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스타파 만수르
1. 생애[3]
1.1. 선수 생활
만수르의 축구 인생은 본인의 회고에 의하면 억지로 시작되었다. 학교에서 두 팀이 시합을 하는데 골키퍼가 부족했고 학교 선생님이 만수르를 골키퍼에 넣어 버렸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만수르는 나름 잘할 자신이 있었고 그 자신감은 실제가 되었다. 그렇게 학교 대표로 축구를 하게 된 만수르는 알 아흘리 SC에 입단했고 본격적으로 축구선수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러다 이집트가 월드컵에 출전하게 되었고 만수르는 영연방 팔레스타인과의 지역예선에서 2경기에 모두 출전했다. 영연방 팔레스타인을 손쉽게 제압한 이집트 대표팀은 헬완호를 타고 나흘에 걸쳐 이탈리아 나폴리에 갔다.
이집트 대표팀의 월드컵 첫 상대는 헝가리였고 만수르는 나름 해볼만하겠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만수르의 회고에 의하면 이탈리아 출신 주심 리날도 발라시나는 2대2로 팽팽히 맞서던 상황에서 파우지의 드리블 돌파 골을 오프사이드로 무효화시켰다. 게다가 4번째 골인 톨디 게저의 골 상황에선 만수르가 헝가리의 크로스를 끊었음에도 센터 포워드 텔레키 팔은 무릎으로 만수르의 가슴을 가격하고 팔꿈치로 코뼈를 부러뜨렸다고 한다. 그것도 모자라 만수르를 골라인 바깥으로 밀어버렸는데도 발라시나 주심은 헝가리의 골을 선언했다. 그런 편파판정으로 인해 결국 이집트는 헝가리에 2대4로 분패했고 발라시나를 포함한 심판진들은 관중들에 엄청난 야유와 욕설 세례를 들었다.
만수르는 월드컵 이후 대표팀 감독이던 제임스 맥레어에 도움으로 조던 힐 트레이닝 대학에 체육 교육학 학위를 따기 위해 입학했다.[4] 그런 도중에 1936년 올림픽에도 참가했지만 이집트는 1라운드에서 오스트리아에 1대3으로 패했다.
1937년에는 스코틀랜드의 퀸즈 파크에 입단하게 되었고 2시즌 동안 49경기의 출장수를 기록했다. 만수르가 퀸즈 파크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친 경기는 레인저스 FC를 상대로 한 글래스고 컵 4강전이었다. 여기서 그는 부상을 입었음에도 레인저스의 페널티 킥을 막아내었고 연장 혈투 끝에 퀸즈 파크는 패했지만 만수르의 플레이는 깊은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2년간의 활약을 본 셀틱은 만수르에게 5천 파운드의 돈과 함께 프로 계약을 제의했다. 하지만 축구로 돈을 버는 것에 큰 흥미가 없던 만수르는 그 제안을 거절했고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이집트로 돌아갔다.
1.2. 이후
만수르는 이후 친정팀 알 아흘리에서 감독으로 활동했고 내각의 각료로 정치계에 발을 들이기도 했다
2. 플레이 스타일 & 평가
퀸즈 파크 클럽의 공식 역사서의 저자 봅 크램시는 만수르를 좋은 골키퍼였으며 많은 인상적인 시합을 남겼다고 평했다.
3. 뒷이야기
- 만수르는 2002년의 BBC 인터뷰에서 1958년 월드컵 당시 브라질 대표팀에 대한 평을 남겼다. 그 팀이 자기가 본 최고의 팀이었으며 펠레는 그 때 팀의 중심이 아니었고 가린샤와 지지가 그 위대한 팀의 최고였다고 평했다.
[1]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2] 출처: BBC 인터뷰, qpfc, 위키피디아, 11v11[3] 출처: BBC 인터뷰, qpfc, 위키피디아, 11v11[4] 맥레어는 무함마드 라티프도 레인저스 FC에 입단시키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