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북청년회
North-West Youth Association / 西北靑年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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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에 실존했던 정치깡패. 백색테러를 무수히 자행하던 극우 성향 '''테러조직'''으로, '''서북청년회'''(西北靑年會, Northwest Youth League)라고 한다. 약칭은 '''서청'''(西靑).
폭행, 강도, 강간, 살인, 고문은 물론 제주 4.3 사건 당시 자행한 영아살인 등 사람이 사람에게 저지를 수 있는 악행은 거의 다 했다. 전시상황이었다고 옹호할 수 없는 것이, 이들은 군인이 아닌 민간단체였다.
2. 상세
북한에서 월남한 사람들로 구성된 청년단체(양호단, 대한혁신청년회, 함북청년회, 황해회청년부, 북선청년회, 평남동지회, 평안청년회)들이 모여 1946년 11월 30일 서울 YMCA에서 창단했다.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선우기성을 선출했고, 중앙집행위원장 외에 11개 부서와 감찰위원회 및 지부가 설치되었다.정종식, 서북청년단의 결성과 활동
이들은 주로 지주, 개신교 인사[2][3] , 민족주의자나 일부 친일반민족행위자 등 북한의 탄압을 피해서 도망온 젊은이들이었다. 실제 해방 후 한국전쟁 전까지 소련군정의 개신교 박해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단순히 개신교인이라는 이유로 사회활동에 제약을 받거나 권리행사가 제한되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개신교인 민족주의자 조만식 선생이 한국전쟁 전에 고려호텔에 연금됐던 것을 생각해보자. 이러한 탓에 한국전쟁 직후 북한에는 지주, 자본가, 개신교도, 자유주의자, 민족주의자들이 죄다 월남해버려 숙청하려야 숙청할 사람이 없는 상황까지 이르게 된다. 1949년 백범 김구를 암살한 범인 안두희도 젊은 시절 이곳 정회원으로 활동한 적이 있다.
하지만 단순히 이런 면모만 생각할 수는 없다. 실제 서북청년회의 구성원에 개신교도들이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종교적인 측면에만 국한에서 보면 "서북청년회가 어떻게 이런 악행을 벌일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나온다. 실제 대다수 소속원은 공산주의에 이가 갈린 무고한 사람들이었다. 소련군의 북한 진주 이후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북한 정권은 수많은 탄압 행위들을 감행했는데, 이 과정에서 가족과 재산을 전부 잃고 혼자 남한으로 내려온 사람들도 많았다. 하루아침에 모든 걸 잃은 이들은 월남한 끝에 후일 대한민국의 반공 정권에 중용되어 정치적 도구로 이용당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본 글의 서북청년회다. 위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저 종교와 이념으로만 서북청년회를 바라보면 지금껏 이들이 자행한 끔찍한 만행을 모두 설명할 수 없다. 물론 그렇다고 이들이 복수귀가 되어 저지른 모든 일이 정당화되는 건 아니다.
2.1. 대동청년단, 대한청년단과의 통합
1947년 4월 지청천이 대동청년단을 조직하고 기존의 청년 단체들을 통합하면서 서북청년회를 해체하고 대동청년단에 합류시킬 것을 요구하자 장택상은 강력하게 반발했으며, 조병옥 또한 치안상의 문제를 들어 서북청년단 해산을 반대했다.
대동청년단 합류를 둘러싸고 서북청년회는 합동파와 합동반대파로 분열되었는데 합동파는 1948년 9월 대동청년단에 통합되었고 합동반대파는 문봉제를 위원장으로 서북청년단을 재건하고 초기 서북청년회가 김구 노선을 지지한 것에 비해 이들은 이승만 노선을 따라 이승만 친위대 역할을 했으며, 1948년 12월 19일 대한청년단에 흡수 통합되었다. 서북청년단이나 대동청년단 같은 기존 단체들을 대한청년단으로 통합시킨데에는 다른 정치가들의 세력 기반을 빼앗아 자기 것으로 하려는 이승만의 의도도 한 몫 했다. 대한청년단은 총재를 이승만으로 단장은 신성모로 했다. 일부는 내분에 염증을 느껴 탈퇴하거나 군이나 경찰, 특무대 등으로 들어가는 등 제3의 길을 택하기도 했다.
3. 악행
3.1. 암살, 테러, 민간인 대량학살
1947년 삼일절 기념식을 따로 가진 좌·우익이 시가행진 중 숭례문에서 충돌한 사건을 비롯하여 부산 극장사건, 조선민주애국청년동맹 사무실 점령사건, 정수복 검사 암살사건 등 좌익 세력에 대한 테러를 주도하고 경찰의 좌익 색출 업무를 도왔다. 제주도 4.3 사건에서 언급되는 '''토벌대'''로 불리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정식 군대나 경찰이 아니라 이 서청이다.[5] 가장 큰 문제는 빨치산을 색출하고 처벌한 것이 아니라 '''민간인, 때로는 군경의 가족에게조차 적법하지 않은 사적재재를 가했다는 점'''에 있다.
물론 빨치산은 지역 주민의 호응이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고, 따라서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었던 숙청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6] 그런 맥락으로 따지자면 우리는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이나 서울대병원 학살사건등을 영원히 비판할 수 없게 된다. 1949년에 이루어진 제네바 협약에 의거하여 어떠한 경우를 막론하고 민간인에 대한 증오범죄는 금지되며, 이에 따라 서북청년단의 행동은 위법이다. 또한, 6.25 한국전쟁 당시에 벌어진 보도연맹 학살사건에서 좌익에서 전향한 사람들을 포함한 민간인들을 대량 학살했다. 이 사건의 항목에도 나와있듯이,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성향을 가진 사람들 뿐만 아니라 아예 그냥 공무원들 각자 인원 할당량을 만들어서 쌀을 지급해준다는 명목으로 유인해 가입된 무고한 민간인들도 수없이 희생되었기에 이는 단지 이념만의 문제가 아니며, 매우 중대한 묻지마식 대량학살 범죄라고 볼 수 있다.
서청 중앙본부의 문봉제 단장은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이와 관련한 해명성 발언을 한 바 있다. 그는 “우리는 어떤 지방에서 좌익이 날뛰니 와 달라고 하면 서북청년회를 파견했다”면서 “'''그 과정에서 지방의 정치적 라이벌끼리 저 사람이 공산당원이다 하면 우리는 전혀 모르니까 그 사람을 처단케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지역이 제주도”라고 밝혔다. 그는 이어 “우린들 어떤 객관적인 근거가 있었겠느냐”고 반문했다.'''
北韓硏究所, 北韓 1989년 4월호, 127쪽, 제주 4.3 사건진상보고서, 271쪽에서 재인용
이승만과 미군의 후원 아래 제주 사태의 최일선에 서게 된 서북청년회는 군‧경 모두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중산간마을인 애월면 광령리 주민이던 고치돈은 하귀리 개수동으로 소개했다가 그곳에서의 무차별 총살에 놀라 다시 제주읍 외도리로 소개했다. 고치돈은 외도리 민보단장이 처가 쪽 친척이라 그의 배경으로 양민증도 비교적 빨리 얻었고, 특공대에 편입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고 했다. 고치돈은 특공대 시절 목격했던 서북청년회 출신 경찰들의 잔혹했던 행동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다.
내가 외도지서 특공대 생활을 할 때 서북청년단 출신 경찰 이윤도(李允道)의 학살극은 도저히 잊을 수 없습니다. 그 날 지서에서는 소위 ‘도피자가족’을 지서로 끌고 가 모진 고문을 했습니다. 그들이 총살터로 끌려갈 적엔 이미 기진맥진해서 제대로 걷지도 못할 지경이 됐지요.
'''이윤도는 특공대원에게 그들을 찌르라고 강요하다가 스스로 칼을 꺼내더니 한 명씩 등을 찔렀습니다. 그들은 눈이 튀어나오며 꼬꾸라져 죽었습니다. 그때 약 80명이 희생됐는데 여자가 더 많았지요. 여자들 중에는 젖먹이 아기를 안고 있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윤도는 젖먹이가 죽은 엄마 앞에서 바둥거리자 칼로 아기를 찔러 위로 치켜들며 위세를 보였습니다. 도평리 아기들이 그때 죽었지요. 그는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그 꼴을 보니 며칠간 밥도 못 먹었습니다.
출처: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271쪽
더욱 엽기적인 일은 이들 서북청년단원들이 4.3 사태 당시 제주도 주민들을 상대로 온갖 폭력과 범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피해를 당한 집안의 여성들을 협박하여 억지로 결혼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원래 서북청년단원들이 빈털터리 신세로 내려오다 보니 그런 식으로 처갓집의 재산을 손에 넣어 제주도에 정착을 시도했거나, 개중에는 일부러 제주도 주민들 중에서 부유한 집안의 딸을 노리고 하는 경우도 있었다. 문제는 그렇게 억지 결혼을 하는 제주도 여성들 중의 상당수가 바로 서북청년단원들한테 가족이 죽임을 당한 피해자들이었고, 그러다 보니 가족을 죽인 원수와 억지로 한 집에서 한 이불을 덮고 사는 꼴이라서 4.3 사태가 끝나고 나서 제주도에는 평생 가도 부부동반 외출을 안 할 만큼 남편과 냉랭하게 사는 부부들이 많았다고 한다.#1948년 11월 9일 제주도 총무국장 김두현(金斗鉉, 53)이 서청의 손에 고문치사 당한 사건도 서청의 위세를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다. '''제주도 행정 2인자가 보급문제에 불만을 품은 서청들에게 희생된 것이었다'''. 특히 서청 제주단장 김재능은 자기 사무실에서 심한 매질을 한끝에 김두현 총무국장이 실신하자, 숨이 끊어지지 않은 상태인데도 밖으로 내버려 끝내 절명케 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제주 4.3 사건 진상보고서, 271~272쪽
3.1.1. 정부의 하청인
이 범죄에는 정부가 조장한 부분도 크다.
단순히 '''사설 민간단체'''였던 서북청년단을 '''무장친위대와 같은 테러단체'''로 '''완성시킨 이들은 이승만과 이승만 행정부의 간부들이다'''. 거기다가 급여를 주지도 않고 제대로 된 배급체계도 갖추어주지 않아 사실상 학살을 조장하게 만들었다. 서청 경찰관 출신 박형요는 "이승만이 우리를 이용했다고 여겨집니다.", "이 대통령의 허락 없이 어느 누가 재판도 없이 민간인들을 마구 죽일 수 있는 권한이 있겠습니까? 이승만이 '죽이지 말라'고 했으면 제주도에서와 같은 학살 사태가 있을 수 있습니까?"라면서 이 사람들도 이승만에게 이용당한 피해자일 가능성을 주장했다.[7] 자세한 건 이승만 문서에서 3.2.5. 제주도민 대량 학살 참고. 독일 나치의 말단 병사들이나 부역자들이 하는 말과 많이 비슷하다.
3.2. 활동 이후 숙청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 보면 서청의 활동상이 나와있다.
서북청년단은 정부수립 이전에 계림공작대라는 조직을 두고 독자적으로 대북공작을 벌이기도 했으며 이 조직은 정부수립 이후에 국방부와의 협력으로 호림부대라는 특수부대로 재편되어 북파활동을 벌였다. 이들은 결국 한국전쟁 중에 북한군에 의해 처형당하거나 그나마 운 좋은 경우에는 약간의 훈련을 거친 후에 예비역 장교 신분으로 국민방위군을 조직하고 훈련시키는 역할에 배정되기도 했는데 이들조차도 후에 군인들을 굶겨죽인 죄로 처형당했다. 이후 지향점을 잃어버린 이들은 민병대로 편입되었다.
서청의 이용가치가 사라지자 서북청년단 출신자들은 특별한 보상도 없이 버림받았다. 남한군 예비역 육군 대령이자 언론인, 작가의 길을 걸었던 선우휘는 출신에도 불구하고 서청과는 거리를 두었다. 하지만 그의 말년 작품은 대부분 서청 출신으로 쓸쓸히 버림받은 사람들에 대한 회한이 담겨 있다. 그가 진정으로 동인문학상을 주어야 할 작품이라 평한 "테로리스트"나 자신이 대령으로 등장하는 "오리와 계급장"이 대표적이다.
서청 간부이고 유엔군의 북한 통치시기 이승만이 임명한 평안도 지사 대신 미군정에 임명돼서 벼슬을 한 김성주[8] 는 이렇게 버려진 대표적 케이스, 그는 후일 반 이승만 음모혐의로 사형당한다.[9] 정확하게는 고문치사당한 것으로 추정되는데[10] 시체를 '''헌병 사령관 집에 유기해버리고 사형 판결과 집행을 이전에 한 것처럼 날짜조작을 해버렸다.''' 4.19 이후에나 진상이 공개되고 시체가 발굴되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김성주의 억울함을 증명한 건 중도 보수였던 민주당이었다.
제3보병사단이 '백골부대'로 불리게 된 연유를 제공한 것도 서청 단원들. 정확히는 수도사단 제18연대에 자원입대한 서북청년단원들이 '죽어 백골이 되어서도 고향을 되찾겠다'는 의미로 방탄헬멧에 백골을 그려넣자 이내 18연대의 유행이 되어 급기야 연대 자체가 백골부대로 불리었고, 이후 흥남철수 과정에서 3사단 26연대와 배를 바꿔타는 바람에 소속이 바뀌었다. 그 후 휴전이 되어 여력이 생기자 사단명칭을 보다 전투적으로 바꾸겠다는 사단장의 의지에 18연대 명칭이 사단에도 적용돼 사자 부대에서 백골 부대로, 18연대 역시 자신들이 원조 백골이라는 의미로 진백골로 바꾸었다. 게다가 1대대는 자신들이 그 중에서도 진~진짜 원조라며 명칭을 진진백골대대로 바꾸었다.
헌데 서북청년회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그저 '백골부대라는 호칭의 유래가 된 단체'로만 알고 있어서, 이들을 건전한 청년단체로 아는 경우도 있단다(…). 충공깽. 사실 같은 단체 소속이었다고 해도 때로 몰려다니며 사적 린치로 민간인이나 죽이는 위험분자들에 비하자면, 언제든 전쟁이 벌어질 수 있는 혼란시국에 고향을 되찾겠다고 제대로 된 군대조직에 몸담은 이들이 훨씬 제대로 된 사람인 것은 맞다.
이 밖에 월남한 이북 청년과 학생들의 생계를 돕는 지원사업을 했고, 활동자금은 한반도 서북부 출신 실업가들과 미 군정청 고위관리들, 이승만 계열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에 의존하기도 했고, 각 지방단의 유지로부터 염출하거나 미 군정청의 원조물자를 유출하여 자금화했다. 사실상 조직폭력배와 비슷한 셈이다. "정부와 정치인들에게 돈을 받아서 정치 깡패이고, 각 지방단 유지에게서 염출했다"라고 하는데 이건 당시 서청의 위치로 보면 거절할 사람이 없었을 것으로 사실상 강제로 삥 뜯은 것이고, 원조물자 유출은 당시 조직폭력의 역사를 다루면 빠지지 않는 유형이다. 이승만 정권 때 개털이 됐고 이 때 살아남았어도 아마 몇년 뒤 박정희가 정권 잡고 나서 떠 한번 뒤에서 당했을 것이다. 정치깡패들 조차 또 다른 독재자의 눈에 들지 못하면 쉽게 숙청되기 때문이다.
4. 평가
활동상만 보면 바로 정답이 나온다. 오죽하면 '''같은 우익조차 외면했다.''' 김성주의 비참한 최후는 이렇다. 서청은 같은 반공 세력에게도 환영을 못 받았다. 반공이 국시이던 당시 기준으로도 서청은 엄청난 만행을 일삼았다. 한마디로 홍위병의 극우버전이며, 반공을 외치면서 정작 무고한 민간인들을 강간 및 학살한 극악무도한 테러 집단이자 범죄 조직이라고 볼 수 있다.
서청 출신자들은 '''"남한마저 사회주의 세상이 되면 살 곳이 없어지기 때문에 생존차원에서 투쟁했다"''' 고 말한다.[11] 즉, 고향에서도 살해 위협을 받으며, 재산마저 빼앗기고 쫓겨났기 때문에 살아남으려고 과격한 투쟁을 벌였다는 것이다. # 그렇다고 해도 이들이 잔인한 전쟁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이들 역시 수 없이 많은 무고한 이들의 목숨을 반공주의란 명목 하에 빼앗았고, 도리어 빨치산들 역시 남한이 사회주의 국가가 되지 않는다면 살 곳이 없어지기에 생존을 위하여 투쟁하였다고 역지사지로 물어보지 못 할 것 없다.
이승만에게는 서북청년회뿐만 아니라, 삼우회도 있었다. 하는 일은 같다. 해방 이후 좌익들 사이에서는 "이승만에게 삼우회가 있으면, 김구에게는 백의사[12] 가 있다"고 소문이 났다. 여기에 양자 모두를 따른 것[13] 이 김두한이 이끌었던 대한민주청년동맹, 약칭 대한민청이다.
여기까지 읽었으면 홍위병이나 재특회, 그리스의 황금새벽당과 공통점이 더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들과는 다른 점 역시 상당하다. 가장 큰 특징은 명분은 크고 폼나게 내거는데, 정작 진짜로 사고친 것은 후방에서 한참 약자들 상대로 했다는 것이다. 보도연맹도 그렇고, 정치깡패짓도 그렇고, 제주도에서도 그렇다.
냉전시기에 서북청년회 같은 극우 조직들이 기승을 부린 것은 한국뿐만이 아니었다. 남미나 아프리카에서도 극우 조직들이 생겨나 빨갱이 사냥을 명목으로 무고한 양민들을 학살했다. 대표적으로 콜롬비아의 "자위군"이라는 우익단체가 있었는데 이들은 단지 공산주의 게릴라들의 본거지에 거주했던 사람들을 학살했다. 또한 과테말라에서도 극우 성향의 군부가 가혹한 착취 및 수탈에 시달리던 원주민들을 소련과 쿠바와 결탁한 공산주의자로 몰아 학살한 역사가 있었다. 이러한 만행이 얼마나 심했던지, 같은 우익 성향의 나라인 주 과테말라 영국 대사조차 이들의 잔악함에 치를 떨었을 정도였다.[14]
4.1. 극우 세력의 왜곡
극우 세력에선 이 정치깡패 집단을 "(對)대테러집단" 이라고 왜곡하기도 한다. 관련은 조우석 문서 참고하자.
이주영[15] 은 이 집단을 '''호국세력'''이라 왜곡하기도 했다.
대한민국 정체성 총서 18권. 그간 금기시되어왔던 '서북청년회'의 진면목을 여실히 드러낸 책이다. 1945년 8월 15일의 해방 직후 좌익들과 싸워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기여했던 우익 청년단체의 하나인 서북청년회와 서북청년들의 건국, '''호국 활동을 개략적으로나마 소개'''하고 있다.
지금 돌이켜 보면, 해방 직후 한반도에서 남북 통일정부를 세우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소련군이 북한을 빨리 공산화시키려는 의지가 너무나 강해 미군과의 합의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16]
[17] 또한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세우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했다. 좌익과 남북협상파들의 반대가 너무 강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도 좌우합작의 연립정부를 세운다는 허망한 목표에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보수우익 세력은 좌익과 남북협상파들의 친일파 숙청과 통일이라는 민족주의의 명분 앞에 주눅들어 있었기 때문이다.이처럼 '''우유부단한 보수우익 세력을 반공과 정부수립의 방향으로 강하게 이끌고 간 세력'''의 하나가 서북청년회였다. 서북청년들은 북한의 전체주의 체제로부터 탈출한 월남민이었기 때문에 전투적인 반공주의자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미군정 경무부장 조병옥의 말대로 그들이 없었으면 '''치안유지도, 정부수립도 할 수 없었던 중요한 세력이었다.'''
5. 영향
비록 존속기간은 짧았으나 서북청년단은 한국 현대사에 결코 지울 수 없는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그것은 "빨갱이, 좌파는 모두 절대악인 사탄이니 용서없이 절멸시켜야 한다."라는 극단적인 반공주의였다.[18]
애초에 서북청년단 자체가 이북에서 개신교 신자였었고, 월남한 이후에 영락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했듯이 단원들의 약 80~90%가 개신교도일 정도로 독실한 개신교도였다. 그리고 이들은 서북청년단 자체가 해체된 이후에 대부분 개신교 목사나 집사 같은 성직자가 되어[19] 개신교계로 들어가 활동을 했는데, 신자들한테 극단적인 반공주의를 가르쳤고 자연히 그들한테서 교육을 받은 신자들은 강경한 반공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아울러 해방 직후와 6.25 전쟁을 거치면서 약 1천 만 명의 이북 주민들이 남한으로 도망쳐 왔는데, 이들 대부분은 자신들과 정치적 성향이 맞고 같은 고향인 서북청년단 출신 목사들이 운영하는 교회로 가서 그들이 가르치는 극단적인 반공주의 설교를 들으며 자랐다.[20] 그리고 이들은 대한독립청년단, 대동청년단, 민족청년단 등지 출신들과 함께 1963년 '청년우인회'를 결성해 현재의 거대 우익단체 대한민국통일건국회의 토대를 만들었고, 대북강경책과 강성 반공주의를 외치는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등의 열렬한 지지 세력이 되었다.
이 극단적인 반공주의는 현재 극우층의 주요 이념이 되었으며, 이 안에는 그러한 반공주의를 외치는 기독교 우파들도 상당수 포진해 있다. 일부는 전광훈과 사랑제일교회가 정신적인 면에서 서북청년단의 가장 충실한 계승자라고 주장한다. 고의적으로 코로나를 퍼뜨려 현 정부를 무너뜨리고 다시 보수 세력의 집권을 기도했을 만큼, 이들의 반공주의 성향은 매우 강경하기 때문이다.
또한 4.3 사건 당시 저지른 학살로 반기독교 정서가 강해진 제주도는 기독교세가 매우 약하다.
6. 서북청년회 재건위
2014년 9월, 갑자기 서북청년회 재건위가 등장해 이 단체를 부활시키겠다고 선언하여 서북청년회가 어떤 단체였는지가 재조명 받았다. 사실 이들이야말로 민주화의 수혜자들로, 제1공화국을 제외한 독재 시절이었으면 오히려 이들 정치깡패는 남산에 끌려갔을 것이다. 이후 서북청년회 재건위는 2014년 11월 28일에 서울에서 재건총회를 개최했다. # 이 과정에서 수련관의 대관이 취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강제로 진입해 강행했다고 한다.
2014년 10월 2일에는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회 대표가 서북청년회 재건위를 명예훼손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소했다. 서북청년회 재건위에서 김구가 김일성의 꼭두각시였고 암살이 정당하다는 주장을 했기 때문인데, 이는 명백한 허위사실이다.
시사인과의 인터뷰에서 재건위 관계자들은 항변하며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다. 사실관계를 따지자면, 서청은 당시 국민방위군과 연관된 신성모의 세력에 가까웠기 때문에 이기붕을 띄우기 위한 이승만에 의해 공중분해 당했다. 또한 한국에는 우파는 있지만 극우가 없다며 '''네오 나치 같은 극우가 필요하다는''' 발언을 하며 사실상 본인들과 네오나치를 동류집단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여담으로 이 운동은 재건위에만 그치고 무산되었다.
7. 관련 문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서북청년회
(시사상식사전-방문각)서북청년단
(디지털제주문화대전)서북청년회 제주도지부
미군정·이승만 정권의 제주4·3항쟁에 대한 인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