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레키 대화재

 

메이레키 대화재를 묘사한 그림
1. 개요
2. 수습
3. 전설
4. 대중매체


1. 개요


메이레키 대화재(일본어: 明暦の大火)는 일본 에도 시대인 1657년 3월 2일[1]에서 3월 4일[2]까지 에도(지금의 도쿄)에서 일어난 대화재로, 후리소데 화재(振袖火事), 마루야마 화재(丸山火事)라고도 불린다.
이 화재로 '''에도의 70%(2574 헥타르)가 불타고''' 사망자만도 '''10만 7046명'''에 달한다. 유명한 에도 성천수각도 이 화재로 소실되었다. 로마 대화재, 런던 대화재와 함께 세계 3대 대화재라고 일본에서 부르는데 어디까지나 일본에서만 부르는 거다. 이보다 훨씬 큰 화재들도 이전에도 이후에도 얼마든지 있었다. 1633년 10만 명이 죽거나 다치고 1만 5천 채 이상 불이나 가게가 불에 탄 이스탄불 대화재[3]같은 엄청난 화재는 세계 곳곳에서 오래전부터 있었다.
당시 덴노조차도 재앙이라고 해서 원호를 바꿀 정도였다고 한다.

2. 수습


화재의 처음 발화장소는 큰 사찰인 혼묘지(本妙寺)라는 설도 있고 그 옆에 있던 로쥬(쇼군 직속 정무담당 최고책임자) 아베 타다아키의 저택이라는 설도 있다. 그 당시 실권을 쥔 아베 가문이 대화재의 책임을 피하기위해 책임을 묻기 곤란한 혼묘지 절을 희생시켜 책임을 전가한 것이라거나 에도 재건을 위한 고의 방화설도 있다.
이 화재 당시 에도 막부의 오슈 아이즈 번 다이묘 호시나 마사유키[4]는 "갖추어 놓지 않고 처벌하는 것은 불가하다." 하는 명언을 남기고 화재를 일으킨 혼묘지의 스님들을 처벌하지 않는 대신, 피해자 구제/도시 재건/방화 대책에 힘쓰도록 처분했다.
일본은 지진이 잦은 만큼 목조건물이 90% 이상이고 에도에는 워낙 건물이 밀집되어있어서 화재가 일어나면 손을 쓸 수가 없었고 화재대비가 없어서 취약했기 때문에, 불을 낸 혼묘지 사찰 측에만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명판결이다. 즉, 사고를 일으킨 사찰뿐만 아니라 도시 계획을 잘못하여 방화 소방 방재 대책을 갖추는데 실패한 막부와 정부 책임도 인정한 명언이다.

3. 전설


이 화재의 원인을 두고 상사병에 빠져 죽은 어느 소녀가 입었던 후리소데(振袖)[5]의 저주가 원인이라는 전설을 담은 여러 문서 기록이 있다.
그 당시 에도의 아사쿠사 스와초에서 가면을 파는 부유한 상인의 외동딸인 오키쿠는, 17세 되는 해 에도에서 열린 마츠리(축제)에 놀러갔다. 그 당시는 귀한 집 처녀들은 축제 같은 특별한 때 말고는 바깥출입이 어려워 마츠리를 손꼽아 기다렸고, 마츠리에서 남녀가 눈이 맞는 경우도 많았다.
17세 꽃다운 나이의 오키쿠도 화려한 보라색의 후리소데를 입고 마츠리 구경을 갔다가 먼발치에서 또래의 잘생긴 한 젊은이를 보고는 한눈에 반하고 말았다. 집에 돌아온 오키쿠는 그 젊은이를 다시 보고싶다고 부모에게 청하고 시집가고 싶다고 졸랐지만 부모들은 신분이 낮아보인다는 이유로 단칼에 거절하고 외출을 금지시켜버린다. 상심한 오키쿠는 상사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다가 다음 해 음력 1월 18일 결국 세상을 떠났다.
또는 봄꽃놀이에서 본 젊은이에 반하고 다시 만나면 눈에 잘 띄도록 그 젊은이가 입었던 것과 비슷한 후리소데를 만들어 입지만 다시 만나서 마음을 전하지 못하고 죽었다는 설도 있고, 딸이 상사병에 걸린 사실을 알게 된 부모가 수소문 끝에 젊은이에 대해 알아냈으나 하필이면 그 젊은이가 결혼을 할수 없는 와카슈도였던 탓에 맺어지지 못할 바엔 하다못해 그 젊은이가 입던 것과 비슷한 옷이라도 입혀 주고자 후리소데를 맞춰주었고 이후 오키쿠는 병이 깊어져 죽고 말았다는 설도 있다.
부모는 딸을 잃고 크게 후회하며 슬퍼했고 에도의 큰 절인 혼묘지(本妙寺)에서 장례를 치러주었다. 일본 풍습에는 죽은 이가 아끼던 옷을 관에 덮어주는데, 어머니는 오키쿠가 마츠리 때 입고 간 그 후리소데를 덮어주었다.
그런데 절에서 일하는 일꾼들이 그 화려한 후리소데를 보고 탐을 내어 몰래 빼돌려 팔아버린다. 지금이나 그때나 화려한 후리소데는 엄청나게 비싼 고급 옷이다. 그런데 그 후리소데를 사서 입은 어느 집 딸이 다음해 같은 날 알 수 없는 원인으로 급사하고 만다. 그 소녀도 똑같이 혼모지에서 장례를 치렀고 그 후리소데는 다시 절의 일꾼들에 의해 다른 사람에게 팔렸는데, 그걸 입은 소녀도 그 다음 해 같은 날 세상을 떠나고 만다. 3년간 소녀 3명이 똑같은 1월 18일에 죽은 거다.
역시 혼묘지에서 치러진 그 세 번 째 소녀의 장례식에서 또다시 돌아온 그 후리소데를 알아본 절의 일꾼들은 죄책감과 불길함으로 겁에 질려 전전긍긍하다 스님에게 자초지종을 털어놓는다. 스님은 부모에게 알리고 오키쿠의 한과 저주가 서린 그 후리소데를 공양하여 없애기로 하고 뜰에 불을 피우고 독경을 하며 후리소데를 불에 던져버린다.
그런데 불타던 후리소데가 마침 불어온 돌풍에 날려가 혼묘지 본당 지붕에 날아앉아 불은 순식간에 번지고, 본당과 혼묘지 사찰 전체를 태운다. 마침 에도는 11월부터 3달간 비가 내리지않아 매우 건조한 상태였고 강한 북풍 바람까지 불어 불은 삽시간에 에도 전체로 번졌다. 불은 사흘간이나 타올라 에도의 2/3을 태우고 사망자 11만 명을 내었다. 그래서 그 화재사건을 후리소데 대화재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 전설은 대화재의 정치적 책임을 전가하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라는 설이 일반적이다.

4. 대중매체


유로파 유니버설리스 4에서도 등장한다. 에도 프로빈스를 보유한 국가에게 전용 이벤트가 발생하며, 3개의 선택지가 주어지는데 1. 자금을 들여 소방대를 창설하고 대로를 놓는다. 2. 자금을 들여 빈민을 위한 주택가를 먼저 건설한다. 3. '''화재와 소요는 에도의 꽃이다'''.
일본 만화 닌자와 야쿠자에서는 야쿠자의 시조라 불리던 반죠인 쵸베가 닌자 카사이 잔조에게 부하가 살해되자 복수를 위해 일으킨 사건으로 나온다. 결국 불타는 에도에서 두사람이 결투를 벌인 끝에 쵸베가 패한다. 쵸베는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던 미즈노 쥬로자에몬에게 복수를 부탁한 후 할복하고 이후 450년 넘께 닌자와 야쿠자가 전쟁을 벌인다.[6]

[1] 메이레키 3년 음력 1월 18일[2] 음력 1월 20일[3] 바로 흡연가들을 3만 명이 넘게 죽였다는 술탄 무라트 4세 집권하에 벌어진 일이라 이 화재 원인이 담뱃불이라는 근거로 흡연을 탄압했다는 이야기도 있다.[4]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서자, 3대 쇼군의 동생[5] 미혼 여성이 입는, 소매 밑부분이 길게 늘어진 화려한 기모노. 기혼 여성토메소데를 입는데, 소매 밑부분이 후리소데보다 짧다.[6] 사실 닌자가 워낙 초인적인 집단으로 나와 일방적으로 야쿠자가 학살당했다. 야쿠자들은 도쿄 대공습을 틈타 구호 활동을 벌이던 닌자들을 총으로 학살했으나 90년 이후 더욱 초인적으로 변한 닌자들에게 학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