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라노 칙령
라틴어: Edictum Mediolanense
영어: Edict of Milan
밀라노 勅令
서기 313년[1] 2월 3일에 발표된 걸로 알려진 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1세가 기독교를 포함한[2] 모든 종교에 대한 관용령. 디오클레티아누스 이래의 박해 시기에 몰수한 교회의 재산 등을 다시 돌려주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전문은 락탄티우스가 저술한 "박해자의 최후(L: De Mortibus Persecutorum)"에 기록된 라틴어판과 에우세비오가 저술한 "교회사(G: Ἐκκλησιαστικὴ ἱστορία / L: Historia Ecclesiastica)"에 기록된 그리스어판이 있다. 둘 다 기본적 내용은 같고 일부 서술에 차이가 있다.
일반적으로는 이 칙령이 콘스탄티누스 1세가 단독으로 밀라노에서 발표한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은 전문에는 콘스탄티누스 1세뿐만 아니라 동방 정황제인 리키니우스도 같이 언급되고 있다. 왜냐하면 제국 전체에서 시행해야 할 사항이었기 때문에 서방의 정황제에 불과했던 콘스탄티누스 1세 혼자서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칙령의 전문이 라틴어판과 그리스어판이 같이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밀라노 칙령이라고 이름이 붙어 있지만 정작 이 칙령이 선포된 곳은 제국 동방 정황제의 수도인 니코메디아였다. 밀라노에서는 콘스탄티누스 1세와 리키니우스가 회담을 했었고 여기서 기독교 공인을 결정한 뒤에 리키니우스가 비티니아의 총독에게 회의 내용을 보내서 칙령으로 공포된 것이다. 그런데 당시에 막시미누스 2세의 선공으로 시작된 내전 때문인지 니코메디아에서의 반포는 6월 13일로서, 2월 3일의 합의일보다 많이 늦어졌다.
학자들에게 밀라노 칙령은 칙령(edictum)이라기보다는 황제의 '친서'로 봐야 한다는 의견도 지배적이다. 실제로 라크란티우스는 리키니우스가 비티니아의 총독에게 친서를 보내어 그 내용을 공포하게 한 것을 인용한 것으로 여겨지며, 유세비우스는 콘스탄티누스 1세가 팔레스타인 총독에게 보낸 친서에서 전문을 인용했을 것이라고 보는 추측이 지배적이다. 갈레리우스가 내린 관용령은 로마법적으로 본다면 황제의 명령에 해당되는 칙령에 해당되지만, 콘스탄티누스 1세와 리키니우스의 경우에는 칙령이 아니라 친서로 봐야한다는 주장이 있다. 즉 로마 황제가 권고하는 내용을 보낼 때 쓰던 방식이라는 이야기다.
전문의 내용에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있어 유익한'''이라는 언급이 있는데 배교자로 악명을 떨친 율리아누스 황제는 이 구절을 근거로 '''밀라노 칙령의 폐기를 선언하는''' 사태가 일어나기도 했다. 차라리 칙령이 아니었다고 했다면 더 법리적으로 타당했을 텐데. 그러나 이미 기독교가 널리 퍼진 상황에서 율리아누스의 조치는 제국의 혼란만 더 부채질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일부 학자들은 밀라노 칙령을 기점으로 기독교의 경직화가 일어났다고 본다. 이전까지 비주류였던 기독교는 황제의 공인#s-1을 받으면서 박해를 받지 않게 되었고,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 권력과 부를 얻는 길이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기독교 신앙은 그 순수한 의미를 잃고 '''기독교인이 되는 게 하나의 문화요 관습'''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이를 가장 강력하게 비판했던 사람이 개신교 신학자 디트리히 본 회퍼였다. 물론 기독교가 국교화 된 것은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 때였다.
영어: Edict of Milan
밀라노 勅令
1. 개요
서기 313년[1] 2월 3일에 발표된 걸로 알려진 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1세가 기독교를 포함한[2] 모든 종교에 대한 관용령. 디오클레티아누스 이래의 박해 시기에 몰수한 교회의 재산 등을 다시 돌려주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2. 내용
현재까지 전해지는 전문은 락탄티우스가 저술한 "박해자의 최후(L: De Mortibus Persecutorum)"에 기록된 라틴어판과 에우세비오가 저술한 "교회사(G: Ἐκκλησιαστικὴ ἱστορία / L: Historia Ecclesiastica)"에 기록된 그리스어판이 있다. 둘 다 기본적 내용은 같고 일부 서술에 차이가 있다.
일반적으로는 이 칙령이 콘스탄티누스 1세가 단독으로 밀라노에서 발표한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은 전문에는 콘스탄티누스 1세뿐만 아니라 동방 정황제인 리키니우스도 같이 언급되고 있다. 왜냐하면 제국 전체에서 시행해야 할 사항이었기 때문에 서방의 정황제에 불과했던 콘스탄티누스 1세 혼자서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칙령의 전문이 라틴어판과 그리스어판이 같이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밀라노 칙령이라고 이름이 붙어 있지만 정작 이 칙령이 선포된 곳은 제국 동방 정황제의 수도인 니코메디아였다. 밀라노에서는 콘스탄티누스 1세와 리키니우스가 회담을 했었고 여기서 기독교 공인을 결정한 뒤에 리키니우스가 비티니아의 총독에게 회의 내용을 보내서 칙령으로 공포된 것이다. 그런데 당시에 막시미누스 2세의 선공으로 시작된 내전 때문인지 니코메디아에서의 반포는 6월 13일로서, 2월 3일의 합의일보다 많이 늦어졌다.
학자들에게 밀라노 칙령은 칙령(edictum)이라기보다는 황제의 '친서'로 봐야 한다는 의견도 지배적이다. 실제로 라크란티우스는 리키니우스가 비티니아의 총독에게 친서를 보내어 그 내용을 공포하게 한 것을 인용한 것으로 여겨지며, 유세비우스는 콘스탄티누스 1세가 팔레스타인 총독에게 보낸 친서에서 전문을 인용했을 것이라고 보는 추측이 지배적이다. 갈레리우스가 내린 관용령은 로마법적으로 본다면 황제의 명령에 해당되는 칙령에 해당되지만, 콘스탄티누스 1세와 리키니우스의 경우에는 칙령이 아니라 친서로 봐야한다는 주장이 있다. 즉 로마 황제가 권고하는 내용을 보낼 때 쓰던 방식이라는 이야기다.
전문의 내용에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있어 유익한'''이라는 언급이 있는데 배교자로 악명을 떨친 율리아누스 황제는 이 구절을 근거로 '''밀라노 칙령의 폐기를 선언하는''' 사태가 일어나기도 했다. 차라리 칙령이 아니었다고 했다면 더 법리적으로 타당했을 텐데. 그러나 이미 기독교가 널리 퍼진 상황에서 율리아누스의 조치는 제국의 혼란만 더 부채질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일부 학자들은 밀라노 칙령을 기점으로 기독교의 경직화가 일어났다고 본다. 이전까지 비주류였던 기독교는 황제의 공인#s-1을 받으면서 박해를 받지 않게 되었고,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 권력과 부를 얻는 길이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기독교 신앙은 그 순수한 의미를 잃고 '''기독교인이 되는 게 하나의 문화요 관습'''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이를 가장 강력하게 비판했던 사람이 개신교 신학자 디트리히 본 회퍼였다. 물론 기독교가 국교화 된 것은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