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오케팔론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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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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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6년 9월 17일, 로마 제국이 주도한 연합군과 룸 술탄국간에 일어난 전투. 공식적으로는 기독교 제국이 이슬람 왕국을 공격한 '성전(聖戰)'이지만, 로마 제국과 신성 로마 제국의 주도권 다툼이 수면 아래에 있었다.
2. 배경
로마 제국의 압박으로 국력차를 실감한 룸 술탄국은 불평등한 동맹을 받아들여 사실상 제국의 봉신국이 되었다(1161년). 아나톨리아 전선을 안정화 시킨 제국은 발칸과 레반트에 힘을 투사하는 등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렸고, 그 사이 룸 술탄 클르츠 아르슬란 2세는 조용히 힘을 키워갔다. 마침내 1174년, 다니슈멘드 왕조의 안전을 보장하던 장기 왕조의 누르 앗 딘이 죽고 후계자 살라딘이 그 세력을 이어받자 룸 술탄은 다니슈멘드를 정복하여 세를 불렸다.
한편 마누일 1세는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와 '로마 황제'로서 경쟁을 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경쟁은 상징적인 영토인 이탈리아에 대한 쌍방의 영향력 확대가 실패함에 따라 '성지'인 예루살렘 왕국의 보호로 옮겨가 있었다. 예루살렘 왕국의 보두앵 3세와 아모리 1세 형제는 로마 제국에 의존하였는데, 1174년 아모리 1세가 죽고 보두앵 4세가 왕위에 오르자 섭정인 트리폴리 백작 레몽 3세는 신성 로마 제국과 가까워지려 하였다.
이에 신성 로마 제국이 성지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십자군을 선포하려 하자, 로마 제국은 신성 로마 제국의 영향력 확대는 물론 십자군 자체를 경계하여 이를 스스로 대체하고자 하였다.[2] 이에 따라 실시되었던 1169년의 로마-예루살렘 연합군의 다미에타 원정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러한 기조를 이어가고자 했던 로마 제국에게 신성 로마 제국과 연대하려하는, 통제를 벗어나기 시작한 룸 술탄국이 눈에 걸리게 되었다.
마누일 1세는 룸 술탄국이 다니슈멘드 왕조에게서 빼앗은 영토를 반환하라고 요구했고, 아르슬란 2세가 이를 거부하자 마누일 1세는 주군-봉신간(정확히는 불평등한 동맹)의 징벌적 성격을 띈 원정을 십자군 여론이 높아진 지중해의 상황과 대상이 무슬림 국가임을 이용하여 원정의 의미를 확대하기로 하였다. 제국군은 물론 기독교 동맹국·봉신국의 군대를 소집하며 지중해에서 잉글랜드에 이르기까지 외교적 선전이 가해지자 사실상 원정은 '성전'의 형태를 띄게 되었다.
3. 준비
황제의 친정(親征)이니 만큼 엄청난 군비가 갖춰졌다. 최대 5만에 육박하는 병력이 소집되었으며, 속국인 헝가리 왕국, 봉신국인 안티오키아 공국 등에서 군대를 보내왔고, 기독교도인 세르비아계, 아르메니아계 군주들도 원정에 참여했다. 로마의 교황청, 예루살렘 왕국 등 주변 기독교 국가에 원정을 대대적으로 선전하던 마누일은 이 '성전군'의 행렬이 10마일에 달한다고 서신을 통해 자랑할 정도였다. 그 정도로 많은 병력이 갖춰졌다.
반대로 룸 술탄 클르츠 아르슬란 2세에게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와신상담하며 간신히 본래 궤도에 오른 상황이었는데, 졸지에 망국의 위기에 몰렸으니 말이다. 술탄은 황제에게 계속 평화협상을 제안했고 다니슈멘드 왕조의 영토를 반환한다는 등의 유리한 조건까지 내걸어봤으나 우위를 확신하고 있던 황제는 이를 모두 물리쳐 버렸다. 결국 남은 방법은 전투뿐이었고, 이에 술탄은 병력을 긁어모았으나 만여명도 안되는 전력일 뿐… 막장으로 벌어진 전력차를 극복하기 위해 지형지물을 이용한 매복전술로 시간을 끌고, 동시에 화평을 지속적으로 제안한다는 전략이 수립되었다.
4.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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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4년 후인 1180년의 상황을 나타내는 지도. 이코니온까지는 상당히 멀다.
집결지인 로파디온(Lopadion)에서 목적지인 이코니온으로 향하는 길은 멀었다. 로파디온에서 이코니온까지는 직선거리로도 500여 km나 되는데, 추가로 합류할 병력과 대군의 보급을 고려한 결과 로파디온에서 트라키시온 테마로 남하한 다음 메안드로스 강 유역의 계곡지대에서 라오디키아, 수블레온 등의 거점을 따라 동진하게 되어 더욱 긴 행군이 되었다. 더군다나 구릉지와 산악지대가 펼쳐진 늦여름의 더운 고원지대는 대군이 기동하기에는 나쁜 환경이었고, 청야전술에 의한 물과 마초의 부족은 원정군을 더욱 지치게 만들었다. 술탄은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주변의 환경에서 자신들의 장기인 매복과 히트 앤 런 전술이 잘 먹힌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이러한 매복에 제대로 걸려든 것은 안드로니코스 바타치스(Andronikos vatatzes)의 별동대였다. 별동대는 본대와는 달리 숫적인 우위를 가지지도 못했고, 그들이 진군해온 길은 수풀이 우거져서 매복하기에 최적의 환경을 가진 곳이었다. 옛 아나톨리콘 테마에 들어설 즈음 갈라져서 아마시아를 향해 진군하던 이 불운한 별동대는 괴멸되었고 지휘관인 안드로니코스의 머리는 창끝에 걸리게 되었다. 상황이 나쁘게 굴러가기 시작한데다 다시 한번 술탄이 평화협상을 제안했지만, 마누일 1세는 진군을 강행했다. 더위와 질병, 보급부족, 기갈은 물론 잊을 만하면 나타나는 매복공격에 시달려 지치고 신경이 곤두선 원정군은 옛 미리오케팔론 요새의 폐허가 있는 치브리체(Tzivritze) 산 부근에 도달했다.
5. 전투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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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정군은 곧 이코니온으로 향하는 관문도로를 두고 의견이 갈렸다. 누가 봐도 매복하기 최적의 장소인 미리오케팔론의 도로는 위험해보였다. 여러 장교들이 도로를 통과하지 말고 북쪽의 필로밀리온으로 우회하여 대군의 우위를 살리자는 의견을 내었다. 그러나 고된 행군으로 군대의 사기가 떨어진 상태였고, 다양한 국가가 참여한 연합군이다 보니 다른 나라 군주의 의견도 신경써야 하는 상태였다. 결국 황제는 단기 결전을 위해 강행돌파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어쨌든 강행돌파하기로 한 연합군은 사전에 도로 양측의 산악지대를 정찰하고 튀르크 유격대를 쫓아내고자 하였다. 그러나 기동력이 뛰어난 튀르크군은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살려 별다른 피해 없이 물러났고, 결국 연합군은 오후가 지나서야 진입을 시작하였다. 예상대로 선발대와 주력 중앙군이 통과중에 공격을 받았으나 어렵지 않게 격퇴해내었고, 이는 별다른 문제 없이 협곡을 지날 것이란 생각을 심어주었다.
그러나 동맹군인 좌우익 부대와 근위대, 공성대, 보급부대들이 진입하기 시작하자 본격적인 공격이 시작되었고 이는 막대한 피해를 내기 시작했다. 좁은 지역의 비전투 물자들 사이에서 전투를 강요당한 연합군은 주력 부대와 떨어진 상태로 지쳐있던 데다 매복이었던 까닭에 속수무책으로 당했고, 마누일 1세는 넋이 나간 것처럼 이를 바라보았다. 때문에 피해는 점점 커져서 처남인 안티오키아의 보두앵과 로마군의 주요 지휘관인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 등이 전사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주변의 질타로 뒤늦게 정신을 차린 마누일은 상황을 수습하기 시작하였고 곧 반격이 개시되었다. 반격에 적잖은 피해를 입은 룸군은 해가 완전히 지고난 저녁이 되어서야 물러났고, 그제서야 협곡을 통과한 황제는 진지구축 중이던 선도부대와 합류할 수 있었다. 안드로니코스 콘토스테파노스가 지휘하던 후위대는 이미 전투가 거의 마무리 되었기에 별다른 피해 없이 황제와 합류했고, 재정비를 마친 이들은 밤중에 이어진 룸군의 공격 또한 쉽게 물리칠 수 있었다.
6. 결과
연합군은 곧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진 것을 알아차렸다. 야전을 위한 주력은 온전했고 전력 또한 여전히 압도적이었으나, 공성전을 위한 장비와 물자를 망실한 것을 알아챈 것이다. 원정의 목적인 이코니온을 공략하기 위해선 이러한 것들이 필요했는데, 그것들이 없어서야…
결국 마누일 1세는 안전한 퇴각을 보장받는 대신 국경지대의 전진 요새인 수블레온(Sublaion), 도릴레온(Dorylaion)의 두 요새를 파괴하는 것으로 평화 협상에 동의했다. 공세 실패와 평화 협상은 곧 룸 술탄국이 획득한 다니슈멘드의 아나톨리아 영토를 당분간 인정하는 것이었다.
7. 전투의 영향
만지케르트 전투와 종종 비교되고 마누일 1세도 로마노스 4세의 처지에 자신을 비유했지만 큰 피해는 아니었다. 잃은 영토도 없었으며 황제가 포로로 잡힌 것도 아니었다. 로마군도 건재해서 조약의 쌍방 불이행으로 인해 일어난 히엘리온-리모키르 전투에서도 로마군이 승리하는 등 여전히 로마 제국의 압도적인 우세였다.
그러나 어정쩡한 전투 결과와는 별개로 영향은 엄청났다. 일단 황제가 친정하는 '성전'이 실패함에 따라 기독교 국가들에 사이에서의 동로마 제국의 권위가 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전투를 주시하고 있던 교황이 프리드리히 1세의 신성 로마 제국 쪽으로 기울게 만들었다. 이는 주변국과의 관계 개선과 잠재적 적국에 대한 견제를 통해 외교적인 균형을 유지하고자 했던 마누일 1세의 구상을 깨트리는 것이었다.
이후 마누일 1세는 뒷수습을 위해 남은 시간을 분주히 보냈고, 치세 마지막 해에 이르러 주변 정세를 안정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남은 시간이 더 없었고, 뒤를 이은 알렉시오스 2세 정권이 찬탈자 안드로니코스 1세에 의해 붕괴되고 제국에 정치적 혼란이 이어지면서, 동로마 제국의 아나톨리아 수복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1] 영어로 쓰면 myriad heads. 무수한 머리라는 뜻으로 여기서 머리는 산봉우리이다. 지명만으로 험한 지세를 알 수 있다. 실제로 이 지역은 카파도키아로 유명한 중앙 아나톨리아 고원이 시작되는 지점으로 갑자기 해발고도가 상승하기 시작하는 지역이다. 참고로 콘야의 해발고도가 1080m이다.[2] 실제로 십자군은 로마 제국 영내를 지나면서 약탈, 파괴 등을 일삼았으므로 경계할만 했다. 거기다 제4차 십자군 원정의 결과를 생각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