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레인/역사
1. 고대
고대 페르시아 만 지역에 존재했던 문화인 딜문의 중심지였다. 시기는 BC3000년경~BC600년경으로, 초기 딜문 문화는 BC3000~175O년경, 중기와 후기는 각각 BC1750~1000년경, BC1000년경~BC600년경으로 나뉘는데 바레인의 유적지에서 수메르, 인더스 문명과 교류한 것이 확인되었다. 이후에도 수메르-아카드의 기록에서 조금씩 언급되다가 BC700년경 아시리아의 침공을 받아 멸망했다고 한다. 이후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영향력 하에 있다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메소포타미아를 정복하면서 바레인 섬도 그리스 문화의 영향권에 들었고, 3세기에는 사산조 페르시아에 정복되었다. 한편으로는 기독교가 생겨나면서 동로마 제국에서 이단이라고 비난받던 네스토리우스파가 여기를 중심지로 삼기도 했었고 유대인도 좀 있었다.
2. 중세~근현대
정통 칼리파가 사산조 페르시아를 멸함으로써 이 지역도 이슬람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이슬람 제국의 분열 이후 이스마일파인 카르마트, 우윤 왕조 등 아라비아 이슬람 왕조의 지배를 차례로 받았고, 16세기 대항해시대에는 포르투갈이 영향력을 끼쳤던 적도 있지만 페르시아의 사파비 왕조에서 이들을 몰아내고 200년 동안 지배했다. 중간에 오만 제국의 침공을 받은 때도 있었다. 18세기에는 아라바아 반도 동부의 수니파 부족들인 할리파 가문과, 사니 가문이 바레인과 카타르 등지에서 페르시아 세력을 쫓아내고 공동 통치했다.
19세기에는 사우드 가문과 페르시아의 압력에 맞서기 위해 영국과 손을 잡았는데 오히려 이게 독이 되어 영국의 보호령이 되고 말았다. 현지에서 저항운동이 있기는 했으나 영국의 무력에 분쇄되었다. 본래 바레인은 진주 산지로 유명했던 곳이었으나 1930년대에 석유가 발견되고, 영국은 BP plc 등을 진출시켜 석유 시추에 나섰다.
2차대전 이후 식민지 독립을 물결을 맞아 독립이 논의되었다. 당시 바레인을 지배하던 영국에 맞서 이란 제국도 바레인에 영유권을 주장했었으나, 바레인 독립 문제를 국제연합에 의뢰하기로 합의,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독립의견이 우세함을 확인하고 1970년 UN 안전보장이사회의 바레인 독립 결의에 이어 이란 제국 국회가 바레인 영유권 주장을 포기할 것을 결의하여 1971년에 바레인국(دولة البحرين, Dawlat al-Baḥrayn)이라는 이름의 전제군주국으로 독립했고, 동시에 UN과 아랍 연맹에 가입했다.
3. 21세기 이후
현 국왕 하마드 빈 이사 알 할리파는 원래 정식 칭호가 아랍 에미리트, 쿠웨이트, 카타르의 군주들과 동일한 아미르 였으나, 2002년에 사우디아라비아, 요르단, 모로코와 동격인 '말리크(영어로는 King)'로 자신의 칭호를 격상했으며 헌법을 제정해 입헌군주국이 되고[1] 국호도 바레인 왕국(مملكة البحرين, Mamlakat al-Baḥrayn)으로 바꿨다.
과거 주말은 목요일과 금요일이었으나 서방과의 교류에 지장을 준다는 이유로 2006년에 주말을 금요일과 토요일로 바꿨다.
이 나라 역시 아랍의 봄의 물결을 피해가지는 못해서, 2011년 일련의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다. 상세 사항은 2010-2011 아랍권 민주화 운동, 바레인 반정부 시위에서.
2018년 4월 1일에 바레인에서는 1932년에 원유생산을 시작한 이후, 최대 규모의 유전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2018년 4월 5일에 영국은 1971년에 바레인에서 철수한 이후, 300명의 군인을 수용할 수 있는 해군기지를 다시 개설했다.#
[1] 그러나 군주의 강력한 권한을 헌법에 명기했을 뿐이라 여전히 전제군주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