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춘

 

'''박시춘
朴是春 | Park Sichoon
'''
<colbgcolor=#878787><colcolor=#fff> '''본명'''
박순동 (朴順東)
'''본관'''
밀양 박씨
'''출생'''
1913년 10월 28일
경상남도 밀양시
'''사망'''
1996년 6월 30일 (향년 82세)
서울특별시
'''학력'''
밀양고등학교 (졸업)
'''가족'''
슬하 3남 3녀
'''종교'''
불교
'''데뷔'''
1931년 '애수의 소야곡' 작곡
1. 개요
2. 생애
3. 논란
3.1. 일제강점기 시절 친일행적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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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작곡가이다.

2. 생애


1913년 10월 28일, 경상남도 밀양시에서 태어났으며 밀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아버지가 권번[1]을 운영해서 유년 시절부터 음악을 접하면서 자라게 되었다고 한다. 유랑극단에서 악기를 연주하던 중, 시에론레코드의 이서구, 박영호 등을 만나 작곡가로서 활동하게 되었다.
정식 데뷔는 1931년 남인수의 '애수의 소야곡'을 작곡하면서 하게 되었고, '애수의 소야곡'이 그야말로 대히트를 치면서 박시춘과 남인수는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이후에는 송민도의 고향초, 남인수의 가거라 삼팔선, 현인의 신라의 달밤, 현인의 비 내리는 고모령, 백난아의 낭랑 십팔세, 신세영의 전선야곡, 군가 전우야 잘 자라, 현인굳세어라 금순아, 남인수의 이별의 부산정거장, 현인의 럭키서울 등의 곡을 발표하며 더욱 더 많은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무려 3천여곡의 노래를 작곡했으며, 이 때문에 박시춘을 '한국 가요의 뿌리이자 기둥'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생기기 시작했다. [2]
1943년에는 영화 '조선해협'으로 영화감독으로까지 데뷔하기 시작했다. 6.25 전쟁 때는 해군 정훈국 소속으로 참전했으며, 군가인 '전우여 잘 가라'를 이때에 작곡했다.
전쟁 종전 후에는 전쟁의 아픔을 담은 노래인 금사향의 님 계신 전선을 작곡했고, 당시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한 백설희의 아메리카 차이나타운, 장세정의 샌프란시스코를 작곡했다.
1950년대에는 영화와 음악 작업을 함께 했으며, 직접 영화사를 차리기도 했다. 심지어 1956년에는 영화 '청춘쌍곡선'에 단역배우로 출연하며 배우로 데뷔하기도 했다. 1958년에는 '삼등호텔'을 제작했고, 같은 해에는 '딸 칠형제'라는 영화의 연출까지 맡았다.
1961년, 한국연예협회의 초대 이사장을 맡았으며, 1982년에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문화훈장을 서훈받으며, 대중가요 작곡가로서는 최초로 서훈을 받게 되었다.
그 후에는 가요무대 등에 간간히 출연하며 대중들에게 모습을 보였고, 1996년 6월 30일에 향년 84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3. 논란



3.1. 일제강점기 시절 친일행적 논란


태평양 전쟁 시기에 지원병으로 참전하는 것이 소원이라는 내용의 혈서지원 을 비롯하여 아들의 혈서, 결사대의 안해, 목단강 편지, 등의 친일 가요를 작곡한 바 있다.
이 가운데 조명암이 작사한 혈서지원은 손가락을 깨물어 낸 피로 혈서를 쓴다는 가사를 담고 있으며 군국가요 가운데서도 친일성이 짙은 노래이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음악 부문에 포함되었고, 박시춘을 기념한 가요제가 친일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3]

[1] 기생 양성소이다.[2] 위 노래들 중 신라의 달밤, 낭랑 18세, 전선야곡, 이별의 부산정거장, 굳세어라 금순아는 2017년 불후의 명곡에서 리메이크되었다.[3] 혈서지원을 불렀던 가수인 남인수백년설도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