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 보르하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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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o Borchard, Лев Боргард (1899.3.31 ~ 1945.8.23)
1. 개요
러시아-독일의 지휘자. 러시아어 풀네임은 레프 르보비치 보르가르트(Лев Львович Боргар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독일의 대부분의 지휘자들이 연주금지를 당하면서 일천한 경력에도 불구하고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임시 지휘자가 되었으나 몇주 후 오발 사고로 타계했다.
2. 생애
모스크바에서 독일계 러시아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자랐고,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 배웠다.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자 21세 때 러시아를 떠나 독일 베를린으로 이주했고 후에 독일 국적을 취득했다.
1920년대 후반에 합창 지휘자와 크롤 오페라 극장 음악 감독이었던 오토 클렘페러의 부지휘자로 일하면서 음악 경력을 시작했다. 곧 나치가 집권하게 되면서 베를린 음악계에 커다란 변화가 닥치는데, 베를린 국립 가극장의 브루노 발터, 베를린 시립 가극장의 에리히 크라이버, 베를린 크롤 가극장의 오토 클렘페러 등 여러 지휘자들이 줄줄이 베를린을 떠나 해외로 망명하게 된다. 당시 음악의 중심지였던 베를린은 갑작스런 지휘자난에 처하게 되었고 이러한 상황은 보르하르트에게 큰 기회가 되었다. 1933년에 보르하르트는 베를린 필을 처음 지휘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베를린 필의 정기음악회를 지휘하는 위치의 지휘자는 아니었으며, 베를린 필과 베를린 국립 관현악단 등에서 주로 가벼운 곡들을 위주로 선곡하는 대중 음악회나 현대음악 연주회에 출연했다. 그러다가 나치 집권 후 현대음악을 옹호하고 좌파에 동정적이라는 이유로 '달갑지 않은 인물'로 찍혔다. 1937년 이후 독일 내에서는 지휘 활동을 거의 중단하다시피 했다.
이후 역시 비슷한 이유로 나치 정권 하에서 핍박받았던 작곡가 보리스 블라허의 오라토리오 '대 이단심문관'의 대본을 집필했고, 국외에서 객원 지휘를 하거나 지휘 강의를 하는 등의 활동으로 근근이 생계를 꾸려갔고, 2차대전 중에는 같은 집에서 동거하던 언론인 겸 작가 루트 안드레아스-프리드리히와 함께 베를린에 남아 있던 유대인들을 숨겨주고 의식주를 제공하던 반체제 비밀 결사인 '에밀 아저씨(Onkel Emil)'를 조직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를 비롯한 대부분의 지휘자들이 연합국으로부터 연주 금지 처분을 받게 되었다. 베를린 필은 다시 연주 활동을 재개하려 했으나 섭외 가능한 지휘자가 없었다. 브루노 발터, 조지 셀 등 해외에 있는 지휘자들에게도 닥치는대로 SOS를 청했으나 당시 베를린 필이 제공할 수 있었던 쥐꼬리만한 개런티로는 비행기 삯도 나오지 않았으므로 모두 거절당했다. 결국 베를린 필은 당시 베를린에 거주하고 있던 레오 보르하르트를 섭외하여 연주회를 재개하기로 했다.
1945년 5월 26일 영화관인 티타니아 팔라스트에서 보르하르트의 지휘로 베를린 필의 종전 후 첫 공연이 열렸다. 프로그램은 멘델스존의 극음악 '한여름밤의 꿈'서곡과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협주곡 제5번(악단 단원 울리히 그렐링 협연),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제4번이었다. 당시 보르하르트는 나치에 박해받고 저항 운동을 한 경력과 모국어인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던 점 때문에 소련군 군정 당국의 신뢰를 받았다. 공연 직후에는 베를린 시청과 베를린 주둔 소련군 사령관 니콜라이 베르사린의 재가를 받아 베를린 필하모닉의 '임시' 지휘자가 되었다. 그러나 보르하르트는 지휘하는 것 말고는 악단에서 실질적으로 아무런 권리를 행사하지 못했고 단원을 뽑고 해고하는 일에도 관여하지 못했다.
당시 재정난에 처해 있던 베를린 필은 거의 매일 같이 닥치는대로 이곳저곳에서 공연을 열었다. 보르하르트는 사망할 때까지 짧은 기간 동안 총 22회의 공연을 지휘했다. 보르하르트 외에 당시 베를린 필 직속 담당 장교가 된 미군 장교 존 비터도 베를린 필을 자주 지휘했다. 보르하르트는 기존의 레퍼토리들 외에 나치 집권기 동안 공연되지 못한 멘델스존 등 유대인 작곡가들의 작품이나 러시아 작품들도 리바이벌했다.
1945년 8월 23일 공연을 마치고 친분이 있던 영국군 장교와 저녁 식사를 한 뒤 장교의 차를 얻어타고 집으로 오던 중 총격으로 사망했다. 사실 그 날 저녁 소련군과 미군 사이에 작은 실랑이가 있어서 점령군 지역 경계에서 검문이 강화되었는데, 미군 초병이 검문을 위해 차를 세우라고 지시했지만 히치하이킹을 시도하는 사람으로 오인해 그냥 지나쳤고, 미군 역시 영국군 차량 표식을 알아보지 못해 총격을 가했다. 동승한 운전자와 보르하르트의 동거녀 안드레아스-프리드리히는 무사했지만, 보르하르트는 미군이 쏜 여섯 발의 총알을 맞고 즉사하고 말았다.
바로 그 다음날 리허설을 하러 모인 단원들은 보르하르트의 사망 소식을 듣고 경악에 빠졌고, 베를린 필을 담당하던 미군 장교 존 비터가 주축이 되어 임시 지휘자를 구하던 중 루마니아 출신의 신인 지휘자 세르주 첼리비다케를 급히 섭외해 추모 연주를 맡겼다. 첼리비다케는 곧 보르하르트의 뒤를 이어 임시 지휘자가 되었다.
음반으로는 1930년대에 텔레풍켄에서 녹음한 각종 관현악 소품과 오페라 아리아가 있고, 종전 후 가진 공연들 중 베버의 오페라 '오베론'서곡과 차이콥스키의 환상 서곡 '로미오와 줄리엣', 알렉산드르 글라주노프의 교향시 '스텐카 라진'의 녹음이 남아 있다. 또 1930년대에 베를린 국립 관현악단을 지휘해 베토벤홀에서 녹화한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오페레타 '박쥐'서곡과 왈츠 '당신과 당신', 트리치 트라치 폴카의 영상물이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