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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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준공영 조간 종합 일간 신문. 1904년 7월 18일에 창간된 한말의 대표적 민족지 대한매일신보가 기원으로 한국의 현재 발행되고 있는 신문 중에서는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이름과 달리 서울시에 한정된 지역 일간지가 아니라 전국에 발행하는 전국지이다.
노조는 민주노총 언론노조 소속이다.
2. 역대 사시
2.1. 1965 ~ 1998: (구)서울신문의 다짐
- 나라의 이익을 앞세운다
- 정치를 바른길로 이끌어준다
- 경제를 뻗게 하는 길잡이가 된다
- 사회를 밝게 하는 횃불이 된다
- 문화를 꽃피우는 샘터가 된다
2.2. 1998 ~ 2003: 대한매일의 다짐
- 공공이익을 앞세우는 신문
- 국민복지에 앞장서는 신문
- 민족화합을 앞당기는 신문
- 2000년대에 앞서가는 신문
2.3. 2004 ~ 현재 : (신)서울신문의 다짐
- 바른 보도로 미래를 밝힌다
- 공공이익과 민족화합에 앞장선다
3. 사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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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사 사무실은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의 한국프레스센터에 위치하고 있으며, 현재의 건물은 1984년 12월에 완공되었다. 저 건물은 스포츠서울,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공포광고협의회)도 있다.
현 서울신문 사옥 터에 얽힌 발자취
4. 지배 구조
5. 역사
5.1. 대한매일신보 시대
1904년 7월 18일에 창간된 대한제국 시대의 신문이다.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이 양기탁 등 민족계몽 계열 독립운동가들의 지원을 받아 세웠다.
대한매일신보 항목 참고.
5.2. 매일신보 시대
1910년 8월 30일부터 1945년 11월까지 조선총독부의 기관지로 존재했던 시대. 자세한 내용은 매일신보 항목 참고.
'''이 신문의 흑역사'''.
5.3. 서울신문 시대
8.15 광복 후 한동안 좌익계열의 사원자치위원회가 운영하다가 미군정과 갈등을 빚어 1945년 11월 10일 군정 당국이 정간처분을 내렸다. 그후 11월 22일에 위창 오세창 사장, 하경덕 부사장, 성재 이관구(1898~1991) 주필, 홍기문(1903~1992) 편집국장[3] 등의 경영진과 필진을 새로 구성하여 '서울신문'이란 이름으로 변경하고 속간하였다. 지령은 대한매일신보와 매일신보를 모두 계승하여 1만 3738호로 발행하였다.
이후 여러 번 기사내용을 시비로 공보처의 간섭과 감독을 받게 되어 1950년대에는 이승만 정권의 어용신문으로서 자유당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다가 4.19 혁명이 일어나면서 '''시위대들이 사옥과 시설을 홀랑 불태워 버려 수많은 희귀 자료들이 손실되었고''', 이승만 퇴진 이후 허정 과도정권기 들어 한국일보 출신인 석천 오종식(1906~1976)이 사장직에 부임했으나, 당연하게도 이후 독자층이 대거 이탈하면서 재정난 크리에 빠져 1961년 5월 9일 휴간되었다. 5.16이 일어난 후인 12월 22일에 주 36면 석간 단간제로 다시 속간되었고 독재정권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나팔수 노릇을 계속했다. 매일신보 시절에 버금가는 흑역사 시절.
1959년 3월 23일에 갑자기 대한매일신보와 매일신보로 이어지던 지령을 폐기했다.
1998년 11월 11일에는 대한매일신보 지령은 다시 추가했다. 그러면서도 친일 기관지 시절이던 매일신보 시절은 자신들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은 것인지 매일신보 지령만 빼고 계산하는 괴상한 계산법을 선보였다. 일종의 친일 역사 세탁. 2020년 현재까지도 이 희한한 지령 계산법을 쓰고 있는 중이다.
한겨레보다 앞서 한글전용을 실행한 전력이 있다. 1958년과 1968년에 한글전용판을 발행하였지만 호응이 시원치 않아서 채 1년을 넘기지 못하고 다시 국한문혼용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신문 발행에 있어서 글자배열이나 편집체제, 문장 등을 한글판에 맞도록 연구하는 등 의미있는 작업이었다. 20년 후 창간하는 한겨레의 한글전용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준 셈.
또 1983년부터 국내 일간신문 최초로[4] 신문 제작방식의 주류인 납활자판을 버리고 컴퓨터 제작 시스템(CTS, Computerized Typesetting System)을 도입하여 프레스센터 준공 후인 1985년 신정부터 실시해 타 언론사보다 먼저 신문 제작의 전산화를 꾀하였다. 이를 1988년 한겨레신문, 국민일보, 1989년 세계일보, 1992년 조선일보, 중앙일보, 경향신문, 1993년 한국일보, 1994년 동아일보가 뒤따르게 되었다.
5.4. 민주화 이후 현황
1987년 6월 항쟁과 6.29 선언, 노동자 대투쟁은 서울신문의 역사를 전환케 했다. 1988년 4월에 권영길 외신부장을 중심으로 노동조합이 결성되어 1989년 9월 사원지주제, 사후평가제, 제작 3개 국장 임명동의제 관철 등을 목표로 26일간 파업을 벌여 부분적으로 관철시켰다. 1995년에는 '서울신문 뉴스넷'이란 이름으로 인터넷신문 서비스를 개시하고 1996년부터 가로쓰기로 바꾸었다. 1997년에는 세계 최초로 구동축이 없는 '타워형 샤프트리스 윤전기'를 도입해 가동시키고 전면컬러 제작이 가능한 '5세대 CTS'를 가동시켰다.
위와 같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친정부 언론의 대표주자다. 군사독재정부 시절 중앙일간지 가운데서는 친정부 성향으로는 경향신문과 쌍벽을 이루었으며 1990년 경향신문이 한화그룹에 인수된 이후에는 지존의 자리를 차지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편파보도로 까였던 조선일보를 이 점에서는 안드로메다급으로 능가했고, 1992년 대선 당시 송정숙[5] 논설위원이 쓴 논설은 노골적인 YS찬양때문에, "YS에게 보내는 연애편지"라고 친여적인 자사의 기자들에게도 까였을 정도. 뿐만 아니라 노골적으로 야당을 공격하고 여당쪽을 두둔하는 보도를 일삼았다. "계도지"라고 해서 서울신문을 관공서나 통장집에서 정부예산으로 구독했고, 이렇게 정부예산으로 구독을 해주니 논조가 어떨진 뻔한 내용. 뭐 그렇긴 해도 문민정부 이후로는 노조도 있어서인지 노태우 정권 이전보다는 논조가 완화되기는 했다.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자 1998년 11월 6일에 <서울신문 영욕의 53년 나래 접으며>라는 제목으로 지난날의 과오를 반성한답시고 저런 칼럼을 실은 뒤 동월 10일자부터 제호를 대한매일신보의 후신을 자처하는 의미에서 사명은 '(주)대한매일신보사', 제호는 '대한매일'로 각각 변경하고 도메인도 'www.kdaily.com'으로 바꾸면서 매일신보 기간을 제외한 대한매일신보의 지령을 합산하기 시작했다.[6] 이후엔 김대중 정권 입맛에 맞춰 좌파 매체로 변신하여 한겨레, 경향신문과 함께 좌파신문 트로이카 ''''한경대''''로 불리기도 했다. 결국 어느 정부가 들어서건 '''친정부 언론'''.
1999년에는 스포츠서울 부문을 '스포츠서울21(주)'로 독립시켰고, 2000년부터 편집국장 선출방식을 직선제로 바꾸고 2002년부터 본사 사원들로 구성된 우리사주조합이 지분을 인수해 대주주가 되어 사장 선출방식을 공모제로 바꾸었다. 2004년 1월 1일을 기해 다시 '서울신문'으로 제호를 환원했지만 지령은 대한매일신보부터 지금까지 그대로 계산하고 있다.
2009년 이동화 사장 취임 이후 편집국장 선출방식이 9년만에 임명동의제로 바뀌면서 논조가 예전의 관보 수준으로 후퇴할까 싶었지만, 정부 비판 기사가 나오는 등 나름 독립적인 색채를 유지하려고 노력중이다.
2017년부터 이덕일에게 연재 지면을 주면서 논란이 되고 있기도 하다. 이덕일은 해당 지면에서 최소한의 사료 검증도 안된 자신의 망상을 마음껏 펼치고 있는 중(...).
2018년 7월부터는 '''토요일자 신문을 발행하지 않는다.''' 주52시간 노동시간 단축에 대응하기 위해 국내 종합일간지 신문사[7] 중 최초로 주 5일 발행을 하게 되었다. # 대신 평일판의 지면수가 늘어날 예정이다.
2019년 6월 포스코의 지분전량(19.4%)을 호반건설이 매입했다. 이에 서울신문사 구성원들은 언론을 민간건설 자본에 넘기지 않겠다며 ‘1대 주주 지위 회복’을 위해 노력중이다. #1 아울러 호반건설의 언론사 대주주로서 가져야 할 도덕성 여부를 검증하는 측면에서 호반건설의 편법 승계 의혹을 취재하였다. #2 또한 전 지분 소유주였던 호반건설과 포스코를 정면비판하는 기사를 헤드라인으로 내보냈다.#3
2020년 상반기 기재부가 지분 공개매각을 선언하였고, 이를 막겠다며 반발하는 중이다. 한때 정권의 어용신문 소리를 들었던 신문사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지면 전체가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을 향한 비판으로 가득차 있다. 서울신문 매각이 끝나는 대로, 2021년 상반기에 기재부가 YTN까지 매각하겠다는 입장이라 서울신문의 매각이 YTN의 미래를 결정짓는 신호탄이 될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라임 사태의 핵심인물 김봉현 스타모빌리티 전 회장이 야당 정치인과 검사에게 로비를 했단 주장이 담긴 김 전 회장의 자필편지를 단독 입수해 공개했다.#
5.5. 2020년 기획재정부의 서울신문 지분 매각 희망
한국기자협회발 기사
서울신문발 기사
호반건설은 왜 서울신문의 포스코 지분을 인수했는가?
경향신문발 기사
6. 특징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신문사다. 한국프레스센터 건물을 소유하고 있다. 신문산업 쇠락으로 매출은 줄었지만 6년 연속 순이익을 기록하였고, 재정상태도 튼튼한 편이다. 1970~80년대를 주름잡은 그 유명한 선데이 서울을 비롯하여 퀸, TV가이드, 뉴스피플, 파르베 등 많은 잡지가 서울신문 소유였지만 <퀸>을 빼고 모두 폐간되었다.
과거에는 정부가 운영하던 공기업이었으나 2002년 1차 민영화 이후 최대주주는 본사 사원주주조직인 우리사주조합(39%)으로 바뀌었으나, 그 외에는 KBS, 기획재정부, 포스코 등이 지니고 있다. 그러나 포스코는 2002년 이후 민영화되어 정부지분이 아니다.
서울신문에서 창간했던 스포츠서울의 경우 1999년 12월 자회사로 분사된 이후 2007년 5월 서울신문에서 보유한 주식을 모두 매각했다. 그러나 2016년 현재까지도 자매지 관계는 유지하고 있다. 그 외에도 여성지인 <Queen>이 있다.
정부기관지의 성격을 가지고 있으므로, 공무원 시험등 국가에서 주관하는 시험들 대부분은 이 신문을 거쳐 민간에 발표된다. 수험생이라면 주목할만한 부분.
그 외에 최우수 교정공무원을 뽑는 교정대상과 우수 청년농민을 뽑는 농어촌청소년대상을 1981년부터 시상해오고 있으며, 1959년부터 2003년까지 패왕전이라는 프로바둑기전을 개최한 바 있었다. 2002년부터 서울 상암에서 '서울신문 하프마라톤'을 매년 개최중이다.
7. 자회사
8. 여담
9. 관련 문서
10. 관련 문헌
11. 역대 임원
11.1. 명예사장
- 오세창 (1945~1946)
11.2. 회장
이승만 정권기 시절에는 공보실장이 회장직을 겸하였다.
11.3. 대표이사 사장
대한매일신보와 매일신보 시절 사장 목록은 해당 항목 참조. 11~19대까지는 한국신문협회장을 자동 겸임하였다.
- 초대 오세창 (1945)
- 2대 하경덕 (1945~1949)
- 3대 박종화 (1949~1954)
- 4대 정등운 (1954~1956)
- 5대 장기봉[8] (1956)
- 6대 김형근[9] (1956~1958)
- 7대 김법린 (1958~1959)
- 8대 손도심 (1959~1960)
- 최정우 (1960, 불취임)
- 9대 오종식 (1960~1962)
- 10대 양순직 (1962~1963)
- 사장대행 김창엽 (1963~1964)
- 사장대행 이상조 (1964)
- 11대 김여원[10] (1964~1965)
- 12대 장태화[11] (1965~1972)
- 13대 신범식 (1972~1974)
- 14대 김종규[12] (1974~1980)
- 15대 문태갑 (1980~1984)
- 16대 이우세[13] (1984~1986)
- 17대 이진희 (1986~1987)
- 18대 이광표 (1987~1988)
- 19대 서기원 (1988~1990)
- 20대 신우식 (1990~1992)
- 21대 윤형섭 (1992~1993)
- 22대 이한수 (1993~1995)
- 23대 손주환 (1995~1998)
- 사장대행 김문진 (1998)
- 24대 차일석[14] (1998~2001)
- 25대 전만길 (2001~2002)
- 26대 유승삼[15] (2002~2003)
- 27대 채수삼[16] (2003~2006)
- 28대 노진환 (2006~2009)
- 29대 이동화 (2009~2012)
- 30대 이철휘 (2012~2015)
- 31대 김영만 (2015~2018)
- 32대 고광헌[17] (2018.5 ~ 현재)
11.4. 부사장
- 하경덕 (1945~1946)
- 홍천 (1961)
- 김창엽 (1963~1964)
- 이상조 (1964~1965)
- 윤흥렬[18] (1999~2002)
- 김행수 (2002~2003)
- 안용수 (2015/2018.5 ~ 현재)
- 윤여권 (2015~2018)
12. 주요 간부
12.1. 주필
- 이관구 (1945~1946/1946~1947)
- 홍기문 (1946)
- 김무상 (1947)
- 이건혁 (1948~1949)
- 오종식 (1949~1952)
- 정인봉 (1954~1956)
- 전홍진 (1956~1958)
- 김영진 (1958~1960)
- 주원 (1964~1966)
- 이종극 (1966~1973)
- 한태연 (1973)
- 남재희 (1977~1978)
- 이진희 (1979~1980)
- 주영관 (1980~1982)
- 이우세 (1982~1984)
- 이한수 (1987~1988)
- 이동화 (1993~1996)
- 김삼웅 (1998~2002)
- 임영숙 (2003~2005)
- 박재범 (2009~2012)
- 이경형 (2015~2018)
12.2. 논설주간
- 이한수 (1986~1987)
- 이정연 (1991~1992)
- 이재근 (1992~1992)
- 김호준 (1997~1998)
- 임춘웅 (1998~1999)
- 우홍제 (1999~2000)
- 손성진 (2017~2018)
12.3. 논설위원실장
- 이정연 (1988~1989)
- 박화진 (1993~1996)
- 김호준 (1996~1997)
- 우홍제 (1997~1999)
- 임영숙 (2000~2001)
- 이경형 (2001~2003)
- 최홍운 (2003~2004)
- 김영만 (2004~2005)
- 신연숙 (2005~2006)
- 염주영 (2006~2008)
- 최태환 (2008~2009)
- 박재범 (2009)
- 이목희 (2009~2010)
- 구본영 (2010/2012~2014)
- 오병남 (2010~2012)
- 곽태헌 (2014~2015)
- 손성진 (2015~2017)
- 문소영 (2018~)
12.4. 논설고문
- 주영관 (1984~1988)
- 반영환 (1993~1996)
- 송정숙 (1994~1997)
- 장윤환 (1998~2002)
- 구본영 (2014~2016)
- 곽병찬 (2018~)
- 손성진 (2018~)
12.5. 편집국장
- 이관구 (1945~1946)
- 홍기문 (1946)
- 김무삼 (1946~1947)
- 정우홍 (1947~1948)
- 이건혁 (1948~1949)
- 우승규 (1949~1952)
- 최상덕 (1952)
- 고제경 (1953~1954/1956~1960)
- 조동훈 (1954~1955)
- 유완희 (1955~1956)
- 김광섭 (1960~1961)
- 김용장 (1961~1962)
- 김현제 (1962~1963)
- 박창수 (1963~1964)
- 조기홍 (1964~1965)
- 조용중 (1965~1966)
- 전민호 (1966~1968)
- 이자헌 (1968~1972)
- 남재희 (1972~1977)
- 이우세 (1977~1981)
- 이한수 (1982~1986)
- 함정훈 (1986~1987)
- 김문진 (1987~1989/1990~1991)
- 이정연 (1989~1990)
- 서건일 (1991~1992)
- 최광일 (1992~1993)
- 이동화 (1993)
- 김호준 (1993~1996)
- 우홍제 (1996~1997)
- 장정행 (1997~1998)
- 정신모 (1998)
- 황병선 (1998~1999)
- 이경형 (1999~2000)
- 최홍운 (2000~2002)
- 김영만 (2002~2004)
- 최태환 (2004~2006)
- 강석진 (2006~2008)
- 오병남 (2008~2010)
- 이목희 (2010~2012)
- 손성진 (2012~2013)
- 곽태헌 (2013~2014)
- 오승호 (2014~2016)
- 김균미 (2016~2017)
- 박홍기 (2017~2018)
- 박찬구 (2018~2019)
- 안미현 (2019~)
12.6. 편집위원실장
- 임동수 (1982~1984)
[1] 이외에도 한국방송공사가 지분 8.98%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42.84% 정도를 정부 관련 기관에서 소유하고 있다.[2] 현재 기재부는 지분을 공개매각 하고자 하고 있다. 2021년~2022년 경 한국거래소에 기업공개시킨 이후 주식시장에서 기획재정부의 지분을 처분할 예정이다.[A] A B 2020년 10월 3일 기준[3] 벽초 홍명희의 장남. 1948년 월북.[4] 1975년부터 코리아헤럴드가 먼저 CTS를 도입하였으나, 한글 신문으로는 서울신문이 처음이다.[5] 이 양반은 이때의 공로인지 1993년 3월에 YS에 의해 보건사회부 장관이 되었다가 1994년에 장관직을 내려놓고 본사 논설고문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1997년 15대 대선 때 이회창 후보를 노골적으로 지지하여 물의을 빚고 결국 그해 말에 논설고문직을 내려놓고 퇴사하였다.[6] 그러나 매일신보 기간을 도려낸 것에 대해서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다.[7] 스포츠신문은 2013년 초 무렵부터 토요일자를 발행하지 않았다.[8] 1980년에 언론통폐합으로 사라진 신아일보의 창업주이기도 했다.[9] 1957년에 생긴 한국일간신문발행인협회 초대회장도 겸임.[10] 전 민주공화당 중앙상무위원.[11] 전 중앙정보부장 고문, 민주공화당 의장고문.[12] 전 한국일보 사장.[13] 이후 한국언론회관 및 한국언론인금고 이사장 역임.[14] 전 국민일보 사장.[15] 본사 최초의 민선(공모제) 사장. 중앙일보 논설고문 역임.[16] 전 금강기획 사장, 그레이프커뮤니케이션즈 회장.[17] 전 한겨레 사장.[18] TV광고 감독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