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전중학교
1. 개요
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읍 모전리에 위치한 남녀공학 공립 일반계 중학교다. 2000년대 들어 정관신도시가 개발이 본격화되고 난 후 신정중학교에 이어 정관신도시에서 두 번째인 2014년도에 개교한 중학교이며 2010년대 들어 처음으로 개교된 중학교이기도 하다.[2]
다양한 분야에서 인재들을 배출하였다. 졸업생들 중 일부가 장제고, 장안고, 부산외고, 국제외고 등 부산 내 명문 고등학교에서 선두를 점하고 있으며, 1기 학생 중에서는 서울대학교에 합격한 학생이 있으며, 2기 학생 중에는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일찍이 합격한 학생이 있다.
학교 뒤에는 학교를 에워싸는 모양의 내리막길이 길게 늘어져 있다. 이 길은 봄에는 벚꽃이 만개하고, 가을에는 낙엽이 흩어지는 아름다운 경관을 보여준다. 때문에 상춘, 경추 명소로도 잘 알려져 있다.
형제 학교로 중학교 옆에 위치한 모전초등학교가 있다.
2. 학교연혁[3]
3. 부서
4. 학교시설
신설된 학교인데다가 군청의 지원도 상당히 많이 받아 시설이 매우 청결하고 안전하다. 학생들이 운동장 수돗물을 식수로 애용할 정도로 수질이 좋은 편이다.
5. 학교생활
특색사업의 일환으로 '자율동아리제'를 두어 학생들의 자유로운 방과후 탐구활동을 장려한다. 시행 초기에는 자율동아리의 활동 결과물 발표가 문서상으로만 제출되고 제대로 전시/확인되지 않는 등 보완이 필요한 부분이 있었다. 2017년에 대내외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며 유의미한 활동을 지속한 동아리로 과학탐구토론동아리, 일본문화체험동아리[5] (통칭 문예부), 성경탐구동아리(통칭 예배부), 영어토론동아리 등이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모두 현전하지 않는다.
이후 해당 제도는 개선을 거듭하여, 2020년에는 다양한 동아리들이 더 나은 환경에서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2020년에 추가된 동아리로는 사각사각반, 밴드부가 있다
원칙상 학생이 부원을 모으고 신청서를 제출하여 학교의 승인을 받은 뒤, 담당이 될 교사를 구하여 동아리를 만드는 경우와, 반대로 교사가 부원을 모으고 학교의 승인을 받아 동아리를 만드는 경우[6] 둘 다 가능하나, 자율동아리제 시행 극초기였던 2017년을 제외하면 후자가 일반적이다.
6. 주요행사
- 학예전
- 학예회
- 모전가요제
- 모전리그
고정행사별 추가 이벤트 목록 (갱신 요망)
1기 운동회 - 3학년 가장행진
1기 가요제 - 아름다운 밤 간부회 단체 공연 [9]
2기 운동회 - 무용부 특별공연
2기 가요제 - 회장과 3학년 남자 부회장의 댄스배틀 [10]
다만, 2기가 1기의 모전리그, 춤신춤왕, 모전 가요제를 계승했고, 4기가 3기의 게임 대회를 계승했듯이 앞서 모범이 된 행사는 조금의 변주만을 거쳐 연후 기수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개교 초기인 2016~2017년에는 교장의 의지에 힘입어 뮤지컬, 마술단, 성악단, 밴드[11] 등 초청 공연, 골든벨, 벼룩시장[12][13] , 크리스마스 파티[14] . 작품전시회, 모전 페스티벌, 모전리그, 춤신춤왕, 모전가요제 등 매우 다양한 특색 사업이 이루어졌고, 기장군에서 개최한 안전연극, 독서감상문 대회와 부산시교육청(해운대)의 자율학기제 소감문 낭독식 등 외부행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7. 교통
7.1. 버스
[1] 학교 홈페이지 참고[2] 그 후 2013년도에 부산중앙중학교가 부산진구 부전동 궁리마루 자리에서 정관신도시로 이전해왔고 2017년도에 공립중학교인 정관중학교가 새로 개교하였다.[3] 학교 홈페이지 참고[4] 정관중학교가 개교하기 전이라 그런지 가장 학급 수가 많다.[5] 현재는 왜색을 희석하고 문화부로 이름을 바꾸어 독립해서 모전중학교 자율동아리제와는 직접적 관계가 없는 단체가 되었다.[6] 단, 두 경우 모두 신청서와 보고서를 제출할 동아리 학생 대표를 사전에 선출해야 한다.[7] 덕분에 지도부와 학생회는 정기 고사가 끝나면(특히 연말) 매우 바빠진다.[8] 고정행사들도 진행 구성이 바뀌거나 이벤트가 추가되어 해당 기수에 맞는 각색이 이루어진다.[9] 당시 간부회 구성원들이 모두 가무에 일가견이 있었기에 가능한 이벤트였다. 초대 회장의 후일담에 의하면 자진해서 주말 새벽까지 반납하고 안무 고안부터 숙달까지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았다고 한다. 실제로 독창적이면서도 빈틈없는 칼군무를 선보여 후배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10] 선례와 달리 둘 다 몸치였다.[11] 야마하[12] 벼룩시장이란 이름이 무색하게 고가품이나 평소에 보기 힘든 물건(서예용구) 등 양질의 상품이 상당히 있었고, 나머지도 대부분 새 것이거나 거의 쓰지 않은 물건들이었다.)[13] 발생한 수입의 일부를 기부했다.[14] 벼룩시장을 통해 얻은 수입에서 기부금을 제한 돈으로 개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