우 대비는 왕의 법적인 어머니였다.
왕이 어린나이에 즉위할 때는 수렴청정을 행하기도 하였다. 대비를 가르쳐 그가 거처하는 장소인 대비전 자체가 대비를 상징하였고 자전(慈殿), 자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대왕대비가 없는 이상 왕실의 최고어른으로 존중을 받았다.
2. 한국
한국사에선 사실 태후가 대비보다 훨씬 많이 쓰였다. 고려말, 조선조 이전의 대비 사용례는 손에 꼽는 정도다. 고려엔 왕대비 외에 왕태비(王太妃), 국대비(國大妃)도 있었다.
한국사 최초의 대비는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은팔찌 유물에 적힌 '백제국왕대비(百濟國王大妃)'. 누군진 모르고 무령왕의 왕후일거라고 추측만한다.
그 다음 기록은 고려 왕조인데 태조 왕건의 6녀 시호인 '순안왕대비'. 그리고 문화왕후는 현종 때 대비로 올려졌다. 순안왕대비에 대해선 후궁 정목부인의 딸이라는 것과 시호가 저렇다는 것 외에 기록이 없어 왜 '왕대비'가 되었는지 알 수 없다. 문화왕후의 경우는 '왕태후' 대신 받은 게 맞는데, 그녀는 고려초기 왕후로 추존할 만한 왕의 모후, 조모, 외조모도 아니었으나[1] 궁에서 성종의 조카 목종과 현종을 양육했고 그녀의 딸 원정왕후가 현종의 1비가 되었으므로 자신의 양어머니나 마찬가지였기에 현종이 대비의 존호를 올린 것으로 보인다. 또는 성종 때 그녀의 마지막 품계가 궁주여서[2] 태후와 왕후 사이의 절충안으로 대비를 고른 것일 수 있다.
이러한 태후와 왕후의 중간 대우는 성종 이후로도 보인다. 문종 때는 생전 왕비가 아니었고 자식도 없었던 원목왕후[3] 에게도 왕후의 시호를 올렸다. 대신 능호를 만들지 않고, 절에서 제사를 그만두는 등 차등을 두었다. 이는 신하들이 또 다른 현종의 비 원순숙비[4] 의 장례를 치를 때 문화왕후의 예에 의하여 장례를 치르되 그 능호는 없이 했는데, 원순숙비와 원목왕후 둘 다 선왕의 비이니 예우가 달라서는 안 된다고 건의했기 때문이다. 인종의 두번째 왕비로 책봉된 선평왕후의 경우, 의종 때 연수궁주 - 왕태비(延壽宮主 - 王太妃)로 책봉되었다. 이유는 생전 왕비였으나 자식이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즉, 중국 왕조의 정석적인 방법이 아닌 왕태후의 대체제로서 쓰였다.
고려 초중기에 왕대비 사용 제도는 애매한 위치의 비[5] 가 죽으면 예우 차원에서 왕후로 올려주지만, 태후나 왕후로 올려줄 정도의 권력이나 실권이 없었으니 한단계 아래인 대비, 태비로 올렸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
고려 말 원 간섭기부터 정석적인 방법으로 왕대비 제도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충렬왕과 충선왕 때에는 기존의 천자국식 태후, 왕후 제도를 완전히 폐지하지 못하고 태후와 대비가 섞여서 쓰였다. 이후 대비만 쓰다가 공민왕 때 반원 자주 정책으로 인해 다시 태후가 섞여서 쓰인다.
원 간섭기부터 여말까지 왕대비 또는 대비 칭호를 받은 여성은 다음과 같다.
- 근비 이씨: 창왕의 어머니. 창왕이 즉위하여 왕대비가 되었다가 쿠데타로 쫓겨났다.
- 정비 안씨: 공양왕 때 왕실의 어른으로서 정숙선명경신익성유혜왕대비(貞淑宣明敬信翼成柔惠王大妃)로 올려졌다.
- 국대비 왕씨: 공양왕이 자신의 어머니를 자예정명익성사제혜덕삼한국대비(慈睿貞明翼聖思齊惠德三韓國大妃)로 올렸는데 이 존호를 줄여서 삼한국대비, 국대비라고 한다.
공양왕은 이성계 등 권신의 추대로 왕위에 올라 왕권이 거의 없었다. 그러니 자신의 부모를 왕비, 국왕으로 추존하지 못하고 삼한국대비, 삼한국 대공[6] 으로 한단계씩 낮춰서 추존한 것이다. 국대비는 오대십국 시대에 왕의 모친을 국태부인으로 삼은 것에서 딴 것으로 보인다.
조선 왕조는 성리학적 제후국을 자처해 갑오개혁 이전까지 '왕대비' 또는 '대비'를 사용했다. 대비가 왕대비의 준말인지라 원래 둘은 동의어였다. 그러나 철종 대부터는 대비가 3명이 되는 바람에 대비를 왕대비보다 한 단계 낮은 격으로 썼다. 사실 성종 대에도 이랬지만 3명 모두 고부지간인 철종 대와 달리 인수대비와 인혜대비가 동서지간이었으로 같은 왕대비지만 서열을 두는 걸로 해결했다.
3. 서양
서양에서는 죽은 남편으로부터 재산과 지위를 상속받은 과부를 Dowager라고 불렀고, 왕비도 마찬가지로 왕이 죽으면 Queen에 Dowager를 붙어서 Queen Dowager라고 불렀다. 직역하자면 "미망인 왕비"라고 할 수 있다.
동양과는 다르게 과부라고 해서 재혼이 불가능하지 않았기 때문에 Queen Dowager도 재혼할 수 있었다. 헨리 8세의 마지막 부인도 헨리가 죽고 나서 재혼했다. 물론, 재혼할 경우 Queen의 칭호는 소멸된다. 만약 Queen Dowager의 자식이 왕위를 계승하면 보통 Queen Mother라고 불러서 Dowager랑 차이를 두었다. 왕의 어머니가 아닌 경우에도 대비가 될 수 있었다. 영국에서는 Queen까지만 법적 정당성이 있기 때문에 Queen Mother은 작위로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왕의 어머니라고 무조건 Queen Mother를 사용할 수 없었다. 엄연히 호칭에 왕비가 들어가기 때문에, 왕비로 책봉됐어야 한다. 실제로 빅토리아 여왕의 어머니는 왕비로 책봉된 적이 없어서 Queen Mother을 사용할 수 없었고, 단순히 Queen's Mother이라고 명명됐다.
4. 나무위키에 항목이 개설된 인물
4.1. 실존인물
4.1.1. 한국
대왕대비가 된 경우는 제외했다. 지위 체계가 바뀐 이후부터는 왕대비가 된 경우도 제외했다.
4.1.2. 서양
- 나사우의 소피아 (스웨덴)
- 데지레 클라리(스웨덴,노르웨이)
- 덴마크의 알렉산드라(영국)
- 마거릿 튜더(스코틀랜드)
- 소피아 왕대비(스페인)
- 스웨덴의 로비사(덴마크)
- 스웨덴의 잉리드(덴마크)
- 엘레오노르 다키텐(잉글랜드)
-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영국)
- 조제핀 드 로이히텐베르크(스웨덴,노르웨이)
- 캐서린 파(잉글랜드)
- 테크의 메리(영국)
- 프랑스의 이사벨라(잉글랜드)
4.2. 가상인물
[1] 고려 초기엔 외할머니도 왕후로 추존되었는데 고려 초기 근친혼 때문에 왕이 된 이들의 외할머니가 선대의 비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즉, 모계가 공주이거나 왕족이었다.[2] 고려에선 초기와 과도기였을 때를 제외하면 생전에 비, 궁주였던 사람이나 왕의 어머니를 사후에 왕후로 추존하였다.[3] 생전 흥성궁주 - 숙비.[4] 생전 경흥원주 - 덕비.[5] 왕자가 없거나 군주의 총애나 뒷배경이 없거나 등등.[6] 대공도 한국사에서 유일하다.[7] 아사가의 후궁이었지만 군후인 소이나는 오래 전에 죽은데다 아사가의 유일한 아들인 유진의 어머니이기에 유진이 즉위하면서 대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