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배(축구)

 


''''''
[image]
''''''
'''박성배
朴成培 | Park Sung-Bae'''

'''출생'''
1975년 11월 28일 (48세)
'''국적'''
대한민국
'''직업'''
축구선수 (공격수/은퇴)
축구 코치
'''신체'''
키 181cm, 체중 80kg
'''소속'''
<colbgcolor=#00ab84> '''클럽'''
전북 현대 다이노스 (1998~2002)
광주 상무 불사조 (2003~2004)
FC 서울 (2005~2006)[1]
부산 아이파크 (2005~2006/임대)
수원 삼성 블루윙즈 (2007)
영하트 마나와투 (2008~2009)
이스턴 서버브스 (2009)
용인시청 축구단 (2010)
'''지도자'''
용인시청 축구단 (2010/플레잉 코치)
FC 오산 (2011~2013/U-15 감독)
대한축구협회 (2016/유소년 전임지도자)
대한민국 U-20 (2017~2018/코치)
수원 삼성 블루윙즈 (2019/수석 코치)
안산 그리너스 FC (2020 /수석코치)
'''국가대표'''
2경기 2골(대한민국 U-20/1994)
3경기 2골(대한민국 U-23/1995)
'''8경기 0골(대한민국/1999~2001)'''
'''학력'''
충주대성중 - 청주상고 - 숭실대
'''별명'''
흑상어
1. 개요
2. 클럽 경력
2.1. 프로 입단전
2.2. 프로 경력
3. 지도자 생활
4. 국가대표 경력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축구선수 출신 코치. 현역 시절 별명은 흑상어.

2. 클럽 경력



2.1. 프로 입단전


숭실대학교 재학중이던 1994년 20세 이하 대표팀에 발탁되어 2경기에 출전해, 쿠웨이트와 태국을 상대로 각각 한 골씩을 기록했다.

2.2. 프로 경력


1998년 전북 현대 다이노스에 입단하며 프로 생활을 시작하였다. 5시즌동안 리그 93경기 출전 26골을 기록 후 광주 상무에서 군생활을 하였다. 전역 후 트레이드를 통해 2005년 FC 서울로 이적했지만 당시 김은중과 정조국, 박주영 등 쟁쟁한 공격진 속에서 정규리그에 단 한 경기에도 나서지 못하고 부산 아이파크로 임대되어 20경기 5골을 기록했다. 이 당시 네 경기 연속골을 기록하는 등 6경기 연속 공격 포인트를 올리며 맹활약했고 팀을 전기리그 우승으로 이끌기도 했다. 그러나 다음시즌 서울 복귀 후에 또 주전 경쟁에서 밀리며 R리그만 뛴 끝에 2007년 수원 삼성 블루윙즈로 이적해, 13경기 2골을 기록했다. 이 두 골 중에서 당시 수원 첫 시즌이던 양상민이 기여한 골도 있다.영상 자동 다운로드 주의
이후 2008년 수원과의 계약 종료 후 가족과 뉴질랜드로 이사를 가며 뉴질랜드 리그의 영하트 마나와투와 이스턴 서버브스에서 선수생활을 한 후, 2010년 창단된 내셔널리그의 용인시청 축구단의 플레잉코치로 국내에 복귀했다(17경기 3골).
별외로 안정환이 한창 샤방하게 K리그를 주름잡고 있을 때, 박성배도 머리띠를 하는 등 멋있게 보이려고 노력(?)했다[2]. 하지만 이럼에 불구하고 딴지일보에 K리그 인상파 베스트 11으로 뽑히는 굴욕(...)을 당했다.

3. 지도자 생활


2011년 은퇴 및 용인시청의 코치로 일한 후, 2013년 FC 오산의 U-15 감독을 맡아 3년간 지도했다. 그 후 2016년부터 대한축구협회 전임지도자로 일하며 U-14 대표팀 감독, U-20 대표팀 코치 등 유소년 지도를 맡았고, 특히 2018년 AFC U-19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대표팀의 준우승에 기여했다는 평을 받았다.
2018년 12월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5대 감독으로 선임된 이임생 감독을 보좌할 수석 코치로 합류하게 되었다. 이임생 감독 본인과, 새로 합류한 주승진 코치가 수비수 출신이어서 공격 부문을 담당할 코치가 필요했다고. 이임생 감독과는 2007년 당시 선수와 수석 코치로 만났으며, 박성배 본인에게는 12년 만의 수원 복귀이자 첫 프로팀 코치 경력이다.
2020년 1월 안산 그리너스의 수석코치로 내정되었다. 하지만 2021년에는 민동성 수석코치가 새로 부임한 것을 보면 팀을 떠난듯 하다.

4. 국가대표 경력


1998년 11월 13일 중국 베이징에서 있었던 중국 프로 선발팀과의 친선 경기에 출전하였는데 이 경기는 사실상 대표팀 간의 경기였지만 프로 선발 팀 명목으로 출전하였기 때문에 공식 A매치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그 후 1999년 코리아컵에 출전[3]했고, 히딩크호 초기 2001년 칼스버그컵을 포함, 1999년부터 2001년까지 대표팀 선수로 8경기에 출전했다.

[1] 한 경기도 뛰지 못하면서 입단 3개월만에 부산으로 임대되었다.[2] 이 시기 K리그에 나름 패셔니스타들이 제법 있었다. 장발과 염색으로 유명한 김병지라든가, 모자 쓰고 나온 이용발이라든가[3] 맥시코와 경기에서 PK를 얻어낼 뻔 했는데, 심판이 혐한에 승부조작범이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