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트루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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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이탈리아 반도 북부 지역에 존재하던 민족. 한때 이탈리아 북부와 중부, 코르시카 섬까지 지배했고 고대 그리스와 함께 고대 로마에 많은 영향을 끼쳤지만 아직까지 비밀이 많은 문명이다. 기원전 8세기에서 기원전 1세기에 거쳐서 이탈리아 북부에서 많은 도시국가를 건설하였다.
그리스어로는 티레니아(Τυρρηνία, Tyrrēnía)라고 부른다. 에트루리아인은 스스로를 라스나(𐌓𐌀𐌔𐌍𐌀, Rasna)라고 불렀다. 로마인은 에트루리아인을 에트루스키(Etrusci) 또는 투스키(Tusci)라 부르고, 에트루리아 지방은 에트루리아 혹은 투스키아(Tuscia)라고 불렀다. 이것이 나중에 토스카나라는 이름으로 현대까지 남게 된다.
2.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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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도 오래된 민족이라 기록이 확실하지 않다. 여러모로 논쟁이 많다. 이탈리아 반도 중북부에 있었던 빌라노바 문화(Villanovan culture)가 기원으로 강력히 추정된다.
빌라노바 문화는 이탈리아 중북부 등을 중심으로 성립된 초기 철기시대 문화로 중앙유럽의 언필드 문화의 분파이다. 빌라노바 사람들은 이탈리아 반도에 철기 기술을 전수했으며, 장례법으로 화장을 지냈고 시신을 태운 재를 독특한 이중 원추 모양을 한 유골 항아리에 닮아 묻었다. 유골함은 토기 혹은 청동제였다.
향후 빌라노바 문화는 에트루리아 문명이 근동, 그리스와 구별되는 독특한 요소를 가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아나톨리아의 리디아에서 유래한 종족이라고 하나, 디오니시오스는 에트루리아인은 이탈리아의 토착민족이라고 언급한다. 2007년의 유전자 조사 결과 에트루리아인들은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기근을 피해 이주해 왔다는 주장이 나왔는데, 이는 카프카스 등지에서 주로 확인되는 Y 염색체 하플로그룹 G의 비중이 높다는 데 근거한 것이다. 그 반면 2013년 자료에서는 mtDNA 분석 결과 아나톨리아인과의 유전적 연관은 6~7천 년 전에나 있었으므로 에트루리아 문명과의 연관은 없을뿐더러, 고대 에트루리아인의 유전자가 아나톨리아인보다는 현대 유럽인과 더 가깝다고 보았다.
이 두 해석의 차이는 근본적으로 Y 염색체에 의한 하플로그룹 분석과 mtDNA에 의한 하플로그룹 분석의 성격 차이 때문에 발생한다. Y 염색체는 부계로 유전되는 반면, mtDNA(미토콘드리아 DNA)는 모계로 유전된다. 임신과 육아 등의 문제 및 신석기 시대 이후 사냥-채집 역할의 분화로 인해 정복이나 이주 등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은 일반적으로 남성이기 때문에, Y 염색체 자료는 정복이나 이주 등을 더욱 민감하게 반영하는 반면 mtDNA 자료는 비교적 보수적이고 토착적인 성향을 많이 반영한다. 특히 유럽에서 순동기~청동기 시대 이주해온 하플로그룹 R 계통의 Y 염색체 자료에 비해 mtDNA 자료가 신석기 시대 이후 정착한 토착 유럽인의 체질을 더욱 많이 반영한다는 것은 에트루리아뿐만 아니라 전 유럽에 걸쳐 일반적인 현상이다. 따라서 두 자료는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소수의 외래 정복자가 우위를 점하였으되 실제 구성원 다수는 토착민이었다는 해석을 지지하는 상보적인 자료일 수도 있다. 그것이 아래 언어 자료의 현황과도 부합하는 면이 있고.
3.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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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트루리아어는 라이티아어(Rhaetic)[4] , 렘노스어(Lemnian)와 함께 티레니아어족(Tyrsenian languages)에 속한다고 보기도 한다. 이 중 렘노스어는 에트루리아의 아나톨리아 기원설을 얘기할 때 종종 거론된다. 일단 에트루리아어는 인도유럽어족은 아니다.[5]
에트루리아어는 에트루리아 문자로 된 금석문 등을 통해 확인이 가능하다. # 하지만 해독은 불가능할 가능성이 높다. 물론 문자는 그리스 문자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라틴 문자의 직계 조상이므로 어느 정도 쉽게 읽을 수는 있다. 그러나 에트루리아어는 현대에 존재하지 않는 어족에 속하기 때문에 일부 어휘를 제외하고는 언어학적인 추측만 가능하다. 페니키아어와 비교할 수 있는 명판이 있으나, 이 명판도 에트루리아어의 이해에 큰 기여를 하지는 못하는 수준이다. 각종 금석문에는 라틴어에 있는 일부 어휘들이 발견된다. 이를 통해 라틴어에 에트루리아어 어휘가 많이 차용되었고, 양 민족집단 간에 문화적 교류와 혼종이 활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외에 고유명사와 기수법이 알려져 있다. 또한, 음운이 그리스어에 비해 적은 편이었다는 것까지 내다 볼 수 있다.
4. 문화
이탈리아 토착 문화로 에트루리아 이전에 발생한 테라마레 문화, 빌라노바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페니키아, 키프로스 등 서아시아의 영향이 있었고, 그리스인이 남부 이탈리아에 정착하면서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분묘 건설에 많은 공을 들였는데, 에트루리아 문화는 주로 분묘를 통해서 발견되고 있다.
에트루리아 문화에서는 건축, 조각, 회화, 공예 등의 예술이 높이 평가되고 있다. 전성기에는 조각, 회화 등에서 생동감 있는 표현이 강하다는 점이 현대에 높이 평가받는다. 조각으로는 아레초에서 발견된 키마이라 상이 유명하다.
당시 주변국가와는 달리, 여성의 독립적인 인격을 인정했다. 여성은 자신이 원하는 남성과 성행위를 할 수 있었고, 연회나 운동경기에서도 동등한 대우를 받으며 참가할 수 있었다. 남녀 불평등의 문화를 가진 그리스인들에게는 '''성행위가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고, 여성들이 집에서건 밖에서건 완전히 다 벌거벗고 생활하며 돌아다니는''' 에트루리아의 상황이 매우 충격적이었다. 이 때문에 로마인들과 그리스인들은 에트루리아 문화를 타락했던 것으로 보았다. 에트루리아인들에게 성적인 행위는 생명, 죽음, 내세와 관련있다고 추정할 뿐이다. 하지만 헤로도토스는 이런 에트루리아 여성들의 자신감있는 모습을 찬양하기도 했다.
로마에 비해서는 가정 내에서 어머니의 권위도 상당히 존중된 것으로 생각된다. 에트루리아 전통양식의 비석에서는 아버지뿐만이 아니라 어머니의 이름도 함께 기록되었는데 로마에서는 이런 경우가 상당히 드물었기 때문.
5. 신화
에트루리아인의 신앙은 로마와 마찬가지로 다신교였다. 로마인들은 에트루리아인들이 자신들보다 신을 더 중시한다고 평가했다. 대체로 그리스 신화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아왔고, 로마 신화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크게 에트루리아 토착신과, 로마 신화와 유사한 신, 그리스에서 유입된 신으로 나누어진다.
에트루리아에서는 사자 숭배가 번성했고, 죽은 자의 무덤을 생전의 집과 똑같이 만들며 관은 사자의 모습을 생생하게 조각하여 장식하였다. 이 때문에 많은 분묘가 에트루리아의 문화를 알려주는 유적으로 남게 되었다.
6. 정치
에트루리아 족의 도시국가들은 통합적인 국가를 만들지는 않았지만, 12도시 연맹이라는 느슨한 연맹체를 형성하였고 제사, 군사 등에서 협력하였다. 타르퀴니아, 키우시, 베이오, 체르베테리(카에레), 아레초 등이 유력한 도시이다.
7. 고대 로마와의 관계
에트루리아는 주로 고대 로마와 관련하여 언급된다. 로마가 왕국이었던 시절에는 에트루리아가 영향력을 강하게 행사했는데 로마 7왕 가운데 5대왕부터 7대왕까지 3명이 에트루리아 혈통이었으며, 실제로는 더 많았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심하게 보면 로마는 그냥 '''라틴 족 도시 가운데 에트루리아 앞잡이 노릇하던 도시''' 정도로 보기도 한다. 어쨌든 에트루리아와 교류가 굉장히 활발히 진행되어 로마 문화에 에트루리아의 색체가 짙게 베이게 되었다. 예를 들면 로마의 대표적인 복식으로 인식되는 토가도 에트루리아인들의 의상에서 유래되었고, 이름 짓는 법도 에트루리아의 작명법에서 유래했고, 아치형 건축도 에트루리아에서 먼저 시작된 것을 로마인들도 받아들인 것이다.
하지만 로마가 강성해지면서 에트루리아의 도시들을 세력으로 압도하게 되었고, 결국 에트루리아의 도시들은 차례차례 로마에 복속되어 로마의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되었으며, 이후 시간의 경과에 따라 로마에 동화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에트루리아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은 만큼 에트루리아 문화를 상당히 존중한 편이었고 특히나 점술 등에 관해서는 상당한 후대에 이르기까지 로마인들이 에트루리아로 유학하기도 했으며 그들의 철학체계와 로마와의 차이를 명확하게 인식했다. 여러 출토물과 기록을 고려했을 때, 에트루리아에 대해서 로마는 다른 동맹체보다도 좀 더 특별하게 인식한 것 같기도 하다.
고대 로마의 유명한 귀족 가문 중 하나인 리키니우스, 트레보니아누스, 케이오니우스 같은 공화정, 제정시대 귀족가문들이나 이름난 정치인, 장군 중 에트루리아계가 꽤나 있다. 폼페이우스, 카이사르와 함께 1차 삼두정치의 한 축이었던 크라수스, 옥타비아누스의 친구로 공화정 말, 제정 초기의 대표적인 명장으로 이름난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 그리고 루키우스 베루스, 푸피에누스[6] ,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 발레리아누스, 갈리에누스 등 로마 황제들이 그들인데 이들은 모두 에트루리아계 로마인들이었다.
여담으로 로마의 대표적인 시인 베르길리우스가 에트루리아계라고 한다. 베르길리우스의 풀네임이 '''푸블리우스 베르길리우스 마로'''인데 그의 성 '''마로'''가 에트루리아식 네이밍이라서 베르길리우스는 고대 에트루리아 귀족 가문의 후손으로 여겨진다. 전승에 의하면 베르길리우스 본인 스스로도 종종 자신을 에트루리아계라고 밝혔다고 한다.
8. 부활?
1801년 토스카나 대공국이 나폴레옹에 의해 잠시 단절되며 에트루리아 왕국이 건국되었다. 이 나라는 보르보네(부르봉) 가문 파르마 공작의 아들 루도비코 1세[7] 를 모셔와 왕으로 삼긴 했는데 프랑스의 괴뢰국에 지나지 않았고 1807년 프랑스에 병합. 물론 고대의 에트루리아와 같은 지역이라는 것 말고는 큰 연관성은 없다.
9. 비고
2019년에 한국의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에트루리아전이 열렸다.
[1] 대표적인 도시국가 벨즈나가 로마에 멸망. 일부 소도시들은 기원전 2세기까지 잔존.[2] 에트루리아인을 가리킬 때는 Etruscans.[3] h는 자료에 따라 붙는 곳도 있고 빠지는 곳도 있다.[4] 이 연두색칠 된 지역이 로마 시대에 라이티아(R(h)[3] aetia) 속주였다. 그래서 현대국가와 상관없는 역사적 맥락의 지명으로 쓰인다.[5] 렘노스어와 같은 어족으로 분류하는 이유가 음성학적 분석과 일부 단어가 에트루리아어와 유사성을 띄기 때문이고 렘노스어 역시 에트루리아어와 마찬가지로 읽을 수는 있으나 완전한 번역은 없다, 렘노스어가 새겨진 유물은 단 2종류만이 알려지고 있다.[6] 이 황제는 부계가문이 에트루리아계이지만, 모계는 그 유명한 클라우디우스 씨족 중 하나인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가이다.[7] 루도비코의 남계 후손이 룩셈부르크의 현 대공 앙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