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린샤

 

'''가린샤의 수상 이력'''

'''둘러보기 틀 모음'''
'''개인 수상'''
'''FIFA 월드컵 골든볼 1962'''
'''FIFA 월드컵 골든슈 1962'''[24]


'''베스트팀'''




'''FIFA 월드컵 우승 멤버'''
'''1958'''
'''1962'''

'''브라질의 前 축구선수'''
<color=#373a3c><colbgcolor=#fff72a> ''' 예명 '''
'''가힌샤[1]
Garrincha'''

<color=#373a3c> ''' 본명 '''
마누에우 프란시스쿠 두스산투스
(Manuel Francisco dos Santos)
<color=#373a3c> ''' 출생 '''
1933년 10월 28일 /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color=#373a3c> ''' 사망 '''
1983년 1월 20일 (향년 49세)
<color=#373a3c> ''' 국적 '''
[image] 브라질
<color=#373a3c> ''' 신체 '''
169cm
<color=#373a3c> ''' 포지션 '''
윙어
<color=#373a3c> ''' 소속팀 '''
'''보타포구 FR (1953~1965)'''
SC 코린치안스 (1966)
포르투게자 카리올라 (1967)
아틀레치쿠 주니오르 (1968)
CR 플라멩구 (1968~1969)
올라리아 AA (1972)
<color=#373a3c> ''' 국가대표 '''
50경기 12골 (브라질 / 1955~1966)
1. 개요
2. 생애
3. 선수 경력
3.1. 클럽 경력
4. 플레이 스타일
5. 평가
6. 기록
6.1. 대회 기록
6.2. 개인 수상
7. 사생활
8. 여담
9. 가린샤에 대한 말, 말,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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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FIFA - 가린샤 영상'''

브라질의 전 축구선수. 본명은 마누에우 프란시스쿠 두스 산투스(Manuel Francisco dos Santos). 별명인 '''가린샤'''(Garrincha)는 '작은 '란 뜻이다.[2] 현역 시절 포지션은 아웃사이드 라이트 혹은 오른쪽 윙어.
펠레, 니우통 산투스, 지우마르 등과 함께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에 두 차례의 월드컵 타이틀을 선사했으며 특히 1962년 월드컵에서는 골든볼과 골든슈, 우승까지 모두 차지하는 전설적인 활약상을 남겼다. 펠레와 함께 브라질 축구 최전성기 시절을 상징하는 인물 중 하나.

2. 생애


가린샤는 리우데자네이루슬럼가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알코올 의존증자였고, 가린샤는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해서 문맹이었다.[3] 게다가 어릴 적 소아마비를 겪었기 때문에 '''다리가 기형'''이었다. 오른쪽 다리는 안으로 굽고, 왼쪽 다리는 밖으로 굽은데다 오른쪽 다리보다 '''6cm 짧았다'''. 오죽 장애가 심했으면 의사가 보조장치를 달지 않으면 평생 휠체어 신세라고 진단했다. 당시 외과의사가 무료로 수술을 해주어서 이정도다. 보험의 후유장애 기준을 보면 '한 다리가 5cm 이상 짧아진 때'를 30%의 장애로 본다. 그만큼 장애가 심했다는 것이다.
[image]
<color=#373a3c> '''가린샤의 다리[4]'''
그랬던 가린샤가 훗날 당대 최고의 축구 선수, 더구나 당대 세계 최고의 드리블러라는 칭호까지 획득했다.[5]
가린샤가 축구를 하면서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악마의 드리블을 하는 절름발이가 있다."는 식의 소문이 돌았지만 사람들은 반신반의했다.

3. 선수 경력



3.1. 클럽 경력


그가 보타포구에 입단 테스트를 받으러 왔을때 그는 바로 첫 터치로 내 다리 사이에 공을 넣어 지나갔다. 많은 사람들은 내가 불쾌했을 거라는 생각을 했지만 그들은 잘못 짚은 것이었다. 난 거기 있던 임원들에게 그와 계약해야 한다고 말했고 다행히도 그들은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니우통 산투스

가린샤가 프로 구단에 입단하고 싶어할 때 보타포구의 감독을 쫓아다니며 엄청나게 귀찮게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다리가 휘어있는데다 8살짜리 지능을 가진 사람[6]이 프로 축구단에서 뭔가를 할 수 있을거라는 생각은 아마 누구라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귀찮아진 감독은 팀의 주전 레프트 백을 보내서 가린샤를 테스트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 주전 레프트 백은 단순한 주전이 아니라 세계 축구 역사에서 손꼽히는 전설의 왼쪽 풀백 '''니우통 산투스'''였다.[7] 2010년대를 기준으로 따지자면, 입단 테스트의 상대로 마르셀루다비드 알라바 정도 되는 월드 클래스 선수를 다리가 휜 장애인 상대로 붙여준 격이다.
다시 말해 테스트는 명분이고 "저 절름발이 녀석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멀리 내쫓아 버려라"는 뜻으로 내보낸 것. 하지만 가린샤를 압도적인 차이로 이기라고 내보냈던 산투스는 오히려 가린샤에게 알까기를 당하는 등, 처참하게 패배했다. 다만 산투스는 이런 굴욕을 당하자 오히려 적극적으로 가린샤를 영입하라고 프런트에 역설했다. '''이 친구와 같은 팀에서 뛰면 그런 굴욕을 또 당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서였다. 농담으로 하는 소리가 아니라 실제로 경기가 끝나고 코치에게 "나는 저 선수를 다른 팀 소속으로 맞대결하고 싶지 않으니까 꼭 영입해달라"고 요구를 했다.
결국 가린샤는 1953년 보타포구 FR과 계약했고, 가린샤는 1957년 주립 리그에서 우승한 것을 시작으로 펠레산투스 FC에 입단한 뒤로 둘은 그야말로 라이벌로서 경쟁을 펼쳤 -[8]다.
1962년 가린샤는 자신의 최전성기를 맞이하는데 1962 칠레 월드컵에서 우승을 이끈 활약을 바탕으로 주립 리그, 리우-상파울루 토너먼트에서 우승을 거두는 등 클럽 축구 역사상 최초로 6관왕을 이끈다. 이후 1965년까지 581경기 232골을 기록했고, 이후 보타포구 FR을 떠나 SC 코린치안스, 포르투게자 카리올라,아틀레치쿠 주니오르,CR 플라멩구에서 뛰다가 1972년 올라리아 AA에서 은퇴했다.

3.2. 국가대표 경력


1955년에 국가대표에 데뷔한 가린샤는 펠레, 니우통 산투스, 마리우 자갈루와 함께 1958 스웨덴 월드컵에 출전하는데 이 대회에서 가린샤는 펠레와 훌륭한 호흡을 보여 결승전에서 닐스 리드홀름, 군나르 그렌, 쿠르트 함린이 이끄는 스웨덴을 상대로 동점골의 기점 역할[9]을 하고 바바의 역전골을 직접 어시스트하면서 5:2 승리를 이끌어 우승을 차지한다.
이후 1962 칠레 월드컵에도 참가했는데 4년전 우승 멤버들이 거의 그대로 유지되었고 브라질은 우승후보로 꼽혔다. 하지만 조별리그 두 번째 경기 체코슬로바키아전에서 펠레가 부상을 입어 아웃되고 무승부를 거두는 바람에, 사람들은 브라질이 조별리그에서 탈락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표했다. 하지만 조별리그 세 번째 경기 스페인전에서 펠레를 대신하게 된 아마리우두가 멀티골을 터뜨리며 2:1 역전승을 거두어 브라질은 조별리그를 2승 1무로 통과한다. 이 스페인전에서 가린샤는 특유의 측면돌파 후 크로스로 아마리우두의 역전골을 어시스트했다.
8강 잉글랜드 전에서[10] 가린샤는 코너킥 상황에서 헤더로 선제골을 기록, 강력한 프리킥 슈팅으로 만들어낸 세컨볼을 바바가 골로 연결하면서 두 번째 골의 기점이 되었으며, 이후 엄청난 오른발 중거리슛으로 쐐기골을 넣으며 3:1 승리를 이끌었다.
4강 칠레전에서는 페널티 에어리어 앞으로 굴러온 세컨볼을 벼락같은 왼발슛으로 연결하며 선제골을 기록하고, 코너킥 상황에서 또 헤딩골을 기록하며, 후반전 초반에 코너킥으로 바바의 결승골을 어시스트하는 등 2골 1도움을 기록하며 4:2 승리 결승 진출을 이끌었다. 그러나 후반전 38분에 사건이 일어나는데 칠레의 수비수가 가린샤를 따라다니며 심판이 안보는 사이 가린샤에게 파울을 날렸고 가린샤는 화를 참지 못하고 상대 수비수를 발로 걷어차다가 심판에게 걸려 퇴장당한 것이다.
다행히 징계가 풀려서 결승전에 출전할 수 있었고 요제프 마소푸스트가 이끄는 체코슬로바키아를 3:1로 꺾으며 우승을 차지하며 브라질은 FIFA 월드컵 2연패를 달성한다. 이때 가린샤의 활약을 요약하자면 '''1962년 칠레 월드컵 우승 + 골든볼 + 골든슈'''[11]
이후 1966 잉글랜드 월드컵에도 출전했으나 이때 가린샤는 이미 33살의 노장이었기에 기량이 쇠퇴하기 시작했기에 큰 영향력을 끼치진 못했다. 펠레 역시도 상대팀의 매우 거친 파울들로 부상을 겪으며 컨디션이 최악이었다. 일단 불가리아와의 경기에선 펠레와 가린샤가 골을 넣으며 2:0 승리를 거두었으나 펠레가 부상으로 빠지고 결국 헝가리와의 경기에서 토스탕이 1골을 넣는데 그치며 결국 3:1 패배했으며, 조별리그 마지막에선 펠레가 복귀했지만 가린샤가 경기를 뛰지 못했고 에우제비우가 이끄는 포르투갈에게 3:1로 패해 조별리그에서 탈락하고 만다.[12] 이후 가린샤는 국가대표에서 은퇴했다.
여담으로, 이 시기 브라질 국대는 가린샤와 펠레가 동시에 뛴 경기에선 '''불패'''였다.[13]

4. 플레이 스타일



브라질의 월드컵 2연패 과정에서 수훈갑이었던 선수답게 엄청난 재능을 자랑하던 축구선수였다. 가린샤의 피지컬은 좋지 않았다. 170cm도 되지 않는 단신이었고, 양쪽 다리의 길이가 다른 기형의 몸을 가지고 있었다. 비쩍 마른 몸을 가지고 있었으며, 스피드 역시 돋보이는 수준은 아니었다. 축구선수로서 갖춰야 할 피지컬적인 장점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린샤가 이런 부분들을 극복하지 못했다면 그냥 별 볼 일 없는 축구선수 A 정도로 평가받으며 선수 생활을 마감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잊혀졌는가? 아니다. 가린샤가 선수생활을 하던 시절에서 무려 60여년이 지났는데, 그는 지금까지도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즉, 그가 엄청난 재능과 노력을 바탕으로 단점을 극복하는 데에 성공했다는 말이다.
신체적인 면에서는 장점이 없었으나, 기술적인 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선수였다. 많은 장점들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중에서도 독보적이라 할 만한 부분이 있었는데, 바로 민첩한 몸놀림이다. 이 민첩성을 기반으로 다양한 속임 동작을 사용했는데, 가린샤의 크고 작은 속임 동작들은 상대 수비수의 균형을 깨기에 그만이었다. 때문에 가린샤는 수비수와 1:1로 마주본 상태에서 돌파해내는 능력이 아주 뛰어났다. 수비수 몇 명을 계속해서 제쳐내는 플레이에도 능했다. 가린샤의 한쪽 다리가 짧다는 점이 장점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그 다리 길이의 차이가 상대 선수들에게 있어서는 가린샤를 상대하기 더욱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선수들과 구별되는 독특한 리듬을 타면서, 그것도 양발을 무리없이 사용하며 드리블하니 수비수 입장에서는 그 패턴을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가린샤는 수비수를 '농락'하는 데에 있어서 누구보다도 뛰어난 능력을 가진 선수였다. 가린샤의 별명인 'Alegria do povo'는 포르투갈어로 '사람들의 즐거움'이라는 뜻인데, 이는 가린샤가 매번 보여주는 트릭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상대 선수를 제치며 느끼는 희열'은 브라질 축구계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것 중 하나이다. 브라질 축구를 다룬 여러 자료에서 볼 수 있는 '징가'라는 단어가 가리키는 것이 바로 이것인데. 이를 누구보다도 잘 보여준 선수가 다름아닌 가린샤였다.
[image]
특히 수비수와 마주 본 상황에서의 이런 드리블은 가린샤만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역사상 최고로도 거론되는 드리블 능력이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사실 패스에도 아주 능했다. 가린샤는 측면에서 중앙의 선수들과 연계하여 플레이메이킹을 하는 능력이 아주 뛰어났다. '크로스와 패스 등으로 센터 포워드에게 찬스 제공'이라는 아웃사이드 라이트의 전통적 임무에도 훌륭한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상대 선수를 제치고 필요한 공간만 딱 만들어서 간결하게 크로스를 제공하는 플레이야말로 가린샤의 전매특허이다.
킥 능력 또한 뛰어났다. 측면에서 뛰는 클래식한 스타일의 윙어라서 중앙에서 슈팅을 때릴 찬스가 많지는 않았지만, 혹여 잠시 중앙에 머무르다 찬스가 찾아오면 지체 없이 냅다 슛을 때려갈겨 골망을 갈랐다. 골대와의 거리는 상관없었다. 가린샤는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발목 힘의 소유자라서 슈팅의 세기가 엄청났기 때문이다. 즉, 박스 안에서나 박스 밖에서나 위협적인 슈팅을 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골을 이런 상황에서만 넣었는데, 보타포구 FR에서만 200골이 넘는 골을 득점했다. 놀라운 기록이다. 코너킥을 주로 본인이 처리했으며 프리킥도 잘 찼다. 1950년대 후반~1960년대 중반까지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프리킥은 주로 지지, 펠레, 가린샤 이 3명이 도맡았다. 셋 다 월드컵에서 프리킥 골을 득점한 바 있다.
뛰어난 활동량과 수비능력도 가지고 있었다. 가린샤의 플레이 모습을 보면 풀백과 협력 수비하는 장면, 상대 수비수들을 압박해서 공을 빼앗아내는 장면 등 당시의 윙어들에게서 보기 힘든 수비적인 재능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외에 크로스를 헤딩으로 처리하는 능력도 가지고 있어서 꽤 많은 헤딩 득점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천부적인 축구 재능 덕에 못하는 게 없는 선수였다.
경기 중 여러 가지 기행을 저지르기도 했던 선수였다. 수비진과 골키퍼를 제끼고 빈골대 앞에서 가만히 기다리다 수비진이 달려오자 그를 다시 제끼고 골을 넣기도 했고 2골이나 넣으며 상대 수비진을 부수다가도 상대 수비수가 알짱거리는게 짜증나서 그를 발로 찼다가 퇴장 당하는 일[14]도 있었다. 1958 스웨덴 월드컵을 제패한 후 가린샤에게 우승 소감을 묻자 "여섯 경기만 이기고도 우승이라니, 이상해요."라고 말했다.[15]

5. 평가


장애를 극복한 인간 승리의 표상이자, 축구선수로서 일생일대의 영광을 누렸고, 반면 불우했던 출생과 유소년기를 반영하듯 씁쓸한 최후를 맞이하는 등 축구계에서도 보기 드문 파란만장한 선수. 또한 세계 최고의 드리블러로서 온갖 캐사기 유닛이 들끓는 브라질에서도 수십 년째 '가린샤의 재림'이란 칭호를 받은 선수가 거의 없다는 점이 그 위대함을 말해준다.[16][17]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도 그보다 확실하게 높은 평가를 받는 브라질 선수는 브라질을 넘어 축구계의 GOAT인 펠레뿐이다. 역대 선수들 랭킹에서 TOP 10위 안에는 거의 고정으로 들어가는 멤버들이자 역대 브라질 2티어급 선수들인 지쿠, 호마리우, 호나우두를 가린샤와 비교해도 확실하게 낫다고 할 수 없다.[18]
다만 어떤 면에선 저평가 되는 선수인데, 월드컵 2연패에 그중에 칠레 월드컵에선 득점왕+MVP+우승이라는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의 마라도나 못지 않는 활약과 공헌도를 올렸지만 당대의 브라질 대표팀의 수준에 묻혀 역대 최고선수 떡밥에 끼질 못한다. 남미에서는 펠레마라도나의 경지에 이른 선수로 추앙받지만 타 지역에서는 펠레, 디에고 마라도나 다음엔 요한 크루이프 등 유럽 선수들을 떠올린다. 하지만 가린샤는 마라도나에 꿀리지 않을 정도의 실력을 갖고 있었다고 평가받으며 국대 커리어는 마라도나보다 좋다. 당시 펠레가 무너지며 흔들리던 1962 칠레 월드컵 우승을 위한 브라질의 대답이라고 할정도로 펠레에 못지않은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1962 칠레 월드컵에선 펠레가 부상을 입어 벤치 신세를 지는 바람에 사실상 가린샤가 우승시킨 것이나 다름 없다. 여담으로 펠레는 이 월드컵을 모티브로 브라질 월드컵 준결승 직전에 네이마르 없이도 브라질이 우승할 수 있다는 말을 했다.[19] 물론 실상은...

6. 기록



6.1. 대회 기록


  • 보타포구 FR
    •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1957, 1961, 1962
    • 토르네이우 리우-상파울루: 1962, 1964

6.2. 개인 수상


  • FIFA 월드컵 골든볼: 1962
  • FIFA 월드컵 골든슈: 1962
  • FIFA 월드컵 올스타팀: 1958, 1962
  • FIFA 월드컵 역대 베스트 XI: 1994
  • 월드 사커 올해의 팀: 1962
  • 발롱도르 드림팀 2군: 2020
  • FIFA 20세기 월드팀: 1998
  • FIFA 20세기 남아메리카팀: 1998
  • IFFHS 레전드: 2016
  • 브라질 축구 명예의 전당

7. 사생활


그라운드에서의 화려한 모습과는 달리 사생활은 모범적이었다고 보긴 어려웠다.
절제 없는 성생활을 즐겼으며[20], 결혼과 이혼을 반복했고, 아내가 6명에 자녀가 '''최소한''' 14명이었다고.[21] 그리고 은퇴 후 불과 49세의 나이에 알코올 의존증으로 인한 간경화로 사망했다.
가린샤의 범국민적인 인기 때문에 가린샤의 아내들은 팜므파탈, 가린샤는 순진한 축구 영웅이라는 이미지가 있지만 사실 꼭 그렇지만도 않다. 아내들 중에서도 대표적인 악녀로 꼽히는 2번째 부인 엘자가 가린샤와 이혼한 이유는 가린샤가 그녀를 '''마구 발로 찼었기''' 때문. 지적장애인 중 이런 케이스는 꽤나 많다. 교육을 해도 폭력이 나쁘다는 것을 이해하기도 힘들어할 뿐더러, 나쁘다는 걸 간신히 알아도 정신력이 부족하여 분노를 참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일반 가정폭행범들은 상대와 자신의 신체능력을 고려해서 힘조절을 하지만 지적장애인은 자제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전력을 다해 동거인이나 보호자가 중상을 입을 때까지 폭행하는 경우도 많다. 더군다나 가린샤는 프로 축구선수이므로 체력이 매우 강하여 폭행의 강도 또한 매우 강하기에 이혼하지 않고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8. 여담


  • 한국에선 20세기만 해도 인지도가 많이 낮았고 기껏해야 펠레의 오른팔 정도 인상이었지만 오히려 21세기 들어 넷상에서 회자되며 인지도가 꽤 올라갔다. 물론 가린샤 클럽(...)처럼 애매한 용어의 주인공으로 더 유명한게 함정이지만.[22]
  • 브라질리아에 위치한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의 공식 경기장인 "이스타지우 마네 가린샤"(마네 가린샤 국립 경기장)는 바로 가린샤를 기리는 의미에서 이름을 지은 것이다. 여기서 3,4위전이 열렸는데, 벨루오리존치 대참사를 겪은 브라질 대표팀은 결국 네덜란드에게 0:3으로 패하며 4위에 그쳤다.
  • 1958년 월드컵 당시의 일화이다. 가린샤는 스웨덴에서 100달러를 주고 라디오를 샀다.[23] 곧 사소한 문제가 생겼는데 라디오에서 포르투갈어가 아닌 스웨덴어로 된 방송만 나오는 것. 당황한 가린샤는 마사지사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는데 라디오가 탐났던 마사지사는 가린샤에게 사기당했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라디오를 넘긴다면 이 일을 묻어두겠다고 약속했다. 100달러라는 비싼 가격에 산 라디오를 넘기는 것을 머뭇거리던 가린샤에게 마사지사는 브라질 국대 선수가 이국에서 사기를 당한 사실이 알려지는게 더 부끄러운 일이라고 했고, 결국 가린샤는 라디오를 마사지사에게 넘기고 말았다.
  • FIFA 20에 신규 아이콘으로 추가되었다. 축구 게임에서는 첫 출연.

9. 가린샤에 대한 말, 말, 말


많은 형제들 중의 누군가가, 쓸모없고 흉하게 생긴 새의 이름인 '가린샤'라는 이름을 그에게 지어주었다.

그가 축구를 시작했을 때, 의사들은 그에게 X표를 그었다. 소아마비에, 허기에 굶주리고, 유아 수준의 지능에, 척추는 S자로 휘고, 두 다리는 한쪽으로 휘었고, 절름발이 노새를 닮은 이 불쌍하고 비정상적인 젊은이는 절대로 운동선수가 될 수 없다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그만한 오른쪽 윙어는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다.'''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Pelé and Garrincha - '''Gods of Brazil'''

펠레와 가린샤 - '''브라질의 신들'''

BBC 다큐멘터리

[1] 원어 발음은 /ɡaˈʁĩʃɐ/로 '가힌샤'에 가깝게도 들리며 외래어 표기법상으로도 '가힌샤'로 표기된다.[2] 일설에 따르면 가린샤란 이름이 작은 새라는 뜻이 아니라 새의 이름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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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그 가린샤.
가린샤가 어렸을 때 친구들과 함께 새총으로 가린샤를 맞히는 놀이를 즐겼는데 그걸 엄청 잘해서 별명이 가린샤가 됐다나..
[3] 사실 브라질의 경우 1950년대 문맹률이 50%(!), 1990년대 초반까지도 20%대에 달했을만큼 공교육 사정이 좋진 못했다. 지금이야 사정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브라질의 교육수준은 1인당 GDP에 비하면 썩 질이 좋다고 볼 순 없는 상태. 학교별 편차도 심한 편이다.[4] 왼쪽 다리(사진에서는 오른쪽)가 짧아서 들려 있는 게 선명히 보인다.[5] 중앙에서 닥돌하여 수비를 깨부수고 득점 기회를 만들어내는 드리블 능력으로 본다면 펠레, 디에고 마라도나, 조지 베스트, 호나우두, 리오넬 메시같은 역대 최고 수준까진 아니지만 전통적으로 오른쪽에서 라인을 타며 돌파 후 크로스, 중앙으로 좁히며 드리블후 패스, 슛 등 클래식 윙어로서의 모습으로는 가린샤는 부동의 1인자다.[6] 흔히 IQ 33이라는 이야기가 있으나 이는 과장된 루머 혹은 당시 정확하지 못한 지능테스트에 의한 잘못된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 가린샤가 지적장애인이었던 것은 맞지만 IQ 33은 아니다. 당장 유튜브에만 봐도 가린샤가 멀쩡하게 인터뷰를 하는 영상이 버젓이 있다. 진짜로 그 정도 IQ를 갖고 있었다면, 인터뷰는 커녕 제대로 의사소통도 불가능하다. 만약 8살 아이 정도의 지능이었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아마도 오늘날의 기준으로 지적장애 3급 정도였을 가능성(즉 IQ 50~70 정도)이 훨씬 높다. 일단 IQ 33이라면 지적장애 1급이므로 일반적으로 '지능'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자세한 것은 여기를 참조하자.[7] 니우통 산투스는 월드컵 4회 출전(1950, 1954, 1958, 1962)하면서 2회(1958, 1962)를 우승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참고로 월드컵에서 2회 우승한 선수가 축구 전체 역사에서 딱 20명밖에 안 된다. 브라질 올타임 레전드를 꼽으면 반드시 들어갈 선수로 그 호베르투 카를루스보다 위면 위였지, 결코 아래가 아니다. 남미 올타임 베스트까지는 거의 확정이고 뽑는 사람에 따라서는 세계 올타임 베스트에도 충분히 넣을 만한 선수다.[8] 현재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유벤투스 FC로 이적했기 때문에 해당되지 않는다.[9] 가린샤의 순간적인 측면 돌파 후 크로스가 펠레의 발에 맞아 살짝 굴절되고 쇄도하던 바바가 골을 넣었다.[10] 경기 초반에 웬 한 마리가 경기장에 난입해 경기가 중단되고, 잉글랜드의 지미 그리브스 선수가 네 발로 기어서 개에게 친근하게 다가가서 유인했다가 단숨에 낚아채서 보안 담당자들에게 넘기는 코믹한 장면이 펼쳐지기도 했다. 이 장면에 가린샤는 감명받아서 경기장에 난입한 개를 애완동물로 삼아 데려갔다고한다.[11] FIFA 월드컵 역사상 단일 대회에서 우승, 골든볼, 골든슈를 모두 거머쥔 선수는 가린샤, 마리오 켐페스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 파올로 로시 (1982 스페인 월드컵) 뿐이다.[12] 이때 에우제비우는 2골을 넣으며 브라질을 침몰시켰다.[13] 가린샤가 뛰었던 마지막 경기가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헝가리전이었고 거기서 패배한 게 가린샤의 유일한 A매치 패배기록이다. 펠레는 이전 경기였던 불가리아전에서 부상으로 아웃됐고 포르투갈전에 억지로 복귀했지만 이때는 가린샤가 경기를 뛰지 않아서 결국 둘이 함께 뛴 경기들은 불패로 남게되었다.[14] 그게 바로 1962 칠레 월드컵 4강전 경기였다. 상대는 개최국 칠레. 후반 38분에 칠레 수비수를 뒤에서 발로 차버렸고 퇴장당한다. 하지만 칠레 수비수들의 거칠었던 수비가 인정되었고 결승 상대국 체코슬로바키아의 가린샤 퇴장 철회 신청을 FIFA가 승인하여 가린샤는 결승에서 뛸 수 있었다. 이미 조별 예선에서 브라질을 만난 적이 있어서 브라질의 강함을 알고 있었겠지만 그들은 정정당당한 승부를 선택한 것이다. 게다가 당시 체코슬로바키아는 그 조별 예선 경기에서도 경기 도중 부상당한 펠레를 위해 매너 게임을 펼친 적도 있다.[15] 실제로 32국이 출전하는 2018년 러시아 월드컵도 한 팀이 우승까지 겪어야 할 경기 수는 고작 7경기(조별리그 3경기, 토너먼트 4경기) 뿐이다. 물론 본선에 출전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수많은 예선경기는 논외.[16] 1970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전경기 득점과 우승을 동시에 거머쥔 레전드 윙어 자이르지뉴와 역시 동시대에 왼쪽 측면 공격수와 공격형 미드필더를 보았던 히벨리누 정도를 제외하면 가린샤의 아성에 도전할 만한 브라질 출신 윙어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들조차 가린샤를 넘었다는 평가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또한 줄리뉴 보텔류 역시 뛰어난 선수였음에도 불구하고 가린샤 때문에 1954년 스위스 월드컵을 제외하면 월드컵에 출전하지 못했다.[17] 브라질 국대가 윙어를 잘 기용하지 않는것도 한가지 원인이 될 수는 있다. 일단 포지션이 같아야 얘기라도 해 볼 것 아닌가. 그나마 FC 바르셀로나에서는 윙어로 뛰었던 호나우지뉴가 몰락하지 않고 대성했다면 가린샤의 후계자가 됐을 것이다. 심지어 월드컵에서 골 넣고 퇴장당한 것까지 똑같다.[18] 전문가 평가나 언론마다 다르지만 보통 호나우두와 가린샤가 역대 TOP10 수문장급으로 꼽히며 비슷비슷하게 평가받는다. 그리고 지쿠가 호나우두와 가린샤보다는 아니어도 거의 비슷한 티어로 꼽힐때가 많다.[19] 당시 네이마르8강전 때 척추가 골절되는 심각한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20] 심지어 첫 성관계가 14세 때 마약에 취한 상태로 염소한 것이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고 한다.(...) 물론 뻥카인지 진짜인지는 본인만 알 일.[21] 펠레의 자서전에서 24살 때 이미 자녀가 6명이라고 언급하는 내용이 있다.[22] 가린샤 클럽이란, 가린샤가 월드컵 본선에서 2골을 넣고 결국 반칙을 저질러 레드 카드를 받은 데서 유래했는데, 한마디로 월드컵 본선에서 골을 넣고 퇴장당한 사람들을 장난스럽게 묶어 부르는 말이다. 정식 축구 용어는 아니다.[23]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약 900불 정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