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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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엘리자베스 2세 영국 국왕의 아버지로 1936년부터 1952년까지 영국의 국왕이었으며 인도 제국의 마지막 황제이자 아일랜드 자유국의 마지막 왕이었다. 영연방의 첫 번째 수장이기도 했다.
2. 전반적인 생애
조지 5세의 차남으로 태어난 그는 형 에드워드 8세의 그늘 아래서 지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해군 장교로 복무했고, 1923년 백작 영애인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과 결혼해 장녀 엘리자베스[1] 와 차녀 마거릿을 두었다.
이후 형인 에드워드 8세가 사교계 명사였던 미국인 심프슨 부인과 결혼하면서 왕위를 포기함에 따라[2] 떠밀리다시피 해서 왕위를 계승했다. 이후 국왕으로서는 치명적일 수 있는 간헐적 말더듬 증세를 노력을 통해 극복했고,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 국민들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등 정신적 지주로서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다. 하지만, 조지 6세 이후로 대영제국과 프랑스 제국은 식민지들이 독립해가면서 저물어간 반면, 미국, 소련이 새로운 세계 질서의 중심 국가로 확실히 부상했다. 재위 기간 동안 인도와 파키스탄이 독립하면서 인도 제국의 황제 자리를 내놓아야 했고 아일랜드가 수립되면서 아일랜드의 왕 자리도 내놓게 된다.[3]
선천적으로 건강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중 국왕으로서의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과로 및 과한 흡연 등으로 건강을 해쳤으며, 1952년 57세의 나이에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후임은 장녀인 엘리자베스.
3. 칭호
조지 6세는 즉위하기 전 요크 공작[4] 시절인 1929년 스코틀랜드 국교회 평의회 고등판무관을 역임한 적이 있어서 당시의 칭호는 '스코틀랜드 국교회 평의회 고등판무관이신 요크 공작 전하(His Royal Highness The Duke of York, His Grace The Lord High Commissioner to the General Assembly of the Church of Scotland)'였으며, 1936년에 즉위하면서 공식적인 칭호는 다음과 같이 정해졌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와 해외 영국 자치령의 왕, 신앙의 수호자, 인도의 황제, 가터 훈장의 주군, 씨슬 훈장의 주군, 성 패트릭 훈장의 주군, 바스 훈장의 주군, 세인트마이클앤드세인트조지 훈장의 주군, 대영 제국 훈장의 주군, 무공 훈장의 주군, 제국 공로 훈장의 주군, 인도성(星) 훈장의 주군, 인도 제국 훈장의 주군, 인도 제관 훈장의 주군, 영국령 인도 훈장의 주군, 인도 메리트 훈장의 주군, 버마 훈장의 주군, 로열 빅토리아·앨버트 훈장의 주군, 에드워드 8세 로열 패밀리 훈장의 주군, 조지 5세 로열 패밀리 훈장의 주군, 조지 6세 로열 패밀리 훈장의 주군, 오더 오브 메리트의 주군, 컴패니언 오브 아너의 주군, 로열 빅토리아 훈장의 주군, 성 요한 훈장의 주군이신 조지 6세 폐하[5] '
그러나 1947년 인도가 독립하면서 인도 제국 황제라는 직위를 포기해 군주로서의 공식적인 칭호는 1948년부터 아래와 같이 변경되었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와 해외 영국 자치령의 왕, 신앙의 수호자이신 조지 6세 폐하(George the Sixth, by the Grace of God, of Great Britain, Ireland and the British Dominions beyond the Seas King, Defender of the Faith)'
다만 인도 지역의 경우 인도 제국은 해체되었어도 공화국으로 완전 독립하기 전까지는 각각 영국의 자치령 지위였으므로(인도 자치령, 파키스탄 자치령 등) 그동안 인도 지역에서 '해외 영국 자치령의 왕' 칭호는 유효했다. 또한 아일랜드에서는 1949년 공화국 출범 및 영연방 탈퇴로 아일랜드 왕 칭호가 폐지되었으나, 영연방 내에서의 아일랜드 왕 칭호는 남은 재위 기간 동안 바뀌지 않아 후임 엘리자베스 2세가 잠시 이어받았다. 영연방의 수장(Head of the Commonwealth) 칭호 역시 공식 왕실 칭호로서는 조지 5세 재위 동안 추가가 보류되었다. 인도 자치령은 1950년에 해체되었지만 파키스탄 자치령은 1956년까지 존속하여 엘리자베스 2세도 잠시 파키스탄 왕을 해본다.
4. 일생
4.1. 출생과 어린 시절
증조모 빅토리아 여왕의 통치시기에 노포크의 샌드링엄에서 빅토리아 여왕의 손자였던 요크 공작 조지 왕자(훗날의 조지 5세)와 테크의 메리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런데 하필 태어난 날이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 앨버트 공의 기일이었고 때문에 빅토리아 여왕은 증손자에게 거의 무관심으로 대했다고 한다. 이런 어머니를 달래기 위해 아이의 조부였던 웨일스 공(훗날의 에드워드 7세)은 앨버트 공의 이름을 따서 조지 6세에게 앨버트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3개월 후 조지 6세는 알버트 프레드릭 아서 조지라는 이름으로 샌드링엄의 성 메리 막달레나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고 가족 내에서는 버티라는 애칭으로 불렸다고 한다.
어렸을 적의 조지 6세는 병약한 체질과 심한 말더듬, 눈물이 많은 데다가 겁이 많고 소심한 성격을 지녔다고 한다.[6] 원래 왼손잡이로 태어났지만 오른손잡이로 교정을 받다보니 이런 경향은 더 심해졌다.[7]
4.2. 왕이 되기 전의 생애
1909년 앨버트는 오즈본에 있는 왕립해군학교에 생도로서 입학했다.[8] 1913년 앨버트는 해군 사관후보생으로 임명되었고 1년 후 1차 세계대전 때 HMS 콜링우드(세인트 빈센트급 전함)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1916년에 벌어진 유틀란트 해전에도 참전했지만 십이지장의 궤양 때문에 더 이상의 전투를 치르지는 못했다. 1918년 2월에는 크란웰의 왕립함대항공단에 조종 장교로 배치되었다가 종전을 맞이한다.
1919년 앨버트는 캠브리지의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역사와 경제학을 공부했다. 이즈음에 형인 에드워드 8세의 소개로 호주출신 유부녀 실라 러프버러와 사귀었다. 형이 사귀던 프리다의 친구였는데 이들 넷은 함께 더블 데이트를 즐겼다고. 이 때문에 왕실에서는 에드워드 8세가 동생을 나쁜 길로 물들인다고 못마땅해 했고[9] , 앨버트에게 헤어질 것을 종용했다. 형과는 달리 말을 잘듣는 앨버트는 실라와 헤어지고 나서 요크 공작의 작위를 받았다.[10] 이후 그는 아버지를 도와 왕실의 의무를 이행했다.[11] 이때 주로 탄광과 공장, 철도 등을 시찰하면서 '''산업 공작'''(Industrial Prince)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별명답게 앨버트는 노동자들의 노동환경에도 관심이 많아 산업복지협회의 회장직을 맡기도 했으며 1921년부터 1939년 사이에는 1년마다 여름캠프를 열어 다양한 계층에서 온 소년들이 함께 지내도록 하기도 했다.
결혼할 나이가 되자 왕실은 과거의 관례대로 그가 다른 나라의 왕족과 결혼하길 기대했다. 그러나 앨버트는 자기가 직접 자유롭게 신부감을 고르길 바랐다. 1920년에 앨버트는 스트래스모어 백작 클라우드 조지 보우스라이언의 딸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을 만났고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심한다.
엘리자베스도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왕가의 피가 흐르는 고위 귀족이었으나 당시 유럽 군주국들의 관례에 의하면 직계 왕자와 공주는 타국의 통치 가문과만 결혼해야 했다.[12] 엘리자베스 스스로도 왕실의 일족이 되어 치뤄야 할 희생 때문에 앨버트의 구혼을 두 번이나 거절할 만큼 주저했다.
하지만 앨버트의 한결같은 마음과 헌신적인 구애를 보고 결국 결혼을 결심하고, 부왕인 조지 5세 또한 그들의 결혼을 흔쾌히 허락하였다.[13] 둘은 1923년 4월 26일 웨스터민스터 사원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조지 6세의 말 더듬는 버릇은 그가 공공장소에서 연설하는 걸 꺼리게 만든 원인이었다. 일례로 1925년 10월 31일 웸블리에서 열린 대영제국 박람회의 폐회사를 조지 6세가 맡았는데 이는 청중과 조지 6세 양쪽에게 모두 고통스러운 경험이었다고 한다.(킹스 스피치 처음에서 말을 더듬는 그 장면)
이를 그냥 방치할 수는 없어서 조지 6세는 오스트레일리아 출신 언어치료사 라이오넬 로그를 만나서 치료를 받았다. 이때 엘리자베스도 옆에서 꾸준히 치료를 도왔고 그 결과 호주연방 국회 개회 연설을 훌륭하게 치러냈다. 이후 조지 6세가 대중 앞에서 연설하는 걸 꺼려하는 횟수는 크게 줄어들었다고.
호주를 순방하면서 당시 영국령이었던 자메이카를 경유했는데 이때 자메이카에서 테니스 복식경기를 하면서 흑인과 함께 테니스를 쳤다. 인종차별이 유효하던 당시 시대에 인종 간의 평등을 보여준 훌륭한 사례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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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아내 둘 다 내성적인 편이었기에 이들 가족은 비교적 조용하게 살았다. 당시 집은 런던 피카딜리가 145번지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의 행복한 생활도 곧 깨지게 된다.
4.3. 원하지 않았던 왕좌
1936년 1월 20일 조지 5세가 사망하면서 에드워드 왕자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당시 에드워드 8세는 나이가 42임에도 불구하고 미혼이었고 이 때문에 둘째였던 조지 6세가 왕위계승 1순위가 되었다. 게다가 그해 12월 11일 에드워드 8세가 미국인 사교명사[15] 였던 월리스 심프슨 부인과 결혼하겠다고 하면서 파장이 일어난다. 당시 총리였던 스탠리 볼드윈은 "2번이나 이혼한 이혼녀와 결혼하면서 왕위를 지킬 수는 없다. 왕위에서 물러나든가 아니면 심프슨 부인과 연을 끊든지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 결국 에드워드 8세는 심프슨 부인과의 결혼을 위해 왕위를 저버렸다. 졸지에 왕위에 오르게 된 조지 6세는 당황했다. 그는 왕위수락을 거부했고 형의 퇴위 전날에는 모후를 찾아가서 어린아이처럼 흐느껴 울기까지 했다. 하지만 결국은 즉위했다. 워낙 갑작스레 진행된 일이라 그는 겨우 3주 만에 필요한 걸 배우고 왕위에 올라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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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된 이후로는 국가의 수장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어 폭격이 일상화된 시기에는 가족은 안전한 곳으로 보내놓고 왕은 국민과 함께 해야 된다며 버킹엄에 있다가 폭격에 죽을 뻔하기도 했다. 전쟁 중에는 일상적으로 영국 해군 제독(원수)의 정복을 입고 있었다.
남편과 사이가 좋았던 엘리자베스 역시 놀란 건 마찬가지였기에, 이 부부는 형인 에드워드 부부와의 사이가 나빠졌다. 이 때문에 1936년을 '''세 왕의 해'''라고도 부른다. 무려 '''세 명의 왕'''이 교체되었기 때문. 아마 대영제국이 일본처럼 연호를 썼다면 두 번이나 연호를 갈아치워야 했을 것이다.
조지 6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공군이 런던을 폭격하는 동안에도 아내와 함께 버킹엄 궁전에 머무르며 영국 국민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충분히 수행했다.
하지만 전쟁 때 겪은 잦은 스트레스와 폭연으로 결국 폐암에 걸려 말년에는 한쪽 폐를 절제하고 금연을 했지만 1952년 2월 6일 자다가 관상동맥 혈전증으로 사망해 형보다 먼저 죽었다. 위의 왼쪽 사진은 1952년 자기를 대신해 해외 순방을 나가는 딸 엘리자베스 공주를 배웅하기 위해 나온 조지 6세를 찍은 것으로, 이게 공식석상에서 촬영된 마지막 사진이 되었다. 선량한 국왕이었지만, 왕이 된 탓에 오히려 불행한 인생을 살다 간 인물. 엘리자베스 공주는 케냐를 순방하던 도중 이 소식을 접했는데, 마침 공주의 숙소가 트리탑 호텔(Treetop Hotel), 말 그대로 나무 위에 있는 호텔이었다.
형인 에드워드 8세는 나치를 좋게 평가하기까지 했기 때문에 살아 생전 조지 6세의 속을 썩히기만 했을 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아내인 엘리자베스 왕비는 조지 6세가 본의 아니게 왕이 되어 지나치게 과로한 나머지 일찍 사망했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에드워드 8세와 심프슨 부인을 전보다 더 싫어하게 되었다.
키는 175cm로 자기 형인 에드워드 8세보다 더 컸다고 하지만, 미국에서 루스벨트 대통령(188cm)과 나란히 섰을 때는 안습… 이걸 본 미 국무부의 한 관리는 키가 큰 루스벨트 옆에 서니 꼭 피그미족 같았다고 일기장에 썼다. 이 분이랑 나란히 서 있으면 땅콩이 된다.
아버지 조지 5세와 은근히 비슷한 인생을 살았다. 차남으로 태어나 왕위 계승과 거리가 먼 삶을 살다가, 예상치 못하게 왕위를 계승했고 전쟁을 승전으로 이끌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다만 아버지보다 14세 일찍 세상을 떠난 점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2차 대전 당시에 녹음된 조지 6세의 육성. 들어보면 알겠지만 연설 실력이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영화 킹스 스피치는 조지 6세와 그의 언어치료사였던 라이오넬 로그 사이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해당 연설이 킹스 스피치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연설. 영화를 보고 들어보면 발음이나 간격을 신경써서 최대한 같게 들려주려고 했다는 걸 알 수 있다.
5. 가족 관계
5.1. 조상
5.2. 자녀
6. 관련 작품
- 인투 더 스톰[19]
- 킹스 스피치와 영화를 원작으로 한 동명의 연극
-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도 원치 않게 왕이된 그의 얘기가 나온다.
-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더 크라운. 시즌 1에 폐암에 시달리는 말년의 조지 6세가 등장한다. 배우는 자레드 해리스. 이후 시즌에도 회상 신에서 자주 출연했다. 조지 6세(더 크라운) 항목 참조.
- 다키스트 아워
7. 기타
- 영국 해군의 차세대 핵미사일 탑재 전략 핵잠수함인 드레드노트급 잠수함의 4번함 함명이 '킹 조지 6세'로 결정되었다.
[1] 가족들 사이에서의 애칭은 릴리벳이었다.[2] 심프슨 부인은 2번의 이혼경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영국 국교회는 왕실 일원이 이혼한 인물과 결혼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 게다가 영국 국왕은 영국 국교회의 수장이다. 이러한 이유와 관련되어 당시 영국 국민들의 정서도 이혼한 인물과의 결혼에 관대하지 않았다. 이후 (조지 6세의 차녀인) 마가렛 공주와 조지 6세의 왕실 시종무관이었던 피터 타운센드와의 결혼이 무산된 것도 이와 비슷한 이유.[3] 1949년 이전의 아일랜드는 완전한 공화국이 아니라 영국의 자치령이었다. 그러나 이미 1937년 시점에서 아일랜드가 독립전쟁 당시 아일랜드를 영연방 내 자치령으로 규정한 영국-아일랜드 조약을 파기함으로써 사실상 아일랜드는 완전 독립한 상태였다. 다만 영국이 이를 승인하지 않고 있었을 뿐이었고, 1949년에 와서는 영국이 아일랜드의 영연방 탈퇴와 완전 독립을 승인한 것.[4] 국왕의 차남에게 주어지는 작위였다. 킹 조지 5세급 전함 3번함 듀크 오브 요크가 바로 조지 6세의 이 작위에서 따온 것.[5] His Majesty George the Sixth, by the Grace of God, of Great Britain, Ireland and the British Dominions beyond the Seas King, Defender of the Faith, Emperor of India, Sovereign of the Most Noble Order of the Garter, Sovereign of the Most Ancient and Most Noble Order of the Thistle, Sovereign of the Most Illustrious Order of Saint Patrick, Sovereign of the Most Honourable Order of the Bath, Sovereign of the Most Distinguished Order of Saint Michael and Saint George, Sovereign of the Most Excellent Order of the British Empire, Sovereign of the Distinguished Service Order, Sovereign of the Imperial Service Order, Sovereign of the Most Exalted Order of the Star of India, Sovereign of the Most Eminent Order of the Indian Empire, Sovereign of the Imperial Order of the Crown of India, Sovereign of the Order of British India, Sovereign of the Indian Order of Merit, Sovereign of the Order of Burma, Sovereign of the Royal Order of Victoria and Albert, Sovereign of the Royal Family Order of King Edward VII, Sovereign of the Royal Family Order of King George V, Sovereign of the Royal Family Order of King George VI, Sovereign of the Order of Merit, Sovereign of the Order of the Companions of Honour, Sovereign of the Royal Victorian Order, Sovereign of the Most Venerable Order of the Hospital of St John of Jerusalem[6] 그의 아버지인 조지 5세가 전 해군 출신으로, 아들들에게는 엄격한 아버지였던 탓에 앨버트의 이러한 경향을 더욱 부추겼다.[7] 영화 킹스 스피치에선 왼손잡이 교정 이외에도 안짱다리도 억지로 부목을 대서 교정을 받았고, 심지어 자신을 돌보던 유모에게 학대를 받았다고 라이오넬 로그에게 토로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8] 재학 중 다른 학생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다고 한다. 물론 당시에는 소심함이나 말더듬이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장남인 에드워드가 있었기에 차남인 앨버트가 국왕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9] 실제로 에드워드 8세는 앨버트와 실라 그리고 실라 남편과 함께 골프를 치러가서, 앨버트와 실라 둘이서 있을 수 있게 실라 남편을 꾀어내기도 했다.[10] 실라와 헤어지는 대신 일종의 조건으로 내걸어 생일날 요크 공작 작위를 주었다. 아버지인 조지 5세 역시 요크 공작 출신이라 의미있는 작위이긴 했다.[11] 비록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긴 했지만 심한 낯가림과 말더듬 때문에 대중 앞에 나서기를 많이 꺼려했고 이 때문에 자기 형 에드워드보다 주목받지 못했다.[12] 이런 법칙을 귀천상혼이라고 하는데, 영국 왕실은 귀천상혼의 개념이 약했기 때문에 조지 6세는 엘리자베스와 결혼할 수 있었다. 만약 다른 유럽 군주국이었다면 왕위 계승권이 박탈되었을 것이다. 대표적인 국가가 당시 스웨덴 왕실.(1970년대에 와서야 귀천상혼 폐지)[13] 민심을 읽는 법을 알았던 조지 5세는 외국인 공주와 아들을 결혼시키기보다 자국인과 결혼시킴으로써 국민의 인기를 얻고자 하였다. 거기다 어머니인 메리 왕비는 엘리자베스를 아주 마음에 들어해서 오히려 조지 6세에게 어서 청혼하라고 할 정도였다.[14] 즉위한 후인 1947년 남아프리카 연방을 방문했을 때도 흑인과 악수하지 못하게 하는 현지 경호원들에게 '''게슈타포'''라 일갈하신 바 있다. [15] 말이 사교명사지 지금의 셀럽 같은 존재가 아니었다.[16] 조지 3세의 7남이다.[17] 웨일스 공 찰스, 프린세스 로열 앤, 요크 공작 앤드루 왕자, 웨식스 백작 에드워드 왕자[18] 1978년 이혼[19]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윈스턴 처칠의 행적을 다룬 TV 영화로, 동명의 재난 블록버스터 영화와는 전혀 다르다. 해군 원수 정복 차림의 조지 6세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