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
1. 개요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후이자 헝가리 왕국의 왕비. "시씨"(Sisi)라는 별명으로도 알려져 있다.[2][3] 헝가리식 이름은 비텔스바흐 에르제베트(Wittelsbach Erzsébet).
비텔스바흐 가문의 바이에른'''에서의'''[A] 공작 막시밀리안 요제프와 바이에른의 초대 국왕인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의 딸인 바이에른 공주 루도비카의 차녀.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와 결혼하여 오스트리아의 황후가 되었다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가 이중제국 체제를 이루게 되자 오스트리아의 황후인 동시에 헝가리의 왕비가 된다. 그녀가 정치에 개입한 것은 단 한 번이었는데, 1867년 헝가리의 독립내각 구성을 강력하게 지지한 것이다. 이는 일전에 헝가리를 방문했을 때 헝가리인들이 보여준 환영에 큰 감명을 받아 헝가리를 매우 좋아했기 때문이다.
원래 프란츠 요제프의 아내가 될 이는 그녀의 언니 헬레네[4] 였다. 그러나 정작 네네와 맞선을 보던 날 프란츠 요제프는 어머니와 언니를 따라온 어린 시씨를 보고 사랑에 빠져 시씨에게 구혼한다. 그리고 결국 시씨는 이 청혼을 받아들여 2년 뒤 황후의 자리에 오른다.
그러나 바이에른에서 자유롭게 생활해온 시씨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엄격한 황실예법[5] 에 잘 적응하지 못해 방황했다. 여기엔 시어머니이자 이모인 조피 대공비와의 갈등의 영향도 있었다. 게다가 남편 프란츠 요제프도 워커홀릭에 마마보이였던 탓에 그녀의 편이 되어주지 않아 시씨는 신혼초기부터 고독하고 외롭게 지냈다. 어린 시절[6] 에는 조피에게 반발하지 못했지만 자기주장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고 아들 루돌프를 낳아 궁정에서의 입지가 강화된 다음에는 정신병원을 후원하거나[7] 국내외를 여행하는 등 이런저런 다양한 활동을 한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황실의 공식적인 행사에는 참여하려고 하지 않아 황후답지 못하다는 평을 들었다. 하지만 시씨에게 약했고 그녀를 도와주지 못한 본인 때문에 아내가 힘든 결혼생활을 보낸 것을 자책한 프란츠 요제프는 그녀의 행동을 막지 않았다.[8] 아이러니한 것은 시어머니인 조피 대공비에게 미움받던 그녀 역시 루돌프 황태자의 아내이자 자신의 며느리인 벨기에의 공주 스테파니를 미워했다는 것이다. 이는 조피 대공비의 사랑을 받으며 시씨와 갈등을 빚던 동서 샤를로트(벨기에의 공주이자 막시밀리안 1세의 아내)가 스테파니의 고모였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21세기 들어 프란츠 요제프와의 불화에 대해 새로운 연구가 진행되었다. Family Tree DNA라는 집단의 DNA 연구(https://www.familytreedna.com/public/habsburgfamilyproject)에 의하면 오스트리아 출신 미국인인 찰스 홀트(Charles Holt, 1865~1947)가 프란츠 요제프의 사생아일 확률이 매우 높으며, 그렇지 않더라도 합스부르크-로렌 가문의 부계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는 것. 그녀가 찰스 홀트의 존재를 알았는지는 현재의 기록으로서는 알 수 없지만, 찰스 홀트가 태어난 1865년 이후로 엘리자베트 황후는 헝가리 독립을 지지하고(1867년), 막내인 마리 발레리를 출산(1868년)[9] 하는데, 그 직후부터 궁정에 머무르지 않고 평생 여행을 다니며 산다.
2. 외모
당대의 가장 아름다운 왕족 여성으로도 이름이 높았던[10] 시씨는 자신의 외모를 가꾸는 일에도 열의를 보였으며 몸매를 유지하기 위해 무리한 다이어트를 감행하기도 했다. 당시 존재하는 거의 모든 기초 화장품을 테스트하고 일기에 기록까지 해가며 가장 효과적인 제품을 찾아 피부관리에 열중했고, 색조 화장은 피부를 상하게 한다며 거의 하지 않았다. 몸무게 관리에도 열중해서 거의 거식증 환자 수준[11] 으로 적게 먹고 운동에 열중해 '''평생 키 173cm, 몸무게 46~49kg를 유지했다'''. 하루에 오렌지 6개만 먹는 날도 있었다고. 길고 풍성한 머리카락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머리카락 무게를 빼면 실제 무게는 그것보다도 가벼웠다. 매일 3시간 이상을 머리 관리에 투자했고 그 시간동안 외국어나 철학, 과학, 문학 등의 과외를 받았다고 한다. 루트비히 2세의 친척[12] 이었고 윗대에서 오랫동안 근친혼이 반복된 탓인지 그녀의 섭식장애나 예민함, 아들 루돌프의 자살 이유를 유전적인 요인에서 찾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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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모에 대한 이러한 강박증에 가까운 성향 탓인지 나이를 먹고 늙기 시작하자 시씨는 모든 개방된 장소에서 자신의 얼굴을 감추기 시작한다. 현재 남아있는 사진과 그림 대부분이 가장 아름다운 시절의 것인 이유도 모두 그러한 까닭이다. 나이 들고 찍힌 사진은 거의 다 흐릿하거나 얼굴이 제대로 나오지 않은 것들이다. 인터넷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늙은 엘리자베트의 초상화는 대부분 그녀의 사망 이후 그려진 것이다.
3. 가족 관계
시씨의 아버지는 바이에른 공작(Herzog in Bayern) 막시밀리안 요제프이며 어머니 바이에른 국왕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의 딸 루도비카 공주이다. 이모로는 로이히텐베르크 공작부인 아우구스타, 오스트리아 황후 카롤리네 아우구스테, 프로이센 왕비 엘리자베트 루도비카(엘리제), 작센 왕비 아말리에 아우구스테, 시어머니가 되는 조피 대공비등이 있다. 형제들로는 투른 운트 탁시스 공비가 되는 헬레네(네네), 카를 테오도르, 양시칠리아 왕비 마리아 조피, 트라니 백작부인 마틸데 루도비카, 알랑송 공작부인 조피 등이 있다. 조카들로는 벨기에 왕비 엘리자베트, 바이에른 왕태자비 마리 가브리엘레가 있다.
시씨는 프란츠 요제프와의 사이에서 네 아이 - 조피,[13] 기젤라, 루돌프, 마리 발레리 - 를 낳았다. 첫째 조피는 여행 중 어린 나이로 죽었으며,[14] 유일한 아들이었던 루돌프는 성인으로 성장해 황태자위에까지 올랐지만 세간에 '마이어링 사건'으로 알려진 밀월여행 끝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기젤라와 마리 발레리만이 시씨의 사후까지도 살았다. 그녀는 자신이 직접 양육한 막내 마리 발레리에겐 다소 지나칠 정도로 애정을 쏟았지만 조피가 양육한 기젤라와 루돌프에게는 철저히 무관심했다. 이러한 편애는 아들 루돌프가 자살하게 된 원인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으며, 딸 기젤라를 자신을 위해 멋대로 정략결혼의 도구로 사용하기까지 했다.[15][16] 한편 기젤라와 루돌프는 매우 사이가 좋은 남매였다.
루돌프는 남매 가운데 시씨와 가장 닮은 아이였으나 아들의 약혼식에도 참여하지 않을 정도로 무관심한 어머니 탓에[17] 두 사람 모두 살아서는 그 사실을 몰랐다. 그러나 1889년 루돌프가 자살하자 시씨는 실의에 빠져 남은 평생을 검은 상복을 입고 이전보다 더욱 도피성이 짙은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 아들 루돌프의 죽음에 더해 시씨는 1888년 아버지, 1890년에는 언니, 1892년에는 어머니, 1893년에는 막내동생을 연달아 떠나보냈다. 연달아 비극을 겪은 시씨는 그러지 않아도 좋지 않았던 몸 상태가 더 나빠지기 시작했고, 여행도 쉬지않고 계속 다니다보니 죽을 때까지 건강을 회복하지 못했다.
게다가 일련의 사건 이후의 여행은 경호원을 대동하지도 않고 가명을 사용했으며 소수의 시녀들만을 데리고 다니는 여행이었다.[18] 그러나 이러한 행동들이 결국 시씨의 죽음을 부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후술하듯 암살당할 당시에도 시씨는 경호원은커녕 시녀 한 명만 대동하고 있었다.
4. 암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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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전날 마지막으로 사진에 잡힌 시씨. 오른쪽의 여인은 시녀인 헝가리 왕국의 여백작 스타러이 이르마(Sztáray Irma 1863~1940)로 평생 결혼하지 않고 시씨를 보필했다.
1898년 9월 시씨는 비밀리에 스위스를 여행 중이었다. 그러나 황후의 신원은 노출당했고, 이 사실을 안 스위스의 한 신문에서는 오스트리아 황후의 여행 이야기를 실었다. 이 기사를 읽은 무정부주의자 루이지 루케니(1873-1910)[19] 는 엘리자베트에게 접근해 그녀를 암살한다.[20] 루케니는 가는 송곳(needle)[21] 으로 시씨의 가슴을 찌르고 도망쳤는데, 시씨는 찔리고 나서도 한참 동안 그 사실을 몰랐다. 단지 소매치기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루케니는 암살 훈련을 받아 작은 상처를 통해 치명적인 출혈을 유도했던 것이다. 시씨의 가슴에 난 작은 상처에서는 계속 피가 흘러나왔지만 입고 있던 검은 옷[22] 과 그 안에 받쳐 입은 코르셋 때문에 황후 자신도, 시녀도 상처와 그로 인한 출혈의 심각성을 눈치채지 못했다. 시씨는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려는 목적으로 임신 기간을 제외하고는 항상 꽉 조이는 코르셋을 착용하고 다녔는데 그 때문에 시씨가 칼에 맞고 비틀거렸을 때도 시녀나 목격자들은 코르셋이 너무 조여서 그런 것이라 생각했다.
비틀거리던 시씨는 계속 걸어서 스위스를 떠나는 배에 승선했으며 꽉 조였던 코르셋을 풀고 나서야 자신에게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곧 혼절했다. 코르셋 때문에 칼에 찔리고도 별로 출혈이 없는데다가 검은 옷을 입었던지라 얼마 없던 출혈도 티가 안 나던 것인데 코르셋을 풀자마자 심각한 출혈이 시작됐기 때문이었다. 응급처치를 받으면 살 수 있었겠지만 공교롭게도 그 배에는 의사도, 간호사도 승선하고 있지 않았다. 시녀가 급히 선장에게 황후의 신분을 알려 회항했고 죽어가는 황후는 뒤늦게서야 호텔로 옮겨졌고 급히 의사를 불러왔지만, 단 한 번 정신을 차렸다가 한 마디만을 남기고 사망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였다. 유언마저 남기지 못한 갑작스런 죽음이었다.
시씨의 죽음은 당일 바로 전보로 부쳐졌는데, 그 날도 어김 없이 집무실 책상에 앉아있던 프란츠 요제프는 아내의 죽음을 듣고 충격을 받아 책상에서 넘어지며 정신을 잃었다고 한다. 그나마 그가 위안을 얻을 수 있었던 부분은 시씨가 자살한 것이 아니라 살해당했다는 것이었다. 프란츠 요제프는 항상 시씨가 루돌프를 따라 자살할까봐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신앙심이 깊은 프란츠 요제프로서는 가톨릭 교리에 따라 자살한 이가 천국에 갈 가능성에 회의적 태도를 가졌고 아내가 자살한다면 그녀 또한 구원받기 힘들거라 생각했다고.[23]
후계자를 앞세운 데다가 갑작스런 사별까지 겪은 이후 프란츠 요제프는 더욱 실의에 빠져 지낸 나날이 많았으며 사적인 자리에서 시씨를 회상하며 측근들에게 종종 "난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는데…", "그녀가 나에게 얼마나 중요한 사람이었는지 모를거야." 등의 얘기를 했다고 한다. 프란츠 요제프와 시씨는 평생 애증이 뒤섞인 미묘한 결혼 관계를 유지했는데, 루돌프의 죽음 이후로 남편과 화해하며 늙어서 좀 사이가 좋아지려고 하다가 시씨가 암살당하면서 비극으로 끝나버렸다.
5. 평가
5.1. 동정적
불행한 인물들은 많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엘리자베트가 인기 있는 이유는 아무래도 비극적 결말과 더불어서 '마지막 황후'라는 상징성이 크게 작용하는 듯하다는 해석이 있다. 사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마지막 황후는 카를 1세의 아내인 부르봉파르마의 지타지만, 지타는 고작 2년만에 남편과 함께 폐위되어 쫓겨난 터라 '저물어가는 거대 제국의 마지막 황후'라는 인상이 강하게 남아있는 건 엘리자베트고[24] , 외적인 아름다움까지 더해 상업적으로 흥하기 좋은 조건을 갖춘 것.
또한 옛날 사람들이 무조건적으로 모든 면이 긍정적이고 선한 인물상을 추앙하던 것과 달리 현대인들은 다면적인 인물상을 더욱 인간적이라고 느끼고 선호하는 덕도 있다. 엘리자베트는 예민하고 감수성 풍부했으며 헝가리어[25] , 고전 그리스어, 라틴어 같은 어려운 언어들을 마스터할 정도로 지성이 뛰어났다. 또한 남성 승마 기수들과 동등하게 경쟁할 수 있을 정도로 스포츠에도 능하고, 문학적 재능도 있어서 시 쓰는 게 취미였고, 진보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사고관을 가졌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분야에 소질을 보였음에도 그걸 발전시킬 수 없는 황후라는 위치에 있었던 탓에 개인적인 관심사와 취미의 범위를 벗어난 제대로 된 성취는 이룰 수 없었다. 몇 십 년 더 늦게 태어났더라면 자유로운 현대인으로 살아갈 수 있었을 여인이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나 황실이라는 화려한 감옥에 갇히고 본인, 남편, 자녀들 모두 비극적인 삶을 살아야 했기에 그 비극성을 매력적으로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26]
5.2. 비판적
한편으로는, 어머니이자 황후로서의 역할에 소홀했다는 비판적인 평가도 존재한다. 그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이든 긍정적인 사람이든 그저 평범한 귀족으로 살았으면 그 자신도 주변도 더 행복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또한 20세기 영국의 다이애나 스펜서 왕세자비과 비교하여 평가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 경우 더욱 박한 평가를 받는다. 두 사람 다 당대에 명성이 높았고, 외견상으로는 화려했지만 불행한 가정사를 지녔으며,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는 공통점을 지녔다. 그러나 다이애나 비는 남편인 찰스 왕세자가 불륜을 저지르며 자신을 철저히 배신한 상황 속에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사회적 지위에 충실했고, 자식들도 진심으로 사랑했으며, 대인지뢰 반대 운동을 비롯한 국내외 이슈에도 적극 참여해 세간의 찬사와 존경을 받았다. 하지만 엘리자베트는 비록 시집살이에 시달리기는 했지만 남편인 프란츠 요제프 1세의 극진한 사랑을 받았음에도, 답답하다는 이유로 황후와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등지고 평생 여행만 다녔다는 사실에 대해 비판받고 있다.
6. 기타
오스트리아와 독일 등지의 독일어 사용권을 중심으로 한 유럽 지역에서는 그녀의 일생을 다룬 뮤지컬 '엘리자베트'가 인기리에 공연되고 있다. '죽음[27] 이 엘리자베트를 사랑했다'는 내용인데[28] 고증도 꽤 잘 되어있고, 엘리자베트의 부정적인 면모에 대해서도 무조건적으로 미화하지 않고 비판적으로 다룬다. 2012년 2월부터 '엘리자벳'이라는 이름으로 라이센스판 한국 공연도 올라왔다.
우리나라에서는 사연까지 공연했는데 김선영, 옥주현[29] , 김소현, 조정은, 신영숙이 엘리자베트를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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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를 관광할 때 모차르트와 더불어 지겹도록 접하게 되는 인물이다. 특히 빈의 호프부르크 왕궁에는 그녀의 이름을 딴 시씨 박물관까지 있으며 그 안에는 시씨가 생전에 입던 드레스나 사용하던 물건들, 심지어 그녀를 살해한 도구까지 전시되어있다. 시씨에 대해 잘 모르는 관광객들은 주로 대충 보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은 데 비해 현지인들은 상당히 진지하게 관람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쇤브룬 궁전에 가보면 시씨가 거주하던 방과 생활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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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오스트리아의 기념품점에서는 시씨와 관련된 다양한 기념품을 팔고 있다. 예를 들면 드레스를 입은 시씨의 미니 동상이나 흉상, 초상화 같은 것들. 모차르트 동상, 모차르트 쿠겔, "오스트리아에는 캥거루가 없다"[30] 는 내용이 쓰인 티셔츠와 더불어 기념품점에서 반드시 보게 되는 품목 중 하나다.
한편 시종과 시녀를 전부 헝가리인으로 둘 정도로 헝가리에 호의적이었기 때문에, 헝가리에서의 인기가 매우 좋았다. 수도 부다페스트의 에르제베트 다리부터 시작해서 헝가리 곳곳의 광장, 공원 등등 온갖 지명에 에르제베트(Erzsebet)가 붙어있다.
근래의 필적 감정사들이 연구한 바에 따르면, 그 동안 알려진 별명 '시씨'의 필체가 'S'보다는 'L'에 더 가까워서 실제 별명은 '''리지(Lisi)'''일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한다. 실제로 엘'''리자'''베트라는 이름을 감안한다면 꽤 설득력 있는 설.[31] 다만 '시씨'라는 별명이 워낙 널리 알려져 있어서 지금까지도 통용되고 있다.
[A] A B Herzog '''in''' Bayern(英:Duke in Bavaria). 바이에른 공국은 1506년 이후 기존의 게르만족 전통의 분할상속제를 폐지하고 장자상속제를 적용시켰는데 이로 인해 기존의 자신들의 영지와 공작위를 잃어버린, 그리고 후에 분할 상속을 통해 작위를 받았어야할 이들의 불만이 극에 달했다. 따라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바이에른'''에서의''' 공작이라는 작위를 만들었고 비텔스바흐 가문의 후예들은 모두 이 작위를 받게 되었다. 물론 이 작위는 예우상의 작위였고 실제로는 바이에른'''의''' 공작(Herzog '''von''' Bayern/Duke of Bavaria)이 통치했다.[1] 바이에른의 초대 국왕,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의 딸이었다.[2] 뒤에 s가 하나 더 들어간 "Sissi"라는 표기도 존재하지만, 관련 박물관이나 문서를 포함한 대부분의 공식 표기는 Sisi로 쓰고 있다.[3] 그러나 엘리자베트의 필체 상 첫 글자가 'S'가 아닌 'L'인 것이 유력하다는 설이 제기된다. 그렇게 되면 '시씨'가 아닌 '리지(Lisi)'가 되는 셈. 엘리자벳이라는 이름의 흔한 애칭이다.[4] 애칭은 네네(Nene). 이후 여동생에게 약혼자를 빼앗겼다는 충격으로 혼인을 하지 않다가 당시로선 늦은 나이인 22살에 여동생의 도움으로 제국 내 운송 사업을 하고 있던 투른 운트 탁시스 가문의 후계자와 연애 결혼을 한다. 참고로 헬레네는 형제자매 중 유일하게 행복한 결혼 생활을 했으며, 그녀의 피를 이은 투른 운트 탁시스 가문은 지금도 유럽 내 귀족 가문 중 가장 큰 부를 지닌 가문으로 번성하고 있다.[5] 허례허식을 혐오했던 마리아 테레지아 때까지만 해도 쇤부른의 예법은 이웃 나라 프랑스나 프로이센에 비해 무척이나 자유롭고 편안했으나, 프란츠 요제프 대에 이르러서는 궁정문화가 엄청나게 보수적으로 변했다.[6] 그녀는 겨우 17세에 결혼했다.[7] 그녀 자신이 평생 우울증과 온갖 신경증에 시달렸기 때문에 정신의학에 큰 관심을 가졌다.[8] 시씨가 '''남편을 자기한테서 떼어놓으려고 일부러 정부를 소개시켜줬다'''는 이야기도 있다. 프란츠 요제프 1세 항목 참조.[9] 루돌프를 낳은 이후 임신하는 것을 극히 꺼리다가 갑작스럽게 막내아이를 가지기로 결정했다.[10] 시씨의 집안인 비텔스바흐 가문은 대대로 키가 크고 미남, 미녀가 많은 집안이었다. 오촌 조카뻘인 루드비히 2세도 젊은 시절엔 미남으로 유명했다.[11] 정확히는 거식증이 아니라 폭식증으로 추정된다. 기록을 보면 시씨가 종종 혼자 식당에 가서 풀코스 식사에 디저트까지 싹 비웠다고 한다. 즉, 식욕을 참지 못하고 과식을 한 후에 엄청난 양의 운동으로 이를 상쇄하는 것.[12] 시씨의 어머니는 비텔스바흐 가문의 일원인 루도비카 빌헬미네로 루트비히 1세의 동생이었다. 루트비히 1세의 손자가 루트비히 2세이며 루도비카의 딸이 시씨이므로 루트비히 2세와 시씨는 오촌지간이다. 시씨가 루트비히의 당고모뻘이 된다.[13] 조피 대공비가 첫 손녀가 태어나자마자 데려가 자신의 이름을 붙였다.[14] 이것이 어린 아이를 고집 부려 여행에 동행시킨 시씨의 잘못이라 보는 견해가 있다.[15] 그녀의 남동생인 막시밀리안은 작센의 공주 아말리에를 사랑하게 되었는데, 그녀는 시씨의 친정친척인 바이에른 왕자 레오폴트의 청혼 또한 동시에 받았다. 그러자 시씨는 남동생의 경쟁자인 레오폴트에게 아말리에 대신 자신의 딸 기젤라를 신부로 맞을 것을 권했고 그렇게 15세의 기젤라는 레오폴트와 결혼하게 되었다. 시씨는 어린 나이에 정략결혼한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지만, 그보다 더 어린 나이인 자신의 딸에게도 이러한 결혼을 강요했던 것.[16] 아이러니하게도 기젤라는 비록 남편의 외모가 못생긴데다 정략결혼이었지만 금혼식까지 치를 정도로 시씨의 자녀들 중 유일하게 행복한 결혼 생활을 누렸다.[17] 며느릿감인 벨기에의 스테파니 공주가 보기 싫어서 일부러 그랬을 가능성도 있다고.[18] 이때부터는 모로코, 이집트, 터키, 알제리 등 유럽 세계를 벗어난 곳들로도 여행하게 된다.[19] 루이지 루케니는 범행 직후 스위스 경찰에게 체포되어 스위스 법정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지만 정작 '''본인은 사형을 요구'''했다. 그러나 사형당하는 것이 좌절되자 1910년 감옥 안에서 벨트로 목을 매 자살했다.[20] 루케니가 엘리자베트를 특정해서 노렸던 건 아니었다. 아나키스트였던 루케니는 후일 재판을 받으며 타깃이 왕족이면 누구든 상관 없었다고 증언했다. 보수주의 왕족을 혐오하여 일으킨 범행이었지만, 막상 당한 건 보수 성향이 아닌 자유주의 성향이 강한 시씨라는 게 아이러니.[21] 시씨 박물관에 가보면 전시되어있는데 위에서 보다시피 흔히 보는 과일 깎는 칼보다도 훨씬 작다.[22] 시씨는 루돌프를 잃은 후 아들을 애도하기 위해 늘상 검은 옷만을 입고 살았다. 다만 생전에 어머니의 관심을 받지 못했던 아들 루돌프 황태자 입장을 생각해보면 위선까진 아니라 쳐도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었지만.[23] 비록 원칙적으로 가톨릭 교리는 자살이 죄라고는 가르치지만, 자살자가 지옥에 간다고 확신하지는 않는다. 구원 여부에는 죽기 직전의 통회 가능성, 극단적 선택을 할 때 정신적으로 몰려있었을 정황(즉 책임의 경감) 등등이 복합적으로 반영될 것이기 때문이다.[24] 한국사에서 경술국치 시기에 재위중이었던 진짜 마지막 황제와 황후는 순종과 순정효황후 윤씨지만, 고종과 명성황후 민씨의 인상이 더 강렬하게 남아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될 듯.[25] 헝가리어는 라틴어 계열 유럽 언어들과는 계통이 달라 서유럽인들이 배우기 아주 까다로운 언어였다.[26] 물론 이런 시대를 잘 못 타고는 재인은 남녀불문 많고, 당장 그녀의 시어머니 조피도 당차고 총명한 성격의 공녀였는데 정치적 이유로 정신 지체장애가 있던 프란츠 카를 대공에게 시집가고,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던 사람도 일찌감치 죽어버려 고독히 모든걸 희생해야 했다. 하지만 조피는 황후가 되길 포기했고, 엘리자베트는 이런 이유에 마지막 황후, 미녀라는 타이틀이 얹어지니 인기가 어마어마해진 것이다.[27] 사신이나 죽음의 신이 아닌 말 그대로의 죽음을 의인화한 것.[28] 당시 "엘리자베트가 황궁에 죽음을 데려왔다"는 속담이 있었는데, 이 말이 작품의 모티브라고. 사실 엘리자베트가 황후로 재위하던 시기는 또 마침 전세계가 정치적 격변기를 겪을 무렵이기도 했을 뿐더러, 합스부르크 황실이 오랫동안 이어져온 근친혼 정책의 후유증으로 크고 작은 유전병에 시달렸다는 것은 유명하며 그 중에는 정신질환도 있었다. 때문에 황족들 중 일부는 정세에 잘못 휘말려 비참하게 죽고 또 일부는 정신질환으로 괴로워하다 자살하는 등 아무튼 천수를 누리며 침대에서 편하게 운명하지 못하는 황족들이 많은 시기였다. 논리적인 인과를 따져봤을 때 그 일들이 다 엘리자베트 때문이냐 하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긴 하지만.[29] 초연부터 사연까지 꾸준히 참여해 왔다.[30] 오스트레일리아(호주)와 혼동하는 이들을 가리키는 유머. 호주 관광청에서도 이걸 가지고 유머 하기로 유명하다. 한국에서도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오스트리아 출신 아내 프란체스카 도너를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으로 착각해서) '호주댁'이라고 불렀을 정도.[31] 영어권에서 엘리자베스라는 이름의 줄임형도 일라이자, 리지, 리즈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