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스 레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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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막스 레거 (Max Reger)
'''본명'''
요한 밥티스트 요제프 막시밀리안 레거 (Johann Baptist Joseph Maximilian Reger)‎
'''국적'''
독일 제국 [image]
'''출생'''
1873년 3월 19일, 브란트(Brand), 바이에른 왕국, 독일 제국
'''사망'''
1916년 5월 11일 (43세), 라이프치히, 작센 왕국, 독일 제국
'''직업'''
작곡가, 피아니스트, 오르가니스트, 교수
1. 소개
2. 생애
3. 대표작들
3.1. 오르간 독주곡
3.2. 관현악곡
3.3. 피아노곡
3.4. 실내악
3.5. 가곡


1. 소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이후로 가장 위대한 독일 오르간 음악 작곡가로 평가받음과 동시에, 독일 음악의 마지막 거장이자 후기 낭만주의 음악과 현대 음악 사이의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의 음악 특유의 복잡성과 난해함으로 인하여 많은 클래식 애호가들에게 외면받던 작곡가이다. 더불어 요하네스 브람스의 영향을 짙게 받았지만, 리하르트 바그너프란츠 리스트에게 영향을 받아 극도로 반음계적인 음악을 작곡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후기로 갈수록 복잡성이 옅어지고,인상주의에 영향을 받은 섬세한 음악적 색채가 돋보이기도 하기에, 마냥 복잡하다고 깔 수만은 없는 작곡가다.

2. 생애


1873년 독일 제국 바이에른 왕국 브란트에서 학교 교사였던 요제프 레거와 그의 아내, 필로미나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5살 때부터 어머니에게 피아노를 배우고, 나중에는 아버지에게 오르간과 바이올린을 배우면서 음악적 고양을 기르다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부터 아달베르트 린트너(Adalbert Lindner)에게 정규적으로 오르간 교습을 받게 되었다.[1]
나중에 요하네스 브람스를 좋아하게 된 것과 달리, 그의 삼촌이였던 요한 밥티스트 울리히(Johann Baptist Ulrich)가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 그를 초대하여 리하르트 바그너파르지팔한스 리히터의 지휘 아래에 이루어진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의 연주를 듣게 되면서 음악극에 눈을 뜨게 되고, 이것이 직접적으로 그가 작곡가의 길을 걷게 되는 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1890년대에는 비스바덴 콘서바토리에서 피아노와 음악이론 전공으로, 당대의 저명한 음악학자 후고 리만에게 사사받게 되었다. 둘은 급속도로 가까워져 매년 크리스마스 때면 리만과 같이 지내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듬해, 그의 제대로 된 첫 작품인 바이올린 소나타 Op. 1의 초연이 이루어졌지만, 쇼트(Schott) 사와의 출판 계약이 어른의 사정으로 인해서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이를 시작으로 막스 레거는 작곡가의 길을 밟게 되었다. 하지만 1895년쯤에는 스승에 대한 반항심이 생겼던 것인지, 의도적으로 '''브람스적 색체를 배제하고 리만이 그렇게나 싫어했던 리스트에게 크게 영향을 받아 첼로 소나타 Op.5를 작곡한다.'''[2]
하지만 이를 시작으로, 페루치오 부조니와도 개인적으로 서로의 작품을 보내면서, 같은 바흐 덕후 기질이 있었기에 친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나중에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게도 자신의 바흐의 곡에 대한 편곡을 보내게 되면서 긍정적인 평가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후에 슈트라우스는 빚더미에 나앉은 레거의 곡들을 출판하는 것을 많이 도와주게 된다.
나중에는 애국심에 고취된 것인지, 군에 자원복무하게 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런 짓은 하지 말아야 했는데가 되어버린다. 레거는 당시에 피아노 교습으로 돈을 발고 있었는데, 그런 그가 군에 복무하게 되면서 그것도 그만두게 되고, 작곡으로 벌어들이는 돈은 쥐꼬리만했다. 게다가 당시의 군대는 모든 장비를 '''전부 사비로 사들여야 했기 때문에''' 레거는 빚더미에 앉을 수밖에 없었고, 류마티스 관절염과 목 뒤에 생긴 종기로 인해 레거는 병역 부적합 판정을 받고 나중에는 군대에서 제대하게 된다.[3] 하지만 불행으로만 점철된 시기는 아니였다. 요하네스 브람스를 개인적으로 알게 되면서 친분을 쌓게 되기도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말이다.
1899년은 그의 인생에 있어서 중대한 전환점이 되는데, 바로 추후에 자신의 아내가 되어, 그의 사후에는 막스 레거 재단을 세우게 되는 '''엘사 바겐스키(Elsa Bagenski)'''를 알게 되면서부터다. 그는 그녀에게 피아노와 성악 교습을 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깊이 사랑에 빠져 가곡들을 작곡해 헌정했지만, 이미 도박에 빠진 남편과 이혼한 전력이 있었기에, '''그녀는 빚더미에 앉은데다가 도박에도 빠지고, 알코올담배에 중독되어있었던 그에게 시달리고 싶지 않았기에''' 청혼을 거절당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일을 계기로, 레거는 왕성한 작곡 활동을 통해 경제적 주도권을 잡고, 도박도 끊고, 알코올도 끊기 위해 노력하는 등, 피를 말리는 노력 끝에 1902년, 결혼에 성공한다.
1900년에 레거는 당시의 유명한 오르가니스트였던 요제프 라인베르거(Josef Rheinberger, 1839~1901)에게 그의 오르간 작품들 중에서 가장 복잡한 작품 중 하나로 꼽히는 '''이름 B-A-C-H에 의한 환상곡과 푸가 Op.46'''을 헌정하게 되었지만, 워낙에 괴상한데가 화성적으로도 극도로 반음계적인데다가 워낙에 복잡하게 짜여있는 곡이였는지라 반응은 당연히 몰라 뭐야 그거 무서워... 그렇게 이 곡으로 많은 오르가니스트들이 그에게 이목을 집중하게 되고, 그 중에는 나중에 이 작품을 초연하고, 더불어 레거가 곡을 헌정하게 되는 카를 슈트라우베(Karl Straube, 1873~1950)도 있었다. 게다가 나중에 슈트라우베에게는 자신의 작품 중에서 가장 '''공포스럽다고''' 여겨지는 장장 24분에 달하는 '''교향적 환상곡과 푸가 라단조 Op.57 "지옥 환상곡"''''을 바치게 된다. 당연히 슈트라우베 본인의 반응은 충공깽.

3. 대표작들



3.1. 오르간 독주곡





  • 이름 B-A-C-H에 의한 환상곡과 푸가 Op. 46

  • 교향적 환상곡과 푸가 라단조 Op.57 "지옥 환상곡"
  • 그 외에 다수의 코랄 프렐류드를 비롯한 작품들

3.2. 관현악곡



3.3. 피아노곡



  • 피아노 독주를 위한 10개의 작은 교습용 소품 Op.44

  • 피아노 독주를 위한 바흐 주제[4]에 의한 변주곡 Op.81

  • 피아노 2중주를 위한 베토벤 주제[5]에 의한 변주곡 Op.86[6]

  • 피아노 독주를 위한 텔레만 주제에 의한 변주곡 Op.134

  • 피아노 독주를 위한 '벽난로에서의 꿈' Op. 143

3.4. 실내악



3.5. 가곡



[1] 그와 동시에 집에다가 학교에 있던 파이프 오르간을 집에다가 설치했다고 한다. [2] 하지만 평단의 반응은 싸늘했고, 초연도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한다.[3] 말이야 제대지 '''실상은 쫓겨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4] 칸타타 BWV128 중 4번째 아리아 Sein Allmacht zu ergründen[5] 바가텔 Op.119 No.11[6] 후에 관현악을 위해 편곡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