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카슈도
若衆道
일본의 문화.
약칭은 衆道로 슈도(しゅうどう)라고 읽는다. 일본에서 남성 동성애의 한 가지 형태로 전해진다. 헤이안 시대에 공가[1] 나 스님[2] 의 사이에서 유행했던 것이 점차 시대가 지나면서 전국 시대 무렵에는 무가에서도 당연시되었고, 이 즈음해서 높으신 분의 취미에서 일반인들도 즐길 정도가 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남색 풍습은 에도 시대에도 성행하며 당대의 일본 문학작품에서도 남색을 다룬 소설이나 그림들이 적지 않게 나오며 일본의 전통극인 가부키에도 중도를 소재로 다룬 작품들이 여럿 존재하지만 메이지 유신으로 성관념이 서구화되고 남색 풍습이 지탄의 대상이 되면서 사라졌다. 다만 현대에도 그 영향이 아주 없는것은 아니라서 보이즈 러브나 오토코노코 등으로 간접적으로 슈도의 향기를 느낄 수는 있다(...).
전국시대에는 주로 신분이 높은 무사가 가신의 아들이나 전도유망한 젊은 이를 코쇼(小姓)로서 자신의 수발을 들게 했는데 대개는 다이묘의 중도의 상대는 이 코쇼였다. 대표적인 예가 오다 노부나가의 경우 마에다 토시이에 및 모리 란마루.[3] 다케다 신겐, 우에스기 카게카츠, 다테 마사무네 등이 대표적인 예로 알려져 있다.
예외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를 행하지 않았는데, 히데요시 본인은 하층민 출신이라 이런 '높으신 분들의 취미'에 대해 처음부터 잘 몰랐기 때문이다. 대신 여색 자체를 즐겼다고 한다. 그리고 그 때문에 풍류도 못 즐긴다고 까였다(...). 심지어 이런 평판을 잠재우기 위해서 부하들이 일부러 미동 수십 명을 방에 넣어놓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들어가게 했다. 그러고 부하들의 기대대로(?) 정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미동 하나를 데리고 나갔다. 잠시 후 미동이 돌아오자 부하들이 일제히 총애를 받았냐고 물어봤는데 미동은 "누나가 있는지 물어보셨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군대는 어디나 똑같다.
불교 대형사찰의 경우 보통 치고(稚児), 즉 머리를 깎지 않고 절의 잡일이나 행사를 돕는 어린 소년들이 슈도가 되는 일도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이 둘은 전혀 다른 개념이고[4] 높은 귀족 자제 출신의 조치고(上稚児)나 재능이 뛰어난 주치고(中稚児)들은 애먼 일을 당하는 경우가 드물었으나 신분이 낮은 이른바 게치고(下稚児)는 자주 승려의 성욕 해소 대상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에는 전혀 이상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공식문서상에서도 이 슈도에 관한 이야기가 남아있는 경우가 있다. 또한 고대 그리스에는 스승과 제자의 동성애 관계가 존재했고 파라오 시대의 이집트나 로마 시대에도 귀족들의 취미 중 하나가 소년과의 동성애를 즐기는 것이었으므로, 이러한 소년애가 일본만의 독특한 현상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오히려 고대 그리스의 경우가 가장 동성애에 긍정적이었는데. 여성과의 섹스는 그냥 애를 만들기 위한 것일 뿐이지만 남성끼리의 섹스는 진정한 마음을 나누는 행위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는 국화와 칼에서 일본인의 성문화를 짧게 언급하며 "일본 성인 남성은 남색을 즐길 때에도 절대 수동적인 역할은 맡지 않으며, 여성의 입장에 놓이는 것은 반드시 소년이어야만 한다"는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그리스와 로마의 동성애 역시 '공', '수'의 역할은 철저히 사회적 지위와 신분에 따라 결정되었으며, 이를 어길 경우 사회적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실제로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대표적인 총공 동성애자에 가까운 양성애자로 유명했지만 당시 취향입니다 존중해주시죠 하고 넘어갔을 정도로 로마 시대에는 동성애 자체는 금기시되지 않았으나 반대로 '공'과 '수'가 바뀐 것은 대단히 모욕적인 행위로 간주했다. 서기 3세기 엘라가발루스 로마 황제가 암살당한 이유 중 하나가 '''로마 황제인 자신이 '수'의 역할'''을 맡았을 뿐 아니라 남성들에게 끊임없이 아양과 유혹을 하는 등, 당시 기준으로 추태를 부렸기 때문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에서도 성인 남성(공)과 소년(수)의 관계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어쨌거나 당시 조선인들의 눈에 매우 이상하게 보였던 풍습이었는데[5] 조선 통신사들이 남긴 기록을 보면 이러한 풍습에 대해 기이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신유한(申維翰)이란 사람이 쓴 《해유록(海遊錄)》을 보면, 신유한이 아메노모리 호슈와 대화하던 도중 이 동성애 문화를 언급한다. 신유한이 "남녀 간의 정욕이야 음양(陰陽)의 이치에 따라 당연한 것이지만, 세상에 어찌 음(陰)이 없이 양(陽)끼리만 서로 정을 느껴 즐거워할 수 있소?" 라며 의아해하자, 호슈는 '''"학사께서는 그 즐거움을 아직 모르시는군요." 라고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고. 이후 신유한은 '아메노모리 호슈조차 똑같이 저리 말하니, 일본의 풍속이 미혹(迷惑)함을 알 수 있다'며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사실 유학자적인 관점에서는 이상하게 여길 수밖에 없다. 유학과 눈곱만큼도 상관 없는 서양인 방문객들도 중도를 보고 몰라 뭐야 그거 무서워 급으로 놀라곤 하였다. 물론 이때 서양인들은 로마 제국 때와 달리 성경에서 동성애 금지를 명시한 기독교도들이었으니 놀라는 것도 당연하다.
일본의 문화.
약칭은 衆道로 슈도(しゅうどう)라고 읽는다. 일본에서 남성 동성애의 한 가지 형태로 전해진다. 헤이안 시대에 공가[1] 나 스님[2] 의 사이에서 유행했던 것이 점차 시대가 지나면서 전국 시대 무렵에는 무가에서도 당연시되었고, 이 즈음해서 높으신 분의 취미에서 일반인들도 즐길 정도가 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남색 풍습은 에도 시대에도 성행하며 당대의 일본 문학작품에서도 남색을 다룬 소설이나 그림들이 적지 않게 나오며 일본의 전통극인 가부키에도 중도를 소재로 다룬 작품들이 여럿 존재하지만 메이지 유신으로 성관념이 서구화되고 남색 풍습이 지탄의 대상이 되면서 사라졌다. 다만 현대에도 그 영향이 아주 없는것은 아니라서 보이즈 러브나 오토코노코 등으로 간접적으로 슈도의 향기를 느낄 수는 있다(...).
전국시대에는 주로 신분이 높은 무사가 가신의 아들이나 전도유망한 젊은 이를 코쇼(小姓)로서 자신의 수발을 들게 했는데 대개는 다이묘의 중도의 상대는 이 코쇼였다. 대표적인 예가 오다 노부나가의 경우 마에다 토시이에 및 모리 란마루.[3] 다케다 신겐, 우에스기 카게카츠, 다테 마사무네 등이 대표적인 예로 알려져 있다.
예외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를 행하지 않았는데, 히데요시 본인은 하층민 출신이라 이런 '높으신 분들의 취미'에 대해 처음부터 잘 몰랐기 때문이다. 대신 여색 자체를 즐겼다고 한다. 그리고 그 때문에 풍류도 못 즐긴다고 까였다(...). 심지어 이런 평판을 잠재우기 위해서 부하들이 일부러 미동 수십 명을 방에 넣어놓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들어가게 했다. 그러고 부하들의 기대대로(?) 정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미동 하나를 데리고 나갔다. 잠시 후 미동이 돌아오자 부하들이 일제히 총애를 받았냐고 물어봤는데 미동은 "누나가 있는지 물어보셨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군대는 어디나 똑같다.
불교 대형사찰의 경우 보통 치고(稚児), 즉 머리를 깎지 않고 절의 잡일이나 행사를 돕는 어린 소년들이 슈도가 되는 일도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이 둘은 전혀 다른 개념이고[4] 높은 귀족 자제 출신의 조치고(上稚児)나 재능이 뛰어난 주치고(中稚児)들은 애먼 일을 당하는 경우가 드물었으나 신분이 낮은 이른바 게치고(下稚児)는 자주 승려의 성욕 해소 대상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에는 전혀 이상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공식문서상에서도 이 슈도에 관한 이야기가 남아있는 경우가 있다. 또한 고대 그리스에는 스승과 제자의 동성애 관계가 존재했고 파라오 시대의 이집트나 로마 시대에도 귀족들의 취미 중 하나가 소년과의 동성애를 즐기는 것이었으므로, 이러한 소년애가 일본만의 독특한 현상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오히려 고대 그리스의 경우가 가장 동성애에 긍정적이었는데. 여성과의 섹스는 그냥 애를 만들기 위한 것일 뿐이지만 남성끼리의 섹스는 진정한 마음을 나누는 행위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는 국화와 칼에서 일본인의 성문화를 짧게 언급하며 "일본 성인 남성은 남색을 즐길 때에도 절대 수동적인 역할은 맡지 않으며, 여성의 입장에 놓이는 것은 반드시 소년이어야만 한다"는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그리스와 로마의 동성애 역시 '공', '수'의 역할은 철저히 사회적 지위와 신분에 따라 결정되었으며, 이를 어길 경우 사회적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실제로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대표적인 총공 동성애자에 가까운 양성애자로 유명했지만 당시 취향입니다 존중해주시죠 하고 넘어갔을 정도로 로마 시대에는 동성애 자체는 금기시되지 않았으나 반대로 '공'과 '수'가 바뀐 것은 대단히 모욕적인 행위로 간주했다. 서기 3세기 엘라가발루스 로마 황제가 암살당한 이유 중 하나가 '''로마 황제인 자신이 '수'의 역할'''을 맡았을 뿐 아니라 남성들에게 끊임없이 아양과 유혹을 하는 등, 당시 기준으로 추태를 부렸기 때문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에서도 성인 남성(공)과 소년(수)의 관계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어쨌거나 당시 조선인들의 눈에 매우 이상하게 보였던 풍습이었는데[5] 조선 통신사들이 남긴 기록을 보면 이러한 풍습에 대해 기이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신유한(申維翰)이란 사람이 쓴 《해유록(海遊錄)》을 보면, 신유한이 아메노모리 호슈와 대화하던 도중 이 동성애 문화를 언급한다. 신유한이 "남녀 간의 정욕이야 음양(陰陽)의 이치에 따라 당연한 것이지만, 세상에 어찌 음(陰)이 없이 양(陽)끼리만 서로 정을 느껴 즐거워할 수 있소?" 라며 의아해하자, 호슈는 '''"학사께서는 그 즐거움을 아직 모르시는군요." 라고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고. 이후 신유한은 '아메노모리 호슈조차 똑같이 저리 말하니, 일본의 풍속이 미혹(迷惑)함을 알 수 있다'며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사실 유학자적인 관점에서는 이상하게 여길 수밖에 없다. 유학과 눈곱만큼도 상관 없는 서양인 방문객들도 중도를 보고 몰라 뭐야 그거 무서워 급으로 놀라곤 하였다. 물론 이때 서양인들은 로마 제국 때와 달리 성경에서 동성애 금지를 명시한 기독교도들이었으니 놀라는 것도 당연하다.
[1] 천황을 직접 섬기는 일본 조정의 신하 겸 귀족이다. 후에 무로마치 시대에 사무라이 계급이 태두하면서 몰락하고 에도 시대 말기에 도막파를 지원하면서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2] 불교의 가르침에 여자를 범하지 말라는 것이 있어도 남성끼리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이 없다는 이유로. 헤이안 시대 남색을 다룬 아키즈키 코의 BL 소설 <왕조 로망스>에 이런 모습이 잘 묘사돼있다.[3] 그러나 모리 란마루가 실제로 노부나가의 중도의 상대역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명확히 증명되지 않고 설만 존재한다.[4] 현대에는 신사나 절에서 대형 행사가 있을 때 임시로 동원되는 꼬꼬마들을 가리키며, 대체로 유치원~초등학생들이 얼굴에 하얀 칠을 하고 헤이안 시대의 복장을 입는 경우가 많다.[5] 조선에서도 남사당패들이 남자를 상대로 성을 파는 등 남색풍습이 아예 없던것은 아니었지만 일본처럼 고위층들도 거리낌없이 즐겼던 것은 전혀 아닌 마이너한 문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