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로 사건
1. 개요
1929년 7월 10일, 봉천군벌의 수장 장쉐량이 소련 소유의 철도인 중동로를 전격적으로 회수한 사건이다. 이로 인하여 소련과 봉천군벌 사이의 봉소전쟁이 발발하였다.
2. 배경
사건의 발단이 된 2,400km에 달하는 중동로는 1896년 청러 밀약에 따라 건설이 결정된 철로였다. 원래 만저우리에서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는 본선과 창춘에서 다롄으로 이어지는 지선을 포함한 거대한 도로였으나, 러일전쟁 이후 남만주 철도가 일본에게 장악되면서 본선만을 가리키게 되었다. 러시아 군대를 중국으로 수송하는 것이 이 중동로의 건설 목적이었고, 이 과정에서 러시아 제국은 청나라로부터 철도 수비권, 광산 채굴권, 전신전화 건설 경영권, 철도부속지의 사법,행정권, 송화강 항행권 등 막대한 이권을 강탈했다. 이후 러시아 혁명이 발생하자 장쭤린은 그틈을 타서 루블화 유통을 폐지하는 등 중동로에 대한 지배권을 상당히 회복하였고, 이후 중동로는 봉천 군벌과 백계 러시아 군벌이 나누어 통치했는데, 볼셰비키 정권은 적백내전을 치러내느라 정신이 없어서 한동안 이에 간섭하지 못했다.
하지만 적백내전이 끝나자 소련은 종전의 카라한 선언을 번복하고 중동로 경영권을 요구했다. 결국 1924년 5월 31일 베이징 중소협정 체결로 봉천 군벌과 소련은 중동로에 대한 권리를 나누었으나 실질적인 철도 관리권은 루블화를 결산 화폐로 삼고 기무처, 차무처, 상무처, 재무처 등의 주요 부서를 러시아인이 독점하는 등 소련이 가지고 있었다. 이로 인하여 북만주의 경제는 소련에 예속되는 양상을 보였다. 한편 2차 북벌을 통해 베이징을 점령하고 난징정부를 수립한 장제스의 국민정부는 열강들이 과거 북양정부와 맺은 불평등조약을 적극적으로 개선하겠다는 수약외교를 선포하고 미국 등에서 관세자주권을 회수하는 등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기 시작했다.
3. 전개
3.1. 장쉐량의 중동로 회수 움직임
1928년 12월 29일 동북역치를 통해 국민정부에 충성을 맹세한 장쉐량의 대소 정책도 수약외교에 발맞춰 갑자기 강경해지기 시작했다. 이미 역치 인전인 1928년 12월 21일, 동삼성 교통위원회는 동삼성 전정감독 장빈(蔣斌)을 동삼성 외교총서 참사 나충문(羅忠文)과 함께 비밀리에 하얼빈에 보내 동삼성 보안총사령관 장쉐량의 명령에 따라 전화국 사업을 접수하겠다는 최후통첩을 중동로 당국에 보냈다. 하지만 12월 22일이 휴일이었기 때문에 중동로 당국은 이 통첩을 보았을 리가 없었다. 이에 소련인 국장이 통지를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인원 교체 등을 거부하자 24일, 장쉐량은 동성특구장관 장징후이에게 긴급명령하여 중동로 전화국을 무력으로 접수하였다. 주봉천 소련영사는 장쉐량에게 항의하고 1백만원의 배상을 요구했으나 장쉐량은 이를 무시했다.
소련의 미진한 대응을 본 장쉐량은 국민정부에서 임명한 변방사령장관에 취임한 후 본격적으로 중동로 회수에 나서기 시작했다. 1929년 2월, 장쉐량은 중동로 독판 겸 중동로 이사 여영환에게 중동로 회수 방안을 입안하게 하고 소련인 부이사장과 비공식적으로 상의하게 했다. 여영환은 철로 수입 증가, 잉여인원 감축, 지출 축소, 소련인 국장 권한 삭감, 중국인 권한 강화 등을 제시하여 쌍방이 평등하게 업무를 보게 함으로 봉소협정의 원약과 정신에 부합하게 할 것을 제의했고 또한 소련이 중동로 주변에 불법적으로 가지고 있던 삼림채벌권을 회수할 것을 제시했다.
이에 따라 1929년 3월 1일, 동북당국은 소련 측에 대해 관리국장 권한문제, 종업원 감축 문제, 조직변경문제, 모든 문서의 중러문 병용문제 등을 제기했다. 이에 소련은 상무, 기무, 차무, 총무, 회계, 수입 등 6개처 정처장 직무를 중국인이 맡도록 하게 하고 종업원의 60%를 중국인이 가지게 했으나 관리국 간부 중에 중국측 간부가 21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등이 여전히 문제로 남았다. 3월 13일 여영환은 관리국장 엠샤노프에게 모든 문서에 중국인 부국장 및 부과장의 연서, 관리국장의 권한을 넘어설 때 반드시 본사와 협의할 것을 추가적으로 요구했다.
하지만 소련은 이를 강경히 거부했다. 3월 22일 여영환이 재차 요구하자 소련은 정, 부 관리국장의 동권에 대한 것이나 관리국회의에서 불일치는 이사회의 불일치를 요한다는 점, 재정적 업무는 감사부장의 심의를 요한다는 요구 등은 수용하기 어렵다고 대답했다. 다만 일부 양보의 뜻을 밝혀 30개과 중에서 중국측에 21개를, 소련측에 9개를 할당하고 중러 양문 병용에 대해 동의한다고 했다. 하지만 여영환은 계속 강경히 나와 3월 25일 이사회에 동철의 수의과 및 토지과를 시정관리국과 지묘관리국으로 이전해야 한다고 명했다. 이에 소련은 주하얼빈 총영사 메리니코프를 통해 장쉐량과 협상하려 했지만 무산되었다.
그러던 중 중동철도에서 모 유대계 은행에 빌려주었던 수백만원에 달하는 자금이 회수 불능 상태가 되었다. 이에 소련은 서류를 모두 본국에 옮겨 책임을 인멸하려 했으나 중국에서는 소련이 중동철도의 이익을 악용하고 있으니 회계과를 회수해야 한다는 주장이 강해지게 되었다. 이에 소련은 상업부를 중국에 넘겨주겠다는 조건으로 회계과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하려 했다. 장쉐량은 이런 분위기를 바탕으로 중동로 회수 움직임에 박차를 가했다.
3.2. 장쉐량의 의도는?
한편 당시 만주에서는 소련과 공동 관리하는 중동로만 있던 게 아니었다. 당장 일본이 주장하던 길회철도 문제를 비롯해서 오히려 일본의 철도부설권 문제가 쟁점이었고 요령국민회교협회 등이 일화배척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장쉐량이 일본에는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으면서 소련에는 강경한 대처를 했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정치적인 의도가 있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장쉐량이 철로를 회수한 이유로는 여러 요인이 지적되고 있다. 우선 장쉐량을 피동적으로 보는 시각으로는 중동로를 무리하게 회수한 배경에는 장제스가 있다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장쉐량이나 봉천군벌은 소극적인데 장제스가 강경책을 주도하여 어린 장쉐량을 조종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장제스가 장쉐량을 부추긴 이유는, 소련과 장쉐량이 싸워서 장쉐량의 세력이 약화되길 바랬다는 음모론적인 시각과 만주에서 소련의 적화 음모를 제거하기 위함이었다는 반공적인 의도가 대립하고 있다. 그외에는 장제스가 아니라 미국이 소련을 제거한 후에 만주에 진출하려 했다는 시각도 있다. 이러한 시각들은 장쉐량의 주동성을 무시하거나, 언급하더라도 장쉐량의 '애국주의'만을 강조할 뿐이다. 이러한 장쉐량 피동설, 장제스 주도설은 자세한 정황을 살펴보면 설득력이 떨어진다.
장쉐량의 능동적인 태도를 중심적으로 보는 쪽에서는 이후 내셔널리즘의 고취로 각종 불평등 조약을 철폐하고 부당하게 빼앗긴 이권을 되찾아오자는 움직임이 강했던 당시 중국 상황을 주목한다. 당시 만주에서도 내셔널리즘이 강하였는데 소련이 중동로의 이득을 부당하게 취하고 있다는 정황이 포착되자 중국 곳곳에서 반발하는 움직임이 벌어졌던 것이다. 게다가 당시 장쉐량은 길회철도 문제 등에서 일본에 지나치게 유화적인 태도를 보여서 '매국노' 소리를 듣는 등 만주 곳곳에서 반장쉐량 세력이 확산되고 있었고 이에 장쉐량은 중동로의 이권을 회수함으로 민족주의 움직임에 화답하여 자신의 정치적인 이득을 취하려 했던 것이다.
게다가 장쉐량 치하의 만주는 이러한 내셔널리즘 열풍과 더불어 장쭤린-장쉐량 부자가 펑펑 써댄 군비 때문에 경제위기에 처해 있어 몹시 불안정했다. 1925년 11월에 일어난 궈쑹링의 반봉사건으로 봉천군벌의 타격은 컸고 무리한 관내 진출로 인하여 재정적 타격이 심화되었다. 거기에 봉천군벌이 남발한 봉표의 가치는 날이 갈수록 폭락하고 있었다. 이로 인하여 1928년 즈음에 만주의 경제는 붕괴된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장쉐량은 이득을 내고 있는 중동로에 침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장쉐량은 중동로 회계과를 요구하고 있었고 소련은 이에 대해 절대 거부를 천명했다.
3.3. 하얼빈 영사관 사건
이러한 줄다리기가 이어지던 상황에서 1929년 5월 27일 하얼빈의 소련 영사관[1] 에서 코민테른 비밀회의가 열리고 있다는 첩보에 장징후이의 지시로 동삼성 북부 특경 관리부가 소련 영사관을 급습하여 39명의 공산당원을 체포하고 중국 공산당을 지원하여 중국 적화 운동을 도모하고 있다는 것을 밝혀내면서 중소 긴장은 강해졌다.
하얼빈의 소련 영사관에서 여러 문서가 압수되면서 동북 당국은 소련이 중동철도를 정치적 선전선동에 이용하고 있다고 비판했고 소련이 조약을 위반했으므로 치안 유지를 위해 부득이한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할 명분을 확보하게 되었다. 장세량은 하얼빈 당국에 러시아인들과 영사관 수색에 대해 절대로 상의하지 말고 만약 소련이 항의하더라도 구금자들을 석방하지 말고 중앙의 허락을 받으라고 지시했다. 또한 수색한 문건을 번역하되 가벼이 선포하지 말며 외국인이 탐지하지 못하게 하라고 주의하였다. 이 때문에 수색 과정에서 많은 문건이 노획되었음에도 한동안은 공개되지 않았으며 간을 보듯이 필요에 따라 조금씩 발표되었다.
이후 여영환과 장국침이 중동철도를 강제접수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소련은 저항할 수 없을 것이라고 장쉐량에게 보고했다.[2]
이에 장쉐량은 측근인 유익비에게 장정추와 함께 길림에 가서 장쭤샹을 설득하라고 지시를 내리는 한편 심양에서 왕수한, 왕수상, 추작화, 유익비 등과 대책을 논의했다. 유익비는 군사적 충돌을 우려해 소극적 태도를 보였으나 장쉐량이 이미 10여개 군대를 철로연선에 파견할 계획이며 각 방면의 정보에 따르면 소련은 싸울 수 없다고 이들을 안심시켰다. 하지만 소련이 만주 국경에 군대를 증강시키고 있었으므로 장쉐량은 길림, 흑룡강의 4개 사단을 수분하와 만저우리 방면으로 출동하게 하였으며 장쭤샹, 만푸린, 장징후이, 여영환에게 <방적신변법>(防赤新辨法) 12개안을 결정하고 대소련 방비 강화를 지시했다."소련 내부는 공허하다. 변방무장은 일격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전쟁이 일어나기만 하면 소련군은 필연적으로 와해될 것이다. 더욱이 해마다 소련의 수확량이 좋지 않아서 민군의 식량문제가 크다. 설사 전쟁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필연적으로 승리는 중국의 것이다."
- 여영환
3.4. 접수 준비와 접수 단행
한편 소련은 1929년 6월 6일, 중국정부가 국제법을 무시했기 때문에 소련 주재 중국 민관에 대해 국제법의 구속을 받지 않을 것이라며 항의했고 이에 장쉐량은 사태가 긴박하면 길림성과 흑룡강성의 병력만으로는 막을 수 없다면서 이를 국민정부 외교부장 왕정팅에게 알려 준비를 철저히 하게 했다. 같은날인 6월 6일, 장쉐량은 장징후이에 여영환에게 대내적으로 엄밀하게 앞으로의 계획을 세울 것과 대외적으로 소련이 중동로의 협정정신을 이행하도록 촉구하게 했다. 그리고 소련이 지연작전을 쓰면 지공회의 해산, 소련이 설치한 상호의 폐쇄, 전신 검사, 거민 제한, 불량분자 구축을 시행하라고 지시하며 혹시 모를 소련의 군사적 대응에 대비했다.
장쉐량은 7월 6일, 톈진에 도착하여 기자간담회를 개최 "최근 왕정팅의 전보를 접하였는데, 외교 문제를 함께 구체적으로 해결하고자 한다."고 하면서 중동로 문제를 논했고 7월 7일, 베이핑에서 3월 26일에 일어난 1차 장계전쟁과 5월 23일에 일어난 1차 장풍전쟁을 갓 진압한 장제스와 회동하였다. 두 사람이 실제로 대면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장쉐량은 장제스에게 중동로 회수를 위한 지원을 요청하며 철도매수, 대소절교, 살령(撒領) 등 외교적인 부분은 중앙의 외교부가 담당하고 중앙이 주소양을 소련에 파견하여 협상하게 할 것을 제안했다. 장제스는 외교문제를 검토하기 위해 외교부장 왕정팅을 급히 베이핑으로 소환, 7월 10일 3자회담을 가졌다. 자세한 것은 회담 내용이 비밀에 붙혀져서 알 수 없으나 이후 장쉐량의 언행을 볼 시에 국민정부가 장쉐량의 조치에 지원을 약속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7월 4일부터 이사회 소집을 통한 소련과의 접촉은 소득이 없어 여영환은 7월 10일 오전 6시, 동북 전정 감독 장빈(張斌)을 시켜 철도전용 전화를 제외한 모든 전화를 회수하고 오후에 직업조합, 철도위원회, 국영무역부, 직물조합, 석유조합을 폐쇄하고 공산당원의 가택수사 및 검거에 들어가 하얼빈에서 33명, 중동로 연선에서 26명을 체포하였고 그 중 31명을 가재도구를 챙길 틈도 주지 않고 오후 6시 35분 하얼빈발 열차를 통해 소련으로 추방했다. 7월 11일 중동로 독판 겸 중동철도 이사장 여영환이 소련인 철도관리국장 엠샤노프를 파면하고 중국인 부국장 범기채를 대리국장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특구 행정장 장징후이가 소련 극동 무역국, 상선국, 상업 연합회 등 상업기관 과 소련인 종업원 조합의 해산을 명령했다.
3.5. 중소단교
중동로 사건 발생 직후인 7월 11일, 소련 정부는 사건을 평화적으로 해결할 용의가 있다고 여영환에게 타진했다. 하지만 여영환은 11일 중동로 무력 회수를 정당화하는 성명을 발표하며 소련의 제안을 거절했다.
7월 13일 소련은 성명을 발표하고 3개 항의 최후통첩을 난징 국민정부와 장쉐량에게 보내 중국 측의 행동이 1924년 협정을 위반하고 있으니 조속히 대표회의를 소집할 것이며 동시에 불법적인 행동의 취소 및 소련 시민의 즉시 석방 등을을 제시하며 원상회복을 조건으로 협상에 응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7월 17일 난징 국민정부는 장쉐량의 중동로 회수가 치안 유지를 위해 불가피했다고 주장하며 소련에 4개 항을 제시했다."정,부 관리국장의 권한, 종업원수의 중소 절반 등의 문제가 협정대로 이행되지 않고 (...) 국장의 여러 월권위법과 같은 것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다. (...) 앞서의 영사관 수사사건은 소련의 간부직원이 모두 적화분자라고 하는 것을 증명했기 때문에 중국이 가져야 하는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정부의 명령을 받아 협정에 기초해서 행동에 나섰던 것이다."
- 1. 쌍방은 중소협정에 비추어 전권대표를 파견하여 회담할 것.
- 2. 중동로에서 분규가 발생한 이래의 현상은 반드시 중소협정, 봉소협정에 의해서 변경할 것.
- 3. 소련은 반드시 적화선전을 하지 않는다는 규정을 엄수하고 새로운 국장과 부국장을 추천하며 이사회로부터 임명을 받을 것.
- 4. 쌍방은 체포한 인민을 석방할 것.
이에 난징 국민정부는 중동로 사건은 소련정부가 중동로 협정의 정신을 위반하였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며 대소련 비난성명을 발표, 장쉐량의 조치를 옹호하고 <국제선언>을 발표, 소련 주재 다사관 직원의 총철수를 결의하였다. 7월 19일 중화민국 외교부는 하얼빈 영사관에서 획득한 소련의 문건을 발표하여 소련이 중국을 적화시키기 위한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대외적으로 선전하는 한편 수뇌회의를 개최하여 "극력 전쟁을 회피하고, 만일 소련측이 국경을 넘을 때는 바로 국제연맹에 호소할 것."을 결의하였고 외교적 교섭에 희망을 걸고 신임 핀란드 공사 주소양(朱紹陽)에게 핀란드로 가는 길에 모스크바에 들려 소련과 교섭하라고 훈령을 내렸다.
하지만 7월 20일, 소련군은 수분하(綬芬河)를 공격하여 중국인 1천여명을 구금하였고 국민정부와 장쉐량의 생각과 달리 중동로 사건은 무력충돌이 불가피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4. 결과
결국 1929년 9월 19일, 바실리 블류헤르 장군이 이끄는 소련군이 전격적으로 만주를 침공하게 된다. 이를 봉소전쟁이라 하는데 구파와 신파의 대립으로 사분오열되어 있던 봉천군벌은 참패했고 압도적인 화력으로 무장한 소련군이 국경 요새들을 돌파함에 따라 백기투항을 할 수밖에 없었다. 자세한 것은 봉소전쟁 문서 참조.
5. 참고문헌
- 중일전쟁, 권성욱, 미지북스.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중국근현대사 3권 혁명과 내셔널리즘(1925~1945), 이시카와 요시히로, 삼천리.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2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 중일외교사 연구, 구정승미, 도서출판선인.
- 장학량과 중동로사건, 송한용, 중국사연구 10권, 중국사학회.
- 코민테른과 립삼체제의 형성 및 좌절, 역사와 세계 27권, 효원사학회.
- 장학량 정권 연구, 송한용 전남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 중동로 사건
6. 관련문서
6.1. 인물
6.2. 국가/단체
6.3. 사건
- 황고둔 사건(1928.6.4)
- 탕산회의(1928.7.6~1928.7.12)
- 동북역치(1928.12.29)
- 편견회의(1929.1.1~1929.12.15)
- 호남 사건(1929.2.21)
- 1차 장계전쟁(1929.3.26~1929.6.27)
- 1차 장풍전쟁(1929.5.23~1929.7.12)
- 봉소전쟁(1929.7.20~1929.12.22)
- 2차 장계전쟁(1929.9.7~1929.12.19)
- 2차 장풍전쟁(1929.10.11~1929.11.20)
- 장당전쟁(1929.12.5~1930.1.14)
- 중원대전(1930.4.5~1930.11.4)
- 창사 폭동(1930.6.11~1930.9.13)
- 탕산 사건(1931.2.28)
- 1차 양광사변(1931.5.27~1932.1.1)
- 나카무라 사건(1931.6.27)
- 만보산 사건(1931.7.1)
- 만주사변(1931.9.18~193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