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견
1. 소개
오호십육국시대 전진(前秦)의 3대 황제이자, 전진의 전성기를 스스로 열고 닫은 저족의 영웅. 자는 영고(永固) 혹은 문옥(文玉)이라고도 한다.
전진의 초대 황제 부건의 조카로, 부웅[4] 의 아들이다. 20세의 나이에 2대 황제인 부생을 제거하고 전진의 황제가 되었다. 이후 왕맹을 비롯한 인재들을 등용하고, 학문과 문화를 부흥시켰으며, 농업과 민생의 진흥에도 큰 노력을 기울였다.
내치뿐 아니라 외정에 있어서도 큰 성과를 거두어, 환온을 앞세워 북진을 시도하려는 동진을 저지하였을 뿐 아니라 이를 공격하여 양양을 비롯한 넓은 영토를 획득했다. 뿐만 아니라 이민족들을 적극적으로 포용하여 빠른 속도로 국력을 확장하였고, 전연을 비롯한 적대 세력들을 차례로 쓰러뜨려 오호십육국시대 최초로 화북 통일의 위업을 달성했다. 그러나 왕맹이 죽은 후, 천하 통일의 야망을 품고는 무리하게 동진 정벌을 추진하다가 비수대전에서 참패하고 몰락의 길을 걸었다.
난세를 평정하여 화북을 통일했고, 적극적으로 여러 이민족들의 융합을 꾀하는 장기적인 비전을 펼쳤으며, 농업과 학문을 진흥시켜 잠시나마 태평성대를 열었다는 점에 있어서 오호십육국시대의 숱한 군주들 사이에서도 석륵과 더불어 명군으로 평가받는 몇 되지 않는 인물 중 한 사람이다. 단순히 전쟁에만 능했을 뿐 아니라 지식인으로서의 경륜도 빼어나서, 그야말로 문무(文武)의 자질을 겸비한 엘리트였다. 또한 당시의 시대상을 감안하면 놀라울 정도의 관대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계속되는 성공으로 인한 자만심과 지나친 이상주의가 발목을 잡아서 참혹한 말년을 보내야 했다. 이 때문에 후대인들에게는 양면적인 평가를 받아왔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부견은 337년, 전진의 초대 황제 부건의 동생인 부웅과 그의 아내인 구씨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출생과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다양한 일화가 전해진다. 그의 어머니였던 구씨가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빌기 위해 서문표의 사당에 들어왔다가 신령과 교접해 20달이 지난 후에 부견을 낳았다거나, 그렇게 해서 태어난 부견의 등에 그가 훗날 "함양에 들어가 왕이 될 것이다"라는 내용의 예언이 적혀 있었다는 등의 전설이 바로 그것이다. 그 외에 사람보는 안목이 뛰어나기로 유명했던 서통이 그를 보고는 "패왕의 상"라 하면서 장차 귀인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는 일화도 전한다.
부견은 어렸을 적에는 할아버지 부홍을 비롯한 다른 일족들처럼 후조의 석호의 휘하에 들어가 그 수도인 업에서 거주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영특하기로 유명했는데, 학문을 즐겨해 조부 부홍[5] 에게 총애를 받았다. 이때 부견이 부홍에게 집에 스승을 들여와 학문을 배우고 싶다고 청하자, 부홍이 감탄하며 "우리 집안 사람들은 오랑캐인지라 대대로 먹고 마실 줄만 알았는데 너는 학문을 하려 하는구나!"라고 말하고는 기뻐하며 청을 받아주었다고 한다.
이후 349년에는 후조의 석호가 죽고 석준과 석감이 제위를 다투게 되자, 부홍이 본래의 성씨인 포(蒲)를 부(苻)로 바꾸고 대장군 · 대선우 · 삼진왕(三秦王)을 자칭하며 독립했다.[6] 그에 따라 부견도 성이 부씨가 되었다. 이후 부홍은 350년에 시해당했고 그의 아들이자 부견에게는 백부가 되는 부건이 뒤를 이었다. 351년, 후조가 멸망의 길을 걷게 되자, 한족 출신인 두홍(杜洪)이 관중 지역을 장악했는데, 부건이 이를 공격해 장안을 점령하고 마침내 전진(前秦)을 건국하여 천왕[7] 을 자칭했다. 이때 부견은 부건을 따라 종군하여 불과 14세 정도의 나이로 용양 장군의 작위를 하사받았다.[8]
2.2. 쿠데타와 즉위
351년에 전진이 건국된 이후로 부견은 유력한 왕족들 중 하나로 성장해나갔다. 부견은 문무에 모두 능통했는데, 그가 칼을 휘두르고 말을 타는 모습은 기백이 넘쳐나서 사졸들의 존경을 받았다고 하며, 어렸을 적의 일화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민족 출신의 권력자로서는 드물게 박학다식하며 공부를 즐겨하고 유학을 숭상하였다. 그는 나이를 먹어가면서 나름대로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했는데, 훗날 그를 보좌하게 될 여파루, 강왕, 양평로, 설찬, 권익 등의 쟁쟁한 인재들을 휘하에 거느리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이런 인재들 중에서도 특히 여파루가 데려온 왕맹은 그 식견과 재주가 뛰어났는데, 부견은 마치 유비가 제갈량을 대하듯 왕맹을 우대했다.[9]
355년, 전진을 건국한 부건이 죽은 후에 그의 아들인 부생이 뒤를 이어 즉위했다. 애꾸눈이었던 부생은 매우 용맹하며 전투에 능했고, 싸움실력은 당할 자가 없을 정도의 맹장이었다. 그러나 그는 성격이 포악하여 심한 폭정을 휘둘렀다.[10] 357년 5월, 부견은 부생의 명을 받들어 강족을 정벌하고 그 우두머리인 요양을 죽이는 전공을 세웠다.[11]
그해 6월, 부생은 부견과 그 배다른 형인 부법을 의심하여 이들을 죽이려 했으나, 부생의 시녀가 그 사실을 몰래 부견 형제에게 알려주었다. 부견은 형 부법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켜 부생을 죽였으며, 천자의 지위에 올라 대진천왕(大秦天王)이라 칭하였고, 연호는 영흥(永興)이라 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겨우 '''20세'''였다. 제위에 오른 부견은 부생에게 살해당한 신하들의 관직을 회복시켜주는 한편, 자신의 즉위에 공을 세운 신하들과 친족들에게 논공행상을 하였다. 다만 기존의 작위였던 왕(王)을 공(公)으로 격하시켜 황제의 권력을 강화하였다.
부견의 배다른 형인 부법 또한 인망과 능력이 뛰어났으나, 서자라는 혈통상의 문제 때문에 별다른 저항없이 부견에게 황제의 자리를 양보했다. 그러나 부견의 어머니인 구씨는 그의 집 앞에 유세객들의 수레가 줄지어 있는 것을 보고는 그를 두려워하다가 결국 암살해버렸다. 부견은 이를 무척 슬퍼하여 죽은 형에게 애공(哀公)의 시호를 내렸으며, 그의 어린 아들들에게도 작위를 하사했다.[12]
2.3. 재위와 전성기
2.3.1. 왕권 강화
황제가 된 부견은 가장 먼저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고 황권을 강화시키는 일에 착수했다. 부견이 집권했을 당시의 전진은 소수 저족 유력 가문의 힘이 강력했으며 황권은 상대적으로 취약했다. 더욱이 부견 자신이 찬탈을 통해 집권했기 때문에 뒷통수가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부견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왕맹을 비롯한 한족 출신의 참모들을 대거 고위직에 등용하고, 그 반면에 황권에 도전할 기미가 보이는 유력 가문들은 숙청해나갔다. 이에 앞장선 사람이 바로 부견의 오른팔인 왕맹이었다.
부견이 제위에 올랐을 때에, 시평 지역에서는 강도들과 호족들이 기승을 부렸다. 이에 부견은 왕맹을 시평령으로 삼아 파견했는데, 그곳에서 왕맹은 엄격한 법치로 호족들의 세력을 억제하는 데 성공했다.[13] 숙청은 중앙에서도 계속되었다. 예컨대 저족 출신의 공신이었던 번세는 왕맹의 승진에 불만을 품고 있던 중, 부견의 면전에서 왕맹을 폭행하려 하는 등 거센 반발을 표했다가 처형당했다.[14] 이에 저족 출신의 호족들이 궁으로 몰려와 항의하자, 부견은 이들을 크게 꾸짖고는 묶어놓고 매질을 하다가 측근인 권익이 말리고 나서야 그만두었다.
이후로 부견의 권력 강화는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선대 황제 부건의 매부인 강덕은 호족으로서 그 횡포가 극심하였는데 마찬가지로 처형당해 저자거리에서 기시되었다.[15] 이후로도 왕맹은 부견 휘하의 맹장인 등강의 도움으로 수십 일 사이에 20명이나 되는 호족들을 잡아 죽였다. 이후로 부견에게 감히 불손하게 구는 이들이 사라졌는데, 이에 부견은 "이제야 비로소 천하에 법이 있음을 알았고, 천자가 존귀한 줄 알게 되었다!"며 감탄하였다고 한다.
2.3.2. 내정 진흥
부견은 명재상 왕맹의 보좌를 받아 권력을 강화한 후, 내정에도 힘을 기울였다. 오랜 전란으로 인하여 피폐해진 농업과 민생을 진흥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에 따라 대상인들의 세력을 억압하고, 그 대신에 경작지를 개간하며 농업을 권장하는 등 중농 정책을 펼쳤다. 또한 제후와 귀족들의 노비들을 징발해서 산을 깎고 관개 시설을 정비하는 대공사를 일으켜 황무지에도 물을 끌어다 써서 농사를 지을 수 있게 하였다. 가뭄이 들 때에는 먹는 반찬수를 줄이는 등 황궁에서 앞장서서 근검절약을 실천하였고, 틈틈이 나이 든 홀아비들과 과부들에게 곡식과 비단을 나누어 주는 등 사회 취약층들을 구휼하였다. 뿐만 아니라 지방마다 사신을 파견해서 구휼 실태를 점검하였고, 소홀함이 있으면 그 지방관을 벌하도록 하였다.
부견은 농업과 민생뿐 아니라 학문을 진흥하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쏟아 부었다. 부견은 장안에 태학(太學)을 세우고는, 경전을 하나라도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든지 학생으로 받아 들였으며, 관료들의 자식들 또한 태학으로 불러와서 수업을 받도록 하였다. 부견은 그 자신도 학문에 매우 밝았기 때문에, 몸소 한 달에 한 번씩 태학에 행차해서[16] 직접 학생들을 시험쳐서 점수를 매겼다.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박사들과 토론을 하기도 했는데, 부견의 박학다식 앞에서는 박사들조차 말문이 막힐 정도였다고 한다. 태학의 박사 왕실은 부견이 학문에 힘을 쏟는 광경을 보고는 감격한 나머지 한무제와 광무제라도 부견을 따라잡을 수는 없을 것이라고 칭송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황제가 직접 태학까지 와서 학문에 힘을 쏟으니, 열심히 공부하지 않는 학생이 없었다.
부견은 유교를 가장 좋아했으나 불교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때문에 고승으로 이름이 높았던 도안을 모셔와 높이 우대하였으며, 그로부터 여러 조언을 듣곤 했다. 또한 372년, 부견은 승려 순도를 고구려에 파견하여 불상과 불경을 전하도록 하였다. 이에 고구려의 소수림왕이 사자를 보내 답례하기도 하였다. 다만 부견은 유교와 불교를 적극적으로 후원한 것과는 달리, 도참 사상과 노장 사상은 이단시하며 매우 싫어하였다. 때문에 이를 가르치는 것을 법으로 금하기도 하였다.
옛 기록에서는 부견이 다스리던 태평성대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부견과 왕맹의 통치하에 전성기를 구가하던 전진의 풍경이었다.
영가의 난 이래로 학교라는 것은 있지도 않았는데, 부견이 왕을 참칭할 때에 이르러 자못 유학(儒學)에 마음을 두었으며, 왕맹이 풍속을 정비하였으니, 정치는 훌륭히 행해졌으며, 학교는 흥하였다. 관롱(關隴)은 평안해졌고, 백성들은 풍요로웠으며, 장안으로부터 여러 주에 이르기까지 모든 길마다 회화나무와 버드나무를 심었으며, 20리마다 정(亭)을 하나씩 두었고, 40리마다 역(驛)을 하나씩 두었으니, 여행자들이 길에서 휴식을 취하였으며, 공업자와 상인들은 길에서 장사했다.
백성들이 이를 노래하며 말하였다. "장안의 큰 길가는 버드나무와 회화나무가 있다네. 아래로는 붉은 수레가 달리고 위로는 난새가 한다네. 훌륭한 선비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우리 백성들을 이끌어 준다네."
- 《진서》 부견재기
2.3.3. 화북 통일
부견은 중농 정책을 통해 국가의 경제와 생산력을 향상하는 한편, 학문과 문화를 진흥하는 데 힘을 쏟았다. 그러나 부견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분열된 천하를 하나로 통일하여 오랫동안 지속되어왔던 전란을 종식시키고자 하는 야망을 불태웠다. 그에 따라 어느 정도 기반이 잡힌 후에는 본격적인 정복 전쟁을 실시하여 승승장구를 이어나갔다.
366년, 왕맹과 양안을 파견하여 동진의 형주를 공격하여 1만여 호의 인구를 획득하였다. 또한 농서의 세력가인 이엄과 충돌이 일어나자 또다시 왕맹을 파견하여 이를 평정하고 이엄을 사로잡았으며, 전량의 왕 장천석을 굴복시켰다.
367년에는 부쌍(苻雙) · 부유(苻柳) · 부유(苻庾) · 부무(苻武) 등을 비롯한 전진의 왕족들이 상규(上邽) · 포판(蒲阪) · 섬성(陝城) · 안정(安定) 등에서 부견에게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한때 반란군이 수도인 장안 인근까지 진입하여 잠시 위태로운 상황에 처했으나, 곧 이를 진압하고 관중지역을 평정하는 데 성공하였다.
369년, 동진의 군벌 환온이 3번째 북벌을 시도하여 전연을 공격해오자, 전연의 황제 모용위는 부견에게 무뢰(武牢) 이서의 땅을 주겠다는 조건으로 도움을 청해왔다. 부견은 이에 응하여 장수 구지를 파견해서 전연을 돕도록 하였다. 전연은 명장 모용수의 활약과 부견의 도움에 힘입어 환온의 북벌군을 무찌르는 데 성공한다.[17] 이후 모용수가 전연의 실권자였던 모용평의 위협을 받고 전진으로 망명해오자, 부견은 왕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를 받아주었다. 또한 모용위가 약속을 어기고 땅을 나눠주려 하지 않았다. 부견은 이를 빌미로 삼아 전연을 공격해서 모용장의 군대를 격파하였으며, 낙주자사 모용축의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낙양 일대를 점령했다.
370년, 부견은 왕맹을 총사령관으로 삼은 후, 10만 대군을 동원하여 대대적인 전연 정벌을 시작했다. 왕맹이 거느린 군대는 전연의 태부 모용평이 거느린 40만 대군과 대치하게 되었다. 왕맹은 샛길로 우회하여 전연군의 보급 물자를 태워버리는 한편, 맹장인 등강과 장자 등을 앞세워 전연군의 진영을 와해시켜 이를 격파하였다. 이리하여 전연의 주력은 거의 궤멸하였다. 그해 11월, 부견은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전연의 수도이자 관동의 중심지였던 업군에 입성하면서 전연은 멸망하였다. 달아나다가 사로잡힌 전연의 마지막 황제 모용위를 위시한 모용씨 황족들은 장안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전진은 최대의 라이벌이었던 전연을 정복함으로써 중원의 중심지였던 관중 · 관동 일대를 모두 장악하여 명실상부한 화북 최강의 세력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부견은 뒤이어서 371년 4월, 서남쪽에 위치한 구지의 마지막 왕인 양찬이 숙부인 양무와 불화한 틈을 타서 이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373년에는 다시 서남쪽으로 군사를 움직여 동진의 익주와 양주를 공격하여 정복하였다. 376년 8월에는 서쪽에 위치한 전량을 정벌하여 그 마지막 왕인 장천석을 굴복시키고 멸망시켰다. 그해 12월에는 북쪽에 위치한 탁발선비의 대(代)를 공격해서 멸망시키고 그 마지막 왕인 탁발십익건을 사로잡았다. 이렇게 하여 부견은 재위 20여 년 만에 오호십육국시대 최초로 화북통일의 대업을 달성한 것이었다.
이후 378년에는 아들인 부비에게 군사를 주어 동진의 양양을 공격하도록 했다. 부비가 거느린 군대는 이후 1년 동안의 혈전 끝에 379년, 양양을 점령했다.[18] 그 다음에는 회수 일대까지 침입하여 광릉 땅 100리를 빼앗았다. 부견은 화북을 통일하는 데에서 만족하지 않고, 장강 너머 동진까지 정복하겠다는 야심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에 전진과 동진 사이의 군사적 대립은 가속화되기 시작했다.
2.3.4. 사민 정책
부견은 영토를 확장하고 화북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상당히 관대한 정책을 펼쳤다. 정복지의 지도층과 인민들을 함부로 해치지 않고, 그 대신에 부락을 재편하거나 해체하고 그 지배계급을 수도인 장안 및 그 인근지역으로 이주시키는 이른바 화융지술(和戎之術)이 바로 그 것이다.
358년, 병주 일대에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던 군벌 장평(張平)이 반란을 일으키자, 부견은 맹장 등강과 여광 등을 앞세워 이를 토벌한 후, 반란군의 괴수였던 장평과 그의 양자인 장자(張蚝)에게 오히려 벼슬을 내려 등용하고는 그들이 다스리던 부락에서 3천여 호를 빼와 장안 인근으로 이주시켰다.[19] 또한 365년에는 흉노 철불부의 수령인 유위진이 흉노의 우현왕 조곡과 더불어 전진을 배신하고는 이를 공격하였는데,[20] 부견은 이를 토벌한 후에 조곡이 거느리던 추장과 호족 6천여 호를 장안 인근으로 이주시켰다.
370년, 전연을 멸망시킨 후에도 대규모 사민정책이 실시되었다. 우선 전연의 마지막 황제였던 모용위를 위시한 그 휘하 왕공들을 모두 사면하고 모두 장안으로 이주시켜 봉작을 수여했다. 또한 관동의 호족과 잡이 10만 호를 관중으로 이주시켰으며, 그 일대의 오환족은 풍익과 북지로, 정령족은 신안으로, 진류와 동아의 1만여 호를 청주로 이주시켰다. 또한 376년, 전량을 멸망시켰을 때에는 그 마지막 왕이었던 장천석에게도 관작을 내렸고, 그곳의 호족 7천여 호를 관중으로 이주시켰다. 그해에 탁발선비가 세운 대국을 멸망시켰을 때에도 끝까지 저항하다가 아들에게 배신당해서 사로잡힌 대국의 왕 탁발십익건도 장안으로 데려와서 태학에서 교육을 받도록 하는 데 그쳤다.[21]
뿐만 아니라, 부견은 인재를 등용함에 있어서도 그 출신 배경과는 상관없이, 능력과 자질에 따라 등용하는 이른바 수재탁수책(隨才擢授策)을 펼쳤다. 때문에 부견의 휘하에는 저족 뿐 아니라 한족, 선비족, 강족 출신으로 높은 지위에 오른 이들이 많았다. 실제로 부견의 오른팔로 활약하며 지위가 승상에 이른 왕맹, 그리고 그 못지 않은 측근들이었던 권익과 설찬 등은 모두가 한족 출신이었다. 또한 모용 선비의 모용수와 강족의 요장은 특히 부견의 휘하에서 많은 전공을 세워 총애를 받았다.[22]
이처럼 부견은 자신이 정벌한 땅의 지배층을 장안 일대로 옮기는 반면, 관중에 거주하던 저족들은 지방으로 파견하여 그 지배력을 높이고자 하였다. 380년에 친척이었던 부락의 반란을 평정한 후, 그해 7월에는 아들인 부비를 포함한 저족의 자제 3천여 호를 나누어 업을 비롯한 관동 일대에 파견하였던 것이 그 예이다.
부견의 이와 같은 이민족 포용 정책은 부견이 지니고 있었던 천하통일과 호한융합(胡漢融合)에 대한 야망을 보여주는 중요한 예로 여겨진다. 이 점에 있어서, 부견은 앞서 화북의 패권을 장악했던 전조나 후조 등의 여타 이민족 왕조와는 확연히 다른 면모를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부견이 빠른 속도로 화북을 평정할 수 있었던 점도 이런 정책들이 밑바탕이 되었던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부견의 오른팔이었던 왕맹, 그리고 부견이 왕맹 다음으로 신뢰했던 측근 부융 등은 그 도가 지나친 것이 아닌가 걱정을 하기도 했고, 이런 염려는 후에 결국 현실이 되고 만다.
2.4. 동진정벌의 실패
2.4.1. 동진정벌의 서막
이처럼 부견이 천하통일의 꿈을 키워가고 있을 무렵, 부견의 오른팔이자 화북쟁패의 일등공신이었던 명재상 왕맹이 375년, 51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왕맹은 병상에서 죽어가면서, 부견에게 동진을 치지 말 것, 그리고 내부의 적인 선비족과 강족을 먼저 제거할 것을 간언하였다. 부견은 왕맹이 병으로 죽어갈 무렵에 그를 살리기 위해 대사면을 행하고 몸소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등 갖은 노력을 다했고, 끝내 왕맹이 죽은 후에는 '''"하늘은 내가 천하를 통일하기를 원치 않는 모양이다! 어찌 내게서 이렇게 일찍 왕경략을 빼앗아 간단 말인가!"'''라고 한탄할 정도로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부견은 왕맹의 유언을 따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이를 역으로 거스르기 시작했다. 부견은 그동안 전장에서 많은 공을 세웠던 모용선비의 모용수와 강족의 요장 등을 총애하여 이들을 중용하였을 뿐 아니라, 저족의 자제들을 지방으로 파견하고 이민족들은 장안 인근에 거주하게 했던 기존의 정책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뿐만 아니라 앞서 언급하였듯이, 379년에는 양양을 점령하고 회수 일대까지 침입하는 등 계속해서 동진을 군사적으로 압박하며 천하통일의 야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382년 10월, 부견은 태극전에서 신하들과 처음으로 대대적인 동진정벌과 천하통일의 포부를 밝혔다. 부견의 측근이었던 대신 권익과 석월 등은 부견의 뜻에 반대하였고, 부견의 아우이자 그가 왕맹 다음으로 신뢰했던 참모였던 양평공 부융조차도 우선 선비족과 강족의 세력을 제거하는 것이 급선무라며 부정적인 견해를 내비쳤다. 그 이후에도 부견의 아내인 황후 구씨, 부견의 조언자였던 승려 도안, 그가 가장 총애했던 후궁인 장부인, 장부인의 소생으로 부견이 총애하던 어린 아들 부선, 심지어 부견의 태자였던 부굉 등까지 모두 동진을 정벌하려는 부견을 말렸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 와중에 부견의 동진정벌론에 찬동한 이는 극소수에 불과했는데, 그중 한 사람이 바로 모용선비 출신으로 부견의 휘하에서 많은 공을 세워 총애를 받고 있었던 모용수였다. 당시 부견이 동진정벌에 반대하는 신하들에게 '''"짐의 군사들이 강에 채찍을 던져넣기만 해도 족히 장강의 흐름을 끊을 수 있소."'''라며 호언장담을 던졌는데, 여기서 유래한 사자성어가 "투편단류(投鞭斷流)"였다.
383년, 마침내 부견은 화북에 이어 강남까지 정복함으로써 천하통일을 완성하기 위한 발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그해 정월, 부견은 휘하의 명장 여광에게 10만의 대군을 내주어 서역원정을 명하였다. 5월에 동진의 환충이 양양 일대를 공격해오자, 부견은 이를 방어한 후 마침내 동진을 정발할 뜻을 굳혔다. 그에 따라 조서를 내려 군사를 징발하였다. 이렇게 부견이 동진정벌을 위해 긁어 모은 군사는 거의 100만에 달했다.
2.4.2. 비수대전의 참패
부견의 대군은 8월에 진군을 시작하였고, 10월에는 본격적인 공세를 시작하였으니, 부융은 수춘(수양) 방면을 점령하였으며, 모용수는 운성 일대를 점령하였다. 부견은 수춘이 함락되어 동진의 기세가 꺾였다는 보고를 접하자 비밀리에 8천의 경기병을 거느리고 몸소 아우 부융이 지휘하던 수춘 전선으로 향했다. 부견은 본래 동진의 관료였다가 포로로 잡아 휘하에 거느리고 있던 주서를 보내 동진 측의 진영에 항복을 권하게 하였다. 그러나 주서는 오히려 동진 측의 총사령관 사석[23] 에게 부견이 지금 수춘에 이르렀으되 아직 전진의 100만 대군이 온전히 집결하지 않았으니, 이들이 모이기 전에 신속히 공격해서 예봉을 꺾으면 승산이 있다는 기밀을 알려주었다.
그해 11월, 사석은 처음에 부견이 수춘까지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는 두려운 마음에 싸움을 회피하려 하였으나 조카인 사염이 주서의 말을 따를 것을 권하자 마음을 돌려서 전진 진영에 선제공격을 가하기로 마음 먹었다. 이때 부견의 장수였던 양성이 팽성 쪽에서 진군하여 수춘 근방까지 이르러 목책을 세웠는데, 사석은 명장 유뢰지를 보내 이를 야습하게 하였다. 이 싸움으로 전진은 1만 5천에 달하는 군사를 잃었고, 양성을 위시한 10명의 장수들이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받아 예봉이 꺾이고 말았다.
한편 부견과 부융은 미처 이 사실을 모른 채 수춘의 성벽에 올라 적의 형세를 살폈는데, 직전에 큰 승리를 거둔 동진군의 사기는 드높았으며 진영도 빈틈이 없었다. 부견은 수춘 방면에서 전진군이 승리를 거둔 탓에 동진의 사기가 바닥을 칠 것이라 생각했는데 상황은 정 반대였던 것이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나머지, 부견은 인근에 위치한 팔공산을 뒤덮은 초목을 동진군으로 착각하고는 기겁을 하는 촌극을 연출하기도 하였다. 여기서 유래한 사자성어가 바로 "초목개병(草木皆兵)"이다.
동진의 주력이 의외로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직감한 부견은 부융과 함께 비수 근처에 진을 치고 동진군과 대치하였다. 이때 동진의 사현이 부융에게 사절을 보내서 전진군이 진영을 조금만 뒤로 물려준다면, 동진군은 강을 건널 테니 서로 승부를 겨루는 게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건냈다. 보고를 받은 부견은 진영을 조금 뒤로 물려주는 척 하다가, 동진군이 비수를 반쯤 건너면 그때 철기병을 보내 이를 공격한다는 작전을 계획했다. 부융 또한 이에 동의하여 전진군은 진영을 뒤로 물리게 되었다.
그런데 상황은 부견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전진의 군사들은 동진군과 제대로 맞붙기도 전에 진영을 뒤로 물려야 한다는 명령을 이해하지 못하고 잔뜩 동요하고 있었던 것이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전진의 군사들은 차츰 제어가 어려워졌는데, 이때 동진에서 기병을 출격시켜 빠른 속도로 쫓아왔다. 이에 전진의 대군은 너무도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대열이 붕괴된 부견의 대군은 서로를 밟아 죽여가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부융은 어떻게든 대열을 수습하기 위해 말을 타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애를 썼으나 말이 넘어지는 바람에 낙마하여 죽임을 당하였고, 부견 또한 난전에 휘말려 화살을 맞고는 말을 달려 달아나는 일생일대의 치욕을 겪어야 했다. 이 싸움을 후대에는 '''비수대전'''이라 한다.
부견은 다급히 달아나는 와중에 바람소리와 학의 울음소리를 듣고도 동진군이 쫓아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며 불안해했는데, 여기서 유래한 사자성어가 바로 "풍성학려(風聲鶴唳)"이다. 간신히 동진군의 추격을 벗어난 부견은 길가에서 어느 농부를 만나고는 그가 바친 밥과 돼지고기로 주린 배를 채웠으며 그 보답으로 비단을 하사하려 했는데, 되려 그 농부에게 '''"오늘날의 몽진(蒙塵)이 어찌 하늘의 뜻이겠습니까!"'''라는 힐난을 들었다. 그제서야 사태를 파악한 부견은 동진정벌을 무리하게 강행한 것을 후회하면서 함께 있던 후궁인 장씨 부인에게 '''"짐이 만일 조신들의 말을 들었다면 어찌 오늘 같은 일을 만났겠소! 무슨 면목으로 다시 천하를 다스릴 수 있겠소?"'''라 말하고는 눈물을 쏟았으나 이미 지나간 일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2.5. 몰락의 길
'''비수대전에서의 참패 이후, 전진은 순식간에 멸망의 나락으로 추락한다.''' 왕맹과 부융의 염려는 과연 들어 맞아서, 부견이 거느린 주력부대가 비수대전에서 궤멸하자 그동안 야심을 숨기고 있던 휘하의 여러 세력들이 일제히 반기를 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로 인하여 부견이 애써 통일한 화북지역은 갈갈이 찢겨나가기 시작했다.
모용수는 과거의 의리를 지킨다는 명목으로[24] 간신히 도망쳐온 부견을 장안까지 호위한 후 자청하여 옛 전연의 수도였던 업을 방어하러 갔으나 이미 이전부터 딴마음을 품고 있던 상태였다. 결국 384년 정월, 정령족의 적빈이 반란을 일으키자, 모용수는 이에 호응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니, 이윽고 세력을 결집하여 '''후연(後燕)'''을 건국한 후 업을 공격하였다.
그해 3월, 모용위는 모용수가 부견을 배신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외지에 파견되어 있던 자신의 종실들과 내통하여 전연의 부흥을 꾀하였다. 모용위의 아우 모용홍은 이에 호응하여 북지에서 반란을 일으켜 '''서연(西燕)'''을 건국했다. 부견은 이를 토벌하기 위해 4월, 아들인 부예를 파견했다. 그러나 부예는 자신을 보좌하던 요장의 충고를 무시하고 성급히 군사를 움직였다가 모용홍에게 패하고 죽었다. 요장은 부견에게 사자를 보내 죄를 빌었으나, 분노한 부견이 이들을 죽여버리자 도주한 후 흩어진 강족의 무리를 모아 반란을 일으켜 '''후진(後秦)'''을 건국했다.
그해 6월, 모용홍은 군사를 거느리고 장안을 향해 진격하던 중 그의 가혹함과 무능력함에 불만을 품은 부하들의 반란으로 살해당했고, 그 아우인 모용충이 반란군의 새로운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한편 부견은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후진을 세운 요장과 수차례 싸워 승패를 반복하였으나 결국 이를 제압하지 못하였다. 이에 설상가상으로, 모용충이 장안 근방까지 진군하여 아방성을 함락시킨 후, 이를 근거지로 삼았으며 9월에는 마침내 장안을 공격해왔으며 이듬해인 385년 정월에는 황제를 자칭했다. 또한 이 해에 농서 지역에서 반란을 일으켰던 걸복국인이 '''서진(西秦)'''을 건국하였다.
2.6. 장안 공방전
이후 384년 9월 ~ 385년 5월에 이르기까지, 서연의 모용충은 장안을 포위한채 지리한 공성전을 감행했다. 부견은 수차례 모용충과 승패를 주고 받았으나 상황은 호전되지 않았다. 한편 부견은 모용위가 장안성 내에서 적군과 내통한 것도 모자라, 자신을 암살하려 했음을 알고는 결국 성내의 모든 선비족들을 학살해버렸다.
시간이 흐를수록 장안성의 공방전은 처절해져만 갔다. 모용충의 군사들이 민가를 약탈하는 바람에 장안 인근에는 곧 사람의 그림자와 밥짓는 연기가 끊겼고, 설상가상으로 장안성 내에도 기근이 닥쳐 사람들이 서로를 잡아먹기에 이르렀다. 부견 휘하의 장수들은 진영에서 식사로 배급받은 고기를 먹은 후, 집으로 와서 이를 토해내 가족들에게 먹이기도 했고, 심지어는 살상한 적군의 시체를 뜯어먹기까지 했다. 385년 3월에는 부견의 아들인 부휘가 패하고 돌아오자 부견이 그를 심하게 질책했는데, 부휘가 분통함을 참지 못해 자결하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그 와중에 4월에는 후연의 모용수가 업성을 함락시켰고, 후진의 요장이 신평을 공격해 함락시키는 등의 비보가 이어졌다.
그럼에도 부견에게 충성하는 이들이 남아있어 실로 감동스럽고 비장한 광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그해 5월, 풍익의 백성들은 모용충의 공격이 이어지는 와중에도 목숨을 걸고 장안으로 양식을 짊어지고 왔다. 이들은 임금인 부견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맹세하고는 성 밖으로 나가서 모용충의 막사를 습격하여 불을 지르다가 오히려 불길에 휘말려 적진과 함께 타죽는 등 처절한 혈투 끝에 거의 궤멸당하고 말았다. 부견은 그들의 죽음을 애도하며 몸소 제사를 지냈는데, 이때 통곡을 하며 슬픔을 가누지 못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2.7. 죽음과 사후
싸움이 길어지자 부견은 점차 모용충의 집요한 포위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흔들리기 시작했다. 부견 그 자신조차도 성루에 올라 전투를 지휘하다가 화살을 맞아 피를 흘리는 등 전황도 악화되어 갔다. 더욱이 신뢰했던 장수 양정마저 모용충에게 사로잡힌 사건은 부견을 더욱 깊은 절망의 늪으로 몰아넣었다. 점점 악화되어 가는 전황 속에서 부견은 재기할 수 있다는 희망을 잃고 멘탈붕괴에 빠지기 시작했다.
급박한 처지에 몰린 부견은 과거와는 달리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도참설에 의지하는 등 이성을 상실한 듯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부견은 본래 유학자적인 성향이 강해서 도참설을 굉장히 싫어했으나, 이처럼 상황이 절망적으로 흘러가자 때마침 장안성에 떠돌던 "황제가 오장(五將)으로 나가면 오래 갈 수 있다"는 참언에 마지막 희망을 걸기로 마음먹게 된다. 결국 부견은 태자 부굉에게 장안의 수비를 맡긴채 자신은 몇몇 혈육과 수행원들을 거느린 채 성 밖으로 탈출했다. 385년 6월, 장안성을 빠져나온 부견 일행은 이윽고 오장산에 이르렀으나 그곳에서 한때 총애하던 부하였던 후진의 요장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요장은 사로잡힌 부견에게 옥새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부견은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기에 도리어 요장을 크게 꾸짖으며 이를 거부했다. 요장은 부견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를 신평의 한 절에 감금했다가 8월 26일에 목을 메달아서 교살해버렸다. 당시 부견의 나이는 48세였는데, 재위에 오른 지 28년, 비수대전에서 패한지 약 2년 만이었다. 요장은 죽은 부견의 시호를 장렬천왕(壯烈天王)이라 하였다.[25]
부견과 함께 오장에서 요장에게 사로잡혔던 그의 가족들도 모두 비슷한 시기에 최후를 맞이했다. 사로잡힌 부견은 자신이 죽고 나면 함께 사로잡힌 자신의 딸들이 요장에게 능욕당할 것이라 생각하여 모두 죽여버렸다. 또한 부견이 교살당한 후, 그가 특히 총애했던 장부인과 어린 아들 부선 또한 모두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한편 부견이 달아난 직후에 결국 모용충이 장안을 함락시켰고, 마지막까지 장안을 사수하던 태자 부굉은 도주하여 곧 동진으로 망명하였다. 그 외에 부견의 명을 받들어 서역원정을 떠났던 여광은 부견을 문소황제(文昭皇帝)로 추존하였으며 이후 후량을 건국한다.
부견의 뒤를 이어 전진의 황제로 즉위한 인물은 그의 아들로서 이전에 양양을 함락시켰던 전공을 세웠던 부비였다. 부비는 부견을 세조(世祖) 선소황제(宣昭皇帝)로 추존하였다. 전진의 잔존세력은 부비와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한 부등 · 부숭 등의 통치하에 요장이 세운 후진과의 처절한 항쟁을 이어갔다. 그러나 뒤집힌 전세를 역전할 수는 없었고, 부견이 죽은 지 약 10년이 흐른 394년에 멸망하였다.
3. 평가
부견은 오호십육국시대의 군주들 가운데 후조의 석륵과 더불어 가장 뛰어난 명군이자 영웅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 자신이 화북을 통일하는 위업을 달성했을 뿐 아니라, 넓은 포용책과 관대함을 선보였고, 유학과 농업의 진흥 및 민생의 구휼에도 많은 공을 쏟아 전란이 끊이지 않았던 화북 일대에 잠시나마 태평성대를 이루었기에 중국사상 최악의 난세로 손꼽히는 오호십육국시대의 숱한 막장군주들에 비하면 평가는 매우 좋은 편이다.
다만 부견은 일생동안 착실히 쌓아온 업적에도 불구하고, 비수대전의 참패로 일거에 몰락한 일 때문에 실속없고 허황되며 오만한 정치가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비록 그 업적은 뚜렷했으나 몰락하는 과정 또한 매우 극적이고 처참했기에 예나 지금이나 평가가 극과 극으로 갈릴 수 밖에 없다고 할 수 있다. 부견의 일화에서 유래한 고사성어인 "투편단류(投鞭斷流)", "초목개병(草木皆兵)", "풍성학려(風聲鶴唳)" 등이 모두 비수대전의 참패와 연관되어 있다는 점도 이러한 부정적 평가를 반영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한 점을 감안하더라도, 오호십육국 시대의 군주들 중에서도 가장 먼저 천하통일에 근접했던 인물이었다는 점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전에 등장했던 오호십육국 시대의 군주들과는 달리, 부견에게 있어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은 그가 천하통일이라는 뚜렷한 비젼을 지니고 있었을 뿐 아니라,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했다는 점이다. 이는 현대에 이르러서도 여러 역사학자들에게 인정받고 있다. 위진남북조사 연구의 권위자인 박한제 교수도 천하통일의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해 능력 위주의 인재채용 및 한화정책과 민족융합책 등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실시했던 점을 부견 정권의 특징으로 손꼽았다.[26]
혹자는 부견이 조금만 더 참을성을 가지고 내실을 다졌다면, 최소한 남북조 시대가 빨리 나타날 수 있었고, 당시 막장가도를 달리던 동진의 상황을 감안할 때 실제 천하를 통일했을 수도 있다고 보기도 한다. 전진이 무너지면서 화북은 60년 뒤인 서기 439년에야 북위가 재통일했고[27] 천하 통일은 수가 진을 멸망시킨 589년에야 실현되었다. '''이후 북방 민족 왕조가 중국을 통일하는 것은 천여년 뒤에 원나라 쿠빌라이 칸 때의 일이다.''' 다만 한편으로는 비수대전에서의 패배로 연쇄작용이 일어나 온 나라가 도미노처럼 무너져 버렸던 점을 생각하면, 부견이 건설한 정권은 겉으로 탄탄해보이는 것과는 달리 내부의 결속력은 사실 영 부실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상태였다면 설마 비수대전에서 승리하고 동진을 정복했더라도 밝은 앞날을 장담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소량의 양무제와 비교되는데 '''생전에 유능했다'''는 것과 '''말년의 실책이 다 말아먹었다'''는 공통점들이 있다. 우리나라로 치면 후삼국시대 견훤과 비슷한데, 팔공산 전투 이후 왕건을 죽음 직전으로 몰아넣어 통일에 근접했는데, 난폭한 금성약탈로 신라가 적대하게 만들고 후백제 내 호족들의 알력과 후사 문제를 너무 엉망으로 처리해버리는 바람에 결국 자멸하게 된다(정확히는 장남을 제치고 4남 세우려다 쫓겨나면서 아예 고려로 망명, 결국 자신의 손으로 세운 나라를 스스로 무너뜨림). 고려와 조선의 온갖 사료에서 견훤이 반역자로 욕먹으나 삼국유사 등에선 견훤이 재평가되었다.
4. 기타
- 의외로 한국사와 깊은 관련이 있는 인물이다. 고구려에 승려 순도를 파견하여 불교를 전파하도록 하였다. 또한 부견 대에 이르러 신라가 처음으로 중국에 사신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당시 부견이 신라의 사신 위두와 나눈 대화가 《진서(秦書)》에 기록되었는데, 이 책은 지금은 실전되었으나 해당 구절은 《태평어람》과 《삼국사기》 등에 인용되어 지금까지 전해진다.[28]
- 인물을 등용할 때에는 철저하게 그 능력을 중시하는 타입이었다. 학식은 뛰어났으나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당시 선비들로부터 무시를 받았던 왕맹을 기용하여 그 능력을 확인하고는 곧 파격적인 승진을 시켜주었으며 종국에는 재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이런 면모가 확연히 드러난다. 또한 모용수와 요장과 같은 야심가들도 그 능력을 보고 기용하여 실전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 부견의 능력중심주의적인 인재철학은 그가 재위초기에 신하들과 나누었던 대화를 보더라도 알 수 있다. 부견이 신하들을 대동하고 한고조의 무덤인 패릉을 유람하던 중, 신하들에게 "유방의 일등공신이 누구인가?"라고 묻자, 신하들은 소하와 조참을 꼽았다. 그러자 부견은 진평이 비록 사람들에게 비판을 받으나 그 또한 소하와 조참 못지않은 공이 있다며 치켜세웠다.[29]
- 제법 색을 밝히는 면모가 있었는데, 궁녀와 남자들이 궁전 앞에서 집단 성관계를 갖게 하고 대신들한테 그 모습을 지켜보게 했다는 일화도 있다(...)[30]
또한 재미있게도 유난히 선비족 출신 사람들을 총애했다. 부견은 자신에게 항복해 온 모용수의 부인인 단씨를 총애하여 함께 가마를 타고 후정을 노닐다가 신하였던 조정의 반대에 부딪혀 그만두기도 하였다.
또한 죽은 전연의 황제 모용준에게는 청하공주라는 딸과 모용충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모두 외모가 수려한 미소녀, 미소년들이었다. 부견은 전연을 정복한 후에 청하공주와 모용충을 모두 자신의 후궁에 들여와 총애를 퍼부어댔는데 당시 부견의 후궁들도 미치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장안에는 "한마리 암새와 한마리 수새가 쌍을 지어 궁궐에 날아드네."라는 노래가 퍼지기도 하였다. 결국 왕맹이 이 문제를 가지고 부견을 심하게 다그치자 그때서야 마지못해 모용충만을 후궁 밖으로 내보냈다.[31]
먼 훗날, 장성한 모용충은 부견이 패망할 무렵 반란을 일으켜 그가 머물던 장안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분노한 부견이 직접 성루 위에 올라 그와 욕설을 주고받으며 싸우다가 마지막에는 모용충의 진영에 비단금포를 보내며 "내가 너에게 베푼 은혜가 얼마나 큰지 잊었느냐"고 꾸짖었다. 그러자 모용충 또한 지지 않고 "나는 이미 천하를 마음에 두고 있는데 금포 한 벌의 작은 은혜를 돌아보겠느냐"라며 응수하며 순순히 항복할 것을 권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부견은 왕맹과 아우 부융의 말을 따르지 않고 모용선비의 세력을 방치했던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또한 죽은 전연의 황제 모용준에게는 청하공주라는 딸과 모용충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모두 외모가 수려한 미소녀, 미소년들이었다. 부견은 전연을 정복한 후에 청하공주와 모용충을 모두 자신의 후궁에 들여와 총애를 퍼부어댔는데 당시 부견의 후궁들도 미치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장안에는 "한마리 암새와 한마리 수새가 쌍을 지어 궁궐에 날아드네."라는 노래가 퍼지기도 하였다. 결국 왕맹이 이 문제를 가지고 부견을 심하게 다그치자 그때서야 마지못해 모용충만을 후궁 밖으로 내보냈다.[31]
먼 훗날, 장성한 모용충은 부견이 패망할 무렵 반란을 일으켜 그가 머물던 장안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분노한 부견이 직접 성루 위에 올라 그와 욕설을 주고받으며 싸우다가 마지막에는 모용충의 진영에 비단금포를 보내며 "내가 너에게 베푼 은혜가 얼마나 큰지 잊었느냐"고 꾸짖었다. 그러자 모용충 또한 지지 않고 "나는 이미 천하를 마음에 두고 있는데 금포 한 벌의 작은 은혜를 돌아보겠느냐"라며 응수하며 순순히 항복할 것을 권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부견은 왕맹과 아우 부융의 말을 따르지 않고 모용선비의 세력을 방치했던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 사서를 읽다 어머니가 사통한 기록을 보고 화를 냈다는 기록이 있다.
5. 대중매체에서의 모습
고우영 십팔사략 8권 남북조시대에 등장한다. 작중에서는 오호십육국 시대의 군주 중 후조의 석륵과 석호와 더불어 그나마 비중있게 등장하는 편이다.[32] 사실 이들보다 중국사에 더 큰 발자취를 남긴 북위와 탁발선비의 이야기가 송두리째 짤렸음을 감안하면 상당한 특혜를 입은 셈. 카이저 콧수염을 기른 푸짐한 인상의 아저씨로 등장하며, 처음에는 현명한 명군이었으나 왕맹이 죽은 후 자만해져서 암군으로 전락하여 부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동진을 정벌하러 갔다가 참패하여 몰락하는 모습으로 묘사된다.[33]
홍콩의 소설가 황역이 오호십육국 시대를 배경으로 쓴 소설 《변황전설(邊荒傳說)》에서도 초반부에 비수대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에 부견이 나름 비중있는 인물로 등장한다. 만화가 황옥랑 등이 그림을 담당한 《변황전설》 만화판에서는 근육질의 엄청난 거구로 등장하는데 세기말 패왕스런 카리스마 넘치는 외모로 묘사된다. 대머리와 수염이 특히 인상적.
일본에서는 2008년, 부견과 왕맹을 주인공으로 한 《왕도의 나무(王道の樹)》라는 소설이 출간되었다. 이후에는 2012년, 《부견과 왕맹 : 불세출의 명군과 와룡의 군사(苻堅と王猛: 不世出の名君と臥竜の軍師)》라는 제목의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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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시호는 부견의 아들인 부비가 붙인 것이다. 부견을 살해한 장본인인 후진의 요장은 부견의 시호를 장렬천왕(壯烈天王)이라 하였고, 부견의 옛 장수였던 후량의 여광은 문소황제(文昭皇帝)라 하였다.[2] 《자치통감》과 《십육국춘추》 참조.[3] 《자치통감》과 《십육국춘추》 참조.[4] 부건의 아우로, 지략이 뛰어나 형의 참모이자 오른팔로 활약하며 큰 총애를 받았다. 부웅이 젊은 나이로 요절하자, 부건은 "천하는 내가 대업을 이루기를 원치 않는 모양이다!"라고 절규하기까지 했다.[5] 저족의 추장. 유요를 섬겼지만, 석륵이 전조를 멸망시키자 후조에 귀부했다. 그의 휘하 장수 중 관내후로 임명받은 사람이 2천 명 남짓일 정도로 엄청난 군공을 세웠다. 후조 멸망 이후 동진에 귀부하는 척하며 많은 한인들을 휘하로 받아들이고 352년 황제를 칭했다.[6] 성씨를 바꾼 것은 당시에 나돌던 참언을 따른 것이었다.[7] 오호 십육국 시대에 들어선 이민족 왕조들이 황제라는 칭호 대신에 이 칭호를 자주 사용했다. 이름만 천왕일 뿐이지, 예법이나 시호, 묘호 등도 모두 중국 황제의 예를 따랐다.[8] 부견은 이 일을 매우 특별하게 여겼는지, 황제가 된 후에 그 누구에게도 용양 장군의 작위를 내리지 않다가, 훗날 자신이 총애했던 강족 출신의 측근인 요장에게만 특별히 이를 내려주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요장은 훗날 부견을 배신하고 그 목숨까지 앗아가게 된다.[9] 실제로 왕맹은 경력도, 빽도 없는 식객 신세였음에도 부견이 즉위하자마자 중서시랑에 임명되어 국가 기밀을 관장하는 등 사실상 황제의 최측근으로 활약했다. 왕맹은 이후로 승진을 거듭하여 지위가 승상에 이른다.[10] 하지만 부견 측에서 부생을 의도적으로 폄하했을 가능성 또한 높다. 조일의 '낙양가람기' 에 따르면, 부생은 용맹했지만 어질며 살인을 좋아하지 않았고, 현왕을 자처한 부견 측 사가들이 멋대로 폭군으로 몰았다라 말한다. 각종 잔혹한 행위를 일삼았다는 《진서》와는 반대의 시각.[11] 요양의 아우였던 요장이 이때 전진에 항복하였는데, 그는 부견의 측근이 되어 맹활약하였으나 훗날에 부견이 비수대전에서 참패하여 세력이 와해된 틈을 타서 강족의 세력을 규합하고 후진을 건국하였다.[12] 부법의 아들 중 동해공에 봉해진 부양은 훗날 장성하여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며 모반을 꾀했다가 발각되어 부견의 앞으로 끌려왔다. 부견이 모반한 이유를 묻자, 부양은 아버지를 죽인 원수와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어서 그랬다고 답했다. 부견은 그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더니 그건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한 후 그를 죽이지 않고 유배형에 처했다.[13] 시평에 파견된 왕맹이 하루는 관리를 매질해서 죽였는데, 이에 대한 상소가 들어오자 부견은 그를 압송하여 어째서 사람들을 덕행으로 교화하지 않고 무참히 죽일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왕맹은 법을 어지럽히는 자를 벌한 것이 죄가 된다면 기꺼이 벌을 받겠으나, 부견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는 없겠다고 답하였다. 이에 부견은 감탄하며 왕맹을 사면하였다.[14] 정확히는, 번세가 저자거리에서 왕맹에게 욕을 퍼붓자, 부견은 일부러 번세가 보는 앞에서 그가 사위감으로 점찍어두었던 사람을 자신의 부마로 삼겠다고 말했다. 이에 번세가 반발을 표하자, 왕맹이 "어찌 감히 천자와 혼사 문제를 다툴 수 있는가?"라고 따졌는데, 격분한 번세가 부견의 면전에서 왕맹을 폭행하려 하고 욕을 퍼붓는 무례한 행동을 하자 끌어내 목을 베게 한 것이다.[15] 부견도 친족을 희생시키는 일은 꺼림칙했는지, 이를 말리기 위해 사람을 보냈으나, 왕맹은 부견의 사자가 도착하기도 전에 강덕을 죽여버렸다. 그럼에도 부견은 여전히 왕맹을 신뢰하여 벌하지 않았다.[16] 그나마도 처음에는 한 달에 3번이나 들르던 것을 나중에 줄인 것이다.[17] 이 3차 북벌의 실패는 환온에게 뼈아픈 타격이 되었고, 제위를 찬탈하려던 환온의 계획도 물거품이 된다.[18] 부견의 조언자였던 승려 도안은 본래 양양에 살았는데, 이곳이 정복되면서 부견의 휘하에 들어왔다고 한다.[19] 장자는 부견 휘하 최고의 맹장이었던 등강과 맞먹을만한 용장이었는데, 이를 계기로 부견의 심복이 되어 늘 최전선에서 활약하였다. 때문에 전진 사람들은 장자와 부견을 "만인지적"이라 칭했다 한다.[20] 본래 유위진은 360년경에 전진의 휘하에 들어간 바 있었다.[21] 《위서》에서는 탁발십익건이 부견과 끝까지 항전하려다 아들에게 배신 당해 곧바로 살해당했다고 하였으나, 《진서》 부견재기에서는 탁발십익건이 죽지 않고 장안으로 끌려와 포로 생활을 하면서 태학에 들어가 교육을 받았다고 전한다. 《위서》의 기록은 아마도 북위 황실의 시조인 탁발십익건이 죽지도 않고 적국의 포로가 되어 생을 마감했다는 치욕을 은폐하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22] 물론 저족 출신으로도 권세를 쥔 사람은 많았다. 부견이 왕맹 다음으로 신뢰했던 참모는 바로 그의 아우였던 부융이었으며, 부견의 즉위 과정에서 크게 활약한 공신 여파루와 그의 아들인 명장 여광도 저족 출신이었다. 부견으로부터 작위를 받아 지방관으로 파견되었던 이들도 대체로 부씨 일족들이었다.[23] 사안의 아우이다.[24] 모용수는 전연의 마지막 황제인 모용위와 그 측근 모용평에게 의심을 받고 부견에게 망명해왔다. 이때에 왕맹은 모용수가 능력이 뛰어날 뿐 아니라 남의 밑에 있을 인물이 아니라고 판단하여 그를 제거할 것을 건의했으나, 부견은 모용수와 같은 영웅호걸을 죽일 수 없다며 그의 목숨을 구해주었다.[25] 이전 버전의 문서에서는 "서연에게 장안을 털리고 도주하다가 후진의 요장에게 사로잡혔다. 과거에 신하이던 요장은 마음 편하게 그냥 전진 황제나 내놓으면 편히 살게 해준다는 요구를 하지만 마지막 자존심으로 부견은 거절했다. 그래서 요장은 코웃음치면서 이젠 그 때와 다른데 이런 고집을 부린다고 아까워할 줄 아느냐며 졸병 하나를 불러왔다. 그리고 비웃으면서 이 졸병은 일자무식에 백정 일도 하던 이였으니 그저 멍청한 자존심이나 내세우는 네놈 목이나 벨 때 딱이라며 그 졸병에게 목을 베라고 명령했다."라는 서술이 있으나, 출처를 알 수 없는 이야기이다.[26] 특히 부견은 선비족(특히 모용선비)과 강족을 비롯한 여러 이민족들을 수도인 장안 인근으로 이주시키면서도, 자신의 종족인 저족은 오히려 지방으로 파견하였는데 이는 꽤나 독특한 정책이었다.[27] 그러나 북위는 534년 북제와 북주로 나뉘었고 577년에 북주가 재통합했다.[28] 그 외에 부견의 사촌인 부락(苻洛)이 반역을 꾀하고자 여러 이민족들에게 군사를 청하였는데 그 명단 중에 고구려와 백제뿐 아니라 신라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은 모두 무시당했다.[29] 진평은 소하나 조참과는 달리, 대놓고 탐욕스러운 모습을 자주 보여서 두 사람에 비하면 세간의 평가는 낮았으나 그 능력 만큼은 모두가 인정하는 뛰어난 모사였다. 부견은 이런 발언을 통해 자신이 철저하게 능력을 위주로 인재를 채용하겠다는 뜻을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선언하려 한 듯하다.[30] 사실 중국의 남북조 시대에 남조의 궁정에서는 여자가 나체로 춤을 추는 것이 유행이었으며, 남조 송나라의 산음공주가 30명의 남자 애인들을 거느릴 만큼 성문화가 지금보다 훨씬 개방적이었다.#[31] 부견이 미소년을 총애하는 모습이 의아해보일 수 있으나, 당시 중국은 남색 문화가 유행하던 시절이었다.[32] 전조의 유연과 유총도 등장하기는 하지만, 비중은 꽤 적은 편이다.[33] 다만 이 작품에서는 부견의 아우인 부융의 이름을 부용으로 잘못 표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