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인

 

'''현인
玄仁 | Hyun In
'''
<colbgcolor=#878787><colcolor=#fff> '''본명'''
현동주 (玄東柱)
'''본관'''
연주 현씨
'''출생'''
1919년 12월 14일[1]
부산광역시 영도구 영선동 183번지
'''사망'''
2002년 4월 13일 (향년 82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학력'''
경성제2고등보통학교 (졸업)
도쿄예술대학 (성악과 / 전문학사)
'''부모'''
아버지 현명근, 어머니 오봉식
'''형제자매'''
2남 1녀 중 장남
'''배우자'''
[2], 김미정
'''자녀'''
슬하 1남 3녀
'''종교'''
개신교(장로회)
'''데뷔'''
1947년 '신라의 달밤'
1. 개요
2. 생애 및 가수 활동
3. 히트곡
4. 여담
5. 현인가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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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특한 창법의 트로트 거성'''

엠넷 레전드 아티스트 100에서의 소개문구

대한민국 최초의 대중가수.[3] 해방과 더불어 가요계에 선풍을 일으킨[4] 대한민국 가요계에 한 획을 그은 가수다.
본명은 현동주이다. 당시의 대중 가수들 중 가장 학력이 높은데 도쿄 음악학교(現 도쿄예술대학) 성악과 출신이다. 특유의 떠는 창법으로 인기를 끌었다. 당시에는 정말 획기적인 창법이었다.

2. 생애 및 가수 활동


1919년부산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다.[5] 1938년 경성제2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42년에는 현 도쿄예술대학의 전신인 우에노 음악학교 성악과를 졸업했다. 원래 그의 아버지는 현인이 사관학교에 가기를 원했지만, 현인 본인은 음대에 진학하여 교수가 되기를 희망했다. 이에 화가 난 아버지는 그의 대학 학비를 끊어버렸다고 한다. 일제의 강제 징용이 시작되자 중국 상하이로 피신하여 그 곳에서 악단 '신태양'을 조직해서 활동한다. 해방 이후, 귀국하여 악단을 다시 조직하여 극장 무대에서 연주하며 다닌다. 그 후 당시의 유명한 작곡가박시춘이 찾아와서 자신의 곡을 불러달라고 한다.
현인은 "성악도가 유행가 따위를 부를 수는 없다"며 거절했지만, 박시춘이 거듭 권유하자 며칠 생각해본다고 하고, 집에서 며칠 동안 고민을 한 뒤, 결국 대중가수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박시춘은 현인에게 곡을 주었고, 이 곡이 바로 신라의 달밤이다. 이 곡은 발표 당시에 정말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현인을 가요계의 정상에 등극하게 했다. 이후 현인은 <비 나리는[6] 고모령>, <고향만리> 등을 연달아 히트시킨다.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들의 슬픈 정서를 잘 보여주는 <굳세어라 금순아>[7]는 많은 사람들이 즐겨들으며 울기도 했다. 시대를 대변하는 듯한 가수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후 대한가수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1974년에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이민을 가서 '가스라이트'라는 레스토랑을 운영했지만, 한국에서의 무대가 그리워서 1981년에 귀국한다. 1991년에는 <노래하는 나그네>, <길> 등의 신곡들을 발표한다. 1998년까지는 KBS 가요무대와 악극 등에 출연하여 왕성한 활동을 했었지만, 지병인 당뇨병의 악화로 2002년 4월 13일, 82세로 사망하였다.


<color=#fff> '''현인 가요무대 스페셜'''


3. 히트곡



4. 여담


이 분의 열성팬인 중학생이 대국민 토크쇼 안녕하세요에 출연한 적이 있다. 어느 정도냐 하면 현인 선생의 노래를 거의 완벽하게 모창, 현인 선생 관련 모든 정보는 빠짐없이 꿰고 있으며, 심지어 평소 말투와 행동, 옷차림까지 그야말로 어르신 스타일. 영국의 제이크 버그를 생각하면 될 듯. 또한 놀라운 대회 스타킹에서도 현인 노래의 메들리를 선보였으며, 참고로 이 중학생이 바로 2019년에 KBS '노래가 좋다'라는 프로에서 화제의 인물로 주목을 받게 된 조명섭이다. 이 프로그램 이후로 결국 장윤정소속사인 IOK Company에 들어가게 된다.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성악을 전공해서 그런지 일제 강점기 태생임에도 불구하고 외국어의 발음이 매우 정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80년대 이전 태생만 하더라도 대체로 발음이 매우 좋지 못한데, 1910년대 태생임에도 불구하고 발음이 상당히 좋다. 성악을 배울 때 독어, 이태리어 등으로 된 곡을 부르기 위해 이를 연습한다는 것을 알면 충분히 이해가 되는 점. 물론 회화실력과는 별개일 수도 있지만 시대적 배경을 감안하면 대단한 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color=#fff> ''' 현인 '베사메 무쵸' '''
KBS 가요무대에 출연하여 베사메 무쵸를 부른 영상. 본인의 번안가사와 원곡 가사를 섞어서 부르는데, 'Como si fuera esta noche la ultima vez' 부분이 요즘 가수들과 같이 매우 매끄럽다.

<color=#fff> ''' 현인 '꿈속의 사랑' '''
KBS 빅쇼에 출연하여 꿈속의 사랑을 부른 영상. 1절은 한국어 가사, 2절은 중국어 가사로 부르는데 중국어가 아주 매끄럽다. 해방되기 전에 중국에서 활동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color=#fff> ''' 현인 '굳세어라 금순아' '''
1983년 6월 30일,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첫 방송 때 스튜디오에 출연해서 '굳세어라 금순아'를 불렀다. 첫 날이라 편성도 지키지 못하며 쉬지도 못하고 계속 이어지는 프로그램 특성상 잠시 휴식시간이 필요하기도 했고, 여러가지 조정을 위한 방책이었다. 당시 분위기와 어우러져 노래를 부르는 내내 스튜디오의 이산가족들은 침울한 표정이었고, 몇몇은 울기도 했다. 그 역사적 의미와 생생함을 생각했을 때, 어쩌면 가장 명연으로 볼 수도 있겠다.
고운봉과는 막역지간으로, 비록 고운봉이 1920년 2월 생이지만, 현인은 1919년 12월 생으로 고운봉과 3달 밖에 차이가 나지 않기 때문에 친구로 지낸 듯 하다. 해방 후에 명동 대폿집에서 둘이 만나서, 현인이 "이제 나라를 찾았으니 한국 가요 건설에 힘을 쓰자!"라고 했다고... 물론, 데뷔 년도는 고운봉이 훨씬 앞선다.
1991년 11월 23일 토요대행진 생방송 도중 현인의 자료화면이 나갔는데 관객석에 있는 현인의 앞에서 MC 고현정이 생전의 모습이라며 멘트를 잘못한 사고가 있었다. 그 후 방송 도중에 사과하였다. 실제로 작고는 11년 후인 2002년 4월에 별세했다.

5. 현인가요제


매년 8월초 그를 기리기 위한 현인가요제가 부산 송도해수욕장에서 개최된다. 2005년 1회를 시작으로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최근에는 EXO 등 유명 가수들도 초청되어 꽤나 많은 인파가 몰려든다.

[1] 음력 1919년 10월 22일[2] 이혼.[3] 일반적으로 대한민국 최초의 대중가수라 말해지는 가수는 1930년대에 주로 활동한 채규엽이라는 가수다. 다만 활동하던 시기가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였던 점을 감안하면 해방 이후 대한민국 최초의 대중가수는 현인이 맞다.[4] 1960년에 현인이 TV에 나와 <신라의 달밤>을 부를 때, 앞부분에서 MC가 소개해주던 멘트.[5] 아버지는 영국 스탠다드 석유회사의 부산 사무소 직원이었고, 어머니는 신여성이었다. 덕분에 현인은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유학 생활을 하며 졸업하였고, 풍족하게 살수 있었다.[6] 지금은 '내리는'이 올바른 발음 표기고, '나리는'은 잘못된 표기지만, 당시에는 '나리는'으로 발음했다.[7] 흥남 철수가 배경이다.