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 채프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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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레이 채프먼(Ray Chapman)
출생~사망
1891년 1월 15일~1920년 8월 17일
출신지
미국 켄터키
포지션
유격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 입단
1912년 클리블랜드 냅스(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입단
소속 팀
클리블랜드 냅스(1912~1920)
1. 개요
2. 프로 시절
3. 사망
4. 기타


1. 개요


MLB의 야구선수로 풀 네임은 레이먼드 존슨 채프먼(Raymond Johnson Chapman). 프로야구선수 중 유일하게 몸에 맞는 공으로 인해 '''사망'''한 선수이다.

2. 프로 시절


1912년 클리블랜드에 입단한 그는 빠른 발과 뛰어난 작전 수행 능력으로 천재라고 불릴 정도로 뛰어난 야구 선수였다. 1917년 67개의 번트를 대며 한 시즌 최다 신기록을 썼고, 1980년까지 팀 최다 기록이었던 52개의 도루를 기록했다. 1918년엔 아메리칸 리그 득점과 도루 부문 1위에 올랐다.
1920년 캐서린 데일리라는 여성과 결혼하였다. 결혼 후 가정 생활에 더욱 충실하기 위해 은퇴를 고려할 정도였다고. 그러나 은퇴하기 전, 그의 선수 생활은 후술될 사고로 세상을 떠나면서 끝나버리고 만다.

3. 사망


1920년 8월 16일, 뉴욕 양키스와의 경기에서 5회초 선두 타자로 들어선 레이 채프먼은 볼카운트 1-1의 상황에서 투수 칼 메이스(1891~1971)의 공에 왼쪽 관자놀이를 강타당했다. 당시엔 헬멧의 착용이 의무화되어 있지 않아 충격은 더욱 컸고, 머리를 맞고 튄 공이 투수 앞까지 굴러갔다고 한다.[1] 피를 흘리며 쓰러진 채프먼은 즉시 뉴욕 병원으로 후송되었지만 결국 12시간 후인 8월 17일 오전 4시, 두개골 골절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29세. 야구 역사상 전무한 몸에 맞는 볼로 인한 사망 사고였으며 사후 오하이오 주클리블랜드의 레이크뷰 공동묘지(Lake View Cemetery)에 안장되었다.
현장에서는 겁쟁이들이나 쓰는 거라며 무시당한 야구 헬멧을 의무화하자는 목소리가 커졌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겁쟁이 드립이 유효하던 mlb에서 헬멧 착용은 의무화하지는 않고, 필요한 선수들만 쓰는 정도였다가 1971년에 의무착용이 규정되었다.
또한, 스핏볼이 금지되었다. 칼 메이스가 채프먼을 맞춘 공이 바로 스핏볼.[2] 공이 워낙 변화무쌍하다보니 타자를 맞출 위험이 있다 해서 완전히 금지되었고, 이후로도 변형된 부정투구들도 함께 금지되는 계기가 되었다. 거기다 경기 중 공이 더러워지면 타자가 볼 수 없으니 손상된 공은 심판이 즉시 교체해줘야 한다는 규칙이 신설되었다.
채프먼의 사망 이후 클리블랜드 선수들은 그를 추모하는 뜻으로 검은색 팔 밴드를 착용하고 경기에 임했다. 채프먼의 빈 자리를 메꾼 유격수는 당시 신인이었던 조 슈얼(1898~1990). 조 슈얼은 훗날 베테랑 위원회를 통해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오르게 된다.
이후 당시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홈 구장인 리그 파크엔 그를 추모하는 명판이 걸렸다. 명판 맨 밑에는 "He lives in the Hearts at all who knew him."(그는 그를 아는 모두의 가슴 속에 살아 있습니다.)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클리블랜드가 홈 구장을 옮기며 클리블랜드 스타디움으로 명판이 옮겨졌지만, 모종의 이유로 명판이 사라졌다. 그리고 사라진 명판은 2007년 프로그레시브 필드의 창고 청소 중 발견되었다. 몇 년 동안 창고에 박혀있어서 녹이 슬고 글자를 알아보기 힘든 수준으로 변질된지라 일부 보수 작업을 한 끝에 다시 프로그레시브 필드에 걸리게 되었다.
2006년 클리블랜드 명예의 전당에 추대되었다.

4. 기타


채프먼의 머리를 맞힌 투수 칼 메이스는 역대급 언더핸드 투수였다. 20승 이상 기록한 시즌이 5차례로 통산 202승 126패 ERA 2.62를 기록했다. 역대 메이저리그 투수 중 38위로 평가될 만큼 뛰어난 투수였지만, 이 사건때문에 명예의 전당 후보에도 오르지 못했다.
채프먼은 메이저 통산 334개의 희생번트를 기록했다. 역대 6위에 해당하는 기록.
1917년 67개의 희생번트를 성공시키며 단일 시즌 기준으로는 최다 희생번트를 성공한 선수이기도 하다.
타이 콥이 자신과 친구로 여겼던 몇 안되는 선수 중 하나였다.
월터 존슨에게 '''2구''' 삼진을 당하기도 했는데, 존슨에게 스트라이크 두 개를 허용한 이후 존슨의 공이 너무 빨라 도저히 칠 수 없다고 생각해 심판에게 '나머지 볼 카운트는 알아서 해 달라.'라는 말만 남긴 채 더그아웃으로 돌아가버렸기 때문이다. 참고로 타자가 타석을 벗어나면 패널티로 스트라이크를 부여하는 규정이 존재하기는 한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1955년 7월에 열린 서울특별시 고교야구 리그전에서 선린상고 소속의 최운식 선수가 빈볼을 맞고 사망한 것이다.
[1] 당시 정신이 없었던 투수 칼 메이스는 공을 보고 투수 앞 땅볼인 줄 알고 1루로 송구했다고.[2] 칼 메이스가 스핏볼을 주력으로 하기는 했지만 이때의 공은 속구라는 말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