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빈 최씨

 



'''조선 숙종의 후궁
화경숙빈 최씨 | 和敬淑嬪 崔氏
'''
'''시호'''
휘덕안순수복화경
(徽德安純綏福和敬)
'''빈호'''
숙빈(淑嬪)
'''출생'''
1670년(현종 11년) 11월 6일
장소 불명
'''사망'''
1718년(숙종 44년) 3월 9일
(향년 49세)
조선 한성부 창의궁
'''부군'''
숙종
'''사당'''
육상궁(毓祥宮)
'''원소'''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 267 소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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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해주(海州)
'''부모'''
부친 최효원
모친 남양홍씨
'''부군'''
조선 숙종
'''자녀'''
3남
(장남) 왕자 영수 (조졸) [27]
(차남) 영조
(3남) 왕자 (조졸)

1. 개요
2. 생애
2.1. 출신
2.2. 후궁이 되다
2.3. 말년
2.3.1. 추측
2.3.2. 중전 추대 논쟁
3. 묘소
4. 가계
5. 사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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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숙종후궁으로 영조의 어머니이며 일명 조선판 '''신데렐라'''. 숙빈 최씨는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나 신분의 기록이 정확하게 남겨져 있지 않아서 출신에 대해 여러 설이 존재한다.
1670년 음력 11월 6일(12월 17일) 최효원의 딸로 태어났다. 숙종에 눈에 띄어 승은을 입고 숙원으로 책봉되었다.[1] 처음에는 가장 아래 품계인 종 4품 숙원으로 책봉돼 회임과 왕자 생산 등을 거쳐서 후궁들 중 으뜸인 정1품 빈의 자리에까지 오른다. 사후 "화경"이라는 시호를 받아 화경숙빈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영조~철종까지는 모두 숙빈의 후손이 된다.

2. 생애



2.1. 출신


출신이 불분명하여 여러가지 설이 많다.
고종은 영조가 말하길 숙빈 최씨는 침방의 궁녀였다며 무수리 설을 부정했는데 영조의 컴플렉스 등을 생각해보면 이쪽은 지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있다. 침방 궁녀는 내명부에서 꽤 높은 편에 속한다. 지밀 궁녀 바로 다음이 침방 궁녀. 다만 실제로는 궁녀의 대부분이 천민 신분인 공노비 출신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개연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궁녀보다 낮은 무수리이거나, 천민 출생에 심지어 결혼을 했다가 남편과 사별한 기혼녀였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역사적 기록이 없어서 근거는 없다. 무수리는 궁녀와 달리 궁에만 머물지 않고 출퇴근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어머니의 불확실한 출신 신분 때문에 영조 즉위 후,영조에게는 아버지가 다른 형이 있다는 소문, 심지어 영조가 숙종의 아들이 아니라 전 남편의 아들이라는 소문까지 돌았고, 영조가 이로 인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물론 영조는 숙종과 숙빈 최씨의 장남이 아니라 차남이다. 후궁 첩지를 받고 후에 낳은 차남인 영조가 숙종의 아들이 아니라는 주장은 말이 안 된다. 영조의 친형은 요절했다. 그래서 영조가 숙빈 최씨의 차남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2]
숙종의 눈에 띄어 승은을 입었는데, 기록에 남는 여러가지 이야기로 추측하건대, 인현왕후가 폐서인이 되어 사가에 나가서 살던 시절, 인현왕후의 생일에 인현왕후를 모셨던 적이 있는 그녀가 인현왕후를 위한 기원을 올리고 있던 모습을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숙종이 목격하는 바람에 눈에 띄게 되어 후궁이 되었다고 한다.(이문정의 수문록)
다른 기록에서는 인현왕후가 쫓겨나간 사가에서 어느 날 밤 홀로 바느질을 하고있다가 후원을 지나가던 숙종이 숙빈 최씨의 뒤태가 아름다워 들어가서 만남을 가졌다 한다. 숙빈 최씨는 첫째 이후로도 숙종의 아이를 둘을 더 낳았다. 숙종의 후궁 중 가장 회임을 많이 한 후궁이다. 자손이 많지 않은 숙종에게서 가장 아이를 많이 본 편에 속하는데, 그만큼 총애를 받았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아들은 경종, 영조만 살아남은 손이 귀한 숙종에게서 낳았다 하면 아들인데 총애를 안할 리가. 또 다른 설로는 전염병으로 고아가 된 그녀가 산신령(?)의 계시를 받고 나주 목사에게 거둬졌는데 목사의 부인이 인현왕후의 친척이었기에 인현왕후가 입궁할 때 같이 입궁하였다고 한다. 또 다른 설로는 인현왕후의 부친인 민유중이 영광 군수로 부임하는 길에 다리 옆에서 그녀를 거뒀으며 인현왕후의 입궁시에 나인으로 입궁했다고 한다. 특별히 기록에 남을 집안이 아니니 기록이 없어 여러가지 설이 존재한다.
후궁이 되기 전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그녀의 숙모의 사위 김해성이 그녀를 독살하려고 했다는 혐의로 문초를 받을 때 원래 구걸을 하면서 살았다가 그녀가 숙원에 봉해지면서 도움을 받았다고 진술한 것을 보아 야사에서처럼 천민이 아니더라도 매우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보통 사극에서는 무수리설을 가장 많이 채용한다.

2.2. 후궁이 되다


희빈 장씨보다 11살이 어린 숙빈 최씨가 회임하고 후궁이 되자, 당시 왕비였던 희빈 장씨의 강력한 경쟁 상대로 떠오른다. 그 탓에 인현왕후가 복귀되기 전까지는 고초도 많이 겪은 모양이며, 노론 세력이 희빈 장씨를 천하의 악녀로 기록한 수문록에 나오는 이야기라 100% 신뢰할 수는 없지만 처음 태기가 있었을 무렵 당시 중전이었던 장씨가 그녀를 죽이려 했다는 이야기까지 있다.
숙종이 졸다가 꿈을 꾸었는데, 용이 땅에서 나오지 못 하고 울면서 살려달라고 청했다. 이에 중전 장씨의 처소에 가니 빈 독이 뒤집혀져 있었는데 그 독 안에 두들겨맞은 임신부 숙빈 최씨가 있었다. 급히 응급 조치를 하여 태아와 숙빈 최씨를 살릴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일화는 지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겠지만[3] 임금의 총애를 받고 왕자를 낳았기에 수많은 견제와 공격을 받은 것은 사실로 보이며, 이에 맞서기 위해 서인 세력과 친밀해졌다. 비천한 출신에 뒤를 봐줄 배경도 없는데다가 장희빈의 견제가 극심했기 때문에 별다른 방도가 없었을 것이다. 연잉군은 훗날 서인 분파인 노론 세력과 손을 잡는다.
세간엔 숙빈 최씨가 (훗날 영조가 되는) 연잉군을 낳고 숙의(종2품)에서 바로 빈(정1품)으로 뛰는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낮은 귀인(종1품)으로 진봉되었으며 이것도 곧바로 승봉된 게 아니라 영조를 낳고 1년이나 뒤에 결정난 일이었다. 그 밖에도 귀인으로 5년을 지내다가 빈에 진봉되었다. 따라서 숙빈이 왕자를 낳고 바로 숙의에서 빈으로 봉해졌다는 이야기는 잘못된 사실이다.
인현왕후를 폐위하고 희빈 장씨를 중전으로 앉혔다가 다시 인현왕후를 복위시키고 희빈 장씨를 도로 희빈으로 강등시킨 것은 숙종의 왕권 강화책이었다는 것이 정설이지만, 그 구실을 만들어준 것이 다름 아닌 숙빈 최씨다.[4]
또한 많이들 야사로 알고 있으나 '''숙빈이 숙종에게 '희빈 장씨가 인현왕후를 저주했다'고 고자질한 사실'''은 무려 조선왕조실록에도 나와 있다. 누군가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도 있는 일을 고한 것으로 보아 대중매체에 그려지는 현숙하고 천연덕스러운 모습과는 달리 궐 내에서 정치적인 행보를 보이지 않았다고 볼 수 없다. 물론 위의 내용을 읽어보면 뒷배경도 없이 숙빈 최씨가 궁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서인과 손을 잡는건 선택이라기 보다는 필수였다고 볼 수밖에 없겠지만.
매체에 잘 그려지진 않으나 영빈 김씨와는 꽤 두텁게 지낸 것으로 보인다. 한 살 차이 또래인데다[5] 같은 서인 측 배후인 것도 있고, 영조인원왕후경종 독살설 배후로 지목돼 죽을 뻔한 영빈 김씨를 구사일생시켜서 말년을 후하게 살게 해준 점으로 볼 때, 숙빈과 영빈이 꽤 붙어다녔을 것이라는 추측은 신빙성이 있다. 물론 영빈이 숙빈과 가깝게 지내기 시작한 시점은 언제인지 모르나, 대다수는 숙빈이 영조를 낳은 때로 보고 있다. 숙빈의 영조 출산 후 1년 정도는 영빈(당시 귀인)이 숙빈(당시 숙의)보다 두 단계 정도 품계가 높았는데, 집안도 그렇고, 언니인 점을 고려했을 때, 영빈 쪽에서 먼저 숙빈에게 다가갔을 것이라는 쪽이 유력하다. 숙빈이 이듬해 자신과 품계가 같아질 것을 어느 정도 예견한 듯. 단순 품계가 같아지는 걸 넘어 숙빈은 왕자를 낳았기 때문에 확실히 숙빈코인을 타는 게 나을 것이라는 영빈 측의 계산이었을 수도 있다.[6] 두 사람의 품계가 같았던 시기는 숙빈이 영조를 출산한 이듬해부터 약 5년 정도였으며, 이후엔 4년 간 숙빈이 영빈(당시 귀인)보다 높았다. 물론 그 훨씬 이전인 1694년엔 영빈(당시 귀인)보다 숙빈(당시 숙의)의 품계가 더 낮았다.[7]

2.3. 말년


사실 많은 사극들이 희빈 장씨의 일생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일반 시청자들은 숙빈 최씨의 후일담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

2.3.1. 추측


인원왕후의 왕비 책봉 후 인원왕후에 입적된 연잉군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숙빈 최씨는 인원왕후와 친밀했다. 숙빈 최씨 말년에 숙빈 최씨가 궐을 나갔을 거라 추측하는 근거는 이현궁을 환수할 때 등장하는 숙빈방이라는 표현 때문인데 조선왕조실록 숙종 편을 보면 장숙원방, 장귀인방, 숙의방이란 표현이 등장하며 비변사등록에도 영빈방이라는 표현이 등장한 것으로 보아 숙빈방이란 표현은 숙빈이 기거하는 곳이 아닌 숙빈의 창고 또는 재물일 가능성이 높다.[8] 연잉군이 가례를 올린 후 궁을 나가야 할 절차를 의논할 때의 실록 기사(1704년 숙종30년 4월 17일)를 자세히 보면, 숙종이 "연잉군이 결혼했으니 궁을 나가야하는데 집이 없네. 다른 큰 공사중이라 또 집 짓는거 어려운건 아는데, 내 아들 집 일이니 어쩔수 없어. 해당 부서에 말해서 예산을 책정하라(연잉군의 사저를 지어라)"고 전교를 내리는데, 이에 대해 사관이 "숙빈께서 이현에 큰 저택(이현궁)이 있는데 왕자를 위하여 또 집을 짓고자 하니 주상께서 신하들이 말나올까봐 부득이한거라고 먼저 전교를 내리고 선수를 치니 사람들에서 남몰래 탄식한다."라는 평이나 승정원일기와 비변사등록의 1702년 이현궁의 대규모 토목 공사의 규모가 워낙 커 말 30필이 토석을 운반하는데 3개월 이상이 걸린다며 숙종에게 만류하는 상소를 올린 것과 숙종이 결국 끝까지 밀어붙여 공사를 마친 기록을 보면 병중이나 숙종 사후에 거주할 용도의 사제로 보는 것이 맞다. 또한 영조는 숙빈 최씨가 1702년 궁 밖으로 출궁당했다는 설을 확실하게 부정하고 있으며, 임방이 지었다는 숙빈 최씨의 제문 역시 숙빈 최씨의 1702년 궁 밖 출궁설을 전적으로 부정하고 있다. 두 기록 모두 공통적으로 숙빈최씨가 40대 말년에 궐에서 숙종을 간병했다고 하며 숙종 42년에 병환이 들어 사가로 나아가 치료하라는 숙종의 명으로 3년동안 사가에 머물렀다고 기술하고 있다. 47세에 세상을 떠났다.

2.3.2. 중전 추대 논쟁


야사에 따르면 숙빈 최씨에게 숙종이 중전의 자리를 제의했으나, 숙빈 최씨가 거절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그 당시 사회상 미천한 가문 출신의 후궁이 중전의 자리에 올라가는 것은 쉽게 결정되는 일은 아니었다.
인현왕후와 희빈 장씨가 죽은 후 숙종은 후궁이었던 자는 왕비가 될 수 없다는 교지를 내린다.[9] 이 교지의 타깃이 바로 숙빈 최씨라는 주장이 존재했으나, 이는 조선시대 법도를 모르고 나온 주장이다.[10] 왕비로 책봉되었던 희빈 장씨의 경우는 매우 특별한 경우지만, 조선의 왕비는 단순히 왕의 총애가 아니라 철저하게 정치적인 고려에 의해 선택되는 자리로, 승은후궁 출신인데다 조선 당시의 사회상 집안이 한미한 숙빈 최씨가 올라갈 수 있는 자리가 아니였다.[11]
숙종의 후궁들 중에는 숙빈 최씨 외에 영빈 김씨가 있었고, 인현왕후가 사망할 당시 품계는 숙빈보다 한 단계 낮은 귀인이었지만[12] 위에 서술된 대로 매우 한미한 집안 출신인 숙빈과 달리, 영빈 김씨는 조선 역대 사상 이렇다할 문벌이 없다싶을 정도로 부계 · 모계가 엄청난 집안 출신이었다. 그러니 만약 후궁들 중에서 중전을 간택했다면 중전이 됐을 사람은 숙빈이 아니라 영빈일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교지의 타깃은 숙빈이 아니라 영빈이다.[13]
여기에는 또 다른 근거가 있는데, 숙종이 영빈 김씨에게 악감정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영빈은 기사환국이 터지고 한달이 안 된 시점에서 왕의 동정과 궁중 기밀에 관한 정보를 친정에 빼돌리고 이모부 홍치상[14]과 작당하여 '''희빈의 친정 어머니에 관한 유언비어를 날조'''한 혐의가 적발되어 홍치상은 처형되고 그녀는 폐출됐다.[15] 영빈 김씨는 후에 인현왕후가 복위할 때 같이 복위했지만 숙빈 최씨가 회임과 왕자 생산으로 계속해서 품계가 올라 정1품 빈이 되고 다른 후궁들도 하나하나 승봉[16]될 때에도 홀로 귀인에서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는 안습한 상황을 겪었다.
게다가 역시 인현왕후 복위 때 같이 복권되었던 홍치상의 경우 그의 아들인 홍태유[17]홍치상의 무고함을 밝혀달라고 호소했다가 빡친 숙종에 의해 복권이 취소되고 이후 명예 회복이 영원히 금지되어 버린다. 안습. 영빈에 대한 악감정이 대단했던 모양. 영빈 김씨인원왕후 책봉 때에야 간신히 빈으로 승봉된다.[18]
또한 인원왕후는 양자로 입적된 연잉군을 지켜주고 왕위에 오르는 데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숙빈에게 있어서는 인원왕후가 아들의 은인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뒷날 영조인원왕후를 친어머니 모시듯 극진히 모셨다고.[19]

3. 묘소


최씨의 무덤은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에 있다. 그녀의 묘소를 소령원(昭寧園)이라고 부른다. 영조는 최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해 여러차례 그녀를 기리는 제문을 지었고, 또 왕권 강화 차원에서 어머니의 무덤을 능(陵)으로 승격시키고 싶었던 듯 하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드라마 동이 마지막 장면에서 성장한 영조가 차천수(배수빈 분)와 함께 어머니의 묘를 찾은 장면에서 나온 그 무덤이 실제 소령원이다.
계압만록에 따르면, 한 나무꾼이 모화관 부근에서 향나무를 팔고 있는데, 암행을 하고 있던 영조가 어디에서 나무를 캐왔냐고 묻자, 나무꾼이 "나랏님의 모후를 모신 소령'''능'''이 있는 양주 고령산에서 캐웠다."고 했다. 영조는 기뻤지만 넌지시 "다른 사람들은 소령원이라고 부르는데 왜 소령릉이라고 하시오?"라고 물으니 "아니, 임금님의 어머니가 묻혀 계신 곳인데 왜 원이요? 능이지?" 라며 오히려 영조를 무식쟁이 취급(...)했다고 한다. 나무꾼이 무식하여 원과 능을 구분하지 못한 것이었는데, 영조는 기뻐하여 향나무를 다 사겠다며 나무꾼을 경희궁으로 데려오고, 그제서야 방금 전까지 호통을 친 양반이 임금이란 걸 깨달은 나무꾼은 바닥에 넙적 엎드려 살려달라고 빌었으나, 영조는 기분이 좋아져 백성들도 능이라 부르는데 왜 원이라고 하느냐고 신하들을 꾸짖고는 나무꾼에게는 통훈대부 능참봉의 지위를 주었다고 한다.[20]
숙종인경왕후, 인현왕후, 인원왕후를 비롯 희빈 장씨까지 모두 그 무덤이 서오릉 경내에 있는데, 숙빈 최씨만 홀로 파주에 떨어져 있다. 왕을 낳았지만... 신주는 칠궁의 하나인 육상궁(毓祥宮)에 모셔졌다.
소령원은 비공개 구역이라서 여기를 방문하려면 문화재청의 사전 허가를 받아야 한다. 이 묘의 관리는 파주삼릉관리소에서 하고 있기에 여기에다가 방문 신청을 하면 된다.

4. 가계



5. 사극


장희빈을 다룬 많은 사극에서는 드라마 중반부터 출연, 어느 정도 비중을 차지했다. 하지만 이 시대를 다룰 땐 대개 인현왕후장희빈의 대결의 비중이 커서 숙빈 최씨는 인현왕후에겐 인지도가 밀리기에, 동이가 방영되기 전까지 주인공으로 등장한 적은 없고 김혜수가 출연한 장희빈을 제외[21]한다면 단지 인현왕후 편을 들 뿐, 정치색은 아예 없는 인물이었다.
보통 숙종 연간 장희빈을 둘러싼 내명부의 갈등을 다루는 작품의 경우 일반적으로 숙빈에게는 별 다른 포커스가 주어지지 않거나 영조의 어머니로서만 부각된다거나 아예 극에서 배제되는 경우가 많았다. 나온다고 해도 인현왕후를 돕는 어진 여성상으로 등장할 뿐. 그러나 후기 작품 들어서 숙빈 역시 갈등의 중심축으로 들어가 주역이 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반면 한미한 집안이었던 숙빈이랑 의외로 사이 좋게 붙어다녔다고 여겨지는 영빈 김씨는 출연조차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22]
어질고 조용한 숙빈상을 연기했다는 평을 받는다.
욕심없이 착하고 순박한 여성으로 그려진다. 인현왕후를 모후로서 잘 모셔야 한다며 어린 영조를 훈육하는 장면이 나올 정도.
극중 시점에서는 이미 사망한 인물이라 회상장면으로만 몇 차례 등장하는데, 주로 아들 영조가 가진 컴플렉스를 설명하기 위한 장치로 등장. 영조가 어린아이였을 때 사람들이 숙빈이 무수리 출신이라고 쑥덕이는 소리를 듣고 와서 순진하게 무수리가 뭐냐고 묻자, 충격을 받는 표정을 보였다. 임종 직전에 영조에게 정성왕후를 소박맞힌 것[23]에 대해 꾸짖고 그러지 말라고 타일렀다.
본격적으로 장희빈과 맞서는 역할로서 유명해진 숙빈이었다. 서인 세력과 결탁하여 궁중에 사씨남정기를 퍼뜨리는 등 인현왕후 복위를 돕는 것으로 나온다. 후궁이 된 이후 장희빈이 그녀의 출신을 문제삼자 희빈 역시 중인 궁녀 출신이면서도 중전이 되지 않았느냐고 쏘아붙이는 등 희빈과 대립하는 숙빈상을 그려냈다.
주인공으로 나온다. 이산에 나오는 영조(연잉군) 역의 이순재가 동이의 한효주의 아들이라는 배우개그가 성립한다.
극 중에서 초반에는 관악원 나인으로 궐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극 중반에는 감찰부 감찰궁녀로 활동한다. 주인공 역할인 만큼 극적으로 도덕적이고 선한 인물로 표현된다. 인간적인 면모가 부각되는 희빈 장씨에 비해 픽션적 요소가 많이 가미된 듯하다. 극 초반 어린 나이에는 순수하고 천진난만한 모습을 보이지만 궐에 입궁하고 정쟁에 휘말리며, 아들 연잉군이 태어난 이후 치열한 정쟁으로부터 아들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뒷바라지하고 단호하게 희빈 장씨와 대립하는 모습이 표현됐다.
여기서는 인현왕후가 사가에서 부리던 몸종이라는 설정으로, 나름대로 욕심도 있고 영악한 인물로 그려진다. 특히 장옥정을 자해 공갈로 괴롭히고 낚아서 숙종으로부터 후궁의 자리를 따내는 영악함까지 보인다. 작 중에서 신분 상승의 과정이나 그 방법이 장옥정이 행했던 방식 그대로[24]인 것을 보아, 장옥정의 사랑이 주제인 작중에서 그 사랑을 독차지하는 장옥정과 장옥정처럼 사랑받고 중전이 될 가능성을 꿈꾼다. [25][26]
위에 나온 숙빈 기혼녀 설을 반영하여, 본래 노름꾼 백만금(이문식 분)의 아내였으나 도박빚 때문에 백만금과 헤어져 궁인이 된 것으로 그려진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이인좌(전광렬 분)의 계략에 놀아난 것이었다는 설정이 나와있다.

[1] 후궁 첩지를 받을 때, 마지막의 귀인과 빈으로 올라간 경우를 제외하면 모두 아이를 낳아서 품계가 올라갔다. 첫 임신으로 숙원, 둘째를 임신하여 숙의 이후 다음해 귀인이 되었다가 3년 뒤에 단종복위 기념으로 숙빈이 된다. 이중 숙원, 숙의, 귀인 첩지를 받은 것은 모두 1년도 되지 않아 받은 것이다. 그 중에 장남 영수, 차남 연잉군을 연년생으로 낳고, 숙빈에 임명된 해에 셋째 아들을 낳았다. 사실 아들만 셋을 낳는다는건 당시 조선, 특히 손이 극히 귀해진 후기 왕가에 있어서는 엄청난 강운이긴 하다.[2] 여러 사극에서 숙빈 최씨가 무수리였다가 승은을 입고 영조를 낳아 빈으로 승급됐다고 묘사되나 사실 장남을 낳고 차남인 영조를 낳은 뒤 삼남까지 낳았다. 그러나 영조의 동복 형제들이 모두 요절해서...그나마 숙빈최씨가 주인공인 동이에서는 장남 영수를 낳았다가 영수가 어린나이에 요절하고 이에 비통해하는 장면이 나오기는 한다. 오죽하면 야사에서 국문을 받는 소론 세력들이 "영조는 선왕의 자식이 아니다!"라며 바락바락 대드는 얘기가 있다. 게다가 숙종조 공작 정치의 대가인 김춘택과도 염문이 있었다는 설도 있다. 이걸 비틀어 과거 MBC 정통 사극 <대왕의 길>에서 혈통을 부정하는 소론 이인좌에게 영조가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자, 숙종의 혈육이 맞다고 데꿀멍하는 장면이 있다.[3] 아무리 숙빈 최씨의 신분이 낮다고는 해도 이 야사대로라면 장희빈은 '''감히 왕의 씨를 밴 여자를 죽이려 한''' 왕비가 된다. 물론 세자와 왕자가 같지 않고 희빈 장씨가 중전이긴 했지만 그래도 왕의 자식을 해치려 했다는건 절대 그냥 넘어가질 수는 없는 죄가 된다. 또 용이 땅에서 나오지 못하고 라는 대목을 보면 알겠지만 용은 임금을 뜻한다. 그러니까 그냥 지어낸 얘기일 확률이 100%다. 어떻게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가 왕이 될지 안될지 안단 말인가. 하다못해 성 감별도 없던 시절에 말이다.[4] 단 희빈 장씨가 폐위된 것은 인현왕후의 복위로 인해 자동적으로 이뤄졌다.[5] 영빈이 숙빈보다 한 살 언니였다.[6] 물론 두 사람의 집안이 운니지차였기 때문에, 영빈 김씨가 후궁 품계가 더 높았던 시기엔 숙빈을 거들떠도 보지 않았을 것이란 이야기도 있다. 숙빈 최씨는 한미한 집안이었지만 영빈 김씨는 말 그대로 아버지 측, 어머니 측 둘 다 엄청난 파워를 자랑하던 명문 세도가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엔 아들을 낳은 후궁이 권력을 쥐는 법이 당연하니, 서인 측 사람들도 영빈이 아닌 아들을 낳았던 숙빈을 더 밀어줬다. [7] 이로써 영빈은 다른 후궁에게 품계를 두 번이나 따라잡히는 굴욕을 맛본다. 처음엔 갓 입궐한 희빈 장씨(당시 숙원)보다 높았던 소의였으나, 이후엔 중전 후보에서도 밀려버리질 않나, 상술했듯이 숙빈 최씨에게도 4년 간 아랫 사람 신세가 되어버렸다... [8] 장숙원방, 장귀인방, 영빈방이 쓰인 시기에 희빈 장씨영빈 김씨는 모두 궐에서 생활하고 있었다.[9] 구한말에 이 교지때문에 피해를 본 사람이 바로 영친왕의 어머니인 순헌황귀비.[10] 조선 왕조에서 후궁에서 왕비로 올라간 경우는 '''희빈 장씨를 제외하면 모두 명문가 출신의 간택후궁'''이다. 현덕왕후, 안순왕후, 폐비 윤씨, 정현왕후, 장경왕후. 이중에서 왕대비까지 오른 사람은 안순왕후와 정현왕후.[11] 혹여 왕자를 생산했다고 해도 그건 엄연한 높은 집안의 바탕으로 간택돼 입궁하는 간택후궁 출신일때나 논의되었던 사항이다. 궁녀 출신 후궁은 꽤 많지만, 참고로 사도세자의 친모인 영빈 이씨는 궁녀 출신이긴 했으나, 급이 제일 높은 지밀나인이였고, 그당시 지밀나인을 뽑을때 웬만하면 양반가 여식을 원했기 때문에 한미한 집안이긴 했지만 일단 양반 신분이였다.[12] 이때 당시 숙종의 후궁들 중 빈의 지위에 있던 사람은 장희빈을 제외하면 숙빈이 유일했다.[13] 그 예시로 중종 때 장경왕후가 죽자 중종은 경빈 박씨를 왕비로 삼고 싶어했는데 정광필이 왕비는 응당 좋은 집안에서 들여야 한다고 주장해 무산시켰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당파와 그 시대의 극명한 신분제 사회를 감안하면 그 숙종이라 할지라도 숙빈 최씨를 왕비로 삼는 것은 무리인 일이다. 또 숙종은 그럴 의지를 표명한 적이 없다.[14] 효종의 차녀인 숙안공주의 아들. 즉 숙종의 고종 사촌이다.[15] 이 일이 있고 열흘 후에 인현왕후도 폐출된다. 숙종이 이 일의 배후로 인현왕후를 지목했다 한다.[16] 진급[17] 영빈에겐 이종 사촌 동생이 된다.[18] 원래 새로운 내명부의 수장이 즉위하면 후궁들의 품계를 올려주는 것이 관례였다. 인조 때 인렬왕후가 죽어 계비인 장렬왕후를 간택하였는데, 이 때도 숙원 조씨를 비롯한 대부분의 후궁이 승봉되었다.[19] 경종은 인현왕후 민씨의 아들로 입적하였고, 영조는 인원왕후 김씨의 아들로 입적하였다. 인원왕후의 입장에서도 자신의 아들인 영조가 더 이뻐보일 수밖에 없는 상황...[20] 이건 사실 비슷한 이야기가 덕흥대원군묘소에도 있어서 표절일 가능성도 있다.[21] 이 드라마에선 서인 세력과 손을 잡고 희빈을 견제하며 인현왕후의 복위를 돕는다.[22] 장희빈(1995)에서 인현왕후의 상 기간에 둘이 자주 붙어다니는 장면이 나오기는 한다. 물론 최씨가 빈으로 봉해지기 전까진 영빈도 숙빈을 무수리 출신이라며 대차게 깠었다. 둘 다 같은 정파의 지원을 받고 있기도하며, 숙빈 쪽 세가 강해지자 영빈은 이를 보고 숙빈에게 붙어다니기 시작한 것.[23] 영조가 혼인 첫날밤 아내 정성왕후의 손이 고운 것을 칭찬하자 정성왕후가 "부잣집에서 태어난 덕분에 손에 물 한방울 묻히지 않고 자라서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고, 어머니가 허드렛일 하던 무수리란 사실에 열등감을 품고 있던 영조가 정성왕후를 싫어하게 되었다는 야사를 그대로 인용해서 썼음.[24] (드라마상의 허구적 표현이다.)승은을 받는 묘사나, 독이 있는 음식을 일부러 먹어 다른 사람을 모함하고 상전(장옥정은 명성왕후에게)에게 핍박받은 것이 숙종이 알게 되어, 장옥정이 첩지를 받는 묘사는 장옥정의 행보 그대로다.[25] 1화에서 '나는 아씨처럼 될래요. 장옥정처럼'이라는 말을 한다.[26] 작 중에서 인현왕후와의 관계도 왠지 불편하게 묘사된다. 자기가 아들을 낳으면 왕세자는 아니더라도 왕세제로는 세울 수 있느냐고 떠보자 인현왕후가 난색을 표하고, 인현왕후가 아들이 없고 몸이 불편한 것을 알아채자 그녀 사후에 자기가 중전이 되고자 하는 야망을 내비치기도 한다. 인현왕후와 매우 가까운 관계였던 실제 역사와 다르고 숙빈 최씨는 신분상 중전의 후보에 들 가능성이 매우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