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차 십자군 원정

 



1. 개요
2. 배경
3. 준비
3.1. 모집
3.2. 자금난
3.3. 헝가리 보호령, 자라 습격 계획 채택
4. 진행
4.1. 자라 공략 : 1202년 11월 10일 ~ 23일
4.2. 의외의 제안
4.3. 1차 공격 : 1203년 6월 24 ~ 8월 1일
4.4. 막간
4.5. 2차 공격 -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 1204년 4월 8일 ~ 4월 13일
4.6.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5. 결과
5.1. 라틴 제국의 성립
5.2. 망명국들의 성립
5.3. 동지중해의 여왕
5.4. 그 외
6. 평가
6.1. 동유럽과 서유럽의 관계 파탄과 이슬람으로의 전향
6.2. 문화재 유실
6.3. 지중해의 방파제 역할의 공백 → 멸망 이후, 신항로 개척의 요구
6.3.1. 정교회 문화권의 힘의 축소
6.4. 시오노 나나미의 평가와 이에 대한 비판
6.5. 결론


1. 개요


'''제4차 십자군 전쟁'''
Quatrième croisade
[image]
'''시기'''
서기 1202년 ~ 1204년
'''장소'''
달마티아, 그리스, 트라키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원인'''
제3차 십자군 원정의 실패.[1]
'''교전국'''
[image]
[image] '''베네치아 공화국'''
[image] 신성 로마 제국
[image] 몬페라토 변경백국
[image] 플란데런 백국
[image] 프랑스 왕국
[image] '''동로마 제국'''
[image] 헝가리 왕국
[image] 불가리아 제2제국
'''지휘관'''
[image] '''엔리코 단돌로'''
[image] 피에트로 치아니
[image] 오토 4세
[image] 보두앵 6세 드 에노
[image] 앙리 드 에노
[image] 보니파시오 델 몬페라토
[image] 조프루아 드 빌라르두앵
[image] '''알렉시오스 앙겔로스'''‡
[image] 이사키오스 2세
[image]
[image]
[image] '''알렉시오스 3세'''
[image] 알렉시오스 두카스X
[image] 콘스탄티노스 라스카리스
[image] 테오도로스 라스카리스
[image] 테오도로스 만카파스
[image] 레온 스구로스
[image] '''임레'''†
[image] '''칼로얀'''
'''병력'''
십자군: 12,000명
베네치아군: 10,000명
베네치아 전선 210척
15,000명
전선 20척
'''피해'''
불명
사상자: 2,000명
'''결과'''
동로마 제국의 멸망, 라틴 제국의 성립.
'''영향'''
정교회의 총본산인 로마 제국의 일시적인 멸망과 4차 십자군의 실패로 인한 교황청의 권위 추락.
동로마 제국의 망명 왕조인 니케아 제국, 트라페준타 제국, 에페이로스 전제군주국의 성립.
십자군의 괴뢰국가 라틴 제국, 테살로니카 왕국, 아카이아 공국의 성립.
베네치아 공화국의 에게 해 제해권 장악.

2. 배경



2.1. 예루살렘 왕국의 상황


한 때 레반트 해안 일대를 장악하고 다마스쿠스, 이집트 등을 위협하던 예루살렘 왕국의 상황은 비참했다. 영토는 아크레 등의 해안지대로 쪼그라 들어 이슬람의 바다속에 고립된 상황이었고, 트리폴리 백국안티오키아 공국의 상황도 마찬가지여서 본거지와 그 주변만을 보전하고 있었다. 마누일 1세 시절 혼인 동맹 등으로 이끌어낸 동로마 제국의 지원도 헛되이 날려버렸고 동로마 제국의 상황도 악화되면서 더이상 지원을 받기는 힘들어 보였다. 결국, 얼마 전 제3차 십자군 원정이라는 대규모 지원이 있었음에도 다시 서유럽에 손을 벌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2.2. 동로마 제국의 상황


제3차 십자군 원정 당시 프리드리히 1세와 갈등을 벌이던 이사키오스 2세의 실정을 보다 못해 동생을 끌어내리고 제위에 오른 알렉시오스 3세가 황제였으나, 이미 안드로니코스 1세 시절을 시작으로 내부 상황은 물론 외교까지 파탄 나버린 상황이었다. 알렉시오스 3세가 필사적으로 수습한 끝에 제국은 간신히 안정되어 가고있었으나, 이미 하인리히 6세의 협박에 굴할 정도로 국방력이 망가진 제국은 십자군의 결성을 지켜보며 그저 자신들이 마지막까지 보전하고 있던 부(富)와 쪼그라든 영토에 불똥이 튀지않게 처신 할 수밖에 없었다.

2.3. 신성 로마 제국의 상황


제3차 십자군 원정프리드리히 1세는 대군을 이끌고 원정에 나섰으나, 본인의 죽음으로 원정을 망쳐버렸다. 뒤를 이은 장남 하인리히 6세는 아버지가 확보하지 못했던 상징적인 땅, 이탈리아[2]를 확보하여 진정한 '로마 제국'으로서 유럽 세계를 주도하고자 했고 실제로 군사력을 통해 시칠리아 왕국을 붕괴시키고 황후를 시칠리아 왕국의 계승자로 만듬으로써 이를 실현하였다. 야심많은 황제는 동쪽으로 눈을 돌려 자신의 동생과 동로마 황제 알렉시오스 3세의 질녀인 이리니 앙겔리나와 결혼시켰으며,[3] 십자군 원정을 위한 군비라며 동로마에 조공을 요구하는 등 노골적으로 야심을 드러내었다.
그러나 황제는 1197년 32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해버리고 말았다.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2세는 불과 3살에 불과하여 그의 후계자 선출을 두고 제국은 혼란에 빠져들었다. 슈바벤필립이 후계자로 선출되었으나 타협책으로 선출된 그의 황권은 미약했다. 프리드리히 2세가 멀쩡하게 살아있었고, 벨프 가문오토 4세 또한 반 호엔슈타우펜 제후들, 교황, 잉글랜드 플랜태저넷 왕가 등의 지지를 바탕으로 강력하게 제위를 노리고 있었다. 이렇게 제국 내부가 혼란스러워지자 십자군 원정은 부차적인 문제가 되어버렸다.

2.4. 프랑스 왕국, 잉글랜드의 상황


두 왕국은 제3차 십자군 원정 때의 주요한 참가국이었으나, 이번에는 참가할 형편이 못 되었다. 당시 잉글랜드는 프랑스 서부 일대에 프랑스 왕보다 더 많은 영토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명목상의 상위 군주인 프랑스 왕들은 이를 못마땅해 하고 있었다. 특히 냉철한 현실주의자인 필리프 2세는 주변의 백안시에도 불구하고 3차 십자군 원정 도중에 귀국, 아직 원정 중이던 리처드 1세와 왕제 존 사이의 알력을 이용하여 이득을 취하고자 하였다. 한때 리처드 1세살라딘과 평화 조약을 체결하고 서둘러 귀국하여 계획이 무산되는 듯하였으나, 1199년 리처드가 어이없게 사망하여 존 왕이 왕위에 오르자 이를 기회로 삼아 1202년부터 전쟁을 벌여 프랑스 내의 영국 영토를 되찾기 시작했다. 제4차 십자군 원정의 준비 기간은 1198년 ~ 1202년이었으므로, 사실상 양국의 왕들은 원정 참여가 불가능했다.

2.5.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상황


1198년 1월 37세의 젊은 나이로 교황의 자리에 오른 인노첸시오 3세는 야심만만한 사나이였다. 전임 교황인 첼레스티노 3세는 막강한 하인리히 6세에게 짓눌려 힘겨운 임기를 보냈으나, 인노첸시오 3세에게는 시칠리아 왕국의 왕이 된 3세의 어린 프리드리히 2세의 섭정이 되는 등 행운이 따라주었다.
하인리히 6세의 동생인 로마왕 슈바벤의 필립은 이탈리아 전역을 다시 확보하고 싶었지만, 막 제위에 오른 데다 대관식을 치르지도 못했고, 그 대관식을 치러줄 교황이 시칠리아 왕국을 등에 업고 있었으므로 어려움을 겪고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황과 기독교의 권위를 높이고 주변 군주들의 주의를 돌릴 수 있을뿐더러 자신의 명예도 높일 기회가 찾아왔다. 빈사 상태의 예루살렘 왕국이 성지 회복을 외치며 원조를 요청하고 있었던 것이다. 성지 회복은 전임 교황이 이루지 못한 일이었기에 야심많은 교황에게 매력적인 것으로 비추어졌다.

2.6. 베네치아 공화국의 상황


베네치아는 당시 막강한 부와 강력한 해군력을 갖춘 알짜배기 강국이었다. 바실리오스 2세, 알렉시오스 1세 등 동로마 황제들에게 해군력을 지원해준 대가로 통상 특혜를 부여받은 베네치아는 지중해 무역으로 엄청난 이윤을 창출할 수 있었고, 한때 상업 공화국으로서 독보적인 지위를 구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베네치아의 지위는 흔들리고 있었다. 제노바, 피사, 아말피, 안코나 등 경쟁자들이 십자군 전쟁을 발판으로 성장하고 있었고, 이들은 동로마 측과 차례로 통상 조약을 체결했다. 주요한 항로와 거점, 상품 등을 쥔 동로마와의 관계도 문제였다. 막강한 부와 해군력을 가진 베네치아는 요안니스 2세의 치세에 해군력으로 동로마 측을 곤란하게 했었으나 상업 활동 간의 갈등으로 촉발된 1171년 ~ 1172년간의 해전에서는 재건된 동로마 해군에게 패퇴당했다. 이후 1185년 ~ 1186년에 해군력을 지원하는 대가로 다시 통상 조약을 체결하면서 상업 활동을 지속하고 투자도 재개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으나, 내심 자신들의 생명선인 상업 활동을 좌우할 수 있는 제국에 대해 다른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
결국 베네치아는 태생이 해운 도시 국가였기에 타국에 대해 해군력과 자금력 이외의 강제력을 가지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국력의 근간인 상업 이익을 도모할 수만 있다면 누구든 딱히 적대하지를 않고 그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태도를 십자군 전쟁 시기동안 취했다.
때문에 베네치아 측은 1198년 교황이 4차 원정을 위한 십자군을 외칠 때 동년 동로마 제국 측과 통상 조약 갱신을 알렉시오스 3세금인칙서를 통해 확인한 상황이었다. 동시에 서유럽 영주들의 십자군의 수송을 1201년에 받아들였고 이집트를 목적지로 1202년 6월 24일경에 출발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면서 1202년 막 술탄의 자리에 오른 이집트 아이유브 왕조의 알 아딘과 통상 조약을 맺었다.
즉, 상업적인 이득을 위해서는 양다리든 그 이상이든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손님'이 빚쟁이가 되자, 이후 베네치아는 칼자루를 쥐게 된다.

3. 준비



3.1. 모집


1198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성지 회복을 외치며 조서를 발하였다. 그러나 유럽 군주들의 상황이 원정을 떠날 상황이 아니었고, 가장 열성적으로 많은 것을 투자한 리처드 1세 등 2, 3차 원정 참가자들의 결과가 썩 좋지 않았기에 반응은 차가웠다. 교회가 가라는 대로 가봤자 돈과 인력을 날리고 이득도 못 건질 텐데 왜 가겠는가?
그러나 교황을 비롯한 성직자들은 꾸준히 선동을 펼쳤고, 결국 프랑스계의 기사와 영주들이 주축이 되어 그럭저럭 구색을 갖추게 되었다. 상파뉴, 블루아, 아미앵, 플랑드르, 부르고뉴 등 프랑스 동북부계가 주축이 되었고, 추가로 몬페라토 후작 보니파시오가 신임 사령관이 되면서 몬테라토도 합류하게 되었다. 기사 4,500명, 종자 9,000명, 보병 2만 등 약 33,500명의 대병력이 모일 것으로 예상되었으며 교황은 기뻐하며 대사, 은사 등을 약속하였다.
십자군 인사들의 회의를 통해, 목표는 아이유브 왕조의 근거지인 이집트가 되었다. 성지 회복을 타이틀로 내걸었으나 성지를 회복하더라도 가까운 이집트에 적의 근거지를 둔다면 유지하기 힘들 것으로 보였고, 또 부유한 이집트는 많은 전리품을 약속할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4] 이동 경로로는 해로가 채택되었다. 이전까지의 원정을 돌이켜 봤을 때 육로원정은 각종 위험과 원정로 상의 현지 세력과의 갈등을 야기한다는 것이 증명되었기에, 해로가 상대적으로 안전해 보였다. 이처럼, 과거의 십자군 규모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나름의 학습을 통해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원정이 계획 되었다.
그러나 해로를 택하고 보니 '''탈 배가 없었다.''' 여기서부터 모든 것이 어그러지기 시작한다. 자체적인 함대가 없었기에 해군력이 강력한 해운 상업 공화국들이 물망에 올랐는데, 제노바 공화국이 이를 거절하여 베네치아 공화국과 협상하게 되었다. 십자군 인사들은 1201년 5월에 베네치아를 방문해 엔리코 단돌로 원수를 만나 협상하였다. 33,500명의 병력을 이집트로 실어다 주고 9개월 분량의 보급을 책임지는 대신, 은화 8만 5천 마르크와 점령지의 영토 일부를 대가로 지불하기로 한 것이다. 베네치아 측은 상업활동을 축소하면서까지 약속을 지키고자 하였고 500여척에 달하는 대함대를 갖췄다.

3.2. 자금난


그러나 약속한 날짜인 1202년 6월이 돼도 집결한 병력이 부족하자 문제가 되었다. 원정군 전체의 규모가 줄어든 것은 물론, 수송비를 십자군 영주들 각각이 내는 돈으로 충당할 계획이었기 때문이었다. 10월이 되기까지 십자군 지휘부는 집결을 기다렸는데, 그럼에도 절반에 못 미치는 1만 2천여명 밖에 모이지 않았다. 협상 당시 허세를 부려서인지 실제로 영주들의 사정이 악화 되었던지 간에 전체적으로 비협조적인 분위기로 인해 병력이 모자라게 된 것이다. 그 당시에 가장 초창기 프랑크군이 요구했던 금액은 '''오직''' 84000마르크 뿐이었다.
십자군은 자산을 파는 등 돈을 쥐어짰으나 5만 1천여 마르크 밖에 모으지 못했다. 그러자 출병조차 못한 채 빚쟁이가 될 위기에 처한 십자군 측은 마찬가지로 손해를 보고있던 베네치아 측이 8월 경에 가져온 제안을 진지하게 고려하기 시작했다.

3.3. 헝가리 보호령, 자라 습격 계획 채택


당시 달마티아 지방의 헝가리 보호령인 자라[5]를 공격하여 부족한 돈을 충당하고, 또 부족한 돈을 내주겠다는 제안이었다.
이렇게 되면 십자군 측은 놀고있는 대병력을 이용하여 돈을 벌 수 있었으며 베네치아 측은 헝가리 왕의 보호를 받는데다가 지상 전력이 부족하여 공략하기 곤란한, 요충지의 경쟁 도시를 이참에 제거해서 좋았다.
물론 '십자군'이라는 공개적인 간판을 내세운 주제에 돈이 없다는 이유로 같은 기독교계 도시를 약탈한다는 것이 상식을 벗어난 개막장 행위임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 이에 반대하는 일부 인사들이 떠나기도 하였으나 결국 9월이 되어 베네치아 측의 제안을 받아들인 십자군은 집결을 기다린 끝에 10월 8일 출발하였다.

4. 진행



4.1. 자라 공략 : 1202년 11월 10일 ~ 23일


한달여의 항해 끝에 1202년 11월 10일, 십자군은 자라에 도착하였다. 복잡한 해안선과 절벽 등 험한 지세가 지휘부를 난감케 했지만, 성벽에 걸린 십자가와 같은 기독교인들을 공격한다는 사실, 그리고 이들을 쫓아온 교황 특사의 맹비난이 더욱 공격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십자군은 출병해야했고, 출병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베네치아 측이 이집트의 해안 요새를 공략하기 위해 준비한 특수 상륙선을 동원한 끝에 11월 23일, 자라를 함락시켰고 흥분한 십자군은 신나게 약탈을 벌여 필요한 돈을 충당했다. 그러나 베네치아인들과 영주들만이 전리품을 차지했고 일반 기사나 병사들에게는 전리품이 전혀 돌아가지 않았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격분했다. 자라는 엄연히 로마 가톨릭 교회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고, 교황인 자신의 이름으로 시작된 십자군이 같은 기독교계, 그것도 엄연한 가톨릭 도시를 공격한 것은 상식 밖의 일이자 교황 자신을 모욕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자라의 보호자인 헝가리 측도 교황에게 파문을 요구하자, 교황은 결국 얼마 전에 대사·은사를 내린 십자군은 물론 공범인 베네치아 공화국에게 파문을 날렸다. 베네치아와 십자군 측이 반발하며 필사적인 통사정을 하였으나 교황의 입장은 변함이 없었다.
그렇지만 십자군은 해체되지 않았다. 교황의 서신은 십자군 지도부에 의해 은폐되었고 대신 십자군에 참전한 일선 성직자들이 사면령을 내렸다. 이는 명백한 월권 행위였지만 이미 십자군 지도부는 돈의 맛을 본 상황이었다. 이제부터는 교황의 통제력이 전혀 듣질 않는 상황이 된 것이다.

4.2. 의외의 제안


자라를 함락시킨 십자군이 월동 중이던 겨울, 십자군 지휘부와 동로마 제국의 폐위 된 이사키오스 2세의 아들이자 현 황제 알렉시오스 3세의 조카인 알렉시오스 황자가 접선했다. 당시 로마 왕 - 사실상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 이던 슈바벤의 필립#s-1.1.1[6]의 협조 속에 십자군 인사들과 만난 알렉시오스는 아버지와 자신의 제위를 되찾아 달라고 요청했으며 대가로 엄청난 조건을 내걸었다. 바로...

1. 십자군이 지고 있던 빚 탕감과 이집트 원정을 위한 비용으로 20만 마르크를 지불한다.

2. 이후 성지 수호를 위해 병사 1만과 기사 500여명을 파견한다.

3. 교황수위권을 인정하고 동방 정교회를 로마 가톨릭의 산하로 통합시킨다.

제위를 되찾아 달라는 요청은 곧 중세 유럽 최대의 도시이자 난공불락의 도시인 콘스탄티노폴리스 공격이라는 엄청난 요구였지만 대가 역시 엄청났다. 당시 동로마 제국과 공조하던 교황 측은 이미 이 황당한 제안[7]을 거부한 상황이었으나, 물자도 부족했고 병력 부족으로 이집트 원정을 고민하고있던 십자군 측은 사령관 몬페라토 후작의 개인적인 사정[8][9]까지 더해져 승낙하고 만다.
베네치아 측 역시 이를 환영했다. 일단 성공하면 손해를 더 보지 않을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그간 사이가 썩 좋지 않았던 동로마 제국이 허약해진[10] 틈에 친 베네치아적인 인물을 제위에 올리고 특혜를 얻어 경쟁자들과의 차이를 벌리고자 하였다.
이러한 이해 관계가 얽힌 끝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는 것이 결정되었고, 연합군은 1203년 4월 자라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알렉시오스 앙겔로스 황자는 디라히온코르푸에서 지지자들과 연합군의 도움으로 알렉시오스 4세로 추대되었다.

4.3. 1차 공격 : 1203년 6월 24 ~ 8월 1일


[image]
본래 출정일이었던 1202년 6월 24일 로부터 정확히 1년이 지난 1203년 6월 24일, 십자군 - 베네치아 연합군의 대함대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앞 마르마라 해에 도달했다. 규모도 규모거니와 그 목적 역시 저지되어야할 것이었지만, 이미 해군이 붕괴해서 베네치아의 해군력을 지원받던 동로마 측은 그저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동로마 측의 입장에서는 금인칙서를 통해 베네치아 공화국과 동맹을 맺고 있었고, 십자군의 방아쇠를 당긴 교황청 측에서 알렉시오스 황자를 지원하지 않을 것이라 언질을 해주었기에 십자군의 침공은 그야말로 갑작스러웠다. 한달 전 즈음인 1203년 5월에서야 알렉시오스 4세라며 디라히온에서 떠들어 댔는데, 디라히온에서 수도까지는 직선으로도 800km 가까이 거리가 있었다. 당시의 통신 기술을 생각해보면 동로마 정부 입장에서는 날벼락에 가까웠을 것이다.
처음 연합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반대편에 있는 칼케돈에 교두보를 마련하고자 했다. 그러나 나름대로 방비가 갖춰져 있어서 결국 교두보 확보에 실패했고, 소규모지만 요격군이 나타나 배후를 위협하자 이를 격퇴시킨 연합군은 곧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일면을 차지하는 금각만 너머의 갈라타를 먼저 공략하기로 결정했다.
갈라타 공략을 위해서는 금각만을 막고있는 쇠사슬을 끊는 것이 우선이었다. 알렉시오스 3세도 이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쇠사슬을 지키기 위해 이를 관리하는 망루를 수비했는데 결국 전투 끝에 물러났고, 갈라타 지구가 점령되면서 금각만과 도시 북쪽 6km에 달하는 지역이 위험에 노출되어버렸다. 그리고 금각만 방향에서 연합군 육해군이 공격하는 공성전이 개시 되었다.
7월 11일에 1차 공격이 있었으나 격퇴 되었고 7월 17일 2차로 총공격이 감행 되었다. 황제인 알렉시오스 3세가 직접 지휘하는 등 공방전은 격렬했다. 연합군 측의 상륙선을 동원한 공성 능력은 강력했으나, 난공불락의 성벽과 방어자로서 이점을 가진 동로마 측의 수비력이 이를 능가했다. 엔리코 단돌로의 격려로 한 때 25개의 망루를 점령 하는 등 성공적으로 흘러 가는 듯 했던 전투는 바랑인 친위대가 투입되는 등 격전 끝에 마지막에는 동로마 측으로 기울었다. 그러나 연합군이 퇴각하면서 지른 불이 대화재로 번지면서 피해가 커져 영 모양새가 좋지 않게 되자, 이에 시민들이 분전한 황제를 비난하면서 상황이 이상하게 굴러가기 시작한다. 악화된 여론과 전력의 부족을 통감한 황제는 외부에서 지원을 끌어오기 위해 정예병, 상당한 자금을 가지고 몽진을 떠난다.
악화된 여론으로 인한 낮은 정권 지지율 탓인지 수도의 시민들은 과거 황제였던 이사키오스 2세와 연합군이 내세운 알렉시오스 4세 부자를 공동 황제로 올리기로 합의했다. 어차피 부자가 공동으로 황제에 오르는 것이 일상적인 것이어서 표면적으로는 이상할게 없었고, 동로마 측은 일단 공격받을 여지가 없어서 좋았으며, 연합군 측은 맹인이 된 이사키오스 2세와는 달리 자신들이 추대한 알렉시오스 4세를 통해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었으므로 좋았다.[11] 그렇게 사태는 일단락 되는 듯 했다.(1203년 8월 1일)

4.4. 막간


아들덕에 제위를 되찾은 이사키오스 2세는 곧 난관에 봉착했다. 멍청한 아들이 다른 사람 손에 놀아나는 줄도 모르고 감당치 못할 빚을 진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십자군 - 베네치아 연합군이 아들의 요구를 들어 자신을 복위시켰으니 대가를 치러야 했는데, 어느 것 하나 들어주기 어려웠다. 아무리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십자군이 옹립한 황제와 그 정부는 고작 수도와 인근 지역만을 장악하고 있는 괴뢰 정부에 불과했으며 적법한 황제인 알렉시오스 3세가 수도 밖에서 반격을 위해 활동하고 있었다. 이러다 보니 군사력 파견은 불가능했고 교회 통합은 더더욱 불가능했다. 그나마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해 보였고 연합군 측도 가장 원했던 조건인 은 20만 마르크[12]를 지불하려고 창고를 열어 재정 상태를 확인해 보니 아뿔싸, '''돈이 없었다.'''
동지중해를 호령했던 마누일 1세 시절 같았으면 무제한으로 비유될 자금력과 마르지 않는 재정이 실재했겠으나, 이사키오스 스스로가 말아먹고 형이 비축금을 가지고 떠난 뒤였다. 자신도 빚쟁이였던 연합군 측은 체납에 짜증나서 닥달하였고, 이에 못 이긴 황제는 결국 세금을 추가로 물리고 황실의 보물과 성물을 팔고 교회의 재산을 징발하여 돈을 마련하려 하였다. 돈을 긁어모으자 당연히 시민들에게서 불만이 터져 나왔고, 교회는 재산이 침해되는 와중에 교회 통합에 대한 밀약까지 듣게 되어 분개했다. 게다가 아들 알렉시오스 4세는 십자군에 의해서 황제가 된 만큼 십자군이 물러나면 반란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 십자군의 주둔을 허용하고 그들에게 돈을 추가로 약속하며 자신의 호위까지 맡겼고, 그를 통해 베네치아인이 정계에도 영향력을 행사하니 귀족과 시민들은 더욱 분노하였다.
그럼에도 돈이 부족했다. 박박 긁어모았음에도 절반인 10만 마르크 정도밖에 못 마련한 것이다. 황제 부자는 일단 모은 10만 마르크를 라틴인들에게 지불하고, 알렉시오스 4세는 상당한 자금과 병력을 가지고 수도 밖에서 저항을 계속하는 알렉시오스 3세를 잡기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그동안 폭동이 터져서 수도에 거주하던 라틴인들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해 버렸다. 이에 분노한 연합군 측은 보복을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 내의 무슬림 지구를 목표로 공격했지만, 그 과정에서 도시에 거주하던 수많은 무슬림뿐만 아니라 정교회인들까지 연합군에게 학살되거나 약탈당했다. 결국 분노한 시민들이 종교를 가리지 않고 연합하여 민병대로 반격에 나서자 열세에 몰린 연합군은 도망치기 위해 불을 질렀고, 이것이 '''또''' 대화재로 번져 수일간 도시를 태우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이후로도 크고 작은 충돌이 발생했고, 시민과 연합군 측의 갈등은 극심해져갔다.
알렉시오스 4세가 겨울에 빈손으로 돌아왔을 때 도시는 대화재와 폭동, 연합군의 약탈로 황폐해져 있었고 황제에 대한 불만은 살의에 이르고 있었다. 아버지와 갈등을 벌이던 알렉시오스 4세는 사태를 해결도 못 하고 공포에 질려 십자군의 호위하에 황궁에만 틀어박혀 그들에게 줄 돈만 모으는 지경이 되었고, 그런 황제 부자에게 크게 실망한 귀족과 시민들은 대립 황제를 선출하기 위한 회의를 열어버렸다.
그 와중에 프로토스파타리오스(Protospatarios)인 황제 신변 책임자 알렉시오스 두카스[13]가 시민들과 십자군, 황제 사이를 중계하다 쿠데타를 일으켜 황제 부자를 구금하는 일이 일어났다. 쿠데타 와중 이사키오스 2세가 미심쩍은 죽음을 맞았고(1204년 1월 27일 ~ 28일), 대립 황제도 곧 제거되었다. 알렉시오스 두카스는 2월 초에 스스로를 알렉시오스 5세로 선포하였다.
자신들이 옹립한 황제 부자를 실각시켰기 때문에 연합군(십자군)과 신황제(알렉시오스 5세)의 사이는 매우 적대적이었다. 알렉시오스 5세는 곧 군대를 모집하고 성벽을 수리하는 등 전투 준비를 서둘렀고, 이렇게 모은 군대로 연합군을 공격했다. 사태의 급진전에 연합군은 당황했으나 침착하게 대응하여 동로마 군을 역관광시켜 버린다. 알렉시오스 5세는 1204년 2월 8일, 엔리코 단돌로 원수를 만나 협상하였으나 곧 결렬되었고,[14] 같은날 알렉시오스 4세는 교살되었다. 이에 분기탱천한 연합군 측은 재공격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짧은 휴식은 그렇게 끝났다.

이븐 알 아시르(Ibn al Athir)가 쓴다. 로마(Rum)의 왕은 싸우지도 않고 도망쳐 버렸고, 프랑크인(Franj)들은 그들의 젊은 후보자를 왕좌에 앉혔다. 그러나 그는 이름 뿐인 권력만을 가지고 있었으며, 모든 결정은 프랑크인들이 내렸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매우 무거운 공물을 부과하였으며 그 지불의 불가능함이 드러나자 모든 금과 보석들, 심지어 십자가와 메시아상의 일부를 이루던 것까지 약탈해 갔다. 그에게 평화가 있기를... 그러자 들고 일어난 로마인들은 젊은 군주를 죽이고 프랑크인들을 도시에서 내쫓았으며 성문에 바리케이드를 세웠다. (아민 말루프(Amin Maalouf), 존 로스차일드(Jon Rothschild)(역), 『The Crusades Through Arab Eyes』, (New York, Schocken Books, 1984년), p.221.)


4.5. 2차 공격 -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 1204년 4월 8일 ~ 4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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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겨울을 세는 와중에도 회의감를 느끼고 탈주자가 이어졌던 십자군 측이었으나, 상황이 여기까지 이르게 되자 강경파가 득세하게 되었다. 베네치아 측의 대표인 엔리코 단돌로가 연합의 주도권을 쥐게되었고, 전리품 분배와 사후 계획 따위를 논하게 되었다. 십자군 측은 돈도 못받고 성지 구경도 못하게 된 판이었으나, 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켜 전리품을 얻고 빚도 갚자는 의견이 대세가 되었다.
베네치아 측의 생각도 이때 굳어지게 되었다. 당초에는 계산 착오로 인한 손해를 만회하기 위해 탈선을 저질렀지만, 폭주하는 군사력을 주도하게 된 상황에서 본래 동로마에 대한 고민이 결합되자 이후의 계획을 생각하게 되었다. 주요한 도시와 섬, 항구 등을 가지게 되면 각종 상품을 독점적으로 취급할 수 있었고, 항로도 통제할 수 있었다. 게다가 당장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키면, 경쟁 상대를 동로마에서 쫓아내고 흑해 무역을 독점할 수 있었다.
4월 8일, 9일의 이틀동안 서전을 벌인 연합군은 생각보다 도시의 방어 태세가 단단한 것을 보고 당황했다. 연합측은 10일,11일 간 갈라타로 물러나 다시 본격적인 공성을 준비했다. 그 즈음 교황이 보낸 특사가 도착하여 기독교인의 도시를 공격하지 말라고, 자라를 반복하지 말라고 하였으나 이는 오히려 연합측을 분개하게 만들었다. 반로마 감정과 전투에 흥분해있던 연합측은 전부 계약 불이행으로 동로마 측이 초래한 것이라며 특사를 쫓아버리고 최후의 공세를 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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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가 직접 지휘하고, 시민들도 같이 저항하고 다시 바랑인 친위대가 투입되는 등 격렬한 전투가 일어났으나, 한번 함락된 성벽은 1차 공격 때 만큼의 역할을 못했다. 4월 12일이 되자 연합군은 성벽을 점령하여 교두보를 확보하는데 성공하였고, 알렉시오스 5세는 저항 의지를 상실하여 다른 인사들과 함께 황도를 빠져나갔다. 그 와중 콘스탄티노스 라스카리스가 황제로 선포되었으나 바랑인 친위대를 설득하는데 실패하였고, 곧 연합군을 피해 탈출하였다. '''그렇게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사상 최초로 함락되었다.'''

4.6.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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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름끼쳤다'''

빌라르두앵의 조프루아(Geoffroi de Villehardouin),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De la Conquête de Constantinople) 中

운명의 4월 13일, 성내를 살펴본 연합군은 방어군의 저항 의지가 사라진 것을 확인했다. 동로마 측에서는 십자군 영주를 새 황제로 맞이하고자 하였으나, 연합군에는 약탈에 굶주리고 악에 받힌, 동로마인들을 증오하는 2만여의 군대가 관례대로 3일간의 약탈을 바라고 있었다. 지휘부 역시 22년 전 제위 찬탈 과정에서 무관한 서유럽인 수천 명을 학살한 로마 황제 안드로니코스 1세의 학살에 대한 보복심에다, 자신들을 엿먹인 동로마를 증오하며 약탈을 강하게 욕망하고 있었으므로 약탈을 허락하였다. '''그리고 그야말로 대약탈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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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띄고 손에 닿는 모든 것들에 대해 파괴, 약탈, 방화가 벌어졌다. 조금이라도 값나가 보이는 물건은 약탈되었고 교황의 사전 경고에도 불구하고 교회와 성소 역시 오물이 갈겨지고 파괴되고 불살라졌다. 사람도 예외는 아니었다. 남녀노소, 귀족, 성직자들을 가리지 않고 폭행, 살해, 강간, 납치 등이 가해졌다. 소녀, 처녀, 유부녀는 물론 고귀한 귀족 여성들에 심지어 수녀들까지 끌려나와 능욕당하였다. 고대 로마 때부터 전해 내려온 예술품, 유물, 성물도 마찬가지였으며 황제들의 무덤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판토크라토 수도원의 묘역에 있는 황제의 관들이 끄집어 내져 부장품들이 약탈되었으며,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유골조차 이를 피해가지 못했다. 햅도몬 궁전에 안장되어 있던 바실리오스 2세의 묘역은 파헤쳐지고 시신은 길거리에 질질 끌려다녀지다가 내버려졌다.[15] 천여 년을 이어 오던 성당의 많은 성화들도 이교도가 그렸다고 하여 파괴되고 긁혀져 손상됐다. 그리고 새롭게 가톨릭 화가가 그린 성화로 채워졌다가 나중에서야 탈환한 동로마인들이 이를 다시 지우고 그려야 했다.

모술의 역사가가 쓴다. 모든 로마인들이 죽임을 당하거나 약탈당했으며, 프랑크인들에게 쫓긴 몇몇 유지들은 그들이 '소피아'라고 부르는 큰 교회로 가서 피난처를 찾으러 시도했다. 십자가성경을 품고 나간 사제수도자들은 공격자들에게 목숨을 구걸하였으나, 프랑크인들은 이러한 간청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프랑크인들은 그들 모두를 죽였고 교회를 약탈했다.

아민 말루프(Amin Maalouf), 존 로스차일드(Jon Rothschild)(역), 『The Crusades Through Arab Eyes』, (New York, Schocken Books, 1984년), p.221-222.)

3일간의 지옥이 구현된 끝에, 연합군은 은 90만 마르크[16]에 달하는 전리품을 약탈해 본전을 넘어선 큰 수익을 벌었다. 남은 것은 수십만의 시신과 난민, 폐허만 남은 도시였다. 가장 부유하고 유서 깊은 황제의 도시는 그렇게 몰락했다.

5. 결과



5.1. 라틴 제국의 성립


베네치아 측에 3/8의 영토를 분배하고 나서, 나머지 5/8의 영토에는 자칭 "로마 땅의 제국(Imperium Romaniae)"이 들어섰다.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수도가 되었으며, 테살로니키, 펠로폰네소스 반도 등이 왕국과 공국으로 배분되었다.
몬페라토 변경백 보니파치오가 제위를 바랐으나, 비교적 제국령에 가까운 영지를 가진 황제를 바라지 않았던 베네치아 측은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을 밀어주었고 5월 12일 하기아 소피아에서 대관식을 치러 보두앵 1세가 되었다.

5.2. 망명국들의 성립



5.2.1. 니케아 제국


라스카리스 가문의 테오도로스 1세가 니케아로 탈출하여 세운 동로마 제국의 망명 정권이며, 테오도로스 1세요안니스 3세라는 걸출한 명군이 등장하여 십자군 국가들과 다른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콘스탄티노플을 수복하여 제국을 재건하는데 성공하였으나 수복 직후 미하일 8세가 제위를 찬탈하여 팔레올로고스 왕조를 세우면서 지방정권으로 격하하였다.

5.2.2. 트라페준타 제국


콤니노스 왕조 출신 안드로니코스 1세의 손자 알렉시오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십자군에 공격받자 혼란을 틈타 차지한 근거지인 트레비존드에서 자립, 알렉시오스 1세로 칭제했다. 하지만 니케아 제국에 막혀 서쪽으로 더 세력을 키우지 못한 채 지역 소국에 머물렀고 훗날 오스만 제국에게 멸망했다.

5.2.3. 이피로스 친왕국


앙겔로스 왕조 출신으로 두카스 왕조의 외손인[17] 미하일 1세가 이피로스에서 자립하여 세운 망명 정권이다. 초기에는 라틴 제국의 황제 피에르 1세를 생포해 옥사시키고 보니파시오 1세를 전사시켰으며 테살로니카 왕국을 멸한 뒤 '테살로니카 제국'을 칭하며 콘스탄티노플 코앞의 아드리아노플까지 점령해 제국의 재건 직전까지 갔으나 불가리아 제2제국에게 크게 패해 세력이 약화된 이후 니케아 제국이 펠라고니아 전투를 통해 패권을 확립하면서 경쟁에서 밀려났다.

5.3. 동지중해의 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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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 공화국은 '아드리아해의 여왕' 정도가 아니라 '''동지중해의 여왕'''이 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는 갈라타 조계 지역이 갈라타 '''따위'''가 될 만큼 많은 요지를 분배받았다. 아드리아 해에 접한 코르푸, 케팔로니아 섬 등은 물론 에게해에 있는 크레타를 필두로 하는 수많은 섬들이 베네치아의 몫이 되었고 그 외에도 육지의 주요한 항구 및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제하는 칼리오폴리스 까지 획득하여 흑해 무역을 독점하게 되었다.
그 외에도 동로마 장인들을 납치해 유리 등 기술집약적 산업까지 국산화하는데 성공했다.
그야말로 도박에 가까운 모험 끝에 가장 큰 이득을 보아서 기존의 '베네치아 공화국' 이자 '달마티아의 공작'이라는 칭호는 물론, '로마 제국의 3/8의 주인'이라는 명칭까지 획득하게 되었다.
이를 기점으로 동로마와 베네치아는 확고한 원수관계가 되었고, 재건되었다가 멸망할 때까지 동로마의 반베네치아 정서는 굳건했다.

5.4. 그 외


인노첸시오 3세
룸 술탄국
불가리아 제2제국
아테네 공국 - 4차 십자군 원정에 참가하여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자, 프랑스인 기사 오트 드 라로슈가 다른 참가자들과 함께 동로마의 영토를 나누어 아테네를 차지하면서 생긴 나라. 이후 1311년 해고된 카탈루냐 용병대가 아테네 공 발터가 이끄는 군대를 전멸시키고 1390년까지 아테네 공국을 지배했다.

6. 평가


추악하기 이를 데 없는 최악의 막장 드라마 그 자체다. 지금까지의 십자군원정은 물론 기독교 역사를 통틀어 가장 추악하기 그지없는 사건이었다. 베네치아 쪽도 상업 활동을 중단하는 등 국력을 총동원한 만큼 결과물은 얻어야 했지만 정작 함선을 주문한 당사자들의 자금 문제로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진 십자군은 결국 같은 크리스트교 국가를 공격하더니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하고는 라틴 제국이라는 허울 좋은 괴뢰 국가를 세우고 도시를 약탈하며 결국 거기서 정지하고 말았다.

6.1. 동유럽과 서유럽의 관계 파탄과 이슬람으로의 전향


4차 십자군 이전부터 동유럽과 서유럽, 가톨릭 교회와 정교회는 사사건건 분쟁이 일어났다. 서유럽은 군사적 우위를 가지고 십자군이라고 뻣댔으며 동유럽은 압도적인 경제적/문화적 우위를 가지고 서유럽을 깔보있다.(사실 4차 십자군 이전에 서유럽이 로마 제국에 비해 군사적 우위를 가졌던 것도 1183년~1204년 간의 기간 뿐이었다. 콤니노스 왕조, 특히 마누엘 대제 때의 로마 제국은 3차 십자군 정도는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정도였다.) 4차 십자군 이전에도 이런 분열이 있었고, 이사키오스 2세 부터 아예 서유럽을 무시하고 살라딘이랑 협약을 맺는 등 관계가 삐걱거렸다. 그 와중에 정말 되돌릴 수 없는 관계 파탄을 만들어 낸게 4차 십자군이다.
4차 십자군의 병크로 인해 동로마 제국의 많은 위대한 문화 유산들이 십자군 약탈자들에 의해 파괴되고 엄청난 문명적 재앙을 겪게 되었다.[18] 따라서 4차 십자군은 이에 대한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다. 게다가 같은 기독교도 종파로 나누어져 전쟁을 서로 벌이면서 기독교계의 분열을 더 부채질했다. 오죽하면 250년 뒤인 1453년, 오스만 제국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고 약탈했지만 로마인들은 그래도 이(오스만)들은 250년 전에 단돌로가 이끈 십자가를 든 기독교 악마보단 낫다는 평을 남겼을 정도였다.
과장이 아니라 4차 십자군과 60년 뒤 니케아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 이후에도 동로마 제국의 정치판에서 가장 핵심적이고 첨예한 문제는 자연스럽게 '어쩔수 없이 서방한테 신앙이고 뭐고 다 갖다 바친 다음 일단 살고 보자 vs 저 악마 같은 서방 새끼들한테 다시 의존하느니 차라리 이교도의 손에 긍지 있게 죽자'란 식의 친서방 vs 반서방파의 대립으로 흘러갔다. 이 와중에서 반서방파는 에페소르의 마르코나 옌나디오스 스콜라리오스 같은 라틴 점령기 서방 교회의 오만방자하고 폭압적인 모습에 아주 이를 부득부득 갈고 있던 정교회 고위 성직자, 신학자들이 많이 포진해 있었다.
오스만 제국의 정복 이후 이러한 동로마 제국 내 반서방파, 특히 신학적 반서방파들은 새로운 정복자들 또한 기본적으로 세금만 잘 바치고 충성만 하면 관용을 배풀 의향을 보이니 오스만 당국에 협조하여 오스만 제국이 비교적 연착륙하며 동로마 제국의 인구, 지정학적 기반, 국가 인프라를 그대로 흡수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고 오스만 제국이 수백년간 다양한 종교, 민족을 다스리면서도 국체를 유지할 기원이 될 밀레트 제도의 형성에 큰 역할을 했다.
상술한 제국 말기 대표적인 반서방파 신학자였던 옌나디오스 스콜라리오스가 메흐메트 2세가 정복한 신생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니예의 정교회 세계 총대주교로 취임한 이후 세계 총대주교좌가 비단 그리스뿐만 아니라 제국의 정교회 신민들을 모두 총괄하는, 오스만 제국의 정치 시스템 전체에서 봐도 굉장히 중요한 지위 중 하나로 그 위상을 유지했던 점만 봐도 정교회 내 반서방 정서가 얼마나 강했으며, 이것이 정치적 차원에서 오스만 당국에게 있어 얼마나 유리하게 작용했는지 알 수 있다.
즉, 동로마정교회에선 악마 중 악마로 악명을 남겼고, 이에 따른 반작용으로 정교회권, 특히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에 반서방 감정을 맹렬하게 일으켜 점차 지중해 세계 내의 독립된 정치 세력으로서 정교회권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워지자 아예 정교회 내 반서방파와 피정복민의 종교적 자치를 존중하는 무슬림 정복자들간의 새로운 커넥션을 만들어 주고 말았다.
이는 유럽사에서 미증유한 일이었다. 제1차 십자군 원정 출발 당시 교황 우르바노 2세의 연설이나, 레반트 성지의 십자군 제후국들이 형식적으로나마 동로마 황제의 봉신 자격으로 다스렸던 것만 보더라도 정치적, 문화적 대립과는 별개로 동로마권과 서유럽의 관계는 적어도 같은 기독교인이라는 최소한의 공감대는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4차 십자군과 이후 라틴 제국의 삽질로 인하여 정교회 동로마 - 슬라브 세계는 서방을 아예 근본이 다른 이질적이고 적대적인 존재로 인식하게 되었다.
물론 세계사 자체가 같은 종교나 민족끼리도 뒷통수치는게 일상이고 같은 기독교 국가끼리도 전쟁이 흔히 벌어지는게 일상다반사이긴 했지만 '이교도로부터 기독교인을 지키고 성지를 탈환한다는 십자군 원정'이라는 목적을 위해 군비와 군사를 모집하여 출범한 4차 십자군이 계속 같은 기독교를 공격한 행태는 본인들 스스로의 기준으로도 이율배반적이고 표리부동한 행위였다.

6.2. 문화재 유실


콘스탄티노폴리스 약탈로 인한 반달리즘 행위와 그에 따른 문화재 유실도 비판받고 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무덤은 로마 제국의 황릉 역할을 한 판토크라토 수도원의 묘역에 있었는데, 이때 십자군에게 약탈당하면서 파괴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뿐만 아니라 이전의 동로마 제국 초기의 황제들의 무덤들도 모조리 파괴되어서 무덤 양식이나 복식 등이 영원히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들(십자군)은 자신들에 내재 된 황금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황제의 도시를 약탈할 때 재화를 획득하는 새롭고, 타인의 이목에서 벗어나는 방법(도굴)을 생각해냈다. 그들은 성사도 성당의 성역에 마련된 판토크라토르 묘역에 있는 황제들의 묘실을 열어젖혔다.

이들은 밤새 이 모든 것들을 약탈하였고 황금 장신구, 진주 목걸이, 반짝이고 귀중하며 순수한 보석들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불법적이라고 해도 이를 취하였다. 그들은 또한 오랜 세월동안 피해를 입지 않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시신을 발견했다. 그들은 경의에 찬 눈으로 이를 바라보았으나 관에서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 (중략) 그들은 만사에 있어 총체적인 무관심과 불경심을 표했다고 할 수 있을것이다.

- 니키타스 호니아티스. '역사' 중에서

또한 4차 십자군의 가장 큰 오점이 있다면 그건 유럽의 방파제였던 동로마를 몰락시키고 라틴 제국을 세워 그 땅을 차지한 것이다. 게다가 여기까지는 백번 양보해서 국가의 이익이니 넘어간다 쳐도, 결정적으로 '''그 라틴 제국이 동유럽을 더 혼란시켰다는 것'''에 대해서는 비판을 피하기 힘들다.

6.3. 지중해의 방파제 역할의 공백 → 멸망 이후, 신항로 개척의 요구


동로마 제국이 비록 망해 가고 있는 나라이긴 했지만 1204년 이전까지는 이슬람 세력의 공격으로부터 유럽의 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었고, 4차 십자군이 건들지 않았다면 아나톨리아 지역을 기반으로 오스만 제국의 공세에 어느 정도 맞설 여력이 있었다. 아니, 룸 술탄국도 동로마 못지않게 망해가는 중이었으며 몽골이 날뛰고 있었음을 고려하면 망해도 이슬람 튀르크가 먼저 망하지 동로마가 망할 가능성은 적었고, 아나톨리아를 수복하며 열강이 될 여력이 있었다. 그 증거로 유럽에서 축출되고 아나톨리아의 반토막을 가진 니케아 제국조차 만 단위 대군을 동원할 수 있었다. 동로마의 파편 하나가! 그러나 그 군사력은 이슬람이 아니라 가톨릭을 향해 투사되었다(콘스탄티노플 탈환). 공교롭게도 몽골 침공으로 이슬람 세력이 몰락하면서 100여 년간은 별 일 없었지만, 그동안 동로마는 서유럽의 야망에 맞선 생존 투쟁으로 이슬람에 신경 쓸 여력 따윈 사치에 불과하였다.
결국 룸 숱탄국이 망하고 고만고만한 이슬람 소국들이 난립하게 되었는데, 그때는 니케아가 콘스탄티노플 탈환에 성공라 동로마를 재건한 후 가톨릭과 피터지게 싸우던 시점이었다. 즉 아나톨리아를 수복할 수 있었던 수십 년 동안, 동로마는 니케아의 자원까지 뽑아다 유럽전선에 붓는 중이었다.
이슬람 세계는 몽골의 침입에서 회복할 수십 년을 벌었고, 수많은 소국 중 하나였던 오스만국이 제국으로 성장, 육지와 바다 양쪽에서 동로마에 공세를 펼쳤다. 동로마는 이슬람 해적들과 오스만 군대와 싸우며 소아시아를 잃었고, 이어서 힘겹게 수복한 유럽영토까지 착착 상실하며 수도의 방위에 급급하게 되었다. 이는 1453년 제국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구원할 군대가 외부에서 들어와야 하는데 그 외부가 오스만 제국의 공격에 완전히 망해 버렸으니 그럴 수가 없게 된 것이다.(바꿔 말하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기 위해선 그 넓은 제국령을 모조리 점령한 다음이어야 했다. 사람으로 치면 팔다리 잘리고 목까지 잘렸는데 머리가 살아있는 수준.)
유럽도 이슬람 세력을 걷어내기 위해 수차례 십자군을 보내지만 가는 족족 졌고, 제국의 멸망과 함께 이슬람의 군대들은 금각만을 넘어 남유럽과 지중해로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오스만에 의해 지중해의 패권이 넘어가면서 신항로가 개척되고, 세계 무역의 중심지가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넘어가면서 베네치아 역시 몰락의 씨앗을 스스로 뿌리고 만 셈'''이다.
이때 넘어온 이슬람 세력은 무려 1차대전기까지 유럽에서 맹위를 떨쳤다.

6.3.1. 정교회 문화권의 힘의 축소


진짜 문제는 이전에 동로마의 권역이었고 이후 베네치아의 상권이 된 남유럽과 동지중해에서 십자군이 분탕쳐서 제국을 뒤엎어 갈갈이 찢고 그 권리를 뽑아 먹을 능력은 있어도, 이후 혼란을 감당할 능력이 없어 라틴 - 그리스 군소 나라들로 분열되어 서로 박터치게 싸워 동유럽 기독교의 힘만 폭락시켰다는 데 있었다.
결국 쇠퇴한 동로마, 세르비아, 불가리아, 왈라키아, 몰다비아 같은 정교회권 국가들이 산발적으로, 더군다나 자기들끼리도 싸워가면서[19] 오스만 제국의 파도에 저항할 뿐이었지만, 이들 가운데 오스만 같은 강대국은 하나도 없었기에 대국적 관점으로 볼 때 거침 없는 파도의 유속을 잠시 더디게 했을 뿐이다.
15세기 ~ 16세기를 들어 오스만 제국과 직접적으로 국경을 맞댄 나라들 중 그나마 오스만과 뻣대볼만한 강대국으로서 영토와 군사를 보유했던 건 헝가리 뿐이었고, 이 헝가리도 결국 체급과 근세적 군대를 굴리기 위한 정치 시스템의 차이를 극복 못하고 후녀디 왕조의 짦은 번영기가 넘어가자 1526년 모하치 전투에서 오스만에게 결정적으로 무너졌다. 결국 정교회권인 불가리아를 시작으로 세르비아가 멸망하고 왈라키아몰다비아가 무너진 후, 가톨릭인 헝가리 마저 오스만 제국의 신하국이 되면서, 서유럽은 오스만의 칼을 정면에서 받게 되었고, 빈까지 포위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신성로마제국은 베네치아, 스페인,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 언제라도 등을 돌릴 수 있는 동맹으로 삼아 가며 힘겨운 대 오스만 항쟁을 이어나가야 했다.[20] '''이들 십자군이 싸질러 놓은 똥을 후대의 유럽 국가들이 고스란히 뒤집어 쓴 것이다.''' 당대 십자군의 잠깐의 이득을 위해 후일의 유럽 전체에 거대한 위협을 가한 지정학적 공백을 만들어 버린 것이다.[21]

6.4. 시오노 나나미의 평가와 이에 대한 비판


한편 시오노 나나미는 관련 저서들을 통해서 그 시점에서 오스만 제국이 그렇게 성장할 줄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었겠냐고 열심히 옹호를 하지만, 단지 오스만이 문제가 아니라 그가 살았던 수백년 전부터 이슬람의 파도를 막아 오던 제국의 역할을 당대의 모든 사람들도 어느 정도 인정하고, 1차 십자군의 직접적인 원인이 룸 술탄국에 의한 동로마 제국의 압박 때문이었다는 것만 봐도, 현재가 아닌 당대의 관점에서도 상당히 근시안적인 발상이라는 점은 부인하기 힘들다 할 것이다.
하다못해 1054년 스스로 동로마 교회와의 단절을 선언한 가톨릭 교회조차도 이슬람 세력은 일단 막고 나서 생각해 보자고 말했을 정도다. 즉, 오스만 제국이라는 특정 국가가 성장할 것을 예측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근동의 이슬람 제국이 강력해지면, '그 칼끝은 동지중해에서 가장 거대하고 부유한 도시인 콘스탄티노폴리스와 동로마 제국, 그 너머의 동유럽 그리고 서유럽으로 향하게 된다는 것'은 당대에 이미 우마이야 왕조셀주크 제국의 사례로써 증명되어 예측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었다는 것.
게다가 이건 이슬람 세력의 문제가 아니라 로마 제국이 성립하기도 이전의 고대부터 이뤄져 온 것이기에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다. 이슬람 세력이 몽골 제국 처럼 갑툭한 것도 아니고, 힘이 되는 대로 꾸준하게 동로마 제국을 압박하던 것을 뻔히 보던 시기 사람들이 이걸 짐작하지 못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며, 오스만 제국이라는 새로운 나라가 아니더라도 이슬람 세력의 중심부를 통일하는 세력이 나오면 동로마가 그 공세를 감당해 줘야 한다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이야기였다.
동로마 제국과 여러 형태로 알력을 겪었던 프랑크 왕국에서도 우마이야 왕조의 공세를 막아낸 동로마 제국에 축하 사절을 보냈고(카롤루스만 해도 피레네를 넘어온 이슬람과 박터지게 싸웠다), 1차 십자군이 동로마 제국을 향한 이슬람의 공세 역량을 분산시키는 데에 공헌했음을 생각해 본다면 당시 십자군은 어찌 보면 수백년 전 사람들보다 더 근시안적이었던 셈. 뭐, 근동에서 강력한 이슬람 국가가 탄생할 것을 어떻게 예측하느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분열과 혼란이 정리된 후엔 통일과 단합의 시대가 온다는 것은 상식 아닌가? 당장 십자군 원정 과정에서도 아이유브 왕조가 탄생하자 십자군 국가들이 버텨내지 못하는 것을 뻔히 봤던 선례만 보더라도 역사는 반복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헌데 시오노 나나미는 십자군 이야기 3권에서 십자군의 크나큰 병크라고 할 수 있는 제4차 십자군 원정의 '콘스탄티노폴리스 대겁탈'을 성지 순례자들이 더 안전하게 성지 순례할 수 있게 되었다면서 부정적인 평가는 20세기 이전의 것이고 알비파 십자군은 왜 십자군으로 불리냐는 주장을 하면서 '''긍정적으로 평가했으나,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알비파는 정교회랑 아예 비교 자체를 할 수가 없는 마니교, 조로아스터교 급의 이신론을 믿는 이단 중의 상이단인 영지주의 종교였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정교회와 가톨릭은 제2차 니케아 공의회까지 7차례의 공의회를 통해 규정된 '정통 교리'(삼위일체, 테오토코스, 그리스도 신인 양성론, 양의론, 성화상 허용)를 공유하고 있었다. 최소한 교리나 명분상으로는 조직을 별개로 운영하고 있을 뿐인 같은 종교였던 것. 이에 비해 알비파(카타리파)의 영지주의적 교리(선한 정신과 악한 육체의 대비)는 그 계보가 무려 성경에서 사도들이 직접 경고했던, 즉 초대 교회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뿌리 깊은 이단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현대와 달리 종교의 교리가 곧 도덕의 원천이던 당대 기준으로 보면 알비파는 스타워즈로 쳐서 시스 급으로 뿌리 깊은 악의 세력이라는 말이다[22]. 그리고 역시 이 서양사에 대한 소양마저 의심되는 해괴한 평가는 이 작가의 평판을 더욱 떨어뜨렸다.

6.5. 결론


과정이야 어쨌든 2000년을 넘어서 지속된 인류 문명의 산 증인인 로마가 멸망하였고 그로 인해 인류의 소중한 문화재가 유실되었음은 물론, 여느 종교가 그렇듯 기독교에서도 중시하는 인간에 대한 사랑과 배려를 기독교 스스로 져버린 사건이다.
역사에는 만약이란게 없어 논할 가치가 없지만, 만일 로마가 이런 사건을 겪지 않고 오랫동안 유지되어 찬란한 문화재를 많이 남겼다면, 현대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며, 만일 현대까지 유지 혹은 계승 되었다면 발칸 반도가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도덕적인 문제에서 보면 기독교는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지만 이러한 일들 때문에 정작 본인들이 그러지 않는 위선자라는 이미지까지도 생길 정도다.[23]

[1] 제3차 십자군 원정이 결과적으로 실패하여 성지 예루살렘을 확보하지 못하고, 위기에 몰린 예루살렘 왕국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게 되자 촉발되었다.[2] 고대 로마의 본거지라는 상징성이 있었고, 교황에게 직접 간섭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신성 로마 측이 번번히 남하에 실패하고, 동로마 측도 1155년 ~ 1156년의 원정이 실패하면서 양 로마의 의지는 좌절되었었다.[3] 이사키오스 2세의 딸로서, 시칠리아 왕국에 시집왔으나 당시 미망인이었다. 동로마 제국의 제위가 모계로도 이어졌다는 것을 생각하면 하인리히 6세의 야심을 알 수 있는 부분.[4] 실제로 예루살렘 왕국은 자생을 위해 이집트를 공략하고자 단독으로, 또는 동로마 측과 연합으로 이집트를 도모하였으나 실패하였다.[5] Zadar(zara) : 현재 크로아티아령 자다르. 본래 달마티아 지방은 명목상의 군주인 동로마 측이 내린 작위 덕에 베네치아령이었고, 자라는 베네치아 측의 식민 도시였으나 독립하여 헝가리 왕에게 충성했다.[6] 알렉시오스 황자의 누이 이리니의 남편으로 자형이 된다.[7] 혈통에 의한 작위의 계승권을 강조하던 서유럽과는 달리, 동로마 제국은 고대 로마 때 부터의 전통에 따라 시민들의 지지만 있으면 제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서유럽의 영주들이라면 몰라도, 동로마 제국과 교류가 잦던 교황청은 알렉시오스 황자가 사실 정통성이랄게 딱히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교류가 잦고 문화적으로도 가까웠던 베네치아 역시 이러한 사정을 잘 알고있었을 텐데, 원수인 엔리코 단돌로가 모를리가 없었으니 사실상 여기서 부터 베네치아의 뒷계산이 시작됐다고 봐야할 것이다.[8] 십자군에 참가한 영주들은 재산과 영토를 저당잡혀 있었고 베네치아에 빚까지 지고 있어서 자금이 절실했다. 더군다나 병력이 부족한 차에 이를 지원해주고, 교회 통합으로 대의적인 면에서도 부족한 명분을 취할 수 있는 제안이었으니 매력적이었을 것이다.[9] 몬페라토 후작 보니파시오의 아버지 굴리엘모는 5남 3녀를 두었는데 보니파시오는 3남 이었다. 그 중 5남 레니에는 콤니노스 왕조의 황제 마누일 1세의 장녀 마리아와 결혼했었으나, 권력 다툼에 휘말려 살해당했다. 때문에 동로마 제국에 원한을 가지거나 다른 몫을 요구하기 좋은 입장이었다.[10] 당시 제국은 반란과 대 불가리아 전쟁, 세수 감소 등으로 국방력이 망가져 있었고, 해군력의 경우 아드리아해 연안의 방위를 베네치아 측이 대신 제공할 정도였다.[11] 동로마에서는 황제가 후계자를 공동 황제로 지명했고 주로 형제나 자식 혹은 황제와 가까운 관계의 유능한 인물이 그 대상이 되었다. 물론 실권은 지명자가 선임 황제로서 쥐었고 피지명자는 후계자로서 대우받았다. 때때로 시민들의 동의나 다른 독특한 조건들이 요구 되기도 했다. 이러한 방식은 고대 로마로 부터의 전통이었다.[12] 당시 제국 최고액화 히피르피론(Hyperpyron) 200만 닢에 육박하는 거액이었다.[13] 알렉시오스 3세의 딸인 에브도키아의 연인이었다.[14] 연합군 측에서 내건 협상 조건이 알렉시오스 4세의 복위와 남은 계약금 절반에 대한 지급이었는데, 알렉시오스 5세는 이를 지킬 마음이 전혀 없었기에 잘 될리가 없었다.[15] 바실리오스 2세의 시신은 나중에 미하일 8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하는 과정에서 발견하여 수습했다.[16] 히피르피론 800만 닢에 육박했다.[17] 당시 그리스 전통으로는 부모의 가문 중 더 명망 높은 가문을 성으로 쓰거나 아니면 성들을 전부 늘어놓는 식으로 쓰곤 했다.[18] 이 사건으로 동방(동유럽)과 서방(서유럽)의 사이는 결정적으로 파탄났으며 둘이 공식적으로 화해하는데는 800년이나 걸렸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2004년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에게 원정에 대해 사과함으로서 화해한 것이다.[19] 심지어 동로마 계승국들 간에도 서로 싸워댔으니 뭐...[20] 특히나 서유럽 최강국인 프랑스가 오스만과 동맹을 맺었다는 점에서 더욱 힘겨운 싸움이었다.[21] 오스만의 흥기는 약 17세기를 기점으로 끝나며, 이후로는 서유럽 열강들의 반격으로 유럽의 전성기가 찾아오지만, 어디까지나 결과론적인 얘기일 뿐이다. 오스만이 한창 기세를 타던 16세기의 유럽인들도 과연 똑같이 생각할까? 이 사람들 입장에서 제국주의란 먼 미래의, 자신들의 살아 생전엔 겪어보지도 못할 일이며, 이들 입장에서는 현재 전 유럽을 위협하고 있는 오스만의 공포에 떨고 있다는 현실, 그리고 그 방아쇠를 당긴 것이 4백년 전(1204년) 십자군의 실책이었다는 사실만이 중요할 뿐이다.[22] 물론 현대인의 시각으로는 종교의 교리를 이유로 한 박해 자체가 옳지 못한 것이지만, 이 기준으로 따지면 십자군 원정 자체가 부도덕한 행위고...[23] 세계사가 유럽사 위주로 진행되면서 이슬람과 같은 세력을 기독교 관점에서 보게 되고 '기독교=선, 이슬람=침략자'와 같은 이분법적인 생각을 할 수 있지만 십자군 전쟁 때문에 역사를 배우다보면 오히려 반감을 가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