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민주당

 


''창당''

'''조선민주당'''

''월남''

조선사회민주당
(북한)
''월남''

'''조선민주당(남한)[1]'''

''해산''
(국민의당)[2]

서북청년회
1. 개요
2. 역사
3. 관련 문서


1. 개요


'''조선민주당'''(朝鮮民主黨)은 1945년 11월 3일에 창당하여 민족주의기독교 민주주의를 지향했으며, 1961년 5.16 군사정변 때 해산된 대한민국의 정당이다.

2. 역사


1945년 11월 당수는 조만식, 부당수는 이윤영으로 하여 북한 평양에서 결성되었다. 소련 점령하의 북한의 민족주의자들이 분단이 장기간 지속되리라고 예상하지 못한 상태에서 소련군정의 허락을 받아 '조선민주당'이라는 이름으로 창당했다. '기독교자유당', 한경직 목사의 '기독교사회민주당' 등 민족주의자들의 다른 정당 창당 시도는 소련군정의 허락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좌절되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는 북한 내 민족주의자들, 민주주의자들을 대변하는 유일한 정당이 되었다. 사회경제적으로 보았을 땐 당원 기반은 주로 북한내의 개신교인, 중농, 소상공인이었다. 조만식의 연금에도 불구하고 조선민주당은 완전히 자율성을 잃지는 않았다. 창당 3개월만에 50만 당원을 확보하였으며 당 기관지로는 주간 신문 《조선민보》를 발행했다. 북에 남은 조만식 세력의 《조선민보》는 6.25전쟁 직후 조만식이 의문스런 죽음을 맞이하고 그에 따라 민족주의 세력의 완전한 와해 직후 한국전쟁이 끝나며 폐간되었다.
조선민주당의 첫 당수로 선출된 조만식은 막 소련군이 진주했을 때만 해도 소련군정에 협조하려고 나름 노력했다. 창당대회 때 창당을 허락해준 소련군정에 감사인사를 하면서 소련군정이 아니었다면 조선민주당은 나타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신탁통치에 강경하게 반대하는 등 소련군정의 입맛에 맞지 않는 언행을 계속하자 창당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당수인 조만식은 신탁통치에 반대한다는 구실로 연금 당했고, 김일성 일파인 최용건이 조만식을 몰아내고 당권을 장악했다. 또한 그가 당권을 장악하면서 당 자체가 와해되어있어 이미 조선민주당은 당으로서의 의미를 잃은 상태였다. 그 이후 북에서의 조선민주당은 조선사회민주당으로 당명을 바꾸며, 위성정당으로 전락한다.
한편 조만식 연금 후 부당수 이윤영을 포함한 많은 당내 우파 당원들이 소련군정과 북한 정권에 협조를 거부하고 월남하여 서울에서 같은 이름의 당을 창당했다. 이에 따라 조선민주당은 남북으로 갈려졌다. 당이 남북으로 갈라진 것도 모자라 남한의 조선민주당도 분열하였는데, 조선민주당 조직부장이었던 선우기성서북청년회를 창설한 뒤 대동청년단에 합류한 것이다.
이후 명백을 잇던 조선민주당은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조선민주당 부당수였으며 남한 내의 당수가 된 이윤영만이 서울특별시 종로구선거구에서 당선되며 1석을 얻어 원내에 진입하였다. 그 이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참패하였다. 조선민주당은 조만식의 월남을 추진하고 북에서 월남한 정치인들을 지원하기도 하였으나, 정치적으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고, 1961년 5.16 군사정변 때까지 존재했으나 남한 정계에서 큰 영향을 끼치진 못했다.
이윤영은 1952년 8월 조선민주당 소속으로 제3대 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고, 1956년 5월 다시 제4대 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58년 5월 조선민주당 당수에 선임되었으나 1960년 4.19 혁명 이후 정계에서 은퇴하여 목회와 강연활동을 했고,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군정연장반대투쟁위원회 위원장, 국민의당 최고위원을 맡았다.
현재 북한에서는 조선사회민주당이 조선민주당의 명맥을 잇고 있으나, 상술했듯 최용건이 조선민주당의 당권을 장악한 이후 조선민주당은 조선로동당에 완전히 종속되었기 때문에 본래 정당과는 완전히 다른 정당이 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3. 관련 문서






[1] 북한에 있는 조선사회민주당과 다른 사실상의 후신이다.[2] 남한 내의 조선민주당의 당수인 이윤영이 이 당의 최고위원으로서 명맥을 이었다고 볼 수 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