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청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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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2월 19일에 창단된 정치단체. 약칭으로 ''''한청''''이라 한다.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은 각지에 난립한 우익 청년단체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우익 청년단체들은 좌익 청년단체들과의 경쟁에서는 큰 역할을 했지만, 정부 수립 이후 그 중요성은 이전보다 떨어졌다. 이승만은 이들을 하나로 통합하여 자신의 정치적 기반으로 삼고, 덤으로 이범석, 지청천 같은 청년단체 지도자의 영향력을 약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승만은 1948년 12월 19일 대동청년단을 중심으로 청년조선총동맹·국민회청년단·대한독립청년단·서북청년회[4] 등 전국 20여 개의 청년단체를 흡수·통합하여 대한청년단을 결성하였다. 대한청년단은 총재에 이승만, 최고지도위원에 장택상·지청천·전진한·서상천·유진산·강낙원, 단장에 신성모가 추대되었다. 이범석의 조선민족청년단은 처음에는 합류를 거부했지만, 이승만의 압박에 못이겨 1949년 1월 20일 대한청년단에 합류하였다. 이후 대한청년단은 족청계와 비족청계로 분열되었다.
대한청년단은 전국적인 조직망을 확보하고 단원들을 조직적으로 훈련시켜 조직을 강화하는 일에 힘썼다. 대한청년단은 200만 단원을 확보하여 전국적인 조직체계를 갖추고 문화운동과 향토방위를 위한 군사훈련을 실시하였으나, 청년단체로서의 역할보다는 주로 이승만을 지원하는 정치활동에 치우쳤다. 1949년 대한민국의 예비 군조직인 호국군이 폐지되면서 같은 해 11월 정부와 협의하여 ‘청년방위대’를 조직하여 예비군사조직의 기능을 갖추었다. 1950년 1월 대한청년단은 내부 분열로 최고위원회제를 폐지하고 단장제로 바꾸어 신성모가 단장에 선임되었다가 다시 안호상으로 바뀌었다.
1950년 5월에는 육군본부 직할로 20여개의 ‘청년방위단’을 창설하여 조직 편성을 완료하였다. 이들은 본격적인 훈련을 받기 직전에 한국전쟁을 맞게 되어 조직적인 활동을 수행하지 못했다. 이후 중국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악화되자 정부는 1950년 12월 ‘국민방위군 설치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청년방위단은 국민방위군으로 개편되어 국민방위군을 조직하고 훈련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1951년 1월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방위군이 해산되고 5명의 주요간부가 처형되면서 대한청년단의 활동은 크게 위축되었다. 이후 재건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1952년 8월 제2대 대통령 선거 이후 내분이 심해졌고, 결국 1953년 9월 10일 해체되어 민병대에 편입되었다.
대한청년단은 1951년에 창당한 자유당의 기원세력 중 하나이다. 1948년에 지청천의 대동청년단[5] 은 이승만의 청년단체 흡수, 통합 정책에 의해 일부 정치세력을 제외한 대부분의 인력들이 대한청년단에게 흡수 당하게 된다.
대한청년단은 한국전쟁 당시, 경찰과 함께 민간인 학살을 주도한 것으로 의심되는 단체이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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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청년단의 예전 '''단장이었던 신성모는 6.25 전쟁 당시 국방장관'''이었다. 또한 신성모는 '국민방위군 사건'의 간접적인 원인을 제공했다. 대한청년단 출신이었던 국방부 장관 '''신성모는 1950년에 대한청년단의 단장 김윤근을 준장으로 임관시키는 동시에 국민방위군 사령관으로 임명'''한다. 이후 대한청년단의 고위 장교들은 국고금과 군수물자를 착복하여 대량의 아사자를 만든다. 결과적으로 보면 국민방위군 참사의 원인은 이승만이 방위군 부대의 운영을 자신의 친위조직인 대한청년단과 대한청년단을 기초으로 만들어졌던 청년방위대에 맡겼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그 청년단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던 당시 사건을 한 교수는 '''"9만명 가량의 군인이 동사ㆍ아사ㆍ병사한 천인공노할 사건"'''이라고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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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김윤근은 '국민방위군 사건'의 책임자로 총살당한다.
대한청년단 -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국가기록원: 대한청년단
대한청년단(大韓靑年團)-한국 청년단체-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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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48년 12월 19일에 창단된 정치단체. 약칭으로 ''''한청''''이라 한다.
2. 창단 과정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은 각지에 난립한 우익 청년단체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우익 청년단체들은 좌익 청년단체들과의 경쟁에서는 큰 역할을 했지만, 정부 수립 이후 그 중요성은 이전보다 떨어졌다. 이승만은 이들을 하나로 통합하여 자신의 정치적 기반으로 삼고, 덤으로 이범석, 지청천 같은 청년단체 지도자의 영향력을 약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승만은 1948년 12월 19일 대동청년단을 중심으로 청년조선총동맹·국민회청년단·대한독립청년단·서북청년회[4] 등 전국 20여 개의 청년단체를 흡수·통합하여 대한청년단을 결성하였다. 대한청년단은 총재에 이승만, 최고지도위원에 장택상·지청천·전진한·서상천·유진산·강낙원, 단장에 신성모가 추대되었다. 이범석의 조선민족청년단은 처음에는 합류를 거부했지만, 이승만의 압박에 못이겨 1949년 1월 20일 대한청년단에 합류하였다. 이후 대한청년단은 족청계와 비족청계로 분열되었다.
3. 활동
대한청년단은 전국적인 조직망을 확보하고 단원들을 조직적으로 훈련시켜 조직을 강화하는 일에 힘썼다. 대한청년단은 200만 단원을 확보하여 전국적인 조직체계를 갖추고 문화운동과 향토방위를 위한 군사훈련을 실시하였으나, 청년단체로서의 역할보다는 주로 이승만을 지원하는 정치활동에 치우쳤다. 1949년 대한민국의 예비 군조직인 호국군이 폐지되면서 같은 해 11월 정부와 협의하여 ‘청년방위대’를 조직하여 예비군사조직의 기능을 갖추었다. 1950년 1월 대한청년단은 내부 분열로 최고위원회제를 폐지하고 단장제로 바꾸어 신성모가 단장에 선임되었다가 다시 안호상으로 바뀌었다.
1950년 5월에는 육군본부 직할로 20여개의 ‘청년방위단’을 창설하여 조직 편성을 완료하였다. 이들은 본격적인 훈련을 받기 직전에 한국전쟁을 맞게 되어 조직적인 활동을 수행하지 못했다. 이후 중국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악화되자 정부는 1950년 12월 ‘국민방위군 설치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청년방위단은 국민방위군으로 개편되어 국민방위군을 조직하고 훈련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1951년 1월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방위군이 해산되고 5명의 주요간부가 처형되면서 대한청년단의 활동은 크게 위축되었다. 이후 재건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1952년 8월 제2대 대통령 선거 이후 내분이 심해졌고, 결국 1953년 9월 10일 해체되어 민병대에 편입되었다.
대한청년단은 1951년에 창당한 자유당의 기원세력 중 하나이다. 1948년에 지청천의 대동청년단[5] 은 이승만의 청년단체 흡수, 통합 정책에 의해 일부 정치세력을 제외한 대부분의 인력들이 대한청년단에게 흡수 당하게 된다.
4. 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 문제
대한청년단은 한국전쟁 당시, 경찰과 함께 민간인 학살을 주도한 것으로 의심되는 단체이다.[6]
5. 1950년~1951년: 국민방위군 사건과 청년방위대[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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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청년단의 예전 '''단장이었던 신성모는 6.25 전쟁 당시 국방장관'''이었다. 또한 신성모는 '국민방위군 사건'의 간접적인 원인을 제공했다. 대한청년단 출신이었던 국방부 장관 '''신성모는 1950년에 대한청년단의 단장 김윤근을 준장으로 임관시키는 동시에 국민방위군 사령관으로 임명'''한다. 이후 대한청년단의 고위 장교들은 국고금과 군수물자를 착복하여 대량의 아사자를 만든다. 결과적으로 보면 국민방위군 참사의 원인은 이승만이 방위군 부대의 운영을 자신의 친위조직인 대한청년단과 대한청년단을 기초으로 만들어졌던 청년방위대에 맡겼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그 청년단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던 당시 사건을 한 교수는 '''"9만명 가량의 군인이 동사ㆍ아사ㆍ병사한 천인공노할 사건"'''이라고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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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김윤근은 '국민방위군 사건'의 책임자로 총살당한다.
6. 한청의 선언문
"우리는 총재 이승만 박사의 명령에 절대 복종한다. 우리는 피와 열과 힘을 뭉치어 남북통일을 지급(至急)히 완수하여 대한민국의 국위를 천하에 선양하기를 맹세한다. 민족과 국가를 파괴하려는 공산주의의 도구배(徒狗輩)를 남김없이 말살하여버리기를 맹세한다."
7. 한청의 주요 인물
7.1. 초기 조직
8. 역대 선거 결과
-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 1/200 0.19%[12]
- 1948년 제1대 대통령 선거
- 대통령 무공천
- 부통령 무공천
-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 10/210 3.3%
- 1951년 제2대 부통령 선거 무공천
- 1952년 지방선거
- 시의원 40/378
- 읍의원 229/1,115
- 면의원 2,574/16,051
- 도의원 34/306
9. 관련 문서
대한청년단 -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국가기록원: 대한청년단
대한청년단(大韓靑年團)-한국 청년단체-브리태니커
10. 관련 항목
11. 둘러보기
[1] (출처)위키: 대한청년단[2] #[3] 대한민주청년동맹의 후신으로 비밀결사인 백의사의 대외조직.[4] 서북청년회와 청년조선총동맹은 시기적으로 더 앞선 우익청년단체 통합으로 인해 대부분의 인사가 대동청년단에 합류했지만 일부 잔류파를 중심으로 명목상으로나마 조직이 남아있었던 상황이었다.[5] #[6] 한국전쟁 전후 대한청년단의 지방조직과 활동[7] (PDF)마산지역 토호세력의 뿌리 - Tistory[8] (민간인학살)학살과 지역사회의 지배구조-학살 거쳐 정치권력 장[9]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81721&cid=40942&categoryId=34509[10]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72551&cid=46624&categoryId=46624[11] #[12] 선거 당시에는 대한청년단이 존재하지 않았지만 제주 4.3 사건으로 인해 1년 뒤에 치러진 재선거에서 1명의 당선자를 배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