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욱
1. 개요
대한민국의 前 축구 선수. 포지션은 측면 미드필더. 나름대로 2002 월드컵 4강 신화 멤버 중 한 명이었다.
2. 선수 커리어
2.1. 고교 시절
고교시절 전국랭킹을 다툴 정도로 특급 유망주였다. 인천광역시 부평고등학교의 전성기를 이끌었는데 이때 같은 학년이었던 이천수, 박용호와 함께 '''부평고 3인방''' 하면 전국에서 고교축구 보는 사람 치고 모르는 이가 없었다. 이 때는 최태욱이 가장 빛났으며, 상대적으로 못 했던 이천수가 그를 뛰어넘기 위해 축구 내적으론 엄청나게 노력하는 선수가 되었다. 고졸 후 특급대우를 받으며 안양 LG 치타스와 계약, K리그로 직행한 것도 당연한 수준이었다.
2.2. 허정무호 및 히딩크호
고교 시절부터 매의 눈으로 최태욱을 주시하던 허카우터는 2000년에 불과 19세였던 최태욱을 대표팀에 발탁하여 A매치에 데뷔시켰다. 최태욱의 A매치 데뷔무대는 동대문운동장에서 개최된 AFC 아시안컵 예선 몽골전이었는데, 아시안컵 예선이다보니 상대팀들이 팀이라고 불러주기에도 민망한 약체들이었고 우리의 허카우터께서는 이 예선경기들을 잠재성이 있는 유망주들에게 기회를 주는 무대로 삼았다. 이 때 최태욱과 같이 A대표팀에 데뷔한 선수들이 박지성, 이천수 등이다. 최태욱을 높게 평가한 허정무는 2000 시드니 올림픽 최종 대표팀 명단에 최태욱을 포함하기도 한다. 당시 올림픽 출전자격 기준이 77년 이후 출생자였으니, 최태욱은 이천수, 박지성과 함께 무려 4년을 월반한 것.
다음해에도 포지션이 윙백으로 바뀌었지만 소속팀 안양LG의 주전으로 도약하였고 거스 히딩크감독의 눈에 띄어 월드컵을 준비하던 대표팀에도 발탁. 그 해 11월 서울 월드컵 경기장에서 열린 크로아티아와의 평가전에서 골을 넣으며 눈도장을 찍었다. 특유의 스피드와 성실함을 높게 산 히딩크에 의해 2002년 한일 월드컵 최종 엔트리 23인 명단에도 이름을 올렸고, 월드컵을 앞둔 최종 리허설이라고 볼 수 있는 잉글랜드 및 프랑스와의 평가전에서도 연이어 선발 출전할 정도로 준 주전급의 자원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불의의 부상'''으로 인해 대회 초반에 아예 결장하게 되고, 그 사이에 경쟁자인 이천수, 차두리 등이 인상적인 활약을 보여서 경쟁에서 완전히 낙마하여 대표팀이 4강까지 승승장구하는 동안 벤치만 지킨다.
하지만 마지막 터키와의 3-4위전에서 후반전 설기현과 교체되어 꿈에 그리던 월드컵 무대를 밟는다. 불과 10분 남짓한 시간이었지만 그동안의 한을 푸는 듯한 과감하고 날쌘 돌파와 날카로운 크로스로 국민들에게 임팩트를 남겼다.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리자 최태욱이 필드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흐느끼는[1] 모습이 클로즈업되었고 이는 대회 주관방송사 KBS에 의해 전 세계로 송출되었다.
2.3. 슬럼프, 그리고 부활
히딩크가 인정한 기량과 포텐셜, 그리고 병역특례까지 받은 최태욱의 앞날은 창창해 보였고 소속팀 안양에서도 [2] 핵심 선수로 활약하며 기량이 만개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단 한 번의 선택이 최태욱의 선수일생을 바꿔놓는데 2004년 K리그 참가를 목표로 2003년 창단한 신생팀 인천 유나이티드와 계약한 것이다. 인천 측은 창단 붐을 일으키기 위해 연고지 인천을 상징할 수 있는 네임드급 선수 영입이 필요했고 그래서 점찍은 선수가 최태욱이었다. 애향심이 남달랐던 데다 본 포지션이 아닌 위치에서 경기를 뛰는 데 대한 불만도 있었던 최태욱 역시 인천행에 흔쾌히 동의하였고, 지원이 탄탄한 원소속팀 대신 갓 창단된 시민구단에서 뛰는 모험을 시작하게 된다.
인천에서 그는 3-4-1-2 포메이션의 플레이메이커로 활약했고 공격재능을 맘껏 펼칠 수 있었으나, 신생 시민구단으로 필연적인 여러 환경적인 한계로 인해 팀을 떠나기로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3] 한편으로는 김호곤 감독이 이끄는 2004 아테네 올림픽 대표팀 최종엔트리에 들어 생애 두 번째 올림픽 무대에 나서게 되었는데, 이 때 코칭스태프와의 마찰을 빚었던 사건도 발생하였고...[4] 자신에 대한 축구계 여론도 좋지 못했던 이유도 있었는지 최태욱은 돌연 '''J리그행'''을 결정한다. 행선지는 조재진이 활약 중이던 '''시미즈 S펄스'''.[5]
그러나 직선적이고 다이렉트한 최태욱의 플레이 스타일은 J리그의 컬러와는 맞지 않았고 결과론적으로 시미즈행은 최태욱의 슬럼프를 가속화시킨 최악의 선택이 되었다.[6] 더군다나 자국에서 열린 2005년 동아시안컵에서 후반 교체멤버로 뛰면서 실망스러운 경기력을 보여주어서 팬들로부터 '''그 창창하던 유망주가 어쩌다 이리 됐나'''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2006년에 포항 스틸러스와 계약하면서 K리그로 복귀하고, 아드보카트 감독 하의 대표팀에서는 오른쪽 풀백(윙백도 아니고 풀백이다!) 자리까지 마다않으며 월드컵행에 강한 의지를 보였으나 워낙에 폼이 떨어져 있었던 것이 문제. 당연히 2006 독일 월드컵에서는 뛰지 못했고 포항에서도 전력외 취급으로 전락. 파리아스 감독은 최태욱을 3-4-1-2 포메이션에서 윙백 자원으로만 고려했지 공격자원으로 기용할 생각은 전혀 없는 듯 했다.[7]
결국 포항에서 실망스러운 두 시즌을 마치고 최태욱은 포항과 전북의 스왑딜에 엮여 전북 유니폼을 입게 되는데... '''이 이적이 선수인생의 반전이 된다.''' K리그의 대표적 재활공장장 중 한 사람인 '''최강희''' 감독[8] 하에서 최태욱은 부활의 날개를 펴기 시작했고, 2008 시즌에 18경기에 출전하여 4골을 넣으며 서서히 페이스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9 시즌 28경기 9골로 완벽하게 부활. 팀에 새로 합류한 이동국을 뒤에서 받치며 에닝요, 루이스와 함께 K리그 최강의 판타스틱 4를 구축하였고, 팀에게 감격적인 창단 최초 우승컵까지 안긴다. 최태욱 본인에게도 2007년 포항의 우승 당시엔 사실상 2군신세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실질적인 선수 커리어 최초의 리그 우승인 셈. 이 활약으로 시즌 중반 여름에 중동에서 거절할 수 없을정도로 거액의 이적제의가 오는데, 리그 우승을 위해 감독과 단장 모두 이적을 만류했고 팀에 잔류하였다.
2010 시즌에도 전북 공격진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으나 아무래도 같은 포지션의 이승현의 합류와 서정진의 성장으로 전년도만큼 팀의 핵심은 아니었다. 최태욱은 자녀들의 교육문제로 인해 수도권으로의 이적을 원했고, 친정팀인FC 서울로 이적을 추진하였다. 전북 구단은 시즌 중 라이벌팀으로 이적을 허용할 리 없었으나, 지난 해 중동이적을 거절한 것과 팀에게 이적료를 안겨주기 위해 재계약 했던 최태욱의 의리를 이유로 이적을 승낙하게 된다.[9]
국가대표 미드필더 이청용의 EPL 진출로 인해 생긴 공백을 김승용, 에스테베즈 등으로 메우려다 실패한 서울은 최태욱을 통해 이 공백을 완전히 메우게 된다. 최태욱은 반 시즌을 뛰고도 16경기 6골을 기록해 제파로프와 함께 팀 우승의 마지막 퍼즐이 되었고 팀의 더블을 이끌었으며, 개인적으로는 리그 2연패를 달성하였다.
그러나 2011 시즌을 앞두고 전지훈련에서 우측 무릎 부상을 당했고, 복귀과정에서 추가적인 부상까지 당하며 여름까지 한 경기도 출전하지 못하였다. 이 부상으로 인해 자신의 장점 중 하나인 폭발적인 스피드를 잃게 되었으며 교체자원으로 만족해야했다. ACL 4강 1차전 알 이티하드와의 경기에서 1득점을 기록한데 이어 부산과 대전을 상대로 1도움씩을 기록하며 3경기 연속 공격포인트를 기록하며 시즌 말미 괜찮은 폼을 보여주었다. 16경기 1골 3도움
2012 시즌은 최태욱의 부상기간동안 주전을 차지했던 고요한이 윙백으로 내려가며 다시 주전자리를 차지하였다. 김태환과 주전자리를 경쟁했다. 그러나 역습축구를 활용했던 10, 11시즌과 다르게 몰리나와 데얀을 축으로 한 지공축구로 변신한 12시즌에서의 최태욱은 이전만큼의 날카로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였다. 스피드를 활용한 돌파력이 장점인 선수가 부상으로 스피드를 잃고 지공으로 인해 내려앉은 수비를 상대로 돌파력을 보여주지 못한데다, 공격의 중심이 몰리나이기 때문에 공을 잡을 기회도 많지 않았다. 경쟁자인 김태환이 최악의 폼을 보여주었기에 전반기동안 주전자리를 차지하긴 했으나 여름이적시장에서 에스쿠데로가 영입되며 벤치로 밀리고 말았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벤치로 밀린 뒤 개인의 폼은 훨씬 좋아졌는데 에스쿠데로가 선발로 60분정도를 휘저은 뒤 남은 30분정도를 최태욱이 활약하거나 아예 선발로 출전해 5~60분만 뛸 셈으로 모든걸 쏟아부으며 플레이하니 자연스레 경기력도 향상되었다. 이후 남은시즌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리그 우승의 쏠쏠한 조연 중 하나가 되었다. 시즌 28경기 2골 7도움.
2013시즌에는 4-2-3-1형태의 포메이션으로 변화가 이뤄지며 몰리나가 4231의 중앙을 맡게 되어 에스쿠데로와 좌우 주전자리를 차지할 것으로 보였으나 경남FC에서 윤일록을 영입하였고 국가대표 윙백 차두리의 영입으로 고요한이 다시 윙어로 올라오며 간접적인 영향을 받게되었다. 윤일록, 에스쿠데로, 고요한이 주전 2자리를 경쟁하고 최태욱은 4번째 옵션이 되었다. 설상가상 시즌 내내 잔부상에 시달리며 100% 폼을 유지하지 못하였고 FA컵 초반라운드나 1위가 확정된 ACL 6차전 부리람과의 경기와 같은 비중없는 경기에서 선발로 출전하였으나 괜찮은 활약을 보여준 고광민, 정승용 등과 달리 확실히 기량이 많이 떨어진 모습을 보였다. 11, 12시즌은 스피드는 떨어졌어도 클래스는 남아있었으나 그러한 클래스도 거의 보여주지 못한 셈. 리그 10경기 출전해 1득점만을 기록하였다.
2014시즌을 앞두고 데얀, 하대성등이 이적하고 아디가 은퇴하며 서울은 팀 리빌딩을 단행하였고, 이로 인해 이적대상에 올라가게 되며 1월 28일 울산 현대의 김동석(축구선수)과 1:1트레이드로 이적하였다 그러나 리그 첫 경기에서 당한 무릎 부상으로 시즌아웃되며 은퇴를 결심하게 되었고 포항과의 경기에서 은퇴식을 치렀다. ACL 포함 3경기 출전.
3. 지도자
결국, 부상을 극복하지 못하고 은퇴하게 되었다. 5월 15일 울산 현대 구단은 "최태욱이 은퇴를 결정, 유소년 스카우트로 변신한다. 은퇴식은 오는 7월 12일 포항 스틸러스와 홈경기에서 열릴 예정이다"고 밝혔다.
2015년 2월 6일 새로 챌린지에 참가한 서울 이랜드 FC의 유소년 코치로 부임하였다. 2015년 11월 17일 서울 이랜드 FC의 U-15팀 감독으로 부임하였다.
2018년 8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 새로 부임한 벤투호를 보좌할 국내 코치로 김영민과 함께 선임되었다.기사
대표팀에서의 역할은 대표팀 가용 대상 선수들의 플레이 시간 업데이트, 비소집 기간에 선수들과의 직접적인 소통 등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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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P급 강습회에 참가한 것이 확인됐다. #
4. 해설위원
2016-17 시즌부터 SPOTV의 해설위원으로 합류. EPL 중계에 참여한다. 부정확한 발음과 어색한 어휘 선택이 아쉬우며, 기본적인 배경지식조차 부족한 모습이 종종 보이곤 한다. 김병지와 더불어 단연 SPOTV 최악의 축구해설위원이라 할 수 있다.
5. 종교
이영표에 버금갈 정도로 독실한 크리스천이다.
6. 논란
2012년에 갑자기 한국 축구사에 남을 최악의 인물을 옹호하는 트윗을 올려 논란이 되었다. 그래서 '''"너도 승부조작했냐?"'''라면서 거센 비난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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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한 서호정 기자의 반응이 간결하면서 날카롭다. '''"화이팅 해주는 건 좋은데 트위터 말고 카톡으로 보내시든가"'''
둘이 아테네 올대 출신으로 친밀한 사이라서 저런 말을 한 듯 보이지만 승부조작으로 이미 가슴에 대못이 박힌 팬들을 두 번 능멸하는 행위임에는 틀림이 없고 기사까지 나면서 전방위적으로 까이자 결국 사과문을 게시한다.
축구계의 인식을 안좋게 만드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최모씨를 옹호하려 했다는 점이 굉장히 잘못된 점이다. K리그가 승부조작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이유는 축구가 전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스포츠여서 가능했던 것이지, 판이 작은 스포츠였다면 승부조작은 곧 그 스포츠의 존재 여부를 바꿀수도 있는 문제다. 간단하게 스타크래프트 승부조작 사건을 생각해보면 된다. 자신도 축구 선수이면서 그런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경솔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7. 여담
최태욱은 상당히 특이한 축구선수다. 본인의 증언에 따르면 축구를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고 직업으로만 생각했다고 한다. 본래 주변에 형들을 따라다니면서 노는 것이 좋았고 어려서부터 피지컬이 좋았고 속도가 빨랐다. 헌데 이렇게 형들을 따라다니면서 놀다 보니 형들이 축구부에 강제로 스카웃해 간 것이다. 축구부 감독도 최태욱의 자질을 비범하게 여긴 나머지, 초등학교 3학년을 마구 때리면서까지 축구부 가입을 강요했다. 최태욱은 축구가 재미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냥 형들과 노는 게 좋았던 것이고 아버지가 주던 비디오를 보는 게 더 좋았으나 맞기 싫어서 가입했다고 한다.[10]
이렇게 시작한 최태욱의 축구는 타고난 빠르기를 이용한 재능으로 두각을 떨치게 된다. 최태욱은 맞기도 싫어서 별로 의욕을 가지지 못했지만 그 당시 2002년 축구 개최에 대한 이야기가 전국적으로 오가며, 한국에서 열리는 월드컵에 출장한다는 것은 매력적으로 다가왔다고 한다. 이렇게 축구인생을 이어간 최태욱은 재능은 뛰어났고 노력도 열심히 했지만 극한까지 노력했다거나 그런 게 아니었기 때문에 학생 때 기본기를 그렇게까지 성실히 갈고 닦은 것은 아니어서 프로 무대에서 출전과 활약과 성장 등에 한계를 겪게 된다. 프로 무대에서 그 유명한 조광래와 파리아스 휘하에서 윙백으로 뛸 때 수비 가담을 하고 정력적으로 뛰라는 감독의 지시를 받았지만, 정작 자기는 왜 그래야 하는지 잘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웠다고 한다. 그래서 공격적으로 뛸 수 있는 구단을 찾아서 이적을 많이 했다고 하며, 어떻게 보면 시간을 허비한 느낌이 강하다고 회고한다.
최태욱은 국가대표에 대한 열망과 더불어 가족에 대한 책임감으로 이 시기를 버텼지, 아니면 축구를 다른 선수들만큼 좋아하지는 않는 자신이 버티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최태욱은 최강희와 만나며 전환점을 맞는다. 최강희는 최태욱의 인품은 몰라도 운동장에서의 투지나 투쟁심 등을 마음에 들지 않아 했다. 그래서 최태욱을 공 수 모두 100프로로 하라고 하며 출장시키지 않으며, 다른 선수들에게도 정신 자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하며 최태욱에게 자극을 줬다. 그러다 투입한 연습 경기에서 마빡이 깨지도록 열심히 뛰어보라고 주문했는데, 신기하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연습 경기에서 동료의 스터드에 이마가 찢겼다고 한다. 마음을 시름시름 앓고 전북 생활이 재미 없던 최태욱은 웬일로 정말 마빡이 깨지면서 응어리가 풀렸다고 한다. 이 때 이후 최강희와 교감을 나누며 수비 가담을 열심히 하게 되고 최대한 투쟁적으로 하며 2009년 경기력의 정점을 찍게 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태욱은 본인이 천성적으로 투지가 부족하기 때문에 완벽히 감독의 마음에 들지는 않았을 거라고 한다.
8. 둘러보기
[1] 그동안 이 순간만을 바라보고 달려왔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자신의 첫 월드컵이 끝났으니... 물론 같은 필드 플레이어임에도 1분도 뛰지 못한 윤정환, 현영민, 최성용보다는 나은 편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는 그의 마지막 월드컵 무대가 되었다.[2] 당시 안양LG는 조광래 감독이 최태욱, 한정화, 최원권 등 유망 신인 공격수들을 3-4-3 포메이션의 윙백으로 돌려 출장시켰는데, 이 때 조광래가 윙백덕후라는 평판을 얻었다. 다만 이는 포백과 달리 수비수 전향이 아니라 공격 재능을 살리려는 의도로, 실제 선발 좌우 윙백으로 출장했다는 이영표와 최태욱의 위치가 경기중 어느새 바뀌어 있을 정도로 공격적인 미션이 주어진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게 먹히는 경기는 한 시즌에 두 손에 꼽힐 정도이고, 특히 2000~01년의 안양LG는 리그에서 가장 수세적인 팀이었다는 게 문제. 오히려 원래 센터백 후보였던 김동진이 이 과정에서 만개했다. [3] 인천은 창단 감독 베르너 로란트가 단 반년만에 사임했다. [4] 김호곤 감독이 그리스전과 말리전 연달아 최태욱을 선발로 넣고 전반에 교체시켰는데 이에 빡친 최태욱이 교체되어 나오면서 유니폼을 벗어서 거칠게 집어던졌고, 이를 본 수석 코치가 최태욱을 불러세워놓고 삿대질을 하며 공개적으로 갈군 사건. 그리스전의 경우는 김치곤이 퇴장당하면서 불가피하게 전방자원 한 명을 빼고 수비를 두텁게 해야 했던 상황이라 최태욱이 재수없게 교체된 셈이지만 말리전의 경우 0-3으로 끌려가며 최악의 경기내용을 보였고 감독 입장에서는 교체를 통해 분위기 반전을 꾀해야만 했는데 선수 입장에선 자신만 연이어 전반도 다 못 뛰고 교체되니 환장할 노릇이었던 것.[5] 여담이지만 시미즈는 조재진과 최태욱, 그 전에는 안정환 등 한국 선수를 적극적으로 영입했던 팀인데 이로 인해 타 J리그팀 빠들이 시미즈를 깔 때 춍-펄스라는 인종드립을 치기도 했다. 그 이후로도 김동섭, 이기제, 김현성 등이 시미즈를 거쳐 갔다.[6] 본인 회상으로는 J리그의 잔디와도 몸이 맞지 않아 무릎 통증이 있었다고 한다.[7] 그도 그럴 것이 최태욱이 인천에서 뛰었던 1 자리엔 K리그 역대급 외국인 선수인 '''따바레즈'''가 굳건히 버티고 있었기에...[8] 아테네 올림픽 당시 김호곤 감독을 보좌하여 최태욱을 지도했던 코치였다.[9] http://www.hyundai-motorsfc.com/board/board_view.asp?bgbn=2&stype=&sval=&page=&seq=2379[10] 아마 학교 측에서 부모에 대한 설득도 있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