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우솔로스 영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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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도. 연구자들에 의해 마우솔로스의 영묘에 대한 많은 복원안이 제시되었으며 그중 하나를 묘사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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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이스탄불에 있는 실물 크기의 24분의 1로 축소된 복원 모형.
1. 소개
2. 건설
3. 파괴

Μαυσωλεῖον τῆς Ἁλικαρνασσοῦ (고대 그리스어)
Mausoleum at Halicarnassus
Tomb of Mausolus

1. 소개


할리카르나소스에 내 위로 크기를 파악하기 어려울 만큼 어마어마한,그 어떤 사라진 옛 그림자와도 비교할 수 없는 정교한 아름다움으로 가득 찬 무덤이 서 있다.

- 사모사타의 루키안

마우솔로스의 영묘는 할리카르나소스(현재 터키의 보드룸)에 있었던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이다. 특이한 모양과 복잡한 장식 때문에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꼽혔으며, 그 때문에 오늘날 '''마우솔레움'''은 무덤 건축을 뜻하는 보통 명사로 사용되고 있다. 관례적으로 '영묘'로 번역되며, 일반적으로 관을 모아 안치한 서양식 봉안당을 일컫는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봉안당 항목 참고.
참고로 이곳의 유물들 상당수가 런던대영박물관에 있다. 유명한 유물로는 그리스인과 아마존족의 전투 장면을 새긴 프리즈와 마우솔로스 상으로 보이는 높이 3m의 조각상 등이 있다.
마우솔로스의 영묘에는 기원전 350년 무렵 할리카르나소스의 통치자였던 소아시아의 페르시아 사트라프(총독) 마우솔로스와 그의 아내[1]아르테미시아가 안치되었는데 그 당시에 기자의 대피라미드를 뺀다면 무덤 건축물 중엔 최대 규모였다. 무덤 주인의 이름을 따서 마우솔레움이라고도 하는데, 대규모 무덤 건축물의 대명사가 되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마우솔레움 아우구스티.

2. 건설


전설에 따르면 마우솔로스가 죽자 그의 누이이자 아내인 아르테미시아 2세는 비탄에 잠겨 그를 화장한 재를 포도주에 넣어 마시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덤을 만들겠노라 맹세했으며 본인도 결국 죽은 뒤 이 무덤에 안치되었다고 한다. 건축가는 피티우스(또는 피테오스)였고 4명의 뛰어난 그리스 예술가 스코파스·브리악시스·레오카레스·티모테오스 등이 조각을 맡았다. 로마의 저술가인 대(大) 플리니우스(23년 ~ 79년)에 따르면 이 영묘는 거의 정사각형으로서 그 둘레가 125 m에 이르렀다고 한다. 36개의 기둥이 둘러싸고 있고, 24단의 계단식 피라미드로 꼭대기에는 대리석으로 만든 4두 마차가 올려져 있었다고 한다.
건설을 추진한 당사자인 마우솔로스는 공식적으론 소아시아에 있는 페르시아 제국령 카리아의 사트라프였지만, 사실상 군사와 내정권을 모두 장악해서 그 지방에선 왕이나 다름없었다. 마우솔로스는 헬레니즘파였는데, 할리카르나소스로 천도한 뒤 헬레니즘식의 건축물을 많이 건축하였다. 그가 죽기 전 영묘를 건축하기 시작하였으나 완공되기 전에 죽고, 그의 아내이자 여동생이였던 아르테미시아가 계속 진행하였으나 영묘는 그녀가 죽은 뒤인 기원전 350년 후반쯤에 완공된 것으로 추정된다.

3. 파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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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우솔로스의 영묘는 11세기 ~ 14세기에 지진으로 파괴된 것으로 보이며, 1409년 십자군이 여기 처음으로 도착했을 때는 이미 기단부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요한 기사단은 십자군 원정으로 이 지역을 점령했고, 1494년에 그들이 지은 보드룸 요새를 보수하는데 영묘의 석재들을 사용했다. 대리석은 가열되어 석회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요한 기사단은 자신들이 발견한 영묘의 부조나 조각 일부분은 보드룸 요새에 보관하기도 했는데 1506년 전후 성 요한 기사단의 지휘관 중 한 명은 그리스 인과 아마존 족의 전투를 보여주는 12장의 프리즈 석판을 남겨 성벽 장식품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1522년에도 오스만의 공격에 대한 소문이 돌자 보드룸 요새는 다시 강화되었고 영묘의 석재는 거의 다 떨어져 나갔다.
지상의 마우솔레움 유적이 소멸된 후에도 지하 부분은 비교적 온전히 남아있었고, 이 곳을 발견한 요한 기사단 단원이었던 프랑스 리용의 클로드 기샤르는 1581년 발간한 책에서 이렇게 적었다.

"여러 방을 연결하는 복도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흰 대리석으로 장식된 무덤을 발견했다. 그 아름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시간이 없어 다음날 뚜껑을 열기로 하고 철수했다. 그러나 다음날 다시 와서 보니 무덤은 열려져 있고 황금 조각과 옷 조각이 사방에 떨어져 있었다. 이것들은 우리가 철수한 후 약탈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누군가 밤에 와서 관을 열고 매장품을 도굴했을 것이다. 그 무덤 속에는 엄청난 보물들이 있었을 것이다."

기샤르는 지하를 발굴하다가 큰 발견을 했다고 생각했고 날이 너무 늦어 다음 날 다시 왔는데 그 사이에 도굴이 되었다고 생각한 것. 부부의 시신도 도둑맞았다고 생각했다. 기샤르는 주변인을 의심했는지 자신의 안위 때문에 범인이 누구인지 쓸 수 없다고 기술했다.
19세기에 영국은 보드룸 요새와 영묘의 잔해 등을 조사 발굴하였고, 프리즈 석판들은 영국의 대영박물관에 '아마존 전사들의 전투'라는 이름으로 전시되고 있다. 이때 건물의 벽과 계단식 지붕의 일부를 장식한 부분, 지름이 약 2m인 부서진 석제 전차 조각의 바퀴, 마우솔로스와 아르테미시아의 동상을 발견했다. 이것을 기초로 하여 많은 복원도가 그려졌으나, 건축물이 정확히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이견이 좀 있다.
1966년과 1977년 사이 덴마크 아루스 대학의 예페센 교수에 의해 영묘에 대한 발굴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는데, 아무래도 기샤르가 오해를 한 것으로 보인다. 고고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애초에 할리카르나소스의 영묘는 십자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도굴되어 있었다. 그간 할리카르나소스가 포함된 이오니아 지방을 점령했던 세력만 10개가 넘기에 눈에 잘 띄는 마우솔레움이 십자군이 오기까지 1700년간 멀쩡히 있을 수가 없었던 것. 발굴단은 기샤르가 언급한 것으로 보이는 장식된 옷의 파편들도 발견했다. 그것들은 얇은 금판 장식, 채색 유리, 40여 개의 금판으로 된 장미 등이었다. 당시 왕과 왕족들의 옷을 장식하던 이것들은 누군가가 약탈하고 남긴 부스러기만으로도 후대인들을 놀라게 했던 것이다.
당대의 풍습을 고려하면 영묘의 시체는 화장되어 재만 유골 항아리에 보관되어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2] 기샤르의 기록대로 지하의 석실에 석관이있었다고 해도 그곳에 시신이 있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1] 마우솔로스는 왕이 아니라 총독이었으므로 왕비라 할 수 없다. [2] 고대사를 보면 페니키아나 그리스 같은 '''해양 민족은 항아리''', 이집트나 히타이트 같은 '''농경 민족은 관''', 스키타이나 이스라엘 같은 '''유목 민족은 천이나 가죽'''에 시체를 넣는 경향을 보인다. 즉 해양 민족은 교역품을 보관하는 커다란 도자기 , 농경민은 쉽게 구할 수 있는 나무, 유목민도 쉽게 구할 수 있는 가죽을 택하는 식으로, 할리카르나소스는 민족이고 문화고 그리스풍이었으므로 유골 항아리에 망자를 집어넣는 건 당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