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제(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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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진나라(晉)의 제9대 황제이자, 동진(東晉)의 제5대 황제. 자는 팽자(彭子)
2. 생애
건원 원년(343년)에 사마악과 저산자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건원 2년(344년) 8월, 강제 사마악의 병세가 위급해지자 중서감 유빙과 정서 장군 유익 형제는 회계왕 사마욱[1] 을 후사로 세우기로 했다. 하지만 중서감 하충은 겨우 2살 밖에 안되는 사마담을 태자로 봉하자고 했는데 왠지 사마악은 어린 아들을 태자로 봉했다. 9월, 사마악이 사망하자 황제가 되었는데 저태후가 섭정하고 하충이 보좌했다. 하충은 재능과 식견이 있고 도량이 넓었으며 친족이나 지인을 사사로이 돌보지 않고 나라를 잘 다스렸다.
영화 2년(346년) 정월, 하충이 죽고 좌광록대부 채모와 사마욱이 정사를 보좌했다. 이때는 중원 지역이 혼란에 빠져 갈족의 후조를 한족의 염민이 멸하여 염위를 세웠고, 저족이 세운 전진의 부견이 천왕에 즉위했으며[2] 선비족 전연의 모용준이 염위를 멸망시켰다. 이 틈을 타서 동진의 유력한 형주 군벌 환온이 서정을 감행했다.
영화 3년(347년), 성한을 쳤다. 환온은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결국 성한을 멸망시키고 후주 이세를 사로잡았으며 서촉 지방을 수복했다.
영화 10년(354년)에는 환온이 본격적으로 전진을 쳐서 장안, 낙양을 함락시킬 작정을 했으며 평승루에 올랐다. 강주 자사 사마훈과 함께 장안을 수복하기 위해 관중을 쳤는데 촉한의 위연이 제안했다는 그 전설의 '''자오곡 계책'''을 그대로 활용했다가 보급로가 끊겨 철수했다. 사실 환온은 구도인 장안과 낙양을 함락시킬 마음이 만만했고 북벌 전 표문에서도 그런 마음을 표명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자 결국 관중 지역 백성들 3,000여 명만 이끌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3]
사실상 형주의 지배자였던 환온이 북벌을 행한 궁극적인 목적은 큰 공을 세워 동진을 찬탈하는 것이었는데, 결국 그의 꿈은 그의 아들 환현이 이루다가 말았고, 유유가 그 꿈을 이룬다.
영화 12년(356년), 환온은 두 번째로 이어진 북벌 시도에서 4년 전 은호를 꺾었던 요양(姚襄)의 군세를 격파했다. 그리고 나서는 수복한 낙양으로 수도를 이전하자고 건의했지만 사마담의 무관심과 강남에 뿌리를 박은 사대부들의 반대, 환온의 찬탈 의도를 깨닫고 견제하려는 대신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철수한다. 사실 당시 낙양은 동진의 변경에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북쪽의 이민족에게 빼앗겨서 환온 본인도 진지하게 제안한 주장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정북 대장군 저곤, 중군 장군 은호 등도 북벌 러시에 뛰어들었으나, 모두 실패했다. 일단 본인들의 능력은 장군이라기에는 너무나 허접했고 오히려 청담가에 가까웠으며 국고가 비었고 치밀한 계획도 없었다.
승평 5년(361년) 5월, 사마담은 재위 18년 만에 '''19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7월에 영평릉에 안장되었다.
3. 여담
참고로 1980년 영평릉으로 추정되는 무덤이 남경 막부산에서 발견된다. 사실 짧은 기록과 출토 유물 등으로 추정하는 것이긴 하지만, 역대 동진 황릉이 확인되지 않은 것으로 볼 때는 중요한 발견이다.
4. 둘러보기
[1] 원제 사마예의 막내 아들로 강제 사마악의 숙부. 훗날의 간문제.[2] 부견은 죽을 때까지 황제가 되지 않고 천왕이라고 칭했는데 그의 아들 부비가 그를 황제로 추존했다.[3] 부견의 재상으로 유명한 왕맹(王猛)을 이때 만났는데 왕맹은 이를 잡으면서 태연히 환온과 의견을 교환하며 엄청난 학식을 자랑했다. 이에 환온은 자기를 따라오라고 했는데 왕맹은 자신의 스승에게 물어보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스승은 '''환온 따위'''를 따라 나서지 말라고 했고, 이에 왕맹은 모친 모시는 것을 핑계로 환온의 제안을 거절한 후 부견을 따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