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더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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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의 정치인.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1883년 4월 16일 지린성 방면 군대에 주둔하고 있던 아버지의 병영에서 태어났다. 부친 막명해(莫明海)는 1870년 좌종당의 지휘하에 신장 탈환 작전에 참여해 군공을 세우고 1875년에 지린성으로 이주해 그곳에 주둔한 청나라 군대의 장교로 복무했다.
모더후이는 1906년 톈진 북양순경학당에 입학했고, 졸업 후 지린 성 경찰청에 복무하다가 서국 국경원에 배치된 뒤 얼마 안가 서국 국경원장에 취임했다. 1910년 하얼빈 경무국 순경국장으로 이전했으며, 1912년 겨울에 중의원 의원에 당선되면서 중화민국 정계에 입문했다.
1914년 위안스카이에 의해 중화민국 국회가 해산된 뒤, 그는 쌍산현 지사에 취임했으며 이후로 지린성에서 재정부 고문, 펑톈성 교서관, 길림 감리관 등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 그러다가 1921년 지린 일대에서 비적을 토벌한 장쉐량과 인연을 맺었으며, 1923년 차오쿤 정권에 반대하는 세력간의 연합을 성사시키면서 봉천성의 군벌 장쭤린의 신임을 얻고 봉천재정청장 권한 대행, 북양 정부 농공부 총장을 역임했다.
1928년 6월 장쭤린이 황고둔 사건으로 사망한 뒤, 모더후이는 장쉐량을 보좌하며 그가 펑톈성에서 권력을 장악하는 데 힘을 보탰다. 중동로 사건 직후 동삼성 철도공사 이사장 겸 감독으로 임명되어 중국 측 수석대표 자격으로 중소 협상에 임했다. 그러나 만주사변으로 일본이 만주를 장악해버리자 장쉐량을 따라 중국 관내로 피신했고, 이후로는 동북군 장성으로서 중국 공산당 토벌 작전을 수행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모더후이는 국민정부 국민창정회의 주석단 주석을 지냈다. 이후 그는 일제에 맞서 전 중국인들의 총단결을 외쳤고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독립운동 역시 지원했다. 그는 1942년 충칭에서 조직된 한중문화협회 명예인사로 참여했고, 한중문화협회의 주요 행사에 참석해 한국 독립에 관한 지지와 지원을 표명했다. 1944년 한중문화협회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초대 모임에서 그는 자신의 뜻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1966년 5월 광복대륙설계연구위원회 부주임을 역임했고, 그해 6월 20일 총통부 사정을 맡았다. 한편 그는 장제스에 의해 유폐된 장쉐량을 동정해 여러차례 그를 면회했다. 그러다가 1968년 4월 17일에 대만에서 사망하니, 향년 85세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모더후이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1. 개요
중화민국의 정치인.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883년 4월 16일 지린성 방면 군대에 주둔하고 있던 아버지의 병영에서 태어났다. 부친 막명해(莫明海)는 1870년 좌종당의 지휘하에 신장 탈환 작전에 참여해 군공을 세우고 1875년에 지린성으로 이주해 그곳에 주둔한 청나라 군대의 장교로 복무했다.
모더후이는 1906년 톈진 북양순경학당에 입학했고, 졸업 후 지린 성 경찰청에 복무하다가 서국 국경원에 배치된 뒤 얼마 안가 서국 국경원장에 취임했다. 1910년 하얼빈 경무국 순경국장으로 이전했으며, 1912년 겨울에 중의원 의원에 당선되면서 중화민국 정계에 입문했다.
1914년 위안스카이에 의해 중화민국 국회가 해산된 뒤, 그는 쌍산현 지사에 취임했으며 이후로 지린성에서 재정부 고문, 펑톈성 교서관, 길림 감리관 등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 그러다가 1921년 지린 일대에서 비적을 토벌한 장쉐량과 인연을 맺었으며, 1923년 차오쿤 정권에 반대하는 세력간의 연합을 성사시키면서 봉천성의 군벌 장쭤린의 신임을 얻고 봉천재정청장 권한 대행, 북양 정부 농공부 총장을 역임했다.
1928년 6월 장쭤린이 황고둔 사건으로 사망한 뒤, 모더후이는 장쉐량을 보좌하며 그가 펑톈성에서 권력을 장악하는 데 힘을 보탰다. 중동로 사건 직후 동삼성 철도공사 이사장 겸 감독으로 임명되어 중국 측 수석대표 자격으로 중소 협상에 임했다. 그러나 만주사변으로 일본이 만주를 장악해버리자 장쉐량을 따라 중국 관내로 피신했고, 이후로는 동북군 장성으로서 중국 공산당 토벌 작전을 수행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모더후이는 국민정부 국민창정회의 주석단 주석을 지냈다. 이후 그는 일제에 맞서 전 중국인들의 총단결을 외쳤고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독립운동 역시 지원했다. 그는 1942년 충칭에서 조직된 한중문화협회 명예인사로 참여했고, 한중문화협회의 주요 행사에 참석해 한국 독립에 관한 지지와 지원을 표명했다. 1944년 한중문화협회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초대 모임에서 그는 자신의 뜻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1944년 7월에는 국민당 참정위원으로서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이전에 다섯 차례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어 한국 친구가 적지 않다. 승리는 단지 시간 문제일 뿐이며, 중국이 만주를 되찾는 날이 바로 한국인들이 압록강을 건너는 날이 될 것이다."
중일전쟁이 종결된 후인 1945년 10월에 동북선위사, 동북구제회 부회장을 역임했고, 1946년에 제헌국민대회 대표를 맡았고, 1947년에 국민대회 대표를 맡았으며, 1948년에 정부 헌정감독위원회 회장을 지냈고, 중화민국 부총통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공내전이 국민당에게 극도로 불리하게 돌아가자, 그는 1949년에 정부를 따라 대만으로 이동했다. 그해 3월 21일부터 행정원 정무위원으로 활동했으며, 1954년 8월부터 12년간 고시원장을 지내며 입시제도와 일자리 분류 추진, 공무원 보험제도 창설 및 개선 등을 주도했다."한국의 독립은 벌써 문제가 안 되는 것이요, 남은 것은 오직 시간 문제 뿐이다. 나는 고향이 동부임으로 항전 승리의 날에는 고향인 동부로 돌아갈 것이며, 내가 고향을 돌아가게 되는 그 날은, 즉 이미 한국 동지들은 압록강을 건너서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는 날이 될 것이다."
1966년 5월 광복대륙설계연구위원회 부주임을 역임했고, 그해 6월 20일 총통부 사정을 맡았다. 한편 그는 장제스에 의해 유폐된 장쉐량을 동정해 여러차례 그를 면회했다. 그러다가 1968년 4월 17일에 대만에서 사망하니, 향년 85세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모더후이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