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리 섬 전투
1. 개요
미얀마 서부 람리 섬에 비행장을 건설해 미얀마 본토 진출의 교두보로 삼으려했던 영국군과 람리 섬을 점령하고 있던 일본군 사이에서 제2차 세계대전 말 1945년 1월 21일에서 2월 22일까지 벌어진 전투.
참고로 람리 섬은 미얀마어로는 양볘 섬이라고 한다. 다만 이 일대는 아라칸어 사용 지역이다.
2. 전투의 전개
[image]
람리 섬을 폭격하는 연합군의 B-24 폭격기(이미지 출처)
1945년 1월 14일, 람리 섬에 주둔한 일본군 병력이 해안에 포대를 설치하는 것을 확인한 영국군은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 1번함 퀸 엘리자베스를 필두로 한 영국 해군 함선들의 함포사격으로 람리 섬을 공격한 후 상륙하는 작전을 세웠고, 본격적인 전투는 1월 21일에 영국군의 람리 섬에 대한 함포사격과 폭격기 공습으로 시작되었으며 21일 9시 42분에 제 71 여단이 람리섬 서부 '''카야크퓨'''(캬우크피우, Kyaukpyu)의 해안에 상륙한 것으로 영국군의 람리 섬 상륙이 시작되었다.
1월 26일에는 '''산키 작전'''(Operation Sankey)으로 람리 섬 남부 약 10km 지점에 있는 체두바(Cheduba) 섬에 영국군 제3 코만도 여단이 상륙했으나 체두바 섬에는 일본군이 주둔하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체두바 섬을 점령한다.
람리 섬에 상륙한 영국군들은 1월 30일에서 31일까지 일본군들을 몰아 붙였고, 전황의 악화에 람리 섬에 주둔한 제121 연대의 본대로 미얀마 본토에 주둔한 제54 사단의 사단장 미야자키 시게사부로 중장이 람리 섬에서의 철수를 명령하고 후퇴를 지원할 수송선들을 람리 섬으로 보내지만 람리 섬 근해에 주둔한 영국 해군에 의해 다수의 수송선들이 격침당한다. 이에 람리 섬을 봉쇄하고 있는 영국 해군 함선들을 일본 육군 항공대 64전대가 공격해 보기도 했으나 람리섬에 안정적으로 수송선을 보낼수 있을만큼의 피해를 입히지는 못했다.
2월 18일, 선박을 통한 퇴각이 불가능하다고 여긴 람리 섬의 일본 육군은 어쩔 수 없이 람리 섬과 제54 사단이 주둔중인 미얀마 본토 사이의 16km 가량의 악취 나는 맹그로브 늪을 걸어서 건너게 되는데, 일본 육군이 늪지에서 헤매고 있을 때 영국군의 병력들은 늪지대를 포위하였다. 진창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일본 육군은 열병과 독충 등으로 약화되기 시작했고, 추격하는 영국군과 퇴각하는 일본군 사이에서 산발적으로 소규모 전투가 벌어져 대대장이었던 '''이노마타 치카라'''(猪股力) 소좌가 사망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람리 섬에 주둔한 약 900~1,000여명의 일본군 병력중 약 500여명만이 맹그로브 늪을 통과해 54사단에 합류하는데 성공했고, 영국군은 저항이 사라진 람리 섬을 2월 22일까지 봉쇄. 같은 날에 작전 종료를 선언하고 제22 동아프리카 여단을 람리 섬에 주둔시킨다.
3. 악어의 공격?
영국 해군 출신 과학자 브루스 라이트(Bruce Stanley Wright)는 자신의 저서를 통해 람리 섬의 바다악어들이 미얀마로 퇴각하는 수많은 일본 육군 병력을 공격하여 잡아먹었다고 주장하였다.
일본군이 악어에게 공격당해 대다수가 잡아먹혔다는 브루스 라이트의 증언은 1962년 발간된 'Wildlife Sketches Near and Far'에 수록되어 있지만, 이를 뒷받침할 만한 다른 기록이나 증언은 전혀 없을 뿐더러, 2001년 3월 게재된 논문인 '''『Man eating by estuarine crocodiles: The Ramree Island massacre revisited』'''에 따르면 람리 섬에서 악어가 일본군 병력을 공격하였다는 내용의 최초 작성자인 브루스 라이트는 버마 전역에 참전하였으나 이라와디 강 인근에 주둔했을 뿐. 람리 섬 전역에는 참전하지 않았고 악어의 공격 또한 직접 목격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어 해당 내용 자체에서부터 신빙성을 전혀 확보할 수 없는 수준이다."그 날(1945년 2월 19일) 밤은 해병대 보트에 타고 있던 그 어느 대원도 경험해본 적이 없을 정도로 끔찍했다. 검은 늪지에서 소총의 발사광은, 악어의 턱에 분쇄되는 부상병들의 고함소리와 함께 중단되곤 했다. 악어들이 움직이면서 내는 흐릿하면서도 살벌한 소리는, 지상에서는 좀처럼 들을 수 없는 지옥의 소리를 만들어냈다. 새벽녘 독수리들이 악어들이 먹다 남은 것들을 처리하기 위해 도착했다. '''람리 늪에 들어간 약 1,000명의 일본 육군 중 겨우 20여 명만이 살아서 발견되었다."'''
That night [of the 19 February 1945] was the most horrible that any member of the M. L. [motor launch] crews ever experienced. The scattered rifle shots in the pitch black swamp punctured by the screams of wounded men crushed in the jaws of huge reptiles, and the blurred worrying sound of spinning crocodiles made a cacophony of hell that has rarely been duplicated on earth. At dawn the vultures arrived to clean up what the crocodiles had left.... '''Of about one thousand Japanese soldiers that entered the swamps of Ramree, only about twenty were found alive.'''
-영문 위키피디어 『Battle of Ramree Island』 문서에서 발췌.
영국군 소속의 버마 상훈 위원회인 버마 스타 협회(Burma Star Association)에서도 람리 섬에서 악어의 공격이 있었다는 것만 인정했을 뿐, 일본군이 악어에 의해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고 있다. 또한 영국군의 공식 보고서에도 악어의 공격으로 인해 일본군이 피해를 입었다는 내용은 없을 뿐더러, 당시 현장의 일본군이나 현지주민의 증언에서도 관련 내용을 찾아볼 수 없으며 1965년에 발간된 영국의 공식 역사책인 '버마의 재정복'(The Reconquest of Burma)에서도 당시 장소가 악어로 들끓는 늪지대란 내용만 있고, 악어의 공격 같은 이야기는 나와있지 않다.
또한 람리 섬 전투 당시 람리 섬에 주둔했던 일본군 병력인 보병 제 121연대의 보충대인 제 47부대에서 기관총병으로 복무하며 람리 섬 전투에 참전한 일본군 출신자인 '''오하라 히로미'''(小原 博美)도 람리 섬 탈출 당시의 악어 공격에 대해 부정하며 "람리 섬에 주둔할 때 거북은 본 적 있지만 악어는 본 적이 없다"고 덧붙인 것은 물론,[2] 보병 제 121연대 자체도 각각 보병 제121 연대 제3 기관총중대(歩兵第121連隊第3機関銃中隊), 1944년 보충된 보충병으로 구성된 보병 제121 연대 통신중대(歩兵第121連隊通信中隊), 보병 제121 연대 11중대(歩兵第121連隊第11中隊) 등 3개 중대 출신자로 구성된 전우회 3개의 존재가 확인되는만큼 브루스 라이트의 '''"일본군 20여명만이 생존했다"'''는 서술은 사실과는 크게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게다가 2016년 말에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방영한 6부작 다큐멘터리 'Nazi weird war two'[3] 의 4편인 'Crocodile Massacre'[4] 에서 자문을 구한 악어 농장 측에서는 악어가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자기 체중의 5~7%만을 먹기 때문에 1,000여명에 가까운 사람을 먹어치우기 위해서는 '''최소한''' 몸길이 5m 이상의 악어 1,500마리 가량이 있어야 하지만, 넓은 영역을 가지고 사는 악어가 제한된 공간에 그렇게 많이 모일 수는 없다고 말하는 등. '''브루스 라이트의 주장은 악어의 생태로서도 불가능한 일이라고 증언했다.'''( )[A]
영국의 역사학자 프랭크 맥린(Frank McLynn)는 자신의 저서 '''The Burma Campaign: Disaster into Triumph, 1942-45'''에서 "만약 브루스 라이트의 주장대로 일본군을 학살한 악어가 수천 마리였거나 혹은 일본군 수백 명을 잡아먹거나 죽일 정도로 많았다면 그 늪지대의 생태계는 훨씬 이전에 파괴된 상태였을 것"이라고 말하였으며, 위키피디어에 따르면 현재 역사학자들은 이 악어에 의한 학살 이야기를 도시전설 정도로 취급하고 있다고 한다.
이렇듯, 람리 섬 전투 당시 바다악어가 일본군 병사들을 공격했다는 일화에 대한 근거는 람리 섬 전투에 참전하지 않았고 자신이 주장한 사건을 직접 목격한 것 조차 아닌 브루스 라이트의 서술 '''단 하나'''뿐으로서 신빙성이 부족한데다 브루스 라이트의 주장과는 다른 실제 람리 섬 전투 참전자의 증언 및 많이 먹지 않는데다 넓은 영역을 가지고 서식하는 바다악어의 습성, 상위 포식자인 바다악어가 과하게 많을 시 발생했을 생태계의 문제 등 이를 방증하는 근거 또한 충분히 존재하는만큼 브루스 라이트가 주장한 람리 섬 전투당시 악어 공격에 대해서는 '''과장''' 내지는 사건 자체의 '''허위성'''을 검토하는 등. 다양한 시점에서 살펴보아야할 재고(再考)의 필요성이 있다.
그러나 본 문서 또한 오랫동안 악어의 공격을 단정하는 투와 더불어 사실과는 다른 단순 흥미 위주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었고,[5] 악어의 공격에 대한 반론적 근거가 작성된 이후의 본 문서를 참고하여 작성·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국내의 몇 매체에서도 브루스 라이트의 주장과 후술된 람리 섬 전투의 기네스북 등재만을 내세우고 이를 반증하는 근거를 배제하여 '''악어의 공격을 단정하는 것에 치우친 확증편향적인 서술을 보이고 있는만큼,''' 람리 섬 전투의 취급에 대해서는 주의를 요한다.[6]
4. 기네스북 등재
1999년도 기네스북에 『동물에 의한 가장 큰 재앙(The Greatest Disaster Suffered from Animals)』이라는 기록으로 등재되었다.
상기된 2016년 말에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방영한 6부작 다큐멘터리 'Nazi weird war two'의 4편인 'Crocodile Massacre'에서 2017년도 기네스북에 '''악어 공격으로 인한 가장 많은 사람의 사망?'''(Most human fatalities in a crocodile attack?)이라는 기록으로 람리 섬 전투가 등재되어있는 것이 방영되었는데, 해당 다큐멘터리에서 일부가 공개되었던 2017년도 기네스북에서는 람리 섬 전투에 대해 '''"하지만 그 일화 내지는 적어도 사망자의 규모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7] 라고 기재해 악어의 공격이나 그 규모를 완전히 확정하지는 않고 있으며 한국어판 2017년도 기네스북에서 해당 부분은 "그런데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에서 새롭게 조사해보니 이 이야기는 신빙성이 떨어지거나 적어도 죽은 사람의 숫자가 과장되었다는 결론이 나왔다."[8] 라고 번역되어 있다.
5. 참고 문헌
- 영문 위키백과 Battle of Ramree Island
- 한국어 위키백과 람리섬 전투
- 일본어 위키백과 ラムリー島の戦い
- 전장체험사료관(戦場体験史料館) 오하라 히로미(小原 博美) 인터뷰 기록(http://www.jvvap.jp/ohara_hiromi.html)
- [A]
- 내셔널지오그래픽 방영 다큐멘터리 Crocodile Massacre 및 해당 다큐멘터리 방영분 일부( )[A]
- 기네스 세계기록 저. 공민희, 엄성수 역. 기네스 세계기록 2017: Guinness World Records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