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진원
1. 개요
閔鎭遠
1664년 ~ 1736년
민유중의 차남이자 인현왕후의 작은 오빠이며, 노론계의 최고 영수. 숙종의 작은 처남이다. 동춘당 송준길의 외손자.
훗날 노론 중에서도 최고 강경파가 되어 삼수의 옥으로 사대신이 모두 처형되어 무주공산이 된 노론의 수장 자리를 차지한다. 한때 여동생이 폐위된 것과 집안이 몰락한 것 때문에 남인에 대한 원한과 그 남인을 두둔해준 소론에게 한이 맺혔는지,[1] 영조 초반까지 매우 정력적으로 활동하며 소론과 개싸움을(...) 벌인다. 영조는 민진원을 불러 소론의 수장 이광좌와 손까지 잡게 하게 화해를 중재했으나 민진원은 영조의 간곡한 부탁을 그냥 씹었다.(...)[2] 결국 영조도 설득에 실패했고 영조 12년에 역시나 노론 강경파이자 공동 수장이었던 정호와 같이 세상을 떠났다.# 형인 민진후보다도 성향이 아주 비타협적이었다.
2. 민진원의 의외의 모습
민진원은 말년의 비타협적인 모습 때문에 노론의 최고 강경파로 이미지가 박혀 있으나, 1705년 장희빈을 옹호하다 유배를 간 전 영의정 남구만의 형을 감해달라고 직접 상소를 올린 적도 있다.[3]
아울러 1703년 40세 때 전라도 관찰사를 지내면서 서원 건립 경쟁으로 당파 싸움이 격렬해지는 것을 막으려, 서원 건립을 억제하자고 장계를 올린 적도 있었는데 의외로 당파의 대립에 문제 의식을 갖고 있던 면도 있었다.
1706년 43세 때 강화부 유수로서 서울 해상 방위를 책임지던 당시에는 섬과 섬을 이어 간척 사업을 벌여 성공시키고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분배했다. 강화부에 내성을 쌓고 남문과 서문을 신축하며 강화의 청년들을 모아 책을 읽혔다.[4] 실학자가 할만한 일을 노론의 정치가가 해낸 셈. 나라를 다스리는 경륜에도 밝았다.
아울러 1712년의 사은부사, 1718년 주청사로 청나라에 다녀오는 외교관이었다.
경종 즉위 후에는 연잉군을 왕세제로 삼도록 경종을 직접 압박한다. 게다가 경종은 효심이 없으며 군주로서 자질이 부족하다고 공공연하게 디스를 했다. 이 때문에 1722년 경북 성주로 유배를 떠난다. [5]
이인좌의 난이 일어난 후, 65세 때 난이 진압되고 나서는 난에 참여하지 않았던 남인들을 용서하는 일에 극렬 반대하고 소론을 끝까지 배격하는데 앞장서게 된다. 물론 당시 조선의 풍토로는 일종의 연좌제때문에 난에 참여를 안 해도 이인좌나 김일경의 같은 당여로 보았기 때문이며[6] , 이미 난을 일으킨 전례가 있어 잠정적 역적 취급을 했다는 것이다. 민진원의 이런 예측은 틀리지 않아 훗날 민진원이 죽고 소론 계열 잔당, 자제들이 주축이 돼 일으킨 나주 괘서 사건으로 남은 소론의 세력들이 싸그리 갈리고, 이미 죽은 조태구나 이광좌의 관작이 추탈되고 덩달아 역신 취급을 받게 된다.
3. 여담
민진원의 후손들은 번성해 구한말까지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수구파 민태호와 그의 아들 민영익, 순종비 순명효황후 민씨 등이 있다.
소론의 영수 이광좌와 악수를 한 적이 있다. 당연히 영조가 시켜서 한 것. 이광좌는 민진원 사후에도 김재로와 다시 악수를 하게 된다.[7]
2019년 SBS드라마 해치에서는 이경영이 연기하였는데 민진헌이라는 이름으로 변조되어 등장했다.
[1] 인현왕후는 죽기 전에 민진원과 민진후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원래 궁중의 법도에 따르면 후궁에 속한 궁녀들이 내전에 드나들 수가 없는데, 장희빈의 궁녀들이 내전을 수시로 출입하고 창에 구멍을 내서 동태를 엿보는 등의 잘못을 많이 했다. 인현왕후 입장에서는 돌아가는 상황이 한심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고, 지금 이렇게 몸이 아프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반드시 빌미가 있다'고 하는데 자신도 의심스럽다고 말했다는 것. 즉 인현왕후가 지내는 처소에 장희빈의 궁녀들이 다녀갔고, 자신의 병이 혹시 장희빈이 술수를 부린 게 아닌지 사람들이 말하는데 그런 말이 진짜같다는 소리다. 인현왕후가 한 말을 다르게 해석하면 인현왕후가 궁궐 안에서 입지가 얼마나 좁았는지 알 수 있다. 후궁을 모시는 궁녀가 왕비가 머무르는 처소 창문에 구멍까지 내면서 염탐하는 게 다른 시절 같으면 허용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말을 들은 민진원의 기분이 얼마나 참담할지, 그리고 장희빈에 대한 인현왕후의 감정이 어땠을지도 충분히 알 수 있다.[2] 그런데 사실 욕쟁이인 영조도 민진원을 그냥 귀양보내버리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민진원의 여동생인 인현왕후가 자신의 생모인 숙빈 최씨와 어린 시절 자신을 잘 대해준 것도 있기 때문에...[3] 다만 남구만이 자기 외할아버지인 송준길의 제자였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또한 남구만도 인현왕후 친척이자 자기 숙부였던 민정중과 인척이었다는 것도 감안을 해야 한다.[4] 이 모든 것들은 사실 조선시대 지방관들이 해야할 당연한 업무였다. 강화부는 고종시기에 2차례 양요가 일어났던 만큼 바다에서 한성으로 가는 길목이자 방책이였으며, 간척지 무상 분배는 자영농 육성으로 국가재정 확충을 위한 것이였고, 교육은 모든 목민관들의 가장 기본적인 업무 중 하나였다.(해상 방위는 지역의 위치때문이니 제외하고, 간척지를 무상 분배했다는 것은 그가 비교적 청렴했던 인물임을 알려준다.<여동생이 그 유명한 인현왕후이고, 백부가 좌상 민정중으로 생전에 서인의 중진으로 명망이 높았다.(숙종의 母后 명성왕후는 대동법으로 유명한 김육<서인 한당>의 손녀였고, 숙종의 1번째 부인은 송시열의 스승 사계 김장생<서인 산당>의 고손녀였다. > 인현왕후는 바로 김장생의 고손녀의 뒤를 이어서 숙종의 부인이 되었다.)[5] 실제로 훗날 홍인한과 정후겸은 정조의 즉위를 막으려 했다가 제거당했고 김하재 역시 정조에 대한 욕을 담은 쪽지를 예방 승지에게 건네서 역률로 다스려져 죽었고, 윤구종은 경종에게 신하 노릇하기 싫었다고 하자 역시 국문을 받던 중 죽었다. 민진원은 정말 운이 좋았던 셈이다.[6] 즉 노론 입장에서는 준론 소론이나 완론 소론이나 거기서 거기였다.[7] 당대 인물이 전하는 기록에는 노론과 소론이 척을 져 동석할때도 사이에 병풍을 쳐 서로 마주보지도 않았을뿐더러, 사석에서도 광좌니 광이니 광좌놈하고 막 불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