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누엘 플레이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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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라과이의 축구선수 출신 감독. 1971년에 CR 플라멩구 감독을 맡았다.
파라과이 대표팀을 이끈 선수 겸 감독이자, 3개의 축구 클럽에서 동시 감독을 맡은 초유의 감독. 별명은 엘 브루요(El Brujo, '마법사').
2. 생애
2.1. 클럽
기자의 아들로 태어난 플레이타스는 아순시온을 연고로 하는 클루브 나시오날에서 17살에 데뷔하였다. 그리고 특유의 외유내강적인 보스 기질로 어린 나이에 주장의 자리를 꿰찼다. 플레이타스가 주장이 된 후 팀은 성적을 끌어올리기 시작해 1924년, 13년 만에 우승을 차지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이 활약에 힘입어 플레이타스는 아르헨티나의 명문 CA 보카 주니어스로 이적하였다. 여기에서도 그는 주장으로 팀의 우승을 이끌었고 1931년 시즌 중까지 보카에 머물렀다. 하지만 1930년에 입은 다리 골절로 인해 그는 선수로서는 전성기 때의 기량을 다시는 발휘할 수 없었다. 그 이후에는 아르헨티나의 몇 팀을 돌아다녔고 1936년에 선수 생활을 접었다.
2.2. 국가대표
플레이타스는 1919년 파라과이 대표팀이 처음 결성되었을 때부터 핵심 멤버였다. 비록 당시 파라과이가 코파 아메리카에서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브라질 등 기존 강호들을 넘지는 못했지만 플레이타스는 대표팀의 선수 겸 감독으로 활약했다.
2.3. 감독 생활
플레이타스는 선수 시절부터 국가대표팀을 선수 겸 감독으로 뛴 특이 케이스였고, 한 팀에 오래 있지는 못했지만 그는 꾸준히 여러 팀들을 감독해왔다. 그의 경력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은 1953년의 코파 아메리카에서 조국 파라과이를 우승시킨 때였다. 이것은 파라과이의 코파 아메리카 첫 우승이었고 이 활약으로 플레이타스는 브라질 클럽들의 영입 제의를 받았다. 1959년에는 잠시 레알 마드리드의 감독을 맡기도 했고 그 이후에는 브라질에서 시간을 보냈다.
2.4. 사망
1984년 브라질의 히우지자네이루에서 사망했는데 상속인을 결국 찾지 못할 정도로 파라과이에서는 거의 잊힌 이름이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당시 포지션으로는 하프, 요즘 포지션으로 따지면 미드필더에서 뛰었다. 그는 큰 덩치를 가지고 있었지만 기술적으로 뛰어났고 공을 빠르게 다룰 수 있었다. 또한 리더의 기질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4. 뒷이야기
- 플레이타스의 CA 보카 주니어스 이적은 파라과이 축구 최초의 해외 진출이었다.
5. 수상
5.1. 클럽
- 파라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우승 2회: 1924, 1926(클루브 나시오날)
-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우승 3회: 1930, 1934, 1935(CA 보카 주니어스)
- 파라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준우승 2회: 1921, 1927(클루브 나시오날)
-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준우승 4회: 1927, 1928, 1929, 1933(CA 보카 주니어스)
5.2. 국가대표
5.3. 감독
- 파라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우승 1회: 1943(클루브 리베르타드)
-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우승 3회: 1953, 1954, 1955(CR 플라멩구)
-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우승 1회: 1966(SE 파우메이라스)
-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준우승 1회: 1963(플루미넨시 FC)
- 캄페오나투 미네이루 준우승 2회: 1967, 1968(클루비 아틀레치쿠 미네이루)
- 코파 아메리카 우승 1회: 1953(파라과이)
- 코파 아메리카 준우승 2회: 1947, 1949(파라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