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현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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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로마의 최전성기를 이끈 '''5'''명의 '''현'''명한 황'''제'''를 지칭하는 표현. 영어로는 Five good emperors라고 한다. 여러 지표를 종합하여 보았을 때 단연 최전성기라 일컬어진다. 한마디로 서양판 요순시대.
그 계보는 네르바-트라야누스-하드리아누스-안토니누스 피우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로 이어진다.
오현제 이후 로마는 황제 난립기와 세베루스 왕조, 외세의 침입 등 소위 '위기의 3세기'라고 불리는 혼란기를 거치며 서서히 기울어간다.
2. 평가
만약 누군가에게 역사상 인류가 가장 행복하고 번영했던 시기를 골라보라고 한다면, 그는 망설임없이 도미티아누스의 죽음부터 콤모두스의 등극 사이의 시기를 고를 것이다.
로마의 역사를 연구해 보면 우리는 어떻게 좋은 정부가 탄생하는지를 알 수 있다. 티투스를 제외하면 혈연 관계의 세습을 통해 제위에 오른 황제들이 모두 암군이었던 반면, 네르바부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 이르기까지 양자 관계로 제위에 오른 황제들은 모두 명군이었다. 그리고 양자 대신 혈연 관계에 의한 세습이 다시 시작되자마자, 로마의 붕괴는 재개되었다.
티투스, 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그들을 보호해 줄 친위대나 군대가 필요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그들의 올바른 삶, 백성들에 대한 사랑, 원로원의 지지를 바탕으로 보호받을 수 있었다.
종합적으로 본다면 본인 스스로의 통치는 물론, 후임자에 대한 조치 및 배려도 충실한 모범적인 권력 승계 및 발전 시기라고 보면 된다. 이런 모범적인 국가 운영이 가능했던 이유를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은 각 황제들의 공통 사항을 들 수가 있다.모든 것이 너무나도 조용하고 완벽해서, 도저히 쓸 게 없다.
- 전 황제의 양자로 들어와서 황제가 됐다.
- 전원이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황제다.
- 일반 대중들이 문제 있는 황제로 여기지 않았다.
- 네르바를 제외하면 자신의 통치 철학을 실현하기 충분한 시간을 얻었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제외하면 아들이 없다.[1]
- 네르바를 제외하면 후임 황제를 담당할 사람에 대한 교육을 충실하게 실행했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후임자 콤모두스)를 제외하면 후임자도 유능하며 제국을 잘 통치했다.
3. 옥의 티
세상에 완벽이라는게 존재할 수 없다시피 로마 제국 쇠퇴의 원인은 다름아닌 오현제 시기부터 쌓여왔다.
내적으로 자잘한 여러 문제들이 있기는 했지만 제일 큰 문제는 외부의 적, 즉 '''게르만 또한 엄청나게 성장하던 시기'''였다는 것. 트라야누스 황제가 다뉴브 강 이북의 다키아왕국을 멸망시키며 게르만족을 약화시키긴 했지만 애초에 게르만 족 자체가 한 곳에 전부 모인 것도 아니고 여러 세력으로 나뉘어 넓게 퍼져있었던 만큼 이 승전 하나로 게르만 족 전체에게 영향력을 끼쳤다고 보긴 힘들다. 오히려 이 승리를 제외하면 로마는 대대적으로 게르만족과 충돌하지 않고 내실을 다지는데 집중했고, 이 시간동안 게르만 족은 (로마 제국의 표현에 따르면 '먼 게르만 족'과 '가까운 게르만족'들을 불문하고)서로 전쟁과 통합을 거듭하며 강병을 육성함과 동시에 세력을 키워나갔다.
이는 다른 시기도 아닌, 오현제 통치시기의 최후의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치세때 터졌다. 내적으로는 강병을 기름과 동시에 세력이 커졌고 외적으로는 로마에게 효과적으로 맞서는 법을 고려하면서 전술을 발전시켜 로마 제국 방어선의 허점들을 공략하는 식으로 로마 제국을 밀어붙였다. 로마는 결국 변하지 않은 수비 방식으로는 게르만족을 효율적으로 막을수 없음을 인정해야만 했고 차라리 하나로 뭉쳐 국경 밖에서 그들과 교전을 펼치는 식으로 소모전양상으로 흘러가게 둘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이렇게 전선을 늘리면서 직접 다뉴브 강 전선까지 향했다가 그곳에서 병사하고 만다. 이전 오현제들 대부분이 로마 제국 내에서 타계한 것과 달리 국외에서 죽었으며 이후로 재임한 황제들은 이전까지에 비해 단순한 자연사나 병사만이 아닌, 전사,암살,의문사 당하는 횟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오현제 시기와 3세기의 위기 사이의 70여년 간, 노예 공급이 감소하던 사회 구조는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군대 개편과 방어선 재구축 등을 바탕으로 3세기의 위기 당시 게르만족에게 급속도로 털리는 상황은 유능한 황제였다면 최소화시킬 수는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70여년도 일부 황제들의 통치 시기를 제외하고는 내전으로 점철된 시기였다.
다만 그렇다고 오현제들을 외세를 무시했다며 뭐라하기도 힘든게, 이들이 로마의 내실을 다진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이 당시엔 게르만족이 그렇게 똘똘뭉쳐 내려올것이라곤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었다. 애초에 네르바는 재위기간이 짧아 뭐라 따지기도 힘들었고 트라야누스는 당장 직면한 위협인 다키아를 멸망시키고 군사적 확장과 토목, 복지사업을 진행시키는데 전념하는게 한계였으며 하드리아누스는 급진적인 성장을 추구하던 트라야누스의 방향과 반대로 제국을 순행하며 향후의 위협에 대비해 착실히 내실을 다졌고 타지에서 사망한 장본인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황제가 되자마자 파르티아 문제, 안토니누스의 역병, 마르코만니 전쟁들에 대처하느라 갖은 고생을 해야 했다. 즉 이들은 일을 아예 안한게 아니라 '''해야할 일이 너무 많아서''' '북방 게르만 족이 뭉치면 위협적일수 있다.'라는 작은 가능성까지 일일히 살펴볼 정도의 여력이 안되었던 것이라 뭐라 따지긴 힘들었다. 굳이 따지면 안토니누스 피우스 치세 당시 '''개혁조차 이루어지지 않은''' 말그대로 너무 조용히 흘러갔던 치세를 비판했으면 비판했다.
[1] 각 오현제가 전 황제의 양자로 들어와서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아우렐리우스의 후임자로 문제의 콤모두스가 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단순히 아버지로서의 정이 아니라, 아우렐리우스로선 정당한 친자 계승자인 콤모두스를 배제하고 다른 양자를 들여서 계승하는게 불가능했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