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라스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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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derius Erasmus
Desiderius Erasmus Roterodamus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
'''
'''본명'''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1]
'''필명'''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 로테로다무스'''[2]
'''출생'''
1466년 부르고뉴령 네덜란드 로테르담
'''선종'''
1536년 7월 12일 스위스 바젤
'''분야'''
기독교 철학, 르네상스 인문주의
'''국적'''
네덜란드
1. 소개
2. 유년 시절
3. 인문주의자
4. 종교 개혁가로서 성향
5. 사망
6. 평가
7. 기타

예방은 치료보다 낫다.

맹인의 나라에서는 애꾸가 왕이다.

『격언집』, 1500


1. 소개


르네상스 시대 네덜란드의 인문학자이자 신학자. 필명으로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 로테로다무스(Desiderius Erasmus Roterodamus)'라 불리기도 한다. 라틴어로 직역하면 '로테르담의 사랑받는 갈망'. 고전주의 철학자이자 마틴 루터와 함께 세속화된 당시 교회와 성직자들을 비판하던 종교 개혁가들 중 한 사람이었다. 신약성서를 라틴어와 그리스어[3]로 번역했으며, 대표적인 저서로는 『우신예찬』, 『기독교도 병사의 휴대서』 등이 있다.

2. 유년 시절


에라스무스는 1466년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성직자인 아버지와 의사의 딸인 어머니 사이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그는 사생아였지만 부모에게 버려지지는 않았다고 한다. 4살에 학교에 입학하여 9살 때 아버지에 의해 라틴어 학교에 보내졌고 그곳에서 라틴어 시를 지을 만큼 높은 학문적 재능을 보였다. 부모가 흑사병으로 죽고 난 후 후견인이 에라스무스를 공동생활 형제회가 운영하는 학교에 맡겼다. 그는 당시 수도원의 엄격한 규율과 혹독한 생활을 겪었고, 이는 훗날 그의 교회에 대한 비판적인 사상에 영향을 주었다.

3. 인문주의자


21살이 되던 해 에라스무스는 생계 문제로 스테인에 있는 아우구스티노회 수도원에 입회, 가톨릭 사제가 되었다. 하지만 수도원 생활에 회의를 느낀 그는 수도원을 떠나 1493년 베르겐 주교의 비서가 되었다. 베르겐 주교의 밑에 있는 동안 에라스무스는 수도원의 지루한 삶에서 벗어나 세속적 삶을 즐길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뛰어난 라틴어 실력을 눈여겨 본 베르겐 주교는 그가 파리에 가서 공부할 수 있게 해주었다. 베르겐 주교 덕분에 에라스무스는 파리에서 인문학을 공부하며 당시의 지식인들과 교류할 수 있었다. 하지만 파리대학에서 에라스무스의 공부는 만족스럽지 못했던 듯하다. 파리대학에 있는 동안 그는 그곳에서 가르치던 스콜라 철학을 비판했다.
1499년 에라스무스는 영국을 방문했다. 영국 방문은 그가 인문주의자의 길을 걷는 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는 영국에서 토머스 모어[4], 존 콜렛 등 당시의 인문주의자들과 교류했고 어린 시절의 헨리 8세를 만나기도 했다. 그는 지적인 교류를 계기로 고전과 인문주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더불어 가톨릭과 인문주의의 융합에도 관심을 가져 인문주의의 문헌적 연구를 통해 성서의 잘못된 이해를 바로잡고자 하였다. 이러한 목적으로 에라스무스는 그리스어를 공부하여 신약성서를 중세 그리스어로 번역했다. 이 업적은 신학자로서 그의 명성을 높여주었으며, 여태껏 교회가 독점했던 성서 해석을 바로잡고자 한 사례였기 때문에 훗날 종교개혁의 밑바탕이 되었다.
유럽 각지를 여행하던 에라스무스는 1509년 영국에 돌아와서 토머스 모어의 집에 머무르면서 작품을 썼다. 그 작품이 바로 교회의 허위와 위선을 풍자한 '''『우신예찬』'''이다. 우신예찬에서 그는 우신(바보 신)을 만들어 교황, 성직자 뿐만 아니라 군주, 학자들도 비판했다. 그리고 우신예찬은 금서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유럽에서 이 저서의 파급력은 엄청났고 에라스무스는 종교개혁가를 비롯한 인문주의자들 사이에서 유명해지게 되었다.

"아마도 신학자들에 대해서는 침묵한 채 지나치는 게 좋을 것이다. 그들은 놀라울 정도로 거만하고 화를 잘 내는 족속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600개에 달하는 논거를 한 조(組)로 묶어 내 주장을 취소하도록 몰아세울 것이다. 내가 그것을 거절하면 그들은 즉각 나를 이단자로 선언할 것이다. 스콜라 신학자들이 추구하는 방법은 난해한 것들 가운데 가장 난해한 것을 더욱 난해하게 만들 뿐이다."

『우신예찬』 中

그가 저술한 '격언집(Adagia)', '기독교도 병사의 휴대서' 등에도 이러한 풍자가 담겨져 있다.

4. 종교 개혁가로서 성향


에라스무스는 마르틴 루터와 같은 종교 개혁가였지만 루터의 사상에 동조하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루터의 사상에 동조했지만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에 대해 지지해달라고 요청하자 에라스무스는 루터의 종교 개혁의 비이성적인 움직임을 우려하여 “격렬한 언동보다 정중한 중용을 지킴으로써 더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며 온건 노선을 택했다. 그가 바랐던 것은 어디까지나 교회의 체제 내 개혁이었지 그리스도교 세계의 분열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가톨릭교회를 비판하였지만 한편으로는 가톨릭의 교리 중 하나인 자유의지를 지지하며 루터의 사상에 반박했다. 이에 루터는 노예의지론을 통해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론을 반박하며 에라스무스와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루터는 에라스무스를 두고 '독사'라 부르기도 했다. 이렇게 둘 사이의 관계가 틀어졌지만 에라스무스가 루터를 싫어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에라스무스는 루터가 트레엔트 공의회에 의해 이단자로 낙인 찍히자 교회에 루터의 선처를 요구하기도 했다. 루터 또한 에라스무스와 사이가 틀어지기 전에 에라스무스를 따라 신약성서 독일어 번역본을 만든 만큼 에라스무스의 학문적 권위는 인정했다.
에라스무스는 루터에게 급진적 개혁을 자제할 것을 당부했다. 루터는 에라스무스가 유유부단하다고 판단했지만 사실 에라스무스는 루터의 급진적 개혁으로 인해 교회 내 강경 세력이 확고해져, 결국 교회가 영구히 분열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5. 사망


네덜란드의 섭정인 헝가리의 메리 여왕으로부터 초대를 받아 브라반트로 가던 도중 스위스 바젤에서 적리 증상으로 1536년 사망했다. 그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신이시여..."였다. 사후 그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병자성사를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의 시신은 바젤 성당에 안치되었다. 1622년 그가 태어난 로테르담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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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평가


자유주의적 가톨릭주의(liberal Catholicism)의 시조로 평가받기도 한다.

7. 기타


  • 북유럽 르네상스 미술의 거장이자, 독일 초상화 예술의 정점인 한스 홀바인을 토머스 모어에게 추천할 정도로 친분이 있었다. 이 페이지에 실린 홀바인이 그린 에라스무스의 초상화가 에라스무스의 초상화들 중 가장 유명하다. 후에 홀바인은 토머스 모어헨리 8세의 초상화도 남겼다. 이들의 초상화 또한 북유럽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작품들이다.
  • 네덜란드어로 '에라스뮈스'라 불린다. 그가 당대의 대표적인 인문주의자로서 자국어보다는 라틴어를 즐겨 썼기 때문에 네덜란드어인 에라스뮈스는 맞지 않다는 말도 있지만, 어떻게 부르든 상관없다.
  • 특이하게도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에 에라스무스의 목조 조각상이 있는데 그 기원은 윌리엄 애덤스[5]가 타고온 선박 에라스무스호의 선미상(船尾像)을 누군가가 노획하여 도치기현 류코인(龍江院)이라는 절에 세워졌다고 한다. 현존하는 유물은 일본의 국보이다. 2012년부터 에라스무스 대학교를 주축으로 로테르담에서 반환 요청의사를 꾸준히 밝혔오는중이나 매번 거절당하는 중이다. 네덜란드-일본 정상회의때도 마르크 뤼터 총리가 정중하게 반환의사를 보였음에도 아베 신조 전 총리는 방법을 생각해보겠다며 즉답을 회피했다.
  • 독일을 위한 대안싱크 탱크인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 재단 또한 이 사람의 이름에서 따왔다. 네덜란드 출신의 범유럽주의자인 에라스무스의 이름을 독일의 반EU정당인 대안당의 정책연구소에 썼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 재단 측에서는 에라스무스의 자유주의 사상과 유럽적 가치관이 대안당과 일치하여 그의 이름을 땄다고 밝혔다. #

[1] 네덜란드어로는 데시데리위스 에라스뮈스지만 보통 라틴어 발음으로 읽는다.[2] 로테로다무스는 네덜란드 도시인 '로테르담의'를 뜻하는 라틴어 형용사 형태이다.[3] 신약성서는 헬레니즘 시대의 그리스어인 코이네 그리스어로 쓰였는데 이를 중세 그리스어로 번역했다.[4] 대화는 당연히 라틴어로 나눴다.[5]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가신이 된 영국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