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봉제
文鳳濟
1915년 6월 28일 ~ 2004년 10월 20일
1. 개요
대한민국의 전 관료, 언론인이다.
2. 생애
1915년 평안남도 개천군(현 개천시)에서 태어났다. 1933년 5월 1일 동아일보사 개천지국 북원(北院)분국장에 임명되어 근무하다가#, 이듬해인 1934년 4월 사직하였다.# 이후 일본 니혼대학 전문부 경제학과에 입학하였으나 1938년 중퇴하였다.
8.15 광복 직후 조선민주당에 참여하여 개천군당부 서기장이 되었으나, 공산주의자 최용건에게 당권이 넘어가자 부당수 이윤영 등 당내 우익 진영과 함께 1946년 월남하여 평안청년회 부회장, 조선민주당 중앙집행위원·정치위원 등을 맡았다. 같은 해 6월 이승만 등에 의해 민족통일총본부(民族統一總本部)가 결성되자 정치부 차장을 맡았다. 11월 여러 우익단체들이 서북청년회로 통합되자 부위원장이 되었으며 1947년 8월에는 총위원장이 되었다.
1947년 12월 민족대표자대회 대의원이 되었으며, 1948년 12월 대한청년단이 발족되자 총본부 부위원장이 되었다. 이 밖에 평화일보사 이사장, 주일거류민 지도책임자를 맡았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청년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중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정일형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2년 자유당 중앙당 선전부 책임위원 및 정무국 부국장으로 활동하였다. 1952년 9월부터 1953년 3월까지 내무부 치안국장을[1] 재임했으며, 1957년 6월부터 1958년 9월까지 교통부장관을 지냈다. 이 시기 자유당 청년부장, 자유당 중앙위원, 자유당 정책위원, 자유당 훈련부장, 국무원 사무국장 등을 역임하는 한편, 태양신문 발행인, 한국일보사 편집 겸 발행인 등 언론인으로도 활동하였다.
1960년 4.19 혁명 후, 김구 암살사건의 재수사 과정에서 김성주 사건에 연루되어 유죄 판결을 받아 구속되었다. 3년 후 최종 상고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