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세나

 


1. 개요
2. 역사
3. 한국의 메세나


1. 개요


시인은 오로지 시만을 생각하고

경제인은 오로지 경제만을 생각한다면

이 세상이 낙원이 될 것 같지만 사실은

시와 경제의 사이를 생각하는 사람이 없으면

다만 휴지와 지폐

종이 두 장만 남을 뿐이다[1]

-

김광규, <생각의 사이>#[2]

'''Mecenat'''
기업들이 문화 예술에 대한 지원을 통해 사회에 공헌하고 국가 경쟁력에 이바지하는 활동을 통칭하는 용어이다.

2. 역사


로마 제국 초기 아우구스투스 치세에 정치가이자 외교관으로 활동하면서 호라티우스베르길리우스 등의 시인들을 지원했던 가이우스 클리니우스 마이케나스(Gaius Clinius Mæcenas)의 이름에서 따왔다. 마이케나스의 라틴어 이름이 프랑스어로 넘어가면서 '메센(Mécène)'으로 변화하였고 집합적 의미를 가지는 접미사 -at가 더해져, '메세나(Mécénat)'라는 단어가 만들어졌다. 1967년 미국에서 기업예술후원회가 발족하면서 이 용어를 처음 쓴 이후, 각국의 기업인들이 메세나협의회를 설립하면서 메세나는 기업인들의 각종 지원 및 후원 활동을 통틀어 일컫는 말로 쓰이게 된다.
역사에서 대표적인 메세나 사례로 피렌체메디치 가문이 꼽히는데, 조반니 디 비치를 시작으로 코시모 디 조반니,[3] 비에리 디 캄비오, 로렌초 디 피에로 등의 당주가 피렌체를 지배한 350년 동안 지속적으로 문화예술을 후원했고 이들의 활동은 르네상스를 일으킨 한 원동력으로 평가받고 있다.
최근에는 메세나의 의미가 더욱 확장되어 단순히 예술 · 문화 · 과학 · 스포츠에 대한 지원뿐 아니라 사회적 · 인도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공익사업에 대한 지원 등 기업의 모든 지원 활동을 포괄하고 있다. 예를 들어 기업 차원에서 그 도시에 박물관이나 미술관, 도서관을 지어 기증하고, 악단이나 축구 구단, 혹은 과학 연구시설을 세우고 그 활동을 후원해도 메세나인 것이다.
기업의 입장에서는 '이윤의 사회적 환원'이라는 기업 윤리를 실천하는 것 외에도 회사의 문화적 이미지까지 높일 수 있어 홍보 전략의 수단으로도 유리하다.# 어떻게 생각하면 기업의 보여주기식 이미지 마케팅일 뿐이고 자칫하면 기업의 이러한 문화예술에 대한 지원이 탈세 수단의 하나로 악용될 수 있으며, 금전적으로 지원이 아쉬운 문화예술계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기업의 지원을 결코 무시할 수도 없다 보니 자칫 후원자가 되는 기업의 입장에 기울기 십상. 또 기업의 이미지 재고에 도움이 된다는 말은 도움이 되지 않으면 '''기업은 언제든 후원을 거둘 수도 있다'''는 이야기도 되는데, 대표적인 사례로 2007년 신정아 사건이 터졌을 때, 몇 년 동안 여러 기업에서 10억 원 넘는 후원금을 받았던 미술관의 학예연구사가 사실은 위조 학력으로 전문가 행세를 해 온 가짜였다는 것이 밝혀진 뒤 이때문에 자칫 기업의 메세나 지원 심리가 위축될 수 있다는 진단이 나오기도 했다. 관련기사

3. 한국의 메세나


한국메세나협회(공식사이트)
한국에는 1994년 사단법인 한국메세나협회가 발족, 문화예술 지원을 통한 사회공헌에 뜻을 같이 하는 기업들을 회원사로 둔 비영리사단법인으로 창립되었고, 메세나의 의미가 기업에만 한정되지 않고 일반인들에게도 의미있는 운동이라는 판단 하에 2004년에 '''한국메세나협의회'''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2013년 다시 '''한국메세나협회'''로 바꾸었다.
2013년 문화예술후원 활성화에 관한 법률(일명 메세나법)이 12월 31일자로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사이트에서는 이 법안의 발의와 통과를 도운 국회의원들(길정우, 조윤선[4], 이성헌)의 이름을 열거하며 감사를 표하고 있다.
2017년 3월 기준으로 국내 238개 기업이 회원사로 가입해 메세나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
[1] 축약본이다. 원문은 학제간 연구 문서를 참조.[2] 기자는 추일서정의 김광균으로 혼동하였으나 「생각의 사이」를 쓴 시인은 김광규이다(<<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 문학과지성사, 1979). 사실 김광규 문서에도 나오지만 이름이 비슷해 두 시인을 혼동하는 일이 많다.[3] 다만 이 사람은 아버지처럼 예술에 관심을 별로 갖지 않아 후원도 거의 없었다. [4] 이 사람은 훗날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작성에 깊이 관여해 오히려 문화예술계 탄압에 일조했다.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