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중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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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이자 관료,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권응수 장군의 10대손이다.
2. 생애
1912년 경상북도 영천군 신녕면 화남2동(현 영천시 신녕면 화남2리)에서 종9품 경기전참봉을 지낸 아버지 권중면(權重沔)[7] 과 어머니 함안 조씨 조기유(趙基宥)의 딸 사이의 4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정5품 통덕랑(通德郎)의 품계를 가진 작은아버지 권억현(權億鉉)의 양자로 입양되었다[8] . 신녕공립보통학교(현 신녕초등학교), 보성고등보통학교,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귀국하여 경상북도 노동국장을 지냈고, 1942년에는 영천곡물주식회사(永川穀物株式會社)[9] 이사에 취임하기도 하였다#.
제헌 국회의원 선거 때는 경상북도 선거위원으로 있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상북도 영천군 갑 지역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2년 부산정치파동 때 구속되기도 했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지역구를 경상북도 영천군 을 지역구로 바꾸고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과 자유당 정권의 장기집권 및 독재에 대항하여 투쟁하기 위해 1955년 민주당에 입당하였다. 그러면서 민주당 구파에 속하였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9월부터 다음 해 1월까지 국방부장관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민주당 신파와 구파 간 대립 상황에서 구파가 신민당을 창당하여 떨어져 나가자 그도 신민당에 속하였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민정당에 입당하고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상북도 영천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 이활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종로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반 유진산계인 정일형과 복수공천으로 서울특별시 중구-종로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78년 신민당을 탈당하여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서울특별시 강서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 남재희 후보와 신민당 김영배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80년 국가보위입법회의 의원직을 맡았다. 1981년 김의택과 민권당을 창당하여 고문직을 맡았다. 그리고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상북도 경산군-영천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정의당 염길정 후보와 한국국민당 박재욱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3. 선거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1] 일제강점기 시절 창씨명은 權田仲敦[2] 1956년 발행된 대한민국 건국10년지에는 생년월일이 1912년 2월 17일로 기재되어 있다.[3] 경상북도에서는 1988년 이전까지 읍, 면의 하위 행정구역으로 리가 아닌 동을 썼다.[4] 이 마을에 권응수 장군의 묘소가 있다#.[5] 복야공파 산보(山甫)계 33세손이나 항렬자를 쓰지 않았다. 다만 장자 이름이 34세손 영(寧)자 항렬을 써서 이름이 권영소(權寧昭)이고, 장손 이름이 35세손 오(五)자 항렬을 써서 이름이 권오경(權五炅)이다.#[6] 안동 권씨 중앙종친회 초대 회장을 지냈다.[7] 초명 권세현(權世鉉).[8] 안동권씨 대동세보 21권 복야공파(僕射公派) 5회 산보계(山甫系) 2회 508쪽 참조.[9] 권중돈의 사촌형 권태돈(權泰敦, 창씨명 權田泰敦)이 사장으로 있는 회사였다.[10] 영천군 갑[11] 영천군[12] 1955년 민주당에 입당[13] 영천군[14] 영천군[15] 영천군[16] 종로구[17] 중구·종로구[18] 강서구[19] 경산군·영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