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8세

 



'''Edward VIII'''
'''이름'''
에드워드 앨버트 크리스천 조지 앤드루 패트릭 데이비드[1]
(Edward Albert Christian George Andrew Patrick David)
'''출생'''
1894년 6월 23일
서리 리치몬드 화이트 로지
'''사망'''
1972년 5월 28일 (77세)
프랑스 파리
'''장례식'''
1972년 6월 5일
버크셔 윈저 프로그모어 왕립묘지
'''재위'''
영국영국 자치령의 왕, 인도 제국의 황제
1936년 1월 20일 ~ 1936년 12월 11일
'''신장'''
170cm
'''배우자'''
월리스 심프슨 (1937년 결혼)
'''아버지'''
조지 5세
'''어머니'''
테크의 메리
'''형제'''
조지 6세, 메리, 헨리, 조지, 존
'''서명'''
[image]
1. 개요
2. 칭호 및 작위
3. 생애
3.1. 왕위를 포기하다
3.2. 나치와의 연관성
3.3. 인종차별 흑역사
3.4. 퇴위 이후
3.5. 진짜 반역자?
4. 가족관계
5. 기타
5.1. 창작물에서의 에드워드 8세
5.2. 시대를 앞선 패션 감각의 소유자
5.3. 외모


1. 개요


조지 5세의 장남. 본명은 에드워드 앨버트 크리스티안 조지 앤드루 패트릭 데이비드. 가족들에겐 퍼스트 네임인 에드워드가 아닌 미들 네임 ‘데이비드’로 불렸다.
심슨 부인과 결혼하기 위해 왕위를 버리고 윈저 공이 되었다. 이 때 왕위를 계승한 사람은 동생인 조지 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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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기
청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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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 월리스 심프슨과 함께
흔히 사랑을 위해 왕위를 포기한 로맨스의 주인공으로 알려져 있다.#

2. 칭호 및 작위


즉위했을 때의 공식적인 칭호는 다음과 같았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와 해외 영국 자치령의 왕, 신앙의 수호자, 인도의 황제이신 에드워드 8세 폐하(His Majesty, Edward the Eighth, by the Grace of God, of Great Britain, Ireland, and of the British Dominions beyond the Seas, King, Defender of the Faith, Emperor of India)'
다른 국왕들과는 달리 '~ 훈장의 주군'이라는 칭호는 덧붙여지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워낙에 재위기간이 짧았던지라 훈장을 수여할 겨를이 없었기 때문(…). 그는 대관식도 거치지 않았다.
  • 요크의 에드워드 공자 전하 His Highness Prince Edward of York (1894년 6월 23일 ~ 1898년 5월 28일) / His Royal Highness Prince Edward of York (1898년 5월 28일 ~ 1901년 1월 22일)
  • 콘월과 요크의 에드워드 공자 전하 His Royal Highness Prince Edward of Cornwall and York (1901년 1월 22일 ~ 1901년 11월 9일)
  • 웨일스의 에드워드 공자 전하 His Royal Highness Prince Edward of Wales (1901년 11월 9일 ~ 1910년 5월 6일)
  • 콘월 공작 전하 His Royal Highness The Duke of Cornwall (1910년 5월 6일 ~ 1936년 1월 20일)
    • 스코틀랜드에서는 로스시 공작 전하 His Royal Highness The Duke of Rothesay
  • 웨일스 공 전하 His Royal Highness The Prince of Wales (1910년 6월 23일 ~ 1936년 1월 20일)
  • 국왕 폐하 His Majesty The King (1936년 1월 20일 ~ 1936년 12월 11일)
  • 에드워드 왕자 전하 His Royal Highness The Prince Edward (1936년 12월 11일 ~ 1937년 3월 8일)
  • 윈저 공작 전하 His Royal Highness The Duke of Windsor (1937년 3월 8일 ~ 1972년 5월 28일)

3. 생애



3.1. 왕위를 포기하다


왕세자 시절 '사랑받는 아폴로'라 불리며 대중적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반면에 동생 앨버트는 말을 더듬고 대중 앞에서 큰 인기를 얻지 못해 늘 가려져 있었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아버지 조지 5세와 사이가 나빴고, 그 때문에 군주제 자체에 대해서도 불만이 있었으며, 스스로도 왕족 생활이 안 맞는 것 같다고 여러 차례 밝혔다.
파티를 즐겼고 바람둥이로 유명했다. 이혼녀 프리다와의 오랜 연인 관계였고, 동생 버티에게 프리다의 친구를 소개하여 더블 데이트를 즐기기도 했다. 에드워드 8세와 달리 아버지의 말을 잘 따르던 버티는 요크 공작 작위를 받는 조건으로 '실라'라는 호주 출신 이혼녀와 헤어졌다.
왕세자 시절 그가 결혼할 생각을 안 하는 것에 속이 터져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아버지 조지 5세가 '''"네놈이 평생 결혼을 하지 않고 차라리 버티릴리벳[2] 왕위를 물려받기를 바란다."'''는 말까지 했다. 그리고 또 다른 말로는 한심한 장남의 꼬라지를 보고 '''"저 애는 12개월도 못 넘기고 왕좌에서 내려올 거야."'''라고 한탄했다 한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다만 이유는 좀 다르게 어긋나서 에드워드 8세는 고작 '''10개월 22일''' 동안 재위한 다음, 결국 '''"나는 사랑하는 여인의 도움이 없이는 왕의 책무를 다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로 시작하는 세기의 연설을 끝으로 동생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윈저 공작이 되었다.
왕으로 재임하는 동안에 순방 등에서도 심프슨 부인과 함께 다녔다. 그렇게 끌린 이유로는 심프슨 부인이 에드워드 8세를 왕자처럼 대하지 않아서라고 한다. 항상 대접받다가 자신의 지위에 대해 크게 신경쓰지 않는 사람을 보자 색다르게 느꼈을 수도. 사실 귀천상혼의 형식으로 결혼하는 방법으로 왕위를 유지하기를 희망했지만 의회에서 거부했다.# 당시 국민들의 분위기는 에드워드 8세에 우호적인 편이었다. 에드워드 8세가 퇴위하자 차기 왕이 될 조지 6세는 부담감 때문에 어머니를 찾아가 1시간 동안 울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퇴위 때문에 엘리자베스 왕비(조지 6세의 아내)는 에드워드 8세 부부를 매우 싫어했다. 하필 조지 6세의 재위 기간은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고 냉전이 시작되는 등 나폴레옹 전쟁1차 세계 대전 이후 영국 역사상 가장 급박한 시기였고, 이 때문에 조지 6세는 스트레스와 줄담배로 건강을 해쳐서 일찍 죽었다. 엘리자베스로선 에드워드 8세의 무책임한 행동 때문에 남편이 고생하다가 일찍 죽었다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엘리자베스는 왕족 출신이 아니라서 신분이 낮다고 했을 뿐, 엄연히 친아버지가 백작으로 귀족 집안 출신이었고 과거 행적도 무난했다. 조지 5세와 메리 왕비도 엘리자베스를 직접 만나본 뒤 '이런 처자라면 버티와 결혼할 만하다.'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심프슨 부인은 미국 출신인 데다 에드워드와 만나기 전까지의 결혼 생활도 상당히 지저분했다. 아니, 에드워드 본인이 그 지저분의 한 요소였다. 개개인의 실제 성품을 떠나서 이런 대외적인 이미지와 행적만으로도 왕실과 대중들은 엘리자베스보다 심프슨 부인을 더욱 부정적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3.2. 나치와의 연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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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나치 독일을 방문해 환대받는 에드워드 8세
문제는 '왕은 군림하되 통치는 하지 않는다'는 입헌군주제의 원칙을 어기고 ''''왜 자꾸 독일이랑 안 좋게 지내려고 하냐. 독일이랑 사이좋게 지내자.''''며 자꾸 외교정책에 간섭하는 바람에 외무장관 앤서니 이든이 몇 번이나 식겁했다.
그런 탓에 퇴위 후에도 여러모로 영국 왕실에 부담을 주었으며 독일군의 영국 침공을 이용하여 왕위 복귀를 노렸다는 이야기도 있고, 독일이 그를 영국으로 보내서 다시 왕위에 올리려 했다는 이야기도 있긴 하다. 영국 해군에서 프랑스 함락 전에 부랴 부랴 루이 마운트배튼 경을 보내서 데리고 올 정도였으니. 만약 이 양반이 왕위를 포기하지 않았더라면 영국은 당장 독일과 강화하자는 의견이 우세했을 것이고 2차대전의 향방이 달라지거나 상당한 국론분열을 야기시켰을 것이다. 그 때문에 왕이 몰지각하게 행동한 대표적인 사례로 손꼽힌다.
또한 영국 정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독일함선을 타고 1937년 나치 독일을 방문해 나치 고위간부들과 식사, 파티를 즐겼으며 히틀러의 산장에 가서 호화로운 만찬을 즐기는 등 사사건건 영국 정부와 충돌하였다. 특히 나치 독일의 야욕이 드러난 1939년에 나치 독일과 영국은 친밀해야 된다는 라디오 방송을 녹음 했지만 영국 공영방송국인 BBC에서 방송을 거부했다. 이후 1945년 바하마 총독을 사임할 때도 친나치 발언을 서슴치 않았고 기자들을 불러모아 나치가 미국을 무찌르는 날에 다시 복귀하겠다라고 하였으나 전시검열로 인해 보도되지 않았다고 한다.
훗날 에드워드 8세의 라디오 방송을 거부한 BBC에서 만든 다큐멘터리 '에드워드 8세 영국의 나치 왕'에 따르면 에드워드 8세는 자신의 아버지가 윈저 왕조로 이름을 바꾸기 이전에 작센코부르크고타 왕조의 독일 혈통에 대해 큰 자부심이 있었으며 어렸을때부터 독일에 관심이 많았고 이로인해 친독일성향이 있었다고 한다. 나치 독일과 전쟁을 치루고 자신의 나라가 폭격당해 불바다가 되어도 친나치 성향을 버리지 못한 이유도 바로 성장기 시절의 친독일성향 때문이라고 한다. 아버지 조지 5세가 1차 대전으로 영국국민들의 반독일감정으로 인해 왕실이 피해볼까 우려해 왕조 이름을 통째로 바꿔버렸는데 그 아들은 나치 독일에 푹 빠져 영국으로 돌아오지도 못하고 남은 여생을 프랑스에서 보내게 되었다는 점이 참 아이러니하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함께 나치식 경례를 같이 하는 사진이 2015년에 발견되어 뒤늦게 논란이 된 적도 있다. 다만 1935년에 찍힌 것으로, 2차대전 이전 히틀러가 인기를 얻던 시기였음을 유념하자.
여담으로 에드워드 8세를 끝까지 지지한 것은 다름아닌 윈스턴 처칠. 그렇다고 해서 처칠이 에드워드 8세를 무조건적으로 지지했다는 것은 아니다. 처칠도 에드워드 8세와 나치 독일의 연관성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이런 에드워드 8세가 민감한 정보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했다. 에드워드 8세가 바하마 총독으로 사실상 추방을 당하게 된 가장 큰 이유도 바로 처칠 때문이다. 이 때문인지 에드워드 8세는 처칠에게 불만이 담긴 편지를 자주 보냈는데 에드워드 8세의 편지에 답장쓰는 것이 나치 때문에 안그래도 바쁜 처칠에게는 큰 스트레스였다고 한다.

3.3. 인종차별 흑역사


그리고 인종차별을 저지르기도 했다. 쇼와 덴노가 황태자이던 시절에 영국을 방문하였을 때, 역시 왕세자였던 에드워드와 같이 가서 정장을 맞춘 일이 있었다. 그런데 이 일이 끝나고 히로히토가 일본으로 돌아가자 에드워드는 자신의 친구와 함께 일본인 노동자의 복장을 입고 파티에 참석했다. 요컨대 일본의 황자가 유럽인을 흉내내서 양복을 입는 것이나 영국 왕자가 일본의 하층민을 흉내는 것이나 똑같이 우스운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또한 에드워드는 애인에게 쓰는 편지에서 히로히토를 '''고급 원숭이'''라고 지칭했고, 일본인들이 토끼처럼 빠르게 번식한다고 적었다.
정작 동생 조지 6세는 형과는 달리 자메이카에서 흑인과 함께 테니스를 치면서, 인종차별이 유효하던 당시 시대에 인종 간의 평등을 보여준 훌륭한 사례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심지어 즉위한 후인 1947년 남아프리카 연방을 방문했을 때도 흑인과 악수하지 못하게 하는 현지 경호원들에게 '''게슈타포'''라 일갈한 적도 있다.

3.4. 퇴위 이후


퇴위 이후 1937년 6월 프랑스에서 심프슨 부인과 결혼한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보우스 라이언 왕비의 강력한 반대로 심프슨은 Her Royal Highness(전하)의 칭호와 왕족으로서의 혜택은 받지 못했다. 그저 남편의 작위에 따라 윈저 공작부인(Duchess of Windsor)으로 만족해야했다. 그 시대에는 왕족이 배우자감으로 이혼경력이 있는 사람을 들일 수 없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1937년 10월 나치 독일을 순회하는데, 이러한 배경에 있어서 에드워드 8세는 책임과 의무가 크게 따르는 국왕의 자리보다는 왕세자 시절처럼 즐기며 살고 싶어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대중 앞에서의 인기를 누리며 영향력을 행사하고 심프슨 부인에게도 왕비처럼 환대 받게 해주고자 독일을 방문했다고.
심프슨 부인이 나치의 스파이였으며, 에드워드 8세도 여기에 영향을 받아 히틀러와 내통했다는 설이 있다. 심프슨 부인의 정체는 2002년 공개된 FBI 보고서를 통해 밝혀졌다고 하는데 이는 불확실한 의혹이다. 심프슨 부인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는 보고서가 있기는 하나 확실하지 않다. 다만 여러 남자를 만나 이로인해 낙태를 하여 아이를 가질 수 없을정도로 문란한 생활을 즐겼고, 만났던 남자들 중 파시스트 성향이 있는 친나치 인물들도 있었다. 특히 에드워드 8세가 프랑스에 연락관으로 복무할때도 이런 나치 인물들과 연락을 주고 받았기에 나치의 스파이 의혹과 에드워드의 친나치 성향과 반역죄로 처형당해도 할 말 없는 어처구니 없는 행동에 어느정도 영향을 끼치지 않았나 하는 의혹이 당시에도 사그러들지 않았다. 이러한 의혹은 미국 FBI 뿐 아니라 영국정부도 인지하고 있었는데 영국 공영방송국인 BBC[3]에서 만든 다큐멘터리인 '에드워드 8세 영국의 나치 왕'에서도 언급이 된다.
1940년 7월 7일에 작성된 영국 정보기관의 첩보에 따르면, “독일은 윈저 공작 부부의 협조를 기대하며, 공작부인은 어떻게 해서든 왕비가 되고자 한다”며 “독일은 그녀와 협상 중이다”라는 보고가 올라왔다. 이어 “독일은 윈저 공작이 이끄는 반대정부를 제안하고, 독일은 런던 공격 중 조지 왕이 퇴위하리라 본다”라고 보고했다. 이러한 가상 계획은 실제로 이뤄지지는 않았지만, 당시 왕실은 크게 부담을 느꼈다고 한다. 이러한 첩보에 대해 에드워드 8세는 계속해서 부인했다.
1940년에 윈저 공은 영국군과 프랑스군의 연락을 담당하는 연락장교로로 복무중이었는데 독일 외교관과 통화중 실수로 독일측에 영국의 전략을 누설해서 처칠을 불안하게 만들었을뿐 아니라 나치 독일이 프랑스 파리를 침공하자 영국군과 같이 후퇴하지 않고 심프슨 부인과 여행간다는 이유로 모든 짐을 싸서 프랑스 남부 비아리츠를 경유해서 나치에 협력적인 스페인으로 도망가버렸다. 결국 분노에 찬 처칠의 명령으로 영국정보기관의 추적을 받아 포르투칼 리스본에서 붙잡혔고 처칠과 영국 왕실의 압력으로 바하마 총독을 맡게 된다. 이 때문에 리스본에서 바로 바하마로 출발하게 된 것이다. 이후 윈저 공 부부는 영국 정부, 영국 왕실의 눈 밖에 나버려 감시를 받게 되었으나 정신을 못차리고 바하마에 미국 기자들을 불러 친나치적인 발언을 하고 나치독일을 지지한다고 하여 왕실과 정부로부터 완전히 외면 받게 된다. 이런 업보 때문인지 윈저공은 전쟁이 끝나도 영국에 돌아가지 못했고 남은 여생을 프랑스에서 보내게 된다.
왕실의 행사 때문에 영국 버킹엄 궁전에 들렸을 때도 왕족들이 윈저 공을 피한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왕실 가족들과 사이가 좋지 못했고, 1972년 사망하고 나서야 윈저성 근처 묘지에 안치 되어 영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3.5. 진짜 반역자?


당시 주벨기에 독일 대사가 밝힌 바에 의하면 당시 프랑스에 무관으로 파견되어 있던 에드워드는 연합국의 벨기에 방어 계획을 독일 측에 흘렸다고 한다. 1940년 리스본 주재시에는 "영국에 대한 효과적인 폭격이 가해진다면 평화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으며 폭격이 시작된 후에는 "폭격이 이어진다면 영국도 평화를 원하게 될 것"이라고 오랜 친구인 스페인 외교관에게 말했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이 말을 하고 1개월 후에 독일의 영국 폭격이 시작되었다. 이 발언은 리스본의 독일 영사관을 통해 전부 독일에 전해졌다. 바하마로 간 후에도 정신을 못 차렸는지 미국 저널리스트인 풀턴 아워슬러에게 "히틀러가 실각한다면 비극적인 일이 될 것이다. 히틀러는 논리적으로 봤을 때 합당한 독일의 지도자이며 매우 위대한 사람."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당시는 미영연합군이 나치와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던 시기였다. 그 시기에 '''미국인'''에게 이런 얘기를 한 것이다. 심지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독일과 평화 용의가 있다면 즉각적으로 지지하겠다고 전해달라. 만약 영국 정부가 반대한다면 시민들이 혁명을 일으켜 결국 평화가 찾아올 것'이라고까지 말했다. 사석에서 대독강경파인 앤서니 이든은 총살당해야 할 인간이며, 전쟁은 모두 공산당과 유대주의자들의 음모라는 식으로 떠벌리고 다니기도 했다. 하도 심해서 윈저 공의 미국 방문 시 루즈벨트 대통령이 혹시 딴짓할까 봐 감시팀까지 붙였을 정도. 이런 태도에는 로마노프 왕가를 전멸시킨 소련 공산당에 대한 반감과 평소부터 가지고 있던 반유대주의 음모론 성향이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행적들은 나치 독일 정부와 윈저 공이 주고받은 연락문 및 윈저 공에 대한 독일정부의 보고서 등을 포함하는 마버그 파일Marburg Files(영어식 발음이며 윈저 파일Windsor Files 또는 윈저 공 파일Duke of Windsor Files로 불리기도 한다)이 발견되면서 더욱 자세히 드러났다. 이 문서에 따르면 나치 독일 정부는 윈저 공을 영국 왕으로 복위시키고 공작 부인 월리스를 영국 여왕으로 추대하는 대가로 영국이 나치 독일의 유럽 지배를 용인하게 하는 계획, 당시 영국 국왕 조지 6세와 윈스턴 처칠을 암살하여 영국을 항복으로 몰아넣는 계획 등이 담겨 있다. 당연히 이러한 구상에 윈저 공은 중요한 인물로 포함되어 있다. 이는 종전 당시 독일 헤세 주 마르부르크 성과 인근 산에서 연합군에 의해서 발견된 문서로, 내용의 중대함과 민감함으로 인해 당시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과 영국 왕실은 이 문서가 공개되는 것을 막고자 하였으나, 1954년 그 일부가 공개되었고, 1957년 문서의 전체가 공개되었다.

4. 가족관계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에드워드 8세
(Edward VIII)
조지 5세
(George V)
에드워드 7세
(Edward VII)
작센코부르크고타의 공자 앨버트
(Prince Albert of Saxe-Coburg and Gotha)
빅토리아 여왕
(Victoria)
덴마크의 알렉산드라 공주
(Princess Alexandra of Denmark)
크리스티안 9세
(Christian IX)
헤센카셀의 루이세
(Princess Louise of Hesse-Kassel)
테크의 공녀 메리
(Princess Mary of Teck)
테크 공작 프란츠
(Francis, Duke of Teck)
뷔르템베르크의 공작 알렉산드르
(Duke Alexander of Württemberg)
키스레데 여백작
레데이 클라우디아
( Countess Claudine Rhédey von Kis-Rhéde)
케임브리지의 공녀
메리 애들레이드
(Princess Mary Adelaide of Cambridge)
케임브리지 공작 아돌푸스 왕자
(Prince Adolphus, Duke of Cambridge)[4]
헤센카셀의 아우구스타
(Princess Augusta of Hesse-Kassel)

5. 기타


홍콩 MTR의 역 프린스에드워드역이 에드워드 8세에서 유래했다. 정확히는 원래 있던 도로 이름을 에드워드 8세에서 땄고, 나중에 그 도로에 지하철역이 생기면서 도로 이름을 딴 것이라 에드워드 8세와 지하철역은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중국 기문 베이스의 애프터눈 홍차 블렌드인 프린스 오브 웨일스는 이 사람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으로, 에드워드 8세가 왕세자(웨일스 공)이었던 시절 직접 주문해 제작했기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놀랍게도 이 문서 상단의 에드워드 8세 초상화와 거의 유사한 조지 6세의 초상화도 있다! 위 초상화는 에드워드 8세의 대관식을 위해서 제작되었다. 그런데 에드워드 8세가 대관식 이전에 퇴위하면서, 조지 6세의 얼굴을 새로 그려서 재사용한 것. 이 사실을 보도한 텔레그래프 기사 제목부터가 대놓고 초기 포토샵의 예시다(...)#

5.1. 창작물에서의 에드워드 8세


영화 킹스 스피치에서는 가이 피어스가 연기. 동생인 조지 6세 역을 맡은 콜린 퍼스와 비교해 실제 인물과의 외모 싱크로율은 상당히 높은 편이지만, 내연녀인 심슨 부인한테 휘둘리다 못해서 아버지의 임종을 접하고도 애인 타령이나 하거나[5], 말을 더듬는 동생을 조롱하는가 하면, 명색이 국왕이란 사람이 귀빈들이 와 있는 파티장에서 심슨 부인이 술심부름을 시키자 헬렐레해서 술심부름을 하는 등, 제대로 찌질한 모습을 보여준다.
대체역사소설 당신들의 조국에서는 독일이 2차대전에서 승리하여 영국 왕위에 복위하고 독일의 충견 노릇을 하는 것으로 나온다. 조카 엘리자베스 2세는 캐나다로 망명하여 캐나다 국왕을 칭하고 있다.
드라마 더 크라운 초반에도 가끔 등장하는데, 외모 싱크로율이 대단히 높다. 작중의 왕실에서는 그를 나치와 협력한 배신자이자 동생 조지 6세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무책임한 형, 만악의 근원 취급한다. 시즌 3에서는 연극계의 거물 데릭 제이코비가 후두암에 걸려 쇠약해진 모습을 연기했다.
패러독스 사의 2차 세계대전을 다루는 게임 Hearts of Iron IV에서는 처음에는 조지 5세가 즉위하고 있으나 곧 얼마 안가 사망하고 에드워드 8세가 즉위한다. 그리고 즉위 이후 모디파이어로 안정도를 매주 0.10씩 까드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안정도 +15 모디파이어를 가진 조지 6세가 즉위한다. 여담으로 영국이 국가 중점이나 괴뢰국이 되어서 파시즘화 되면 영국 파시스트 연합의 오스왈드 모즐리가 국가 수장이 되는데 에드워드가 파시즘에 유화적인 태도를 보인 것을 반영한 것인지 국왕을 조지 6세에서 에드워드 8세로 다시 교체하게 된다. DLC Together for Victory를 구매하면 남아공의 국가 집중이 추가되고 거기서 파시즘 트리를 타면 남아공으로 납치되어 남아프리카 제국의 황제가 된다. 맨 더 건 DLC가 있으면 영국의 정치 체제를 비동맹주의로 교체하고 직접 친정을 선포할수 있는 루트가 추가된다. 심프슨 부인과의 결혼 이벤트에서 국민들과 영연방 국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강행하고 왕위도 포기하지 않으면 내각이 총사퇴하면서 나라 꼴이 엉망이 되고 정치 체제를 다시 절대왕정으로 돌리게 된다. 이후로는 독립해나간 영연방 국가들을 다시 공격해서 식민지화하고 히틀러와 친선 조약을 맺게 된다. 미국을 공격할 수도 있는데 미국을 합병하거나 괴뢰화하면 부인인 윌리스 심프슨을 미국의 여왕으로 옹립할수 있다.
반면에 독일군이 1차대전에서 승리한 배경을 다룬 대체역사 MOD 카이저라이히에서는 캐나다에서 대영제국의 국왕으로 즉위한다. 게임 상에서는 잔존 협상국의 수장으로서 생디칼리스트들에게 빼앗긴 본토 수복의 결의(...)에 불타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2020년 2월 v0.11버전에서의 업데이트로 왕실의 인기도를 높이기 위해 협상국 이곳 저곳을 해외 순방할 수 있는 이벤트가 추가되었는데... 문제는 개버릇 남 못준다고 그놈의 여자 버릇을 못버렸는지 다른 나라에 갈때마다 그 나라의 유부녀들과 껄떡대느라 오히려 왕실 인기도가 더 떨어진다. 상황이 심각해지면 실 역사대로 동생 앨버트가 앨버트 1세로 즉위하거나 더 아래의 동생인 헨리나 조지가 즉위한다.
모 어린이 경제학 만화에서는 기회비용을 설명할 때 대영제국 국왕의 자리와 사랑을 교환한 세기의 로맨티스트로 소개된다(...). 기회비용적으로 설명하자면 그가 왕위에 머물러 있으면서 영국의 대독전에 손실을 입혔을 경우의 비용과 사랑을 선택했을 경우의 비용을 고려하면 확실한 오류다.

5.2. 시대를 앞선 패션 감각의 소유자


왕으로서의 능력은 바닥을 쳤지만 이와는 별도로 당시 시대를 앞서간 패션의 선두주자이자 선구자였다. 실제로 윈저 공은 남성복계에서 굉장히 중요한 인물로 연구되고 있다. 어느 정도냐면, 윈저노트라는 넥타이 매는 법을 창시했으며 윈저 공이 입은 스타일과 같은 격식있는 정장 스타일을 '윈저 공 스타일'이라고 부른다.[6] 정장 셔츠 스타일 중에서도 칼라가 넓게 벌어져있는 스타일의 셔츠를 '윈저 칼라 셔츠'라고 부른다. 사실 예전부터 윈저 공작이 수트의 표준을 세웠느니 하는데 이건 조금만 생각해도 아니다. 현대 정장은 빅토리아 시대때부터 내려오는 군의 튜닉에서 비롯한 가벼운 격식의 재킷에 여러가지 유행이 지나가며 남긴 흔적들이 조합되어 만들어 진것이다. 당장 원스턴 처칠을 보라 윈저공이 유행시킨게 그정도로 급속도로 퍼질리 없다. 사실 윈저 공의 가장큰 업적(?)은 소프트 칼라 셔츠인데 원래 당시에는 셔츠 깃이 셔츠와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최초로 셔츠깃을 셔츠에 박음질해서 붙인게 윈저 공이다.
이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는데 실제로 윈저 공의 키는 168cm로 단신이었다. 이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옷을 입는데 엄청난 공을 들였다고. 그 덕에 구글에 윈저 공 혹은 에드워드 8세를 쳐보면 잘 입은 사진이 주르륵 쏟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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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프레 1[7]
코스프레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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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트1
수트2[9]

5.3. 외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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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생기기는 했지만 친척이자 영국 해군 원수이던 루이 마운트배튼 백작(오른쪽)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면 백작 쪽이 더 잘생겼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주로 인도에서 지상전 위주의 전선을 지휘했기 때문에 육군 장성으로 잘못 알려진 경우가 많으나, 그는 해군 장성 즉 제독이다. 참고로 현재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부군인 필립 마운트배튼의 외삼촌인 마운트배튼 백작은 1979년 IRA의 폭탄 공격으로 사망했다.

[1] 에드워드는 삼촌 앨버트 빅터 크리스티안 에드워드, 앨버트는 조부 앨버트 공, 크리스티안은 외증조부 크리스티안 9세, 조지는 잉글랜드수호성인 성 조지, 앤드루는 스코틀랜드의 수호성인 성 앤드류, 패트릭은 아일랜드의 수호성인 성 패트릭, 데이비드는 웨일스의 수호성인 성 데이비드에서 각각 따왔다.[2] 버티와 릴리벳은 조지 6세엘리자베스 2세의 애칭이다.[3] 참고로 BBC는 에드워드 8세의 아버지 조지 5세로부터 칙허장을 받아 만들어진 영국공영방송사다.[4] 조지 3세의 7남이다.[5] 조지 5세가 승하한 뒤 왕으로 추대되자 에드워드는 머리를 쥐어싸며 괴로워하는데 이건 왕으로서의 책임감에 압박을 느껴서가 아니라 '이제 좋은 날은 다 갔구나...'라는 한심한 이유에서였다. 부왕이 치매끼를 보이며 오늘내일하는 와중에도 동생 앞에서 "그 꼰대 앞으로 더 살 수 있는데도 나한테 양위하려고 지금 쇼하는거임"이라 막말을 할 정도.[6] 에드워드 8세 스타일이라곤 하지 않는다.[7] 미국 방문 당시 사진[8] 일본 방문 당시 일본 사진[9] 1970년 리처드 닉슨을 만난 자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