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비우스 다리 전투
1. 소개
영어 : Battle of the Milvian Bridge
[image]
사두정치 체제의 내재적인 모순으로 황제 간 협동이 안 되자 그걸 다시 정리하기 위한 로마 내전 중의 한 전투. 로마 제국의 공동황제인 콘스탄티누스 1세는 312년 10월 28일 경쟁자 막센티우스와 로마 시 근교[1] 의 밀비우스 다리에서 전투를 벌여 승리했고, 막센티우스가 여기서 죽게 되어 콘스탄티누스는 서방을 통일했다.
막센티우스는 기병 전력에서 앞선 콘스탄티누스 군 기병이 우회 돌격해오는 것을 막고, 콘스탄티누스 군 보병대가 축차투입될 수밖에 없는 좁은 다리라는 병목지점을 보병 전투력에서는 로마군 최강이던 프라이토리아니 전력으로 방어하려 했으나, 콘스탄티누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처럼 직접 기병대의 선두에 서서 다리로 정면 돌격하여 막센티우스 군의 방어선을 정면에서 분쇄하고, 혼란에 빠진 막센티우스 군은 좁은 다리로 몰렸다가 배수진 처럼 몰살당했다. 막센티우스는 이 전투에서 전사하는데,[2] 공교롭게도 자세히 보면 이 가족은 불쌍한 게 부(막시미아누스, 처형), 자(막센티우스,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전사), 녀(파우스타, 후계구도와 궁정음모로 처형)가 '''다 콘스탄티누스에게 죽는다.'''(...) 여기에 그는 죽은 뒤 콘스탄티누스의 승리와 로마 입성 행진에서 시신이 창에 꿰였고 또 그게 경고의 의미로 북아프리카로 보내지는 등 험한 꼴을 당했다.
로마 근위대, 즉 프라이토리아니가 마지막 불꽃을 산화한 전투이기도 하다. 기록에 따르면 막센티우스가 전사하고 다른 아군들이 전부 도주하는 상황에서도 프라이토리아니는 위치를 사수하며 최후까지 저항하였다고 한다. 전투력의 쇠퇴와는 무관하게 마지막까지 근위대라는 자부심은 있었던 것이다.
<비잔티움 연대기>에 의하면, 퇴각 중에 공병대원들이 다리의 너트와 볼트를 뽑는 타이밍을 잘못 잡아서 큰 추락사고가 났고 거기에 황제 막센티우스도 휩쓸려 죽었다고 한다.
2. 다리
샤를 르 브룅의 미완성의 그림을 바탕으로 한 제라르 오드랑의 판화, 1666년
해당 전투가 벌어진 다리는 오늘날의 그 위치에도 존재한다. 이탈리아어 이름은 Ponte Milvio. 위키 백과에 따르면 오래된 역사만큼이나 다양한 일들이 일어난 장소이기도 하다.
- 기원전 206년 제2차 포에니 전쟁 중 처음으로 다리가 세워졌다.
- 기원전 109년 부수고 새로 지었으며, 카틸리나의 밀서가 여기서 입수되어 결국 진압의 실마리가 되었고 밀리우스 다리의 전투가 펼쳐졌다.
- 중세 말에는 붕괴 위기로 교황 마르티노 5세가 자력으로는 안 되어 외부 전문가에게 수리를 의뢰해서 성공한다.
- 18~19세기에 모양이 확 바뀌었다가, 1849년 이탈리아 통일 전쟁 중 프랑스군[3] 을 저지하려는 가리발디가 다리를 끊었지만 바로 다음해(1850년) 교황 비오 9세가 다시 수리했다.
- 오늘날에는 커플용 관광상품(...)을 내세워 로마 교외의 관광명소 중 하나가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3. 기적
사실 전투 자체의 의미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위 그림처럼 콘스탄티누스가 십자가의 환상을 보았다는 전승으로 유명하다.
이 일화에 따르면 전투를 치르기 전 어느 날 밤, 콘스탄타누스 황제가 막사에서 꿈을 꾸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빛나는 십자가가 나타나더니 '이 표시로 너는 승리할 것이다(In hoc signo vinces : 영어로 In this sign, ((you will or you shall) conquer)'[5] 라는 글자를 보게 된다. 꿈에서 깬 황제는 이 꿈에서 본 십자가 모양의 군기를 만들어 앞장세워 승리를 거두었다고 한다. 이 전승이 기록된 <콘스탄티누스 황제전(De Vita Constantini)>을 쓴 에우세비우스는 황제 본인으로부터 이 이야기가 진실이라는 맹세까지 받았다고 증언했다.(...) 후에 17세기 계몽 시기에 이르러 이 일화의 사실성에 대해서 비판을 받기도 했다. 따져 보아도, 같은 사람(에우세비우스)가 저것보다 이전인 325년에 썼던 <교회사>에서는,[6] 이런 이야기는 없었다고 한다. 있었으면 안 썼을 리가 없을 텐데... 오히려 <교회사>에서는, 하느님의 계시가 아니라 황제 본인과 그 자식들이 그려진 깃발이었다고 한다. 전투 현장에 있었던 몇 만 명의 병사들도 그렇고.[7] 그냥 그만큼 당시의 콘스탄티누스가 이 승리에 대해 간절했다고 보는 것이 맞는다.[8]
4.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 중세 고증으로 유명한 소설 늑대와 향신료에서 크래프트 로렌스가 현랑 호로에게 토르힐트 공화국 건국 설화를 설명하는 장면에서 밀비우스 다리 전투를 각색한 장면이 등장한다.
>대원정에 참가한 고명한 기사단이 이교도들의 군대에게 고전을 하고 있을 때였어. 하늘에 붉게 물든 해질녘이 가까워지자, 이젠 한계로구나 하며 지휘관이 퇴각 명령을 내리려는데 돌연 전장 일대에 그림자가 진 거야.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든 순간─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봤대. 새하얗고 거대한 교회의 문장이 온 하늘 가득 펄럭이고 있는 모습을."
>(중략)
>"맞아. 지나가던 새 떼였어. 하지만 기사단은 기적을 보았으니 질 리가 없다면서 사기충전했고, 해가 완전히 질 때까지의 몇 시간 사이에 상황을 뒤엎어 그 싸움에서 이기고야 만 거지. 그 이후로 그곳에 생겨난 나라의 깃발은 그때의 모습을 따서 붉은 천에 흰 교회의 문장을 넣게 되었고, 이로써 기적은 만들어져 가는 것이었던 것이었다."
>
>『늑대와 향신료』 12권 145~146p
>(중략)
>"맞아. 지나가던 새 떼였어. 하지만 기사단은 기적을 보았으니 질 리가 없다면서 사기충전했고, 해가 완전히 질 때까지의 몇 시간 사이에 상황을 뒤엎어 그 싸움에서 이기고야 만 거지. 그 이후로 그곳에 생겨난 나라의 깃발은 그때의 모습을 따서 붉은 천에 흰 교회의 문장을 넣게 되었고, 이로써 기적은 만들어져 가는 것이었던 것이었다."
>
>『늑대와 향신료』 12권 145~146p
[1] 로마 시 북쪽에 있고, 다리 밑의 강은 다름 아닌 테베레 강이다.[2] 따지자면 퇴각하다가 강물에 빠져 익사했는데, 그런 강물과 다리 자체가 전장이었으므로 사고사라기보다는 전사로 보는 것이 더 맞는다. 바다나 강에서 선박끼리 해전을 치르다가 물에 빠져 죽은 것을 사고사가 아니라 전사로 보는 것과 같다.[3] 로마 교황은 로마와 그 근처 이탈리아 중부지방의 영주이기도 했는데, 통일된다면 그 땅을 다 뱉어내야 한다. (뱉어내고 이탈리아에 완전히 소속시키자 항의의 표시로 바티칸 포로 상태로 있다가, 무솔리니가 이런 난국을 해결하고 국민과 교회의 지지를 얻고자 라테라노 조약을 체결한 결과 지금 바티칸이 탄생한 것) 옛날 서로마 말기 ~ 롬바르드 때와 달리 교황청/교황직 자체의 존립이 위험할 가능성은 전혀 없고 이탈리아 통일 당시에도 없었지만, 그 때의 동로마-프랑크-롬바르드 사이에서 신변의 안전을 꾀했던 안습했던 시절은 트라우마로 남았기에 로마 시 말고도 주변의 완충지역을 확보하고자 했고 그 결과가 교황령이었다. 그래서 치열하게 지키고자 했고(이런 거 다 빼도 있는 땅 뺏기고 싶겠는가, 교황도 사람인데) 그래서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와 제휴해 프랑스군을 파견받아 안전보장을 받았었다. 로마 시내 주둔군만으로 안 될 것 같자 프랑스군이 북쪽에서 증원을 오는 것이었다.[4] 그래서 콘스탄티누스가 카롤루스풍으로 그려져 있다. 의외로 제관과 복식 등의 고증은 봐줄 만한 수준.[5] 정작 저 사진 속의 글자는 라틴어도, 영어도 아닌 그리스어이다.(...)[6] 위의 황제전은 당연히 콘스탄티누스의 사망 후에 쓴 것이다.[7] <비잔티움 연대기>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 군만 보병 9만+기병 8천으로 9만 8천명이었다고 한다.[8] 위의 에우세비우스는 이에 대해 자신의 미래가 걸렸다는 엄청난 중압감 속에서 신적인 계시를 달라고 열렬히 기도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