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권당

 

(창당)

'''민권당'''

신한민주당
(개별 합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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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권당'''
'''공식명칭'''
민권당 (民權黨)
'''창당일'''
1981년 1월
'''해산일'''
1985년 2월 제12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 해산
'''중앙당사'''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길 24 (인사동)
'''정당 성격'''
구색정당 관제야당
'''당 색'''
초록색 (#4CA459)
'''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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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3.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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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의택(金義澤)과 권중돈(權仲敦) 등을 중심으로 1981년 1월 창당된 전두환 정권 시기의 관제 군소야당이다.
1980년 준비위원회 체제를 거쳐 이듬해 창당 후 당 총재제12대 대통령 선거 후보에 김의택을 선출하였고, 6월에는 구신민당청산위원회로부터 마포구 도화동 옛 신민당 중앙당사에 남아있던 비품 등을 사들였다.

2. 상세


당의 이념 및 목표는 민주정치의 완성, 복지경제의 완성, 도의사회의 건설, 정의사회의 구현, 평화적 민주통일 달성 등으로 정하였다.
김의택은 1981년 2월 실시된 제12대 대통령 선거에서 선거인단 투표의 0.5%를 얻는데 그쳤다. 같은 해 3월 실시된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김정수(부산직할시 부산진구), 임채홍(경상남도 거창군-함양군-산청군) 등 2명이 지역구에서 당선되었다. 총재 김의택은 전국구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당선되지 못하였다.
1983년 2월 김의택이 노환으로 별세하자 후임 총재 선출 문제로 내분이 있었다. 그 해 5월 전당대회에서 임채홍이 총재에 선출되었으나, 다시 내분이 발생하였다. 결국 지도체제는 집단지도체제로 전환하였으며, 임채홍은 총재직을 사임하였다.
1984년 6월 전당대회에서 최인영(崔寅泳)이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다시 내분이 발생하여 다음 달인 7월 최인영이 대표최고위원직을 사임하였다. 그리하여 조기항(曺基沆)이 대표최고위원직무대행이 되었다. 얼마 뒤 조기항도 사임하고 1985년 1월 다시 김응조(金應祚)가 대표최고위원직무대행이 되었다. 그 사이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권당 지구당위원장이었던 사람들 대부분이 신한민주당으로 이탈하였다.
1985년 2월 실시된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단 1명의 당선자도 확보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정당등록이 취소되고 당은 해체되었다. 1988년 제13대 총선은 커녕 12대 총선도 넘지 못한 경우는 5공의 수많은 관제야당 가운데서도 민주농민당와 함께 유이하다.[1] [2]

3. 관련 문서




[1] 이 제도는 30여년 넘게 존속 하다가 2014년 헌법재판소가 득표율 미만 정당 해산 규정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리면서 사라졌다.[2] 물론 이 12대 총선에서 신민당의 정신적 계승은 신한민주당의 파란같은 부활로 충실하게 이뤄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