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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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박강조
'''생년월일'''
1980년 1월 24일
'''출생지'''
일본 효고현 야마나시시
'''국적'''
대한민국
포지션
미드필더은퇴
'''신체 조건'''
166cm
'''소속 클럽'''
교토 퍼플 상가 (1998~1999)
성남 일화 (2000~2002)
빗셀 고베 (2003~2012)
'''국가대표'''
5경기 1골대한민국
1경기대한민국 U-23
1. 개요
2. 선수 시절
2.1. 클럽 경력
2.2. 국가대표 경력
2.3. 플레이스타일
2.4. 여담
3. 관련 문서


1. 개요


'''K리그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 역사상 첫 재일교포 선수.'''
박강조는 일본 출생의 대한민국 윙어, 윙포워드였다. 2012년 은퇴 후 경정선수로써 활동하기도 했다.

2. 선수 시절



2.1. 클럽 경력



2.1.1. 교토 퍼플 상가


재일 한국인 3세로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한국 국적을 유지한 교포다. 다키가와 다이니 고교 시절부터 촉망받는 유망주였다. 고등학교 졸업 후 곧바로 J리그의 교토 퍼플 상가에 입단하나 1998년과 1999년, 2년동안 단 1경기 출장에 그치고 방출되고 만다. 선수 본인의 회상으로는 고교무대와 프로무대간의 벽이 너무나 높게 느껴졌던 시기라고.

2.1.2. 성남 일화 천마


방출된 뒤 새로운 팀을 물색하던 박강조는 부모님의 나라 대한민국으로 눈을 돌린다. K리그 입단을 위해 당시 K리그 최강팀이었던 성남 일화에 입단테스트를 받으러 갔고, 3개월간의 테스트 동안 성남 감독 차경복의 눈도장을 받아 성남에 입단한다. K리그 역사상 '''첫 재일교포 선수'''로 기록되었고, 당시 재일교포 선수에 대한 로컬룰이 확립되기 전이라 드래프트 문제와 겹쳐 자칫 잘못하면 한국 국적인데 '''외국인 선수'''로 분류될 위기에도 처했다. 다행히 한국프로축구연맹이 박강조의 성남 입단을 계기로 '''재일교포 선수들은 국내 선수로 인정한다'''라는 로컬룰을 명문화시켰고, 박강조는 그 첫번째 수혜자가 된 것.
2000 시즌에 K리그에 데뷔한 박강조는 그 해 31경기 1도움을 올리며 팀의 주전급 선수로 활약했고, 2001년에도 무릎부상으로 많은 경기를 소화하진 못했지만 20경기 1골 2도움으로 준수한 활약을 보였다. 2002년 18경기 1도움을 올리고 2002시즌을 마감한 뒤 성남 일화와 재계약에는 실패하며 다시 일본으로 돌아간다.

2.1.3. 빗셀 고베


박강조는 일본 복귀 후 고향 야마나시와 가까운 곳에 위치한 빗셀 고베에 입단하며 J리그로 컴백한다. 고베 입단 후 꾸준한 활약을 보여주며 2003년과 2008년을 제외하곤 시즌 20경기 이상을 소화하는 붙박이 주전으로 활약하며 빗셀 고베에서 10시즌간 296경기 35골, 리그 기준 251경기 30골을 기록하고 2012시즌과 종료와 동시에 은퇴했다. 특히 2006년 팀이 J2리그로 강등됐음에도 남아 43경기 10골을 때려박으며 팀의 재승격에 앞장서는 의리도 보였다.

2.2. 국가대표 경력


성남 일화 입단 초기 2000시즌 31경기에 나와 1도움을 올리며 스타 군단 성남 일화에서도 비중있는 선수로 발돋움한다. 특히 166cm의 작은 키지만 넓은 시야와 축구센스를 이용해 좋은 경기력을 펼치며 당시 국가대표와 올림픽대표를 겸임하던 허정무 감독의 레이더에도 들어가게 되고, 2000년 5월 유고슬라비아와의 국가대표 평가전 경기에 선발되어 첫 A매치 경기를 소화하더니 6월 LG컵 명단에도 뽑혀 결승 이집트전에서 결승골을 뽑아 자신의 A매치 데뷔골까지 성공시킨다. 시드니 올림픽을 2달 앞두고 열린 8월 나이지리아와의 평가전에도 뽑혀 활약했다. 이로써 박강조는 '''사상 첫 재일교포 국가대표'''로 이름을 남기게 된다. 아쉽게도 그 해 시드니올림픽에는 본선 예비엔트리에 들어가는데 그치며 본선무대를 밟진 못했다. 포지션 경쟁자들이 이천수, 고종수, 최태욱이었으니 그럴만도 하긴 했다.

2.3. 플레이스타일


166cm의 단신에 60kg가 채 안되는 몸무게로 전형적으로 호리호리한 빠른 윙어라고 오해하기 쉬우나 스피드보다는 시야와 기술로 승부하던 윙어였다. 특히 일본에서 축구를 배워 발밑 기술이 좋은 것으로 평가받았고, 차경복 당시 성남 일화 감독도 박강조의 장점으로 시야와 패스정확도를 꼽았다. 당시 한국에서도 정형적인 윙어가 아닌 플레이메이커로 박강조를 인식했다. 다만 K리그 특유의 피지컬 축구 때문에 2년차부터는 잦은 부상에 시달리며 많은 경기를 소화하지 못해 우려하던 약한 내구성을 노출하기도 했다. 이는 J리그에 돌아가서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아 빗셀 고베에서 장수하는 선수가 되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J리그에서는 절대로 태클이 오지 않을것 같은 곳에서도 K리그에선 태클이 날라오고 했다고...

2.4. 여담


  • 2002년 성남 일화 소속일 당시 2002 한일 월드컵을 위해 입국한 폴란드 축구 국가대표팀과의 평가전에서 추격골을 넣기도 했다. 당시 국가대표 다음으로 한국에서 강한 전력이라는 성남 일화의 면면을 듣고 폴란드 측에서 요청해 성사된 평가전이었는데 박강조는 여기서 0-2로 뒤지던 후반 29분에 페널티 에이리어 정면 바깥에서 중거리포로 1골을 만회하며 강한 인상을 남겼다. 선수 개인적으로도 K리그 생활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로 꼽기도 했던 장면이다.
  • 2007년 자신의 이름을 딴 박강조 사커스쿨을 개원했다.
  • 2012년 선수 은퇴이후 뜬금없이 경정 선수로써의 전향을 발표하고 2013년 후쿠오카에 있는 야마토 보트 학교에 등록하며 훈련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 해 4월 훈련 중 부상으로 인해 꿈을 접었다고.
  • 한국의 수직적 상하관계에 애를 많이 먹었다고 한다. K리그 진출 당시 하필 K리그에서도 가장 수직적 분위기가 강했던 성남 일화에 들어가 더 어려웠다고. 막내라는 이유로 전술적 제안을 아예 하지도 못하는 것에서 가장 충격을 먹었다고 한다. 그러나 엄격함 덕분에 자신이 프로로써의 기초 자세를 한국에서 배웠다며 긍정적인 평가도 했다.
  • 존경하는 선수는 미우라 가즈요시. 이것 때문에 한국에서 회자되는 에피소드가 있었는데, 2000년 6월 LG컵 결승전 이집트와의 경기에서 본인의 A매치 데뷔골이자 경기의 결승골을 넣고 난 뒤 미우라 가즈요시의 고요 셀레브레이션으로 유명한 카즈댄스를 골 셀레브레이션으로 한 것이다!. 카즈댄스는 한국에도 이미 잘 알려진 미우라의 트레이드 마크였기 때문에 "한국 국가대표가 일본 선수의 골 세레머니를 따라해도 되냐??"라는 비판을 받았다고. 문화의 차이에서 온 실수담이다.
  • 이효리의 팬인듯 하다. K리그 활약 당시 인터뷰에서 무인도에 가져가고 싶은 것은? 이란 질문에 '도라에몽의 주머니'와 '이효리'라고 답했다고. 후에 결혼 한 뒤 인터뷰에서는 당연히 아이와 아내라고 답이 바뀌었다.
  • 외모가 잘생긴 편이다. 박재민을 닮았다.

  • 2010년 8월 27일 방영된 MBC 다큐 "경술국치 100년 특집 - 축구, 그리고 세 개의 조국"에 출연해서 근황을 알렸다. 당시 재일교포지만 각기 다른 선택을 한 세 선수를 인터뷰하는 형식에서 박강조는 대한민국을 선택한 선수로 등장해 북한 대표인 정대세, 일본 대표인 이충성과 같이 출연했다.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꽤나 잘 만든 다큐.

3.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