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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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1월 1일부터 6월 14일까지 매일신보에 연재되었다. 작가는 이광수.
이 작품은 1910년 <대한흥학보>에 게재했던 동명의 단편소설 <무정>을 장편화한 것이다. 실제로 단편소설 <무정> 말미에는 “마땅히 장편이 될 재료로되 학보에 게재키 위하여 경개만 서(書)한 것이니, 독자 제씨는 양찰”하라는 이광수의 주석이 붙어있다. 단편 <무정>의 주인공은 여성으로, 어리고 무책임한 남편을 만나 갈등을 겪다가, 결국 음독자살을 기도하는 비극으로 끝난다.
1962년에 영화화되었으며 최은희, 허장강 등이 출연. 당대의 한국 영화 대부분이 그랬듯 원본 필름이 유실된 상태였다가 2016년에 대만에서 필름을 발견, 2017년에 복각하여 최초 공개되었다.
주인공 이형식은 경성학교의 영어교사로, 김장로의 딸 선형의 가정교사 노릇을 하게 된다. 선형의 가정교사 노릇을 하던 형식은 어느 날 자신의 과거 정혼자이자 은사의 딸이던 영채의 소식을 듣게 된다.
영채는 투옥된 애국지사인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기생이 되었으나, 딸이 기생이 되었다는 것을 안 아버지는 영채를 매우 욕하며, 후에 자살하고 말았다. 영채는 기생으로 일하면서도 형식을 위해 순결을 간직하고 있었고, 형식은 영채를 만나 선형과 영채 사이에서 갈등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 영채는 형식이 소속한 학교의 학감인 배 학감에게 강간을 당해 순결을 잃고, 형식의 집에 유서를 남기고 사라진다.
영채는 자살을 하려다가 기차에서 동경 유학생인 신여성 병욱을 만나게 된다. 영채의 사연을 알게 된 병욱은 봉건적 가치관에 따라 타인을 위해 희생만 하며 살아온 지금까지의 영채의 삶은 잘못 되었다고 하면서 그녀 자신을 위한 삶을 살라고 충고한다. 병욱의 도움을 받아 영채는 자신의 삶을 살기로 결심하고, 춤과 음악을 배우기 위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한편, 형식은 결단을 내려 선형과 약혼을 하였으며 함께 미국 유학을 떠나다가 기차 안에서 병욱과 함께 가고 있던 영채와 재회한다. 그들은 외국에서 학업을 마치면 고국에 돌아와 문명 발전에 힘쓸 것을 다짐한다.
한국 최초의 근대소설로 종래의 신소설과 구분되는 소설이자 연재 당시에 엄청난 인기[1] 와 큰 논란을 일으킨 문제작이다. 문학사적으로 따지면 '연애', 즉 이전까지처럼 서로 얼굴도 모르는 두 사람의 정략결혼이라는 전근대적 혼인 방식이 아닌 '연애에 기초한 혼인'을 최초로 서사화하고 이를 근대적 삶의 실천이자 심지어 '''민족 계몽'''으로까지 그 범위를 확장했다는 점에서 아주 큰 의의가 있다. 또 '연애'라는 단어가 이 당시 처음 만들어졌을 때는 지금과 같은 의미가 아닌 'LOVE', 사랑의 의미였다는 것을 고려해보면 개인과 개인이 감정의 주체로써 교제 인물을 선택하고 이로써 자아를 자각하는 의미로써도 의의가 있다.
또, 믿겨지지 않겠지만, 한국에서 최초로 '삼각관계'를 다룬 연애 소설이기도 하다[2] 그런데 이 삼각관계도 골 때린다. 왜냐하면 전개가 '''여자 2명에게 모두 책임이 있고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는 남자가 선택을 요구하는 두 여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어느 쪽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민중을 계몽시키는 것"이라고하면서 자신을 따르라고 강요하는 것으로 얼버무리는 것'''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즉, 양다리. 이게 왜 골 때리냐면, '''이광수도 양다리를 걸친 인물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고전적 위치를 얻어 꾸준히 연구와 재출간이 이뤄지고 있으며, 일본어와 영어로 번역되기도 하였다.
선형과 영채를 대하는 주인공 형식의 상반된 태도에 대해서 당시에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가 논쟁을 벌였을 정도로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광수가 무정 외에도 동성애 코드가 함유된 작품을 익히 발표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발표된 시기가 1910년대라는 것을 생각하면 굉장히 과감한 동성애 표현으로도 끊임없이 뜨거운 감자였다. 영채와 월화의 유사 성행위 장면이라든지, 기차에서 실의에 빠져 있는 영채에게 작업을 거는 병욱이라든지, 형식이 희경에게 남녀 사이의 사랑과 같은 감정을 느끼며 사랑한다는 묘사 등이 당시 큰 논란이었다.
연재 당시에도 인기가 상당했지만, 그 이후로도 꾸준히 엄청난 인기를 구가한 작품. 일제강점기에 가장 많이 팔린 작품이나 20세기 한국인이 가장 많이 읽은 책 등에 대한 주제에서 빠지지 않고 상위 랭크 후보로 분류된다.
등장인물 간의 대화를 통해 일제강점기 우리말 파괴가 어느 정도로 심각했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작품이라는 의의도 있다. 다음은 주인공 이형식과 그의 지인인 신우선 간의 대화이다. 외국어를 많이 섞어 말하는 쪽이 신우선이다.
현재 <무정>의 완벽한 정본은 없다고 봐도 무리가 아니다. 워낙 자주 재출간이 이루어진 인기작품이었던 만큼 일제강점기에도 수없이 많은 판과 쇄가 나왔기 때문. 그나마 작가인 이광수가 살아 있었을 때는 작가가 수정에 개입했을 거라 추정되지만 한국전쟁 중에 이광수가 사망한 후로는 워낙 많은 출판사에서 각기 출판사나 편집자 임의대로 수정되어 출간되곤 했었다. 출판사마다 등장인물 이름이 살짝씩 다르거나 문체를 그대로 살린 판과 현대식으로 살린 판, 등장인물이 사용하는 외국어를 그대로 표기한 판과 당시 조선말로 수정한 판 등 다양하다.
당시 편집 기술에 문제가 있었는지, 본래의 원고는 오탈자가 많은 작품이다. 심지어 등장인물 이름도 수시로 바뀌기도 하고, 몇몇은 초반부에 비중이 있는 것처럼 나오다가 돌연 언급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계몽 소설의 영향, 그리고 한국에서는 실험적으로 시도된 근대 문학이라는 특성상 발단에서 절정, 결말에 이르는 일련의 플롯이 유기적으로 짜여져 있지 않다는 특성이 남아 있다. 특히 후반부[8] 에 뜬금없는 "민족 발전과 전세계의 문명 발전에 이바지하자"는 내용으로 흘러가는 것이 대표적인 한계. 근대 문명에 대한 우호적인 접근도 엿보인다. 이 문제들은 자선 음악회 사건에서 터져버리기 때문에, 읽다 보면 결말부에 위화감이 들 수도 있다. 첫머리에도 기승전과학 소설이라는 농담이 있지만, 실제로 무정에 대한 비판적 독해자 중에는" 이야기가 절정에 이르기까지 연애 중심의 갈등구조를 통해 이야기를 전개하던 작가가, 결말 쓰면서 '뭔가 교훈을 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진 게 아니냐"고 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
이런 전개는 당시 소설들의 클리셰이긴 했지만, 이 소설에서는 상당히 추상적인 방식의 계몽을 들고 있는 점이 비판할 점이다. 교육을 통한 개화가, 당시 일제의 핍박으로 인해 집을 잃거나 식량난을 겪는 많은 국민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무정에서 말하는 계몽이란, 일부 지식인들을 통한 소극적 개혁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작가도 이를 의식한 것인지, 소설 극후반부에 이형식이 생물학을 공부할 것이라고 하는데
이에 대한 서술자적 논평에 나타나 있듯이, 당시 현실적 여건을 고려하지 않은 계몽운동에 대한 회의적 시각도 나타나기는 한다. 사실 이런 '''소꿉장난 같은''' 계몽에 대한 회의적 시각은 소설의 중반부터 드러나고 있다. 예를 들어, 선형의 아버지인 김 장로는 형식을 사위로 삼으면서 "미국에 유학을 보내줄 테니 박사학위를 받아서 돌아오라"고 하지만, 박사학위를 어떻게 해야 받을 수 있는지는 모른다. 그리고 형식과 대화하는 과정에서 "여자도 박사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부인(후처, 선형의 입장에서는 새어머니)은 솔직하게 신기하고 놀라워하지만 김 장로는 이미 알고있었던 척 잘난 척하면서 즉흥적으로 "그럼 선형도 박사학위까지 받고 돌아오라"고 결정한다. 그리고 한 집안에서 박사 2명이, 그것도 부부로 나온다는 것에 스스로 자뻑한다.(...) 이런 모습은 작품 내에서도 소꿉장난 같고 위태롭다는 비판의 대상이 되며, 일단 형식은 이 시점까지는 김 장로의 이런 모습을 다소 한심하게 여기지만 그래도 이젠 가족이 되었다는 생각에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런데, 작품의 후반에 가면 생물학이 뭔지도 모르면서 생물학을 연구하겠다고 하는 형식의 한심한 모습을 작가는 따뜻한 눈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현대의 독자는 작가 이광수의 한심한 모습을 비판적이지만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연애소설로 봐도 저 부분이 가장 웃긴데, 주인공인 형식은 자신이 선택하고 싶은 선형과 버리면 욕먹을 영채 사이에서 선택의 순간에 맞닥드리게 된다. 그 상황에서 형식은 '''"누굴 선택할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가 조선인들을 깨우쳐야 된다는 게 중요하다"'''는 식으로 몰아간다. 그래서 전형적인 남녀관계가 갑자기 계몽사상 토론회로 변하고, 거기에 그나마 대꾸라도 할 수 있는 것은 병욱 정도라서 형식을 추궁하거나 선택을 강요해야 할 상황이었던 영채와 선형이 학생 1, 학생 2로 떨어진다. 그런 상황이라 형식이 누구를 선택하느냐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는 분위기로 흘러가고, 형식은 은근슬쩍 선형과 함께 미국으로 유학 간다. 여기에 영채도 병욱과 함께 일본으로 유학가면서 실질적 스토리가 끝난다. 이 셋이 다시 엮이면 후일담이 이어지니까 만능의 도구 유학으로 다시 만나기 어렵게 뚝 떨어뜨려놨다는 수준. 진짜 고전문학으로 돌아가는 것은 에필로그로, '''갑자기 작가가 개입해서 "모두가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라고 설명하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왜냐하면 작가도 형식만큼이나 생물이나 과학에 대해서 잘 모르고, 미국 유학 생활을 묘사할 수도 없기 때문에 그냥 대충 때우고 끝나는 것이다.
현재 문학계에서는 소설이라기보다는 소설적 구조를 취한 정치 선전문으로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크다. 작가가 갑톡튀하여 자신의 견해를 투영하는 점 때문에, 작가의 주장이 소설의 서사구조를 압도해버리는 소설을 써 가면 "무정 써 온 거냐"고 까인다.(...)
1. 개요
"과학(科學)!, 과학!"
주인공 이형식이 근대 교육을 통한 계몽의 필요성을 느끼며 여관에서 부르짖는 대사
1917년 1월 1일부터 6월 14일까지 매일신보에 연재되었다. 작가는 이광수.
이 작품은 1910년 <대한흥학보>에 게재했던 동명의 단편소설 <무정>을 장편화한 것이다. 실제로 단편소설 <무정> 말미에는 “마땅히 장편이 될 재료로되 학보에 게재키 위하여 경개만 서(書)한 것이니, 독자 제씨는 양찰”하라는 이광수의 주석이 붙어있다. 단편 <무정>의 주인공은 여성으로, 어리고 무책임한 남편을 만나 갈등을 겪다가, 결국 음독자살을 기도하는 비극으로 끝난다.
1962년에 영화화되었으며 최은희, 허장강 등이 출연. 당대의 한국 영화 대부분이 그랬듯 원본 필름이 유실된 상태였다가 2016년에 대만에서 필름을 발견, 2017년에 복각하여 최초 공개되었다.
2. 줄거리
주인공 이형식은 경성학교의 영어교사로, 김장로의 딸 선형의 가정교사 노릇을 하게 된다. 선형의 가정교사 노릇을 하던 형식은 어느 날 자신의 과거 정혼자이자 은사의 딸이던 영채의 소식을 듣게 된다.
영채는 투옥된 애국지사인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기생이 되었으나, 딸이 기생이 되었다는 것을 안 아버지는 영채를 매우 욕하며, 후에 자살하고 말았다. 영채는 기생으로 일하면서도 형식을 위해 순결을 간직하고 있었고, 형식은 영채를 만나 선형과 영채 사이에서 갈등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 영채는 형식이 소속한 학교의 학감인 배 학감에게 강간을 당해 순결을 잃고, 형식의 집에 유서를 남기고 사라진다.
영채는 자살을 하려다가 기차에서 동경 유학생인 신여성 병욱을 만나게 된다. 영채의 사연을 알게 된 병욱은 봉건적 가치관에 따라 타인을 위해 희생만 하며 살아온 지금까지의 영채의 삶은 잘못 되었다고 하면서 그녀 자신을 위한 삶을 살라고 충고한다. 병욱의 도움을 받아 영채는 자신의 삶을 살기로 결심하고, 춤과 음악을 배우기 위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한편, 형식은 결단을 내려 선형과 약혼을 하였으며 함께 미국 유학을 떠나다가 기차 안에서 병욱과 함께 가고 있던 영채와 재회한다. 그들은 외국에서 학업을 마치면 고국에 돌아와 문명 발전에 힘쓸 것을 다짐한다.
3. 의의
한국 최초의 근대소설로 종래의 신소설과 구분되는 소설이자 연재 당시에 엄청난 인기[1] 와 큰 논란을 일으킨 문제작이다. 문학사적으로 따지면 '연애', 즉 이전까지처럼 서로 얼굴도 모르는 두 사람의 정략결혼이라는 전근대적 혼인 방식이 아닌 '연애에 기초한 혼인'을 최초로 서사화하고 이를 근대적 삶의 실천이자 심지어 '''민족 계몽'''으로까지 그 범위를 확장했다는 점에서 아주 큰 의의가 있다. 또 '연애'라는 단어가 이 당시 처음 만들어졌을 때는 지금과 같은 의미가 아닌 'LOVE', 사랑의 의미였다는 것을 고려해보면 개인과 개인이 감정의 주체로써 교제 인물을 선택하고 이로써 자아를 자각하는 의미로써도 의의가 있다.
또, 믿겨지지 않겠지만, 한국에서 최초로 '삼각관계'를 다룬 연애 소설이기도 하다[2] 그런데 이 삼각관계도 골 때린다. 왜냐하면 전개가 '''여자 2명에게 모두 책임이 있고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는 남자가 선택을 요구하는 두 여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어느 쪽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민중을 계몽시키는 것"이라고하면서 자신을 따르라고 강요하는 것으로 얼버무리는 것'''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즉, 양다리. 이게 왜 골 때리냐면, '''이광수도 양다리를 걸친 인물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고전적 위치를 얻어 꾸준히 연구와 재출간이 이뤄지고 있으며, 일본어와 영어로 번역되기도 하였다.
선형과 영채를 대하는 주인공 형식의 상반된 태도에 대해서 당시에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가 논쟁을 벌였을 정도로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광수가 무정 외에도 동성애 코드가 함유된 작품을 익히 발표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발표된 시기가 1910년대라는 것을 생각하면 굉장히 과감한 동성애 표현으로도 끊임없이 뜨거운 감자였다. 영채와 월화의 유사 성행위 장면이라든지, 기차에서 실의에 빠져 있는 영채에게 작업을 거는 병욱이라든지, 형식이 희경에게 남녀 사이의 사랑과 같은 감정을 느끼며 사랑한다는 묘사 등이 당시 큰 논란이었다.
연재 당시에도 인기가 상당했지만, 그 이후로도 꾸준히 엄청난 인기를 구가한 작품. 일제강점기에 가장 많이 팔린 작품이나 20세기 한국인이 가장 많이 읽은 책 등에 대한 주제에서 빠지지 않고 상위 랭크 후보로 분류된다.
등장인물 간의 대화를 통해 일제강점기 우리말 파괴가 어느 정도로 심각했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작품이라는 의의도 있다. 다음은 주인공 이형식과 그의 지인인 신우선 간의 대화이다. 외국어를 많이 섞어 말하는 쪽이 신우선이다.
“요- 오메데토오.[3]
이이나즈케[4] 가 있나 보네그려. 음, 나루호도[5] . 그러구도 내게는 아무 말도 없단 말이야. 에, 여보게” 하고 손을 후려친다.형식은 하도 심란하여 구두로 땅을 파면서,
“아니야. 저, 자네는 모르겠네. 김 장로라고 있느니...”
“옳지, 김 장로의 딸일세그려? 응. 저, 옳지, 작년이지. 정신여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명년 미국 간다는 그 처녀로구먼. 베리 굿.”
“자네 어떻게 아는가?”
“그것 모르겠나. 이야시쿠모 신문기자가.[6]
그런데 언제 엥게지먼트[7] 를 하였는가.”
4. 정본 논란
현재 <무정>의 완벽한 정본은 없다고 봐도 무리가 아니다. 워낙 자주 재출간이 이루어진 인기작품이었던 만큼 일제강점기에도 수없이 많은 판과 쇄가 나왔기 때문. 그나마 작가인 이광수가 살아 있었을 때는 작가가 수정에 개입했을 거라 추정되지만 한국전쟁 중에 이광수가 사망한 후로는 워낙 많은 출판사에서 각기 출판사나 편집자 임의대로 수정되어 출간되곤 했었다. 출판사마다 등장인물 이름이 살짝씩 다르거나 문체를 그대로 살린 판과 현대식으로 살린 판, 등장인물이 사용하는 외국어를 그대로 표기한 판과 당시 조선말로 수정한 판 등 다양하다.
5. 비평
당시 편집 기술에 문제가 있었는지, 본래의 원고는 오탈자가 많은 작품이다. 심지어 등장인물 이름도 수시로 바뀌기도 하고, 몇몇은 초반부에 비중이 있는 것처럼 나오다가 돌연 언급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계몽 소설의 영향, 그리고 한국에서는 실험적으로 시도된 근대 문학이라는 특성상 발단에서 절정, 결말에 이르는 일련의 플롯이 유기적으로 짜여져 있지 않다는 특성이 남아 있다. 특히 후반부[8] 에 뜬금없는 "민족 발전과 전세계의 문명 발전에 이바지하자"는 내용으로 흘러가는 것이 대표적인 한계. 근대 문명에 대한 우호적인 접근도 엿보인다. 이 문제들은 자선 음악회 사건에서 터져버리기 때문에, 읽다 보면 결말부에 위화감이 들 수도 있다. 첫머리에도 기승전과학 소설이라는 농담이 있지만, 실제로 무정에 대한 비판적 독해자 중에는" 이야기가 절정에 이르기까지 연애 중심의 갈등구조를 통해 이야기를 전개하던 작가가, 결말 쓰면서 '뭔가 교훈을 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진 게 아니냐"고 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
이런 전개는 당시 소설들의 클리셰이긴 했지만, 이 소설에서는 상당히 추상적인 방식의 계몽을 들고 있는 점이 비판할 점이다. 교육을 통한 개화가, 당시 일제의 핍박으로 인해 집을 잃거나 식량난을 겪는 많은 국민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무정에서 말하는 계몽이란, 일부 지식인들을 통한 소극적 개혁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작가도 이를 의식한 것인지, 소설 극후반부에 이형식이 생물학을 공부할 것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듣는 사람이라는 이들이 여주인공들과 병옥, 형식 등이다. 자기가 깨우쳤고, 그 깨우침을 전파하겠다는 사람들이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른다."나는 교육자가 되렵니다. 그리고 전문으로는 생물학(生物學)을 연구할랍니다."
듣는 사람 중에는 생물학의 뜻을 아는 자가 없었다. 이렇게 말하는 형식도 물론 생물학이란 뜻은 참 알지 못하였다. 다만 자연과학(自然科學)을 중히 여기는 사상과 생물학이 가장 자기의 성미에 맞을 듯하여 그렇게 작정한 것이다.
(중략)
'''생물학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새 문명을 건설하겠다고 자담하는 그네의 신세도 불쌍하고, 그네를 믿는 시대도 불쌍하다'''.
이에 대한 서술자적 논평에 나타나 있듯이, 당시 현실적 여건을 고려하지 않은 계몽운동에 대한 회의적 시각도 나타나기는 한다. 사실 이런 '''소꿉장난 같은''' 계몽에 대한 회의적 시각은 소설의 중반부터 드러나고 있다. 예를 들어, 선형의 아버지인 김 장로는 형식을 사위로 삼으면서 "미국에 유학을 보내줄 테니 박사학위를 받아서 돌아오라"고 하지만, 박사학위를 어떻게 해야 받을 수 있는지는 모른다. 그리고 형식과 대화하는 과정에서 "여자도 박사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부인(후처, 선형의 입장에서는 새어머니)은 솔직하게 신기하고 놀라워하지만 김 장로는 이미 알고있었던 척 잘난 척하면서 즉흥적으로 "그럼 선형도 박사학위까지 받고 돌아오라"고 결정한다. 그리고 한 집안에서 박사 2명이, 그것도 부부로 나온다는 것에 스스로 자뻑한다.(...) 이런 모습은 작품 내에서도 소꿉장난 같고 위태롭다는 비판의 대상이 되며, 일단 형식은 이 시점까지는 김 장로의 이런 모습을 다소 한심하게 여기지만 그래도 이젠 가족이 되었다는 생각에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런데, 작품의 후반에 가면 생물학이 뭔지도 모르면서 생물학을 연구하겠다고 하는 형식의 한심한 모습을 작가는 따뜻한 눈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현대의 독자는 작가 이광수의 한심한 모습을 비판적이지만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연애소설로 봐도 저 부분이 가장 웃긴데, 주인공인 형식은 자신이 선택하고 싶은 선형과 버리면 욕먹을 영채 사이에서 선택의 순간에 맞닥드리게 된다. 그 상황에서 형식은 '''"누굴 선택할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가 조선인들을 깨우쳐야 된다는 게 중요하다"'''는 식으로 몰아간다. 그래서 전형적인 남녀관계가 갑자기 계몽사상 토론회로 변하고, 거기에 그나마 대꾸라도 할 수 있는 것은 병욱 정도라서 형식을 추궁하거나 선택을 강요해야 할 상황이었던 영채와 선형이 학생 1, 학생 2로 떨어진다. 그런 상황이라 형식이 누구를 선택하느냐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는 분위기로 흘러가고, 형식은 은근슬쩍 선형과 함께 미국으로 유학 간다. 여기에 영채도 병욱과 함께 일본으로 유학가면서 실질적 스토리가 끝난다. 이 셋이 다시 엮이면 후일담이 이어지니까 만능의 도구 유학으로 다시 만나기 어렵게 뚝 떨어뜨려놨다는 수준. 진짜 고전문학으로 돌아가는 것은 에필로그로, '''갑자기 작가가 개입해서 "모두가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라고 설명하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왜냐하면 작가도 형식만큼이나 생물이나 과학에 대해서 잘 모르고, 미국 유학 생활을 묘사할 수도 없기 때문에 그냥 대충 때우고 끝나는 것이다.
현재 문학계에서는 소설이라기보다는 소설적 구조를 취한 정치 선전문으로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크다. 작가가 갑톡튀하여 자신의 견해를 투영하는 점 때문에, 작가의 주장이 소설의 서사구조를 압도해버리는 소설을 써 가면 "무정 써 온 거냐"고 까인다.(...)
6. 등장인물
- 이형식
- 김선형
- 박영채
- 김병욱
- 신우선
- 배 학감
- 이희경
[1] 신문에 연재될 당시 연재가 하루만 지연되어도 독자들의 항의 편지가 빗발칠 정도였다고 한다(...) 사람들이 신문기사를 보려고 매일신보를 산 게 아니라 무정 다음 편을 읽기 위해 매일신보를 샀다는 말도 과언이 아닐 정도.[2] 사실, 연애소설을 통해 접한 근대적/서구적 연애라는 개념은 한국, 중국, 일본을 비롯한 극동국가의 개화기에서 개인의 자유를 상징하는 문화적 충격으로써 매우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이는 마오쩌둥이 미국인 기자인 애그니스 스메들리를 만났을 때 처음 물어본 것 중 하나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나오는 것 같은 연애란 것이 실제로 존재하느냐, 단순히 소설가의 상상 속에서 나타난 허구의 개념이 아니냐, 실제로 그런 연애를 하는 사람이라는 게 있긴 하느냐?"는 것이었다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개인의 감정에 의한 남녀간의 관계라거나, 그 감정 때문에 기존의 사회가 자신에게 부과하는 의무를 방기(放棄)할 수 있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상상하기도 힘든 일이었던 것.[3] "아, 축하하네."[4] 약혼자.[5] "과연."[6] "이래 봬도 신문기자인데"라는 의미.[7] 약혼.[8] 이재민 모금 운동 부분 이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